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한국화

2011. 3. 27. 20:29미술/한국화 옛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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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전기(田琦) / 아호 : 고람(古藍).두당(杜堂)  :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19세기 /  화첩 종이에 수묵 /규격 : 24.5 x 41.5 cm / 국립중앙박물관



전기의 출신이나 예술. 그의 생애 등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없으나. 다만 조희룡(趙熙龍)이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전기전(田琦傳)에서 “몸체가 우람하면서도 면모가 빼어났으며 고운(古韻)과 유정(幽情)이 넘쳐서 마치 晋 唐의 그림속

의 인물같다.

그의 시(詩)도 매우 격이 높았으며. 고람(古藍)의 그러한 안목과 필력의 양성은 그가 압록강 이동에 그 예술의 기준을

두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고 했다.

전기의 산수화 에는 원말 4대가의 남종화풍을 연상케 하는 좋은 작품이 많으나, 그는 그러한 남종화 산수법을 대담하게

단순화 시키고. 또 그자신의 독창성 있는 畵興과 필의로 구김살없이 독자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계산포무도는 활달한 문인화풍의 소묘로서. 화면에 넘치는 문기 의 맑고 깨끗함은 시. 서. 화에 고루 빼어났던 그의

예술의 높은 격조를 실감케 하는 秀作이다.

전기의 아명은 재룡(在龍). 자는 이견(而見)이었으나 후에 위공(瑋公). 기옥(奇玉)등으로 바뀌었고. 호는 널리 알려진

고람(古藍) 외에 두당(杜堂)이 있었으며. 30세에 요절한 천재로 생존시에도 이미 그 시대 화단의 천재로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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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田琦) / 아호 ; 고람(古藍).두당(杜堂) /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19세기 /  종이에 채색 /  29.4 x 33.2 cm / 국립중앙박물관



불과 30 이라는 아까운 젊은 나이로 타계한 전기는. 비록 신분은 높지 않았으나. 詩 畵 에 모두 뛰어나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이룩한 인물이었다. 그에 관한 당시의 평에는 놀라울 정도의 극찬을 살필수 있다. 전기의 시와 화는

당시 문인들 사이에 크게 회자되었음을 문집류를 통해서도 산견할수 있으나. 요절한 탓인지 전래된 작품이 많지않다.

현존하는 그림들은 대소를 불문하고 高格을 지닌 것들로. 탈속한 문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매화초옥도는 전기 생존시에 즐겨 그려지던 소재이다. 이 그림에 적힌 題跋 을 통해 宋의 시인이며. 隱士인 임포의

故事를 소재로 했음을 알수있다. 절강성 서호의 孤山에 홀로 은거하여 매화를 아내삼고. 학을 아들삼아 평생을

유유자적하며 보낸. 이 은사를 찬양한 시와 그림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매화초옥도는 오른쪽 하단에 있는 '역매인형 초옥적중 고람사'(亦梅仁兄 草屋笛中 古藍寫)의 묵서로서. 譯官이며

서화가였던 역매(亦梅) 오경석과. 전기의 교유를 시사하는 그림 임을 알수 있다. 눈 쌓인 산야에 묵선으로 그린

무수한 매화 나무와. 흰점으로 백매화를 그리되 묵선염의 묘로. 하늘과 산야의 거리감이 잘 나타나 있다.

산봉우리와 언덕에 세로로 긴 묵점과 녹색점을 찍고. 등장한 인물의 옷색을 홍과 녹색으로 하여 강조하듯 나타내어

무채색 위주의 화면에 산뜻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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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숙(劉淑) / 아호 : 혜산(蕙山)  제목 : 호응간적(豪鷹看翟) 
19세기 / 족자 비단에 담채 / 87.4 x 30.6 cm / 국립중앙박물관

 


유숙은 산수. 인물. 영모. 화훼에 두루 능한 화원으로 자는 선영(善永). 야군(野君) 이며. 호는 혜산(蕙山)이다.

오늘날 전래된 작품도 많은 편에 속하며. 황공망(黃公望). 예운림(倪雲林) 법을 익혀 南宗畵風 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風俗畵와 道釋人物畵 는 물론 肖像畵 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호응간적은 그가 영모에 있어서 뛰어났음을 살필수 있는 작품이다. 왼쪽 상단에서 시작되어 오른쪽 하단으로

완만히 늘어진 덩굴이 감긴 고목이 물골(沒骨)로 그려졌고. 아래를 노려보는 매의 모습은 자세의 자연스러움과

표현의 사실적인 묘사에 있어 크게 뛰어남이 보인다.

매의 머리 부분과 일직선상으로 해서 하단에는 꿩이 놀라 급하게 날개짓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고목 줄기의

거친 표현은 이 긴박한 분위기를 강조시키는 듯하며. 매의 눈과 꿩 사이의 넓은 공간에. 2행에 걸친 자제가 있는데

숨은 뜻이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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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기(金良驥)/ 긍원(肯園).낭곡(浪谷). 긍원(肯園) / 송하모정도(松下茅亭圖) 
19세기 / 병풍 종이에 담채 / 110 x 44.9 cm / 호암미술관


 


긍원(肯園) 김양기는 김홍도의 아들로, 19세기 중엽에 활약한 화원이다. 그는 아버지의 필법을 이어받은 동시에

여러 화가들의 기법을 익혔다.

그림 하단 전면에는 깊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있고. 오른쪽 냇가에는 여러 종류의 키큰 나무들이 바위

사이사이에 서있다. 키큰 나무들의 왼쪽으로 냇물위에 있는 소나무 아래에는. 띠지붕의 정자가 총총히 받치고

있는 기둥위에 서 있고. 두선비가 난간에서 자연을 바라보며 담소하고 있다.  화면 상단 우측에는 모난 암산이

솟아 골짜기와. 높은 언덕마다 농담의 원수(遠樹)가 간략한 필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전경 계곡의 큼직한 바위와 뒷산 암벽들이 대개 y자형 면을 붓질로 형용하고 아주 연한 담묵으로 묘사된 나무

기둥에 비해 초묵(焦墨)으로 나뭇잎들을 그리고. 그중에서도 맨앞 활엽수의 잎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좌측 상단에는 칠언절구의 시가 있어 더위가 다가오는 초하의 정취를 한껏 살려주고 있으며. 작가의 서체와 그림의

필체가 서로 닮았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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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기(金良驥) / 영모도(翎毛圖) 
19세기 / 족자 종이에 채색 / 107 x 49.5 cm / 고려대학교 박물관



그림의 우측 하단에 경사가 급한 언덕이. 힘차게 꺾여지는 초묵으로 바위의 윤곽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 김홍도의 필법을 이어받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거기에 한 그루의 나무가 벋어 오르다 좌우로 꺾이면서

가지를 이루어 화면 상단의 공간을 잔가지와 잎으로 채운다. 나무밑둥 언저리에는 이름모를 풀이 자라면서 꽃술을

드러내고 있다. 꺾임새가 강한 큰 가지 위에 새 두마리가 마주보고 지저귀는데. 새가 앉은 좌우 가지 사이에 늦은

봄의 무성한 잎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적인 구도는 바위와 나무. 새. 그리고 제시(題詩)까지 생각하며 배치한 것이나. 나뭇가지 분지법(分枝法)이 좀

인위적이고. 짙은 먹선과 담채의 선염(渲染) 이 대조가 강하고. 바위의 皴法 에서도 단원의 영향이 역력하다.

沒骨法으로 처리한 나뭇잎에는 황색과 녹색이 군데군데 가해져 있고. 먹선을 가늘게 사용하여 엽맥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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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섭(洪世燮) / 아호 : 석창(石窓) / 제목 : 유압(游鴨) 
19세기 / 족자 비단에 수묵 / 119.5 x 47.8 cm/ 국립중앙박물관 

 


홍세섭의 자는 현경(顯卿). 호는 석창(石窓)으로. 벼슬은 고종 때 승지(承旨)를 지낸 사인(士人)화가이다. 그는 별로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국내외에서 주목을 받아. 재평가된 화가중의 한 사람이며 유작은 드물다.

이 그림은 원래 8폭 영모(翎毛) 병풍 중의 한폭인데. 담채보다 훨씬 효과를 낸 교묘한 수묵의 구사로. 마치 서구풍의

수채화를 보는 듯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이는 참신한 근대회화적 기법의 사용으로도 주묵할 만한 작품이라 하겠다.

독창적인 부감법의 구도, 수묵의 농담으로 표현한 물살의 입체적 표현기법. 그림을 포근히 감싸며. 자란 담묵. 농묵의

수초군(水草群)등이 매우 눈맛 시원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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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윤겸(金允謙)아호 : 진제(眞宰)제목 : 장안사(長安寺)
언제 : 19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규격 : 27.7 x 38.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김윤겸의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제(眞宰)로. 18세기 화단에서 실경산수를 즐겨 그린 사인 화가이다. 그는 단순히

여기(餘技)에 머물지 않고 분명한 개성을 갖춘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는 당시 크게 유행을 보이는 기행 탐승을 배경으로 한 실경산수의 풍미에 편승해 그림을 열심히 그렸는데. 유존된

작품만도 수십 점에 이른다. 30대 이전에는 그 자신의 독특한 특징이 간취되는 작품세계에 도달케 된다. 30대 로부터

60세에 이르는 간기(干紀)가 있는그림을 통해서 화풍의 변화를 살필 수있다.

장안사는 진재봉래도권 완당장(眞宰逢萊圖卷 阮堂莊)의 김정희의 제가 표지에 붙어 있는 11폭으로 구성된 화첩내에

실려 있는데. 이들 그림중 묘길상(妙吉祥)에 간기가 있어 1768년 즉 58세에 그렸음이 확인되었다.

이 장안사 에서 보이듯 화면 중앙에 그리고자 하는 장소를 포치시키고. 화면에 균등하게 배경을 전개시킨 대각선 구도와, 분명한 선묘로 경관을 단순화시켜 나타내고. 담청의 설채와 선염의 묘가 이룩한 밝고 참신한 화면 등. 두드러진 개성이

보이는 실경산수를 김윤겸은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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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오원(吾園) 송풍유수(松風流水) 및 귀거래도(歸去來圖) 
19세기 / 족자 비단에 담채 / 좌 : 137 x 32.2 cm 우: 136.7x32.4cm / 간송미술관



 

송풍유수(松風流水) : 장승업이 활동하던 조선 말기는 秋史 金正喜가 길러낸 中人계급의 지식층 문인들이 추사 예술의

지극히 조선적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지 외형적인 형사(形寫)에 급급하여 맹목적인 중국풍의 好尙이 유행하던

시기였고. 자연 그의 그림풍은 중국 취향이 농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그림이 단순한 중국풍으로. 외형만을 모방한 것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록 같은 중국풍이긴 하지만

그는 이응헌의 사랑방에서 어깨너머로 보던 그림을, 어느날 갑자기 배우지도 않고 신들린 듯 그려낼수 있었던 천재의

기질이 있었기에. 그림속에 번득이는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수백길 벼랑 위에서 입을 열어 팔방으로 부딪치며 꺾어져 내리다가. 마침내 아득히 ?아져 내리고 마는 거폭(巨瀑)아래.

이에 맞서듯 창연히 솟아올라 검붉은 송린(松鱗)을 자랑하는 장송의 모습은. 임금마져도 묶어 놓을수 없었던 장승업의

호방불기(豪放不羈)한 기질을 말해 주는 듯하다.

소나무 밑 너럭바위에 마주앉아 잠방이 차림에 가슴을 드러낸채. 폭포의 굉음을 들으며 찻물 끓기를 기다리는 선객들의

소탈간략한 모습은. 용! 트림하며 치솟은 소나무와 거폭에 압도당한 눈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서는 이처럼 화면에 숨막힐 듯 번득이는 박진한 생동감이 항상 넘쳐 흐르니.

이 점은 세간에 살면서 시속(時俗)을 거부한 그의 대오(大悟)한 자취일 것이다.

귀거래도(歸去來圖) : 진(晋)의 도연명은 팽택의 수령이 되었으나. 관리생활에 염증을 느끼자 80여일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자신의 심정을 읊은 귀거래사의. 첫 대목을 그려낸 것이 바로 이 그림이다.

도연명이 뱃머리에서 바라본 고향집의 소나무는. 늙은 둥치를 사립문 옆에 기대어 서 있고. 황국은 삿자리 울타리 밑에

무더기로 피어있다. 주인없이 닫혀 있던 서재도 활짝 열려 갑(匣) 속의 서책과 초록 비단으로 감싼 현금이 반쯤 드러나

주인을 반기는 향저(鄕邸)의 분위기를 한층 살려내고 있다.

바람맞은 버드나무의 물기 어린 생생한 모습이나. 이 같은 景物의 사실적인 표현은 장승업의 놀라운 기량을 대변해

주고 있지만. 문 곁에서 아비를 기다리는 어린자식 대신. 병아리 딸린 어미닭 한쌍을 그려 넣은 것은. 도연명의 격조

있는 전원취(田園趣)를 장승업이 자기식으로 이해하였던 데서 빚어진. 웃지못할 작은 실수라 할 것이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무슨 그림이든지 그려내던 그가 생각하는 전원은. 당연히 삿자리울타리

위에 수탉이 한 마리 올라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격식에 얽! 매이기 싫어하던 그의 성품으로 보아. 이런 소재의 변경이 그의 무식 탓이라기 보다 혹시 고의성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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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업(張承業)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및 관아도(觀鵞圖) 
족자 비단에 수묵담채 / 좌:142.2 x 40.3 cm 우:143.5 x 41 cm / 호암미술관



고사세동도(高士洗桐圖) : 장승업의 작품은 산수. 인물로 시작하여 새나 짐승. 골동품. 화초등이 더할 나위 없이

세련되었을 뿐 아니라. 속도감 있는 운필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는 독특한 수지법(樹枝法)과 준법(皴法)을 이용한

교묘한 구도와 병행하여 자유적절하게 과장된 분방함을 갖추고 있다.

이그림은 예운림(倪雲林)의 고사(故事)를 회화화(繪畵化)한 것으로. 왼편 아래쪽의 괴석 옆에 앉아 초연한 운림의

모습과. 이것과 서로 마주하고 있는 준열한 선으로 구성된 오동나무의 줄기와. 동자(童子)등 이러한 것들은 모두

화면에 생동감을 주고. 오동나무의 줄기는 뻗어 올라간 위쪽의 중심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채워 화면을 안정시키고

있다.

화의(畵意)는 운림의 고사에 유래한 것이지만. 구도와 설채. 준법과 수지법 등 어디까지나 장승업 특유의 천재적

 기량에 의한 것으로. 조선조 최후를 장식하는 화원의 작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관아도(觀鵞圖) : “바위위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고. 물에서 노는 한 쌍의 거위에 시의를 얻는다” 고 한 왕희지의

관아의 고사를 그린 것 같다. 극단적으로 휘고 굽은 바위 주름. 특이한 표정의 인물. 기괴한 바위너설을 어긋매껴

굴절시키면서 점경(點景)으로 처리한 구도법. 이러한 것들이 모두 한데 어울려서 이 작품에 일종의 괴이한 분위기를

빚어내고 있다.

화법상으로는 이른바 청조의 기상파(奇想波)와 통하는 점도 없지 않으나. 그의 그림에 보이는 표출주의적인 경향은

전설적인 분방하고 괴팍한 성격과 잘 부합된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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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업(張承業)  쌍마인물(雙馬人物) 
족자 종이에 채색 / 124 x 33.7 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장승업이 그린 그림 분야는 山水. 道釋人物. 翎毛. 四君子. 절지(折枝)등 두루 미쳤으며. 전래된 작품은 대소를 불문하고

가작(佳作)이 상당량에 이른다. 쌍마인물 에는 장승업의 관서(款署)나 인(印) 은 없고 다만 뛰어난 화격(畵格)과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있는 묵서(墨書)에 의해 장승업의 그림으로 인정되는 작품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상단에 소방하고 거친 나무와 하단의 성근풀을 배경으로 해서 중앙에 쌍마와 풍채가 예스럽고 고아한

인물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의 그림에서 낯익은 얼굴이다. 좁고 긴 화면은 오른쪽 상단을 비운 변각(邊角)구도이다.

묵이 중심이 된 유려한 필선과 채색에 있어 선염이 뛰어나며. 특히 갈색과 옅은 자주색에 흰점이 박힌 말은. 색 배합에

있어 독특한 효과를 보여준다. 도석과 영모의 기량을 아울러 살필수 있는 그림이다.

단 한 점만의 독립된 그림이 아닌. 여러 폭으로 이루어진 고사(故事)인물도 병풍의 한 폭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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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업(張承業) 죽원양계(竹園養鷄) 
족자 비단에 채색 : 74.9 x 31 cm : 간송미술관


 

        술 좋아하고 무엇에도 억매이기 싫어하던 활달한 장승업의 성격에 꼼꼼한 사실풍의 그림이 선뜻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양극은 서로 통한다는 진리를 생각해 보면 그가 이 같은 세밀화를 그린 것이 수긍이 간다.

실제 그의 산수화에서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변화를 보이는 주도면밀한 채색법을 발견해 낼 수있고. 수목의 표현에서도 송린(松鱗) 한 점까지도 그려내는 치밀함을 찾아볼수 있다.

대나무와 괴석이 있는 마당 가에서 닭들이 한가로이 모이를 쪼는 모습이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거느리고. 빛깔도 현란한 수탉이 무슨 기척을 들었는지 일가를 수호하려는 듯 꿋꿋한 기상으로 사방을 살피고 있다. 가장으로서 손색없는 태도이다. 맨드라미와 냉이. 개미취 등 풀꽃과 잡초들이 마당 가에 가득 돋아나 있어 닭들이 놀기에는 마땅한 공간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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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계도(鷄圖) 
족자 종이에 담채 : 140 x 43.5 cm : 한국개인

 


세로로 긴 화폭 중앙에 고목같으면서도 괴석같기도 한 그루터기 위에 수탉한 마리가 좌측을 향해 왼발로 서 있다.

화폭 우단의 벼랑에서 뻗어 올라갔을 나뭇가지 하나가 담묵으로 꺾이면서 휑한 공간을 적절하게 메우고 있다. 바위

오른쪽에서 또 하나의 절지가 예리한 필선으로 간략히 묘사되고. 맨드라미나 영지같은 것이 바위 뒤로 화폭을 가로

지른다.

장승업의 예사 기법과는 상당히 다르게 차분하면서 담묵에 주묵을 엷게 섞어 닭과 꽃. 나뭇잎 등을 같은 필치로

묘사해 나간 것이. 翎毛圖 에서 동물과 식물간의 기법의 차이가 보이는 전통적 화법과 다르다. 하단의 왼쪽 구석에

“오원(吾園) 장승업이 임양거사법(林良居士法)을 따른다” 라고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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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 초원지록(蕉園芝鹿) 
족자 비단에 채색 : 74.09 x 31 cm : 간송미술관

 


장승업은 학자들의 내면세계를 표출한 문인까지도 형사(形似)로 모방해내려는 대담성을 보였는데. 이런 치기에 가까운

걸림 없는 태도가 오히려 천진과 상통하여 독특한 화격(畵格)을 갖게 하였던 것이다.

천진무구한 그의 성격은 유사한 성정(性情)을 가진 새나 동물에게 쉽게 감응되었던지. 그가 그린 영모畵 에는 천진함이

가득하다. 다만 정식으로 묘사수련을 거치지 않았던 만큼. 그의 영모화는 간간 정확성이 결여되기도 한다.

파초 한 그루가 괴석 곁에 높이 자라 있는 동산에. 사슴 한 쌍이 한가롭게 노니는 장면이다. 수컷은 새 뿔이 한창 돋아나기 시작한 듯. 가지 친 두 뿔이 탱탱하게 솟아있고. 암컷은 영지를 뜯으려는 자세이다. 괴석 아래에는 장미꽃이 만발하여

더욱 감미로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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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張承業) : 호취도(豪鷲圖)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135.4 x 55.4 cm / 호암미술관

 


장승업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이 없게 되자. 수표교에 있는 이응헌 집과 한성판윤 변원규 집

사랑에 기식했다고 한다. 여기서 그는 중국 고화(顧畵)들을 많이 눈 익힐수 있었고. 이를 모방하는 화가들의

솜씨를 등너머로 배울수 있었는데. 그의 뛰어난 화재(畵才)를 알아차린 주인의 배려로 본격적인 그림공부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장승업은 산수. 인물. 영모. 기완(器玩). 절지 에 이르기 까지 바람이 이는 듯한 속도있는 필력과 담담한 색상의

구사와. 독특한 수집법과 준법을 세워서. 대상을 구도에 맞게 자유롭고도 적절하게 과장하는 그 분방한 솜씨를

이룩하였다. 비록 서권기나 문자향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조선조를 판막음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인

천재화가가 그 기량을 마음껏 과시했음을 그림에서 엿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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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수철(金秀哲) 아호 : 북산(北山) 제목 : 석매도(石梅圖) 
19세기 후반 : 족자 종이에 담채 : 52 x 28 cm : 한국개인


 
김수철의 자는 사앙(士盎), 호는 북산(北山)이며. 생존연대는 미상이다. 그는 조선시대 말년에 아주 참신한 필선과

현대수채화 같은 색채감각의 기법을 발전시킨 화가인데. 그의 비수(肥廋)없이 간결한 선을 “국수가닥” 에다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특히 그는 자연 속에 인물까지도 아주 간략화 시키거나. 화면구성에서도 선의 구성에 성공하고 있다.

이 그림은 화면 중앙에 괴석하나가 왼쪽으로부터 돌출하면서. 그 뒤에 노매 한그루가 꽃망울들이 한창인 잔가지들을

위로 뻗고 있다. 필선은 일반적인 북산체(北山體)와는 좀 달리. 농묵으로 바위와 매화의 윤곽과 가지을 휙휙 속필로

그려갔는데. 형사보다는 기운의 효과를 바랐던 것 같다. 화면 앞. 오른쪽에 철석심장(鐵石心腸) 이라 시 한귀 썼는데.

이는 남송(南宋)의 선비 번방(藩方)이 그의 선배 심추(沈樞)가 귀양살이 중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가상히 여겨

지은 시의 첫 구로서 철석심장연수약(鐵石心腸延壽藥)에서 땄다 한다. 즉 쇠나 돌 같은 굳은 마음을 바위와 매화에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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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수철(金秀哲) 제목 : 화훼도(花卉圖) 쌍폭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금은박 : 각127.3 x 29.1 cm : 국립중앙박물관

 


북산(北山) 김수철의 산수화는 갈필(渴筆) 에 어울리는 담담하고 굵은 선으로 윤곽을 그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이 화훼도에서는 대담한 몰골법을 사용하면서도. 간결한 윤곽을 꽃에 두어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몰골법을 사용한 경우. 미미한 윤곽선은 몰골법 때문에 유탄약사(柳炭略寫)로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쌍폭은 화려한 금박분 당지(金箔粉唐紙)위에 양쪽으로 한 구석에 위치한 괴석의 배경만을 나타내고.

나머지는 탐스러운 모란꽃을 한 그루씩 그리고 있다. 괴석은 거의갈필의 꼬불꼬불한 필선으로 윤곽을

나타내고 그 속으로 농담의 변화가 있는 설채로 괴석의 조형을 살리고 있다. 김수철의 꽃그림에 사용한

몰골법 설채는 풍성하여. 근대적인 서구의 수채화법을 연상시킬 정도로 참신한 감각을 풍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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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철(金秀哲) 제목 : 무릉춘색(武陵春色)
 족자 종이에 담채 : 150.5 x 45.6 cm : 간송미술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계의 선경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복숭아나무를 좋은 곳에 골라 심어 놓으면.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 될수있다는 김수철의 자제시(自題詩)를 달고 있는 이 그림은.

제사(題辭)그대로 김수철이 창조해 낸 풍취있는 선경이다. 이렇게 보면 웃고 있는 사람 얼굴같기도 하고. 저렇게

보면 낙타가 걸어 내려오는 것 같은 모양의 머리를 이고 있는 배경의 산은. 마치 질 좋은 인림(印林)처럼 수려한

맛을 풍기며 솟아 있다.

들창을 받쳐 세운 야트막한 정자는. 휘우듬 버티고 선 긴 나무에 의지하여 바로 그곳이 아니면 안될 것 같은 장소에

박힌 듯 자리잡고 있는데. 산과 나무 등은 모두 수직으로 과장 표현되어. 화면을 갈짓자로 누비며 흘러 내려오는

강줄기와 토파(土坡)가 만들어 내는 강변 경물의 유연성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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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閔泳翊)  : 묵란(墨蘭)
족자 종이에 수묵  : 132 x 58 cm : 한국개인



              민영익은 자가 자상(子湘). 호는 운미(芸楣). 죽미(竹楣). 원정(園丁). 천심죽재(千尋竹齋)이며.

왕가의 외척으로 그의 부친은 민태호인데 그역시 書로써 이름을 얻고있다. 그는 약관 이전인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미국 전권대신. 병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예측키 힘든 급변하는 한말(韓末)의 정세에 남달리 일찍 정계에

들어가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미국과 유럽 제국을 20대 전반 에 순회하며 서양문물을 두루 살폈다.

그는 갑신정변이후 중국으로 피신하여 수차 왕래하다가 1905년 친일내각이 서자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민영익은 특히 蘭. 竹에 있어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으며. 난에 있어서는 대원군 이하응과 더불어 병칭된다.

이 묵란은 민영익의 특징을 잘 대변하는바. 잎의 끝이 뭉뚝한 점. 꽃중앙의 묵점. 긴 잎의 직각에 가까운 꺾임의 묘 등을

열거할수 있다. 화면 오른쪽 상단에 쓴 간기로 1904년에 그렸음을 알수 있다.

화면 하단에 한 무더기의 난을 그렸고 왼쪽 상단에 치우쳐 분(盆)에 담긴 간단한 난을 포치 시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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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익(閔泳翊) : 묵죽(墨竹)
 종이에 수묵  : 47.6 x 44.7 cm : 한국개인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그 중 가장먼저 그려지기 시작하여 줄기차게 이어 내려온 묵죽(墨竹)은 단순히 형태를

그대로 옮기는 형사(形似)만으로 그림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죽에 의탁하여 죽이 지니는 내면적인 의미와

정신적인 아름다운을 나타내야 하는 만큼 기(技)를 떠난 사의(寫意)에의 어려움이 있다. 묵죽은 문인화로서 내면

정신의 투영이라는 보다 높은 차원의 정신미의 결정체 이다.

묵죽은 죽간(竹竿)이 좌로 치중되어. 둘씩 세 쌍이 담묵으로 곧게 치솟고 있다. 가장 오른쪽에 놓인 긴 죽간에 수직

되게끔. 대나무잎을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이어지는 사선 상부에 집중되게 나타냈다. 포치와 구도에 있어서도

뛰어남이 엿보이며. 잎과 줄기의 농담차 외엔 동일한 묵색이다. 용필(用筆)에 자유분방함과 활달함이 잘 드러나며.

용묵(用墨)도 뛰어나 그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힐수 있는 수작(秀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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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안중식(安中植) : 도원문진(桃源問津)
족자 비단에 채색 : 164.4 x 70.4 cm : 호암미술관

 

 
         안중식의 처음 이름은 욱상(昱相)이었으며. 호는 심전(心田). 만년에는 불불옹(不不翁)이라고도 했다.

도화서화원 출신으로 양천. 통진 군수를 지냈으며. 해서. 행서. 초서. 예서등의 글씨에 뛰어났고.

산수. 인물. 화조 그림에 능했던 구한말의 대표적 명가(名家)이다.

일찍이 조석진과 함께 관비생으로 중국에 유학했으며. 1918년 서화협회를 조직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니.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등이 그의 문도(門徒)였다.

1913년 그린 이 작품은 원래 사계산수 중의 한 폭이었으나. 춘추 두폭만이 알려져 있다.

설채(設彩)도 청록산수법(靑綠山水法)을 써서 밝고 화려하지만 매우 갓맑은 감흥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산수법에서 언뜻 느끼는 것은 조선시대 궁중 장벽화(障壁畵)의 인상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러한 그림에도 익숙하던 안중식의 솜씨속에 살아 있는 그의 남종화적인 교양이 조화 반영된

까닭인지도 모른다

 

 

 

 

 

제가 가져온 곳은 이곳인데, 글쓴이는 모르겠습니다.

http://cafe.daum.net/pharm-bogun/8ffF/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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