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6. 13:00ㆍ책 · 펌글 · 자료/종교
1. 성철스님 어머니
언젠가 성철스님에게 물었다.
"출가할 때 집에서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반대 마이 했지, 와 안하겠노. 내가 명색이 유림 집안의 장남인데, 반대 안할 택이 있나. "
성철스님은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할 수 있었던 것은 `거짓말 사주(四柱)` 덕분이었다.
"반대한다고 출가 안할 수는 없는 거 아이가.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했지. 중 안되면 죽을 팔자라고.
출가 안시키고 집에 잡아놓으면 곧 죽는다는데야 더 뭐라 하겠노.
부모들 마음에야 그게 제일 약한 데 아이가.
나중에는 `죽지만 말아라` 고 하데. "
사주팔자를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는 아들의 말을 믿지 못해 따로 사주를 봤다.
당연히 아들의 말과 달랐다.
어머니는 "내가 용한 데 가서 사주 물어본 께, 니는 죽을 사주가 아이라 큰 사람 될 거라 하던데" 라며 아들을 다그쳤다.
그러나 장성한 아들한테 이기는 어머니가 있겠는가.
"그 관상쟁이 참 엉터리요. 내가 지리산에 사주 잘 보는 도인한테 물어봤다 아이요.
그 사람이 집을 떠나지 않으면 요절한다고 학실하게 말했는데, 그 사람 믿어야지
내가 와 어무이가 본 엉터리 사주를 믿을끼요. "
성철스님이 그렇게 거짓말로 속인 어머니는 참 총명하고 지혜로운 성품으로 소문난 분이었다고 한다.
어머니를 본 적이 있는 가족들은 "성철스님의 총명함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을 것" 이란 말을 많이 했다.
어머니는 성철스님을 잉태하기 전부터 "큰 사람을 낳으리라" 며 치성을 많이 드렸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아들을 출가시켰으니, 어머니는 수시로 옷가지와 음식을 준비해 아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성철스님은 결코 어머니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산으로 도망치다가 나중에는 아예 어머니가 절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돌멩이를 던져대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옷과 음식이 든 보따리를 두고는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며칠 후엔 꼭 다시 찾아와 성철스님이 보따리를 가져갔는지를 확인했다.
성철스님이 출가하고 4년쯤 지나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 들어가 하안거(夏安居)를 날 때의 일이다.
어머니가 물어 물어 그 곳까지 찾아왔다.
성철스님은 밖을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만 하고 있었는데, 선방 스님들이 술렁였다.
천리길을 달려온 어머니가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으니 다른 스님들이 도저히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중공사(선방 전체회의)가 열렸다.
"아무리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수도승이지만 어머니가 진주 남쪽 끝에서 이곳까지 찾아왔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선방에서 떠나야 한다. "
선방의 대중공사 결론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성철스님은 어쩔 수 없이 참선 수행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맞이했다. 물론 곱게 맞을 큰스님이 아니다.
"내가 원체 무섭게 하니까 딴 사람은 아무도 안오는데, 우리 어무이는 그래도 찾아오는 기라.
금강산 마하연에 찾아왔을 때는 대중공사 때문에 할 수 없이 만났는데,
보자마자 내가 막 해댔지. `뭐하러 이까지 찾아오느냐` 고.
그러니까 어무이가 `나는 니 보러 온 거 아이다. 금강산 구경하러 왔다` 고 말하데.
그러니까 뭐 더 할 말이 있겠노. "
성철스님은 그 바람에 어머니를 모시고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
금강산에서 수행하면서도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비경을 어머니 덕분에 돌아본 셈이다.
성철스님의 어머니를 잘 아는 비구니 성원(해인사 국일암 감원)스님은 금강산을 유람한 뒤
어머니가 한 말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성원스님이 들었다는 어머니의 얘기는 이랬다.
"보고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어째 험한 길에 가면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 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되는 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금강산 돌아다닐 때는 거기가 극락인 줄 알았는데 돌아올라카니 앞이 캄캄해.
산에서 내려와 기차를 타고 진주로 돌아오는데,
아이구 며느리 생각만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해줄 말이 없어 가슴이 답답한 기라…. "
- 원택 <성철스님 상좌>
2. 법정스님 어머니
우리 같은 출가 수행자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불효자다.
낳아 길러준 은혜를 등지고 뛰쳐 나와 출세간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해 겨울 싸락눈이 내리던 어느 날, 나는 집을 나와 북쪽으로 길을 떠났다.
골목길을 빠져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돌아 본 집에는 어머니가 홀로 계셨다.
중이 되러 절로 간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어 시골에 있는 친구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보다도 비쩍 마른 할머니의 품속에서 혈연의 정을 익혔을 것 같다.
그러기 때문에 내 입산 출가의 소식을 전해 듣고 어머니보다 할머니가 더욱 가슴 아파했을 것이다.
내가 해인사에서 지낼 때 할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친구로부터 전해 들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외동 손자인 나를 한 번 보고 눈을 감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시더란다.
불전에 향을 살라 명복을 빌면서 나는 중이 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린 시절을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의 지극한 사랑 덕이다.
내게 문학적인 소양이 있다면 할머니의 팔베개 위에서 소금장수를 비롯한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덕일 것이다.
맨날 똑같은 이야기지만 실컷 듣고 나서도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밑천이 다 됐음인지,
긴 이야기 해주랴 짧은 이야기 해주랴고 물었다.
"긴 이야기" 라고 하면 "긴긴 간지때"로 끝을 냈다. 간지때란 바지랑대의 호남 사투리다. "
그러면 짧은 이야기" 하고 더 졸라대면 "짧은 짧은 담뱃대" 로 막을 내렸다.
독자인 나는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 어린 시절 할머니가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 나섰다.
그리고 할머니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선뜻 나서서 기꺼이 해드렸다.
일제 말엽 담배가 아주 귀할 때
초등학생인 나는 혼자서 10리도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 담배를 구해다 드린 일도 있다.
내가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할머니를 따라 옷가게에 옷을 사러 갔는데,
그 가게에서는 덤으로 경품을 뽑도록 했다.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뽑은 경품은 원고지 한 묶음이었다.
운이 좋으면 사발 시계도 탈 수 있었는데 한 묶음의 종이를 들고 아쉬워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원고지 칸을 메꾸는 일에 일찍이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성은 김해 김씨이고 이름을 금옥, 고향은 부산 초량,
부산에 처음 가서 초량을 지나갈 때 그곳이 아주 정답게 여겨졌다.
지금 내 기억의 창고에 들어 있는 어머니에 대한 소재는 할머니에 비하면 너무 빈약하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나를 낳아 길러 주신 우리 어머니는 내가 그리는 어머니의 상
즉 모성이 수호천사처럼 늘 나를 받쳐 주고 있다.
한 사람의 어진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에 견줄 만하다는데 지당한 말씀이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에는 그 그늘에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이 따라야 한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집을 세 번이나 옮겨 다녔다는 고사도
어머니의 슬기로움을 말해 주고 있다.
나는 절에 들어와 살면서 두 번 어머니를 뵈러 갔다.
내가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온 후 어머니는 사촌동생이 모시었다.
무슨 인연인지 이 동생은 어려서부터 자기 어머니보다 우리 어머니를 더 따랐다.
모교인 대학에 강연이 있어 내려간 김에 어머니를 찾았다.
대학에 재직 중인 내 친구의 부인이 새로 이사간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었다.
불쑥 나타난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반가워하셨다.
점심을 먹고 떠나오는데 골목 밖까지 따라 나오며 내 손에 꼬깃꼬깃 접어진 돈을 쥐어 주었다.
제멋대로 큰 아들이지만 용돈을 주고 싶은 모정에서였으리라.
나는 그 돈을 함부로 쓸 수가 없어 오랫동안 간직하다가 절의 불사에 어머니의 이름으로 시주를 했다.
두번째는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는 길에 대전에 들러 만나 뵈었다.
동생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때는 많이 쇠약해 있었다. 나를 보시더니 전에 없이 눈물을 지으셨다.
이때가 이승에서 모자간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내 거처로 불쑥 찾아오신 것은 단 한번뿐이었다.
광주에서 사실 때인데 고모네 딸을 앞세우고 불일암까지 올라오신 것이다.
내 손으로 밥을 짓고 국을 끓여 점심상을 차려드렸다.
혼자 사는 아들의 음식 솜씨를 대견스럽게 여기셨다.
그날로 산을 내려가셨는데, 마침 비가 내린 뒤라 개울물이 불어 노인이 징검다리를 건너기가 위태로웠다.
나는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넜다.
등에 업힌 어머니가 바짝 마른 솔잎단처럼 너무나 가벼워 마음이 몹시 아팠었다.
그 가벼움이 어머니의 실체를 두고 두고 생각케 했다.
어느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아, 이제는 내 생명의 뿌리가 꺾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이라면 지체없이 달려갔겠지만, 그 시절은 혼자서도 결제(승가의 안거 제도)를 철저히 지키던 때라,
서울에 있는 아는 스님에게 부탁하여 나대신 장례에 참석하도록 했다.
49재는 결제가 끝난 후라 참석할 수 있었다.
단에 올려진 사진을 보니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머니에게는 자식으로서 효행을 못했기 때문에 어머니들이 모이는 집회가 있을 때면
어머니를 대하는 심정으로 그 모임에 나간다.
길상회에 나로서는 파격적일 만큼 4년 남짓 꾸준히 나간 것도 어머니에 대한 불효를 보상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나이 이 처지인데도 인자하고 슬기로운 모성 앞에서는 반쯤 기대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머니는 우리 생명의 언덕이고 뿌리이기 때문에 기대고 싶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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