2011. 6. 3. 18:27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탄허(呑虛) 스님은 불교의 고승이었지만 주역을 비롯한 역술과 풍수도참에도 깊은 식견을 지닌 독특한 스님이었다.
’화엄경’을 체(體)로 하고 ‘주역’을 용(用)으로 하여 나라의 앞일을 예견하면서 1960~70년대 國師 역할을 하였다.
불가에서는 주역을 은근히 거부하는 분위기가 있다. 일체가 유심조인데, 번거롭게 괘를 뽑아 뭐하느냐이다.
그러나 탄허는 儒 · 佛 · 仙 3교를 아울러 포용하는 ‘포함삼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포함삼교를 미래 종교로서 제안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라도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는데, 없네요.
더 찾아봐야겠습니다.
(펌)
한암이 탄허에게
- 속됨 외면한 채 참됨 구하지 말라 -
장년의 호걸스러운 기운이 넘쳐 업을 지음에 좋고 나쁨을 모를 때에 능히 장부의 뜻을 세워 위없는 도를 배우려하니
숙세(宿世)에 심은 선근(善根)이 깊지 않으면 어찌 이와 같으리오. 축하하고 축하하노라.
그러나 도(道)란 본래 꾸밈이 없어 향하는 바가 없으매 실로 배울 수 없음이라.
만약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있다면 문득 도를 그르치나니 다만 그 사람의 한 생각 진실함을 요구함이니라.
또한 누가 도를 모를까만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스스로 멀어지게 되느니라.
시끄럽다고 고요한 곳을 구하거나 속됨을 버리고 참됨을 향하지 말지니라.
늘 고요함은 시끄러운데서 구하고 참됨은 속됨 속에서 찾으라.
구하고 찾는 것이 가히 구하고 찾음 없는데 도달하면 시끄러움이 시끄러운 게 아니요, 고요함이 고요한 게 아니며
속됨이 속된 게 아니요, 참됨도 참된 게 아닐지니.
부르면 꺾어지고 고함지르면 끊어지느니라. 이러한 시절을 무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이 이른바 한 사람이 헛됨을 전함에 만 사람이 진실을 전함이니라.
그러나 간절히 바라보니 잘못 알지 말지어다. 한번 웃노라.
한암(漢岩, 1876~1951)은 타고난 선문(禪門)의 지도자였다.
스승 경허와 헤어진 뒤 그는 불과 서른에 통도사 내원선원 조실로 추대되면서 후학지도의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금강산 장안사, 건봉사, 서울 봉은사 조실을 거치다가
1925년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며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암은 자신의 맹세처럼 앵무새 놀음이나 하는 문자법사(文字法師)나 선만을 고집하는 암증 선사(暗證禪師)의 길을
철저히 배제했다.
선과 교를 아우르되 오로지 자신이 철저히 깨닫고 익힌 내용을 후학들에게 지도했다.
그런 한암에게 제방의 선객들뿐 아니라 세간의 수많은 대중들이 매료됐다.
김금택(1913~1983)도 그중도 한 사람이었다.
독립운동가 아들로 태어나 6세 때 사서삼경 전 과정을 마칠 정도로 뛰어난 소년재사(少年才士)였던 그는
스무 살 되던 해인 1932년 한암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거룩하신 모습을 뵙지 못하고 당돌하게 글을 올리게 되니 참으로 황공하여 몸 둘 곳을 모르겠나이다.
스님을 우러러 존경하는 저의 마음은 잠시도 쉼이 없으나 다만 마음과 꿈을 통해 오고 갈 뿐 미칠 길이 없나이다.
어쩌면 그렇게 큰스님께서는 맑은 복이 있으시어 입산수도 하시고 헌신짝을 벗고 속세를 잊으셨나이까?
비록 좇고자 하나 따를 수가 없나이다.
다음 해 봄을 기해 나아가 뵈올 계획이오나 속세 인연이 아직 남아 있고 길도 또한 멀고멀어 꼭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돌아보건대 저는 기질이 나약하고 심지가 굳지 못해 훌륭하신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조차 감당 못하오니,
오직 바라는 바는 다행히 어른의 가르침을 얻어서 그 허물을 적게 하는 것뿐이옵니다.
그러나 사람됨이 이와 같사오니 군자께서 기꺼이 더불어 말씀해 주실런지요?
큰스님께서 만일 버리시지 않고 가르쳐 주신다면 속생(俗生)의 지극한 소원을 다하였다고 할 만합니다.
유학자의 집안에 태어난 금택은 저절로 유가의 물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공맹과 노장으로도 해소되지 않는 근원적인 갈증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오대산의 학(鶴)’이라 일컬어지는 한암에게 무한한 존경의 예와 간절함으로 진리를 물었던 것이다.
이에 한암은 세속의 한 젊은이를 향해 극히 이례적인 찬사의 답장을 띄웠다.
도를 향한 젊은이의 마음은 오랜 숙세의 선근에서 비롯됨을, 또 고요함과 참됨은 시끄럽고 속됨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알 듯 말 듯한 내용과 더불어….
금택은 대선사의 자상한 답변에 감격했으며 한암 또한 젊은 유학자의 편지에 그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암 스스로 밝히듯 ‘옛 학문이 파괴되는 때를 당해 그 문장의 품위와 의미가 어찌나도 부처님 글처럼 품위가 넘치던지
먼저 보내온 글과 함께 산중의 보물로 여기겠노라…
납자란 평소 음영(吟詠)은 하지 않지만 이미 마음 달이 서로 비추었으니
묵묵히 있음은 옳지 않기에 몇 줄 편지를 보낸다’며 흐뭇해하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서신은 천리 길이 멀다않고 3년간 20여 통을 주고받았다.
1934년 10월, 마침내 금택은 오대산 상원사로 입산해 한암 스님을 은사로 출가자의 길을 선택했다.
삭발염의한 뒤 탄허(呑虛)라는 법명을 받은 그는 먼저 묵언정진에 들어갔다.
세속적인 생각과 습관을 씻어내긴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렇게 침묵 속에 2년을 보낸 탄허는 이후 15년간 한암을 모시며 선과 교를 두루 익혀나갔다.
탄허는 한암을 늘 부처님처럼 믿고 따랐고 한암 또한 탄허를 몹시 아꼈다.
그는 ‘나의 아난’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사적인 편지의 대필을 맡기기도 했다.
심지어 통도사 경봉이 한암에게 조실로 와 줄 것을 부탁했을 때조차
‘탄허의 학식과 문필이 나보다 천만억 배나 낫고 또 16~17년간 나와 함께 정진했으니
수좌로 두어 두시면 좋은 일이 있을 듯 하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음력 2월, 한암은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도 가사를 드리운 채 고요히 적멸의 세계에 들었다.
이에 탄허는 스승의 비문을 짓고 쓰며 ‘우매한 중생의 눈을 밝혀 줄 금비(金媲, 한암)를 잃었고,
욕망의 바다 거센 파도에 허덕이는 중생들이 돛대를 잃었기 때문이다.…석
탑은 있으나 음성은 들을 수 없으니, 아! 슬프다. 아픔이 폐부를 찌르는구나’라며 통곡했다.
그러나 탄허는 슬픔에 젖어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오래지 않아 스승이 마지막으로 당부한 불사(佛事), 즉 『신화엄경합론』의 번역에 착수했다.
경(經) 120권, 논(論) 150권 등 총 270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옮겨야 했던 탓에
시력장애와 오른팔이 마비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지만 그는 불굴의 의지로 한 장 한 장 번역해 나갔다.
그렇게 십수 년간의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67년 3월, 6만2500여 장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탈고했다.
‘화엄의 집대성’이라 평가되는 『신화엄경합론』. 그 불후의 명저는 이렇듯 한암이라는 대선사와 탄허라는 대강백의 인연이
꽃피워낸 화엄만다라였던 것이다.
- 법보신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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