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펜화작품 / 강은교 시모음

2011. 3. 3. 20:18詩.

 

 



 



 

 

 

 

23층의 햇빛 

                 

 

지금 막 심장에 도착했어
뼈 하나를 지났다구

간을 지나
콩팥을 지나

갈거야, 너의 피로

그림자가 오면 그림자를 기대게 하면서
눈물이 오면 눈물을 기대게 하면서
바람이 오면 바람을 기대게 하면서

햇빛의 금빛 손가락 끝에서 그림자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새까만 그림자의 손톱들이 차가운 벽의 가슴을 어루만진다

갈거야, 너의 핏 속으로
별이 오면 별을 기대게 하면서.



[ 시안 1999 봄호 ]








‘시체꽃’ 소식


인도네시아 발리 섬의 베두굴에 있는 라카 카리야 식물원에는 높이가 2.35m에 이르는

거대한 라플레시아 아르놀디라고 하는, 기이한 꽃이 있다고 하네.
3년에 한번씩 꽃이 피는 이 식물은 향기 대신 악취가 풍긴다고 하네.
사람들은 이 꽃을 ‘시체꽃’이라고 부른다고…… 커다란 배추같이 생겼군,

나는 가보지 못했네만, 아마 그럴걸세, 가끔 세상에는 이상한 일들이 있으니까……

아니면 원래 향기란 그런 것이 아닐는지……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란 모두 그런 악취를 풍기는 것인지도 몰라.

다만 우리네 코라는 녀석이 악취를 향기로 실어들이는 것인지도.
(하하, 無限天空 저 하늘이 실은 우리를 넘실넘실 가두고 있듯이,

사시사철 천장으로 벽으로 굳센 창으로 가두고 가리어.)
내가 너를 가리고 있듯이, 내가 너의 심장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듯이,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있듯이.








가는 곳


달이 뜬다,
산너머 칡밭에는
떨어진 눈썹 몇 개
살 몇 점
홀로 채비를 서둔다.

가다가 더러 귀신 만나면
가는 곳 잊지 말고 물어두게.

 

 


 

 

 




 

 

 

 


가을


기쁨을 따라갔네
작은 오두막이었네
슬픔과 둘이 살고 있었네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였네
어느 하루 찬 바람 불던 날 살짝 가 보았네
작은 마당에는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었고
뒤에 있던 산, 날개를 펴고 있었네

산이 말했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가을의 書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여자를
보아라
종이처럼 그 여자 오늘 구겨짐을
보아라
구겨지며 늘 비 흐름을
비 흐르며 그 여자 길 밖으로 떠나감을
보아라
모든 길 밖에 흐르는 길동무들을
보아라
언제나 싸우고 있는 길의 밤꿈을
보아라
정오엔 많은 바람으로 펄럭이다가
사라지는 그 여자의 꿈속
모든 가을길은 멀어서
마지막엔 그대도 보이지 않는걸

보아라 




 




감자


감자여

거기 검은 비닐의 홑이불을 제치고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공중을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온몸을 쭈글쭈글하게 하면서
금빛 욕망을 지구에 접속시키고 있는 너

네 눈물의 소금기가
베란다를 적시고
엘리베이터를 적시고
아파트 정문으로 흘러내린다

모든 향수와
모든 부재와
모든 유토피아
…………
어쩔 수 없구나

일으켜 세우라
눈물이여,

거기 두 개의 굵은 뿌리와
백서른다섯 개의 실뿌리를 지구를 향하여 굽이치고 있는 너

 

 

 






 

 

 



거리 시(詩)


컴컴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를 보십시오.
쉴 새 없이 외치는 그 여자의 붉은 칠한 입술을 보십시오.
그 여자의 입술이 흔들릴 때마다
몸 흔들며 달리는 찬바람을 보십시오.
번쩍이는 불빛들을 지나서
바람에 문들이 가득 덜컹거리는
골목과 골목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천지에 누운 먼지들
낮은 리어카 위에 쌓는 것을 보십시오.
"오리지날 골덴니트가 싸요, 싸―."
붉은 칠한 입술 속으로
세계의 흙들이 흐르고 있음을 보십시오.
아직도 어둠은 빛의 어머니임을 보십시오.
길을 삼키는 끝없는 길을 보십시오.
꿈을 삼키는 끝없는 꿈을 보십시오.
찬바람에 떠는 그 여자의 두 손이
무덤의 풀처럼 파아랗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는 것을 보십시오.
흐르는 무덤들이 이 저녁 거리
흔들림도 없이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십시오.
캄캄한 하늘을 등에 지고 서 있는 그 여자
어둠이 빛인 그 여자. 









겨자씨의 노래


그렇게 크지 않아도
돼.
그렇게 뜨겁지 않아도
돼.
겨자씨만하면
돼.
겨자씨에 부는 바람이면
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

가장 작은 것에
가장 큰 것이 눕는다.

* 성서에서 인용

 

 

 





 

 



고독


잠자리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구걸하는 한 여자를 위한 노래


우리는 언제나 거기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혀와 혀를 불붙게 하며 눈물로 빛과 빛을 싸우게 하며

다정한 고름 고름 속에 오래 서 있은 허리를 무너지게 하며, 황사(黃沙) 날아가는 무덤 가장자리에서.

그곳 천정은 불붙은 태양이었고 바닥은 썩은 이빨의 늪이었다. 싸우는 이마 갈피로 등뼈 갈피 갈피로

언제나 종이 울렸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황혼을 알리는 종이.

언제나 종이 울렸다 임종을 알리는 종이.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그보다 먼저 흘러갔다.

늦은 손목 눈짓 사이에서, 번쩍이는 번쩍이는 허리띠, 황금 돛대들 사이에서 흘러가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돌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굳은 피 한 점 던질 때까지, 누군가 쓸데없는 제 죽음 하나 내버릴 때까지,

우리가 헌 그 죽음 입고 검은 종소리 한 겹 듣지 않을 때까지.

아아 돌아오지 말라 사랑하라, 그대 아버지가 그대에게 앵기는 독(毒), 그대 나라가 그대에게 먹이는 독(毒),

물의 독(毒), 공기(空氣)의 독(毒), 흙의 독(毒).

다만 우리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 고름에 다른 고름을 접붙이며 즐겁게 즐겁게, 할 일은 그뿐,

구걸하고 시들어 구걸하는 일뿐, 그러므로 결코 일어서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은 채.

 

 

 






 

 

 





그래, 너무 많이 걸어왔네
이제 돌아갈 수도 없어, 지나온 길이 너무 깊어
그는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입을 본다.
그는 사진 속에서 모자를 비뚜로 쓰고 단추를 덜 채운 자신의 키를 본다.
인생은 비극이었으나 그리 슬플 것은 없다고
사진에 대고 항변하면서
희끗희끗한 머리
군살이 낀 어깨
겉보기에는 안 그렇지만 너무 살이 찐 배
주말에는 골프를 치고
주말에는 동창생을 만나고.,
(…………)
잠속에서는 시간을,
영혼을 꺼내든다.
아, 인생은 별 게 없어, 입술을 흩날리면서

그리고
바람 속에서 바람 속으로 걸어간다.
바람 속에 눕는다.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있을까
그 나무 지금도 거기 서서
찬 비 내리면 찬 비
큰 바람 불면 큰 바람
그리 맞고 있을까
맞다가 제일 떨어내고 있을까

저녁이 어두워진다 문득 길이 켜진다



 

 




 

 

 

 



그 여자 1


아침이면 머리에
바다를 이고 오는 그 여자.

생굴이요 생굴!
햇빛처럼 외치는 그 여자

바람 한 점 없어도
일렁이는 주름 그 여자.

손등엔 가득
먹구름 울고 우는그 여자.

비 언제 올지 몰라…
비 언제 올지 몰라…

늘 파도치는 든든한
엉덩이 그 여자.

어둠보다 빨리
새보다 가벼이

해님하고 같이 걷는
예쁜 예쁜 그 여자.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그날 아침 우리 둘이는 헤매고 있었다. 흐린 하늘 아래 몹시 부는 바람 속으로, 지난
밤 번개에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이 고름 된 들판으로, 어디다 집
을 지을까, 어디다 집을 지을까, 우리의 얇은 날개 쉼 없이, 뼈뿐인 마른 나무들 어루
만졌다.

어느새 한낮, 들판 끝 혼자 서 있는 바위 위에서, 이슬 맺힌 우리 눈 문득 키 큰 햇살을
보았다. 구겨진 낙엽마다 오래 전 잃어 버린 노래 한 자락. 소리치며 웃으며 우리 둘이
는 달려갔다. 있는 힘 다해 얇은 날개 마주 잡아, 사랑이여 사랑이여, 햇살 위에 걸터
앉았다. 노랫자락 허리 깊이 쓰다듬으며, 흐르고 흐르는 그 속 천만 숨소리에 귀기울
이며.

그러나 그날 저녁 노랫소리는 더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큰걸음으로 햇살도 어둠 따라
가버렸다. 등 뒤에서 울려오는 긴 긴 흐느낌, 바람은 날개 사이로 불며, 어디서 나타난
천둥 무서운 고함, 가거라 가거라 사랑이여, 서둘러 우리 둘이는 날개를 거두었다. 흐
린 하늘 아래 뼈뿐인 마른 나무들 사이로 얻어맞고 얻어맞아 퉁퉁 부은 산허리, 냇물
이 고름 된 들판으로, 쫓겨난 채 우리 들이는, 다시 헤매며 우리 둘이는.

 

 

 

 





 

 

 



그날 오후


드넓은 홀 안에는 비에 젖은 구두들이 예의바르게 앉아있었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
들이 떨어져 눕는 소리가 들려오고, 그 사이로 추억들이 살그머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장 낡은 구두에게 상패가 수여되었다, (언제나 깊고 험했으며……) 추억들이 힘없이

박수를 쳤다…… 벽들이 참지 못하고 허리들을 꼬았다.
그때였다, 문이 쓰윽 열리고, 젊은 남자들이 벽들마다 발돋움하고 서 있는 양초에 일

회용 라이터를 가지고 다니면서 불을 붙였다…… 비스듬히- 지평선에 서서 지구에 불

을 붙이듯이.

아직도 밖에서는 비가 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숨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니.








그대의 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로 시작하는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하네

하찮은 것들의 피비린내여
하찮은 것들의 위대함이여 평화여

밥알을 흘리곤
밥알을 하나씩 줍듯이

먼지를 흘리곤
먼지를 하나씩 줍듯이

핏방울 하나 하나
그대의 들에선
조심히 주워야 하네

파리처럼 죽는 자에게 영광 있기를!
민들레처럼 시드는 자에게 평화 있기를!

그리고 중얼거려야 하네
사랑에 가득 차서
그대의 들에 울려야 하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모래야 우리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대신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라고

세계의 몸부림들은 얼마나 얼마나 작으냐, 라고.







금오산


어디서 모르는 이의 울음이 자꾸 들려오고 있다.
그대와 그대가 부르고 있다.
그대와 그대가 그리로 들어간다.
흔들리며, 흔들며
추억과 욕망 뒤섞어 흔들며
따뜻한 뿌리 그림자
젖어서 누운
그곳!
오늘도.




 

 






지상의 모든
피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지는 꽃들과
지상의 모든
보이는 길과
지상의 모든
보이지 않는
길들에게

말해다오
나, 아직 별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낙동강의 바람


 

그대 있는 곳을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정신없이
몸 흔드는 게 아닌가.

그대 잠들지 않는 이유를
나는 아네.
그러게 이리 한많은 소리로
뼈 부서지는 게 아닌가.

살이 살을 뜯는 거리에서
울음떼 무성한 언덕쯤에서
출렁임이 또 한 출렁임 낳아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이여.

오늘은 돌아가지 못하는 것들끼리
저무는 해를 만지고 있는데

그대 가는 곳을
나는 아네.
얼었다 녹으며
녹았다 얼며

이 구름 밑
살지 못해 죽는 그대
오, 죽지 못해 사는 그대.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너무 멀리
- 비리데기, 가장 일찍 버려진 자이여 가장 깊이 잊혀진 자의 노래


그리움을 놓치고 집으로 돌아오네
열려있는 창은
지나가는 늙은 바람에게 시간을 묻고 있는데
오, 그림자없는 가슴이여, 기억의 창고여
누구인가 지난 밤 꿈의 사슬을 풀어
저기 창밖에 걸고 있구나
꿈속에서 만나 이와
꿈속에서 만난 거리와
아무리 해도 보이지 않던 한 사람의 얼굴과
그 얼굴의 미세한 떨림과
크고 깊던 언덕들과
깊고 넓던 어둠의 바다를,
어디선가 몰려오는 먹구름 사이로.

너무 멀리 왔는가.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한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그리움이 저 길 밖에 서 있는 한.

 

 

 


 

 

 

 

 

 

 

 


눈발


외롭지 않아요. 우린
함께 함께 내려가요. 우린

머리칼 죄 뜯긴 나무 위에 풀 위에
몸살 앓는 잔돌 위에 산등성이 위에

쇠꼬챙이 담벼락 위에
비둘기 날개 위에

안녕 안녕, 돌아서는 사람들 솟은 어깨 위에
납작 누운 불경기 지붕 위에

호텔 보드라운 창틀 위에
취기 오른 불빛 위에

그리고 미사 위에
언제나 언제나 홀로 서 있는 십자가 위에

끝내는 눈물이 되어

눈물이 되어 온 땅
질퍽질퍽 흐느끼게 해요
함께 함께 흐느끼게 해요.




 






옥황상제가 온다.
옥황상제가 온다.
엄마 등에는
4천 년 묵은 늪이
황톳물이
묻혔다 다시 묻히는
아아 4천 사내의
떼죽음

 

 

 

 

 

 

 

 



 

 



돌아


너 아직 거기 있느냐
사월에 던진 돌아,
꽃샘바람 몹시도 불어가는
길 모퉁이

연탄재며 밥찌꺼기
혹은 목 떨어진 개나리꽃 새
꾸부정하게 끼어앉아
깨진 머리로 빛나는 돌아

으스름 무렵이면
한 잎 가득 피 베어문 하늘이
네 얼굴처럼 달려온다.

날이라도 궂어
출출출 비 내리쏟는 날에는
험집투성이 우리 가슴결엔
화들짝 살아오는 숨소리, 고함소리
난장판으로 강물이 흐르고
뒷산 허리에선
우르르 우르르
우뢰 몸서리 요란했다.

아직 거기 있느냐 너
사월에 던진 돌아,
개나리 활활 일어설 때를 기다려
아, 그 꽃잎 꽃잎에 상채기 흠씬
문댈 때를 기다려
일년이고 십년이고
수유리 한구석
차마 못 떠나는 돌아

네가 못 떠나는 이 땅에
올해도 사월은 가지만
우리는 영영 남아 있다 그 사월에.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두 갈래 길


그날도 우리는 달리고 있었어요, 그림자 가득한 숲의 입들이 우리의 길을 핥아대고 있었죠,

단풍나무가 소리쳤어요, 저쪽으로 가게-, 소나무가 소리쳤어요, 이쪽으로 어서 어서-,

사슬 풀린 개 한 마리 쫓아오고 있었어요…… 개의 이빨이 푸른 햇빛 아래서 널름거렸죠,

뒤집어진 돛폭처럼 펄럭펄럭, 길은 두 갈래…… 언제나 둘…… 두……

우리는 달리고 있었어요, 평화의 하얀 꽃 클로버를 지나서, 자작나무 큰 키를 지나서,
두 개의 동그란 빵 같은 작은 무덤을 지나서, 잠자리 은빛 날개들 웅성이고 있는 약수터를 지나서, ……

지나서, 지나서……

지금도 우리는 달리고 있어요…… 그대는 이쪽으로, 그대는 저쪽으로……

햇빛- 날리는- 두 갈래-
길 위-




 



등불과 바람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등불 하나는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산 하나가 되네

등불 둘이 걸어오네
등불 둘은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와
환한 바다 하나가 되네

모든 그림자를 쓰러뜨리고 가는 바람 한 줄기

 

 

 

 

 

 

 

 



 

 

 

 



망와(望瓦)


한 어둠은 엎드려 있고
한 어둠은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다
언제 두 어둠이 한데 마주보며 앉을까
또는 한데 허리를 얹을까








모래가 바위에게


우리는 언제나 젖어 있다네.
어둠과 거품과 슬픔으로
하염없는 빛 하염없는 기쁨으로
모든 세포와 세포의 사잇길을 지나
폭풍의 날개 속으로 스며든다네.
한낮에도 가만가만 스며든다네.

길 막히면 길 만든다네.
바람 막히면 바람 부른다네.
세계의 수억 싸움 속에
세계의 수억 죽음 속에
낮은 지붕 위란 지붕 위
썩은 살이란 살 위

넘치고 넘쳐서
우리는 꿈을 꾼다네.
금빛 바위가 되는 꿈을 꾼다네.


 

 

 



무엇이라고 쓸까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물방울의 시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물에 뜨는 법


힘을 빼야 하네
어깨에서 어깨힘을
발목에서 발목힘을
그런 다음
헐거워진 그대 온몸
곧게곧게 펴야 하네

그대 어깨에서
키 큰 수평선들 달려 나오고
그대 발목에서
꽃 핀 섬들 달려 나와
황금빛 지느러미
훨 훨 훨 훨
흔들 때까지

예컨대
길이 길의 옷을 입을 때까지.

 

 

 

 




 

 

 

 



물의 꿈


아비여 아비여
동쪽으로 가서
뜨는 해와 만나고
서쪽으로 가서
지는 해와 만나도.

만나고 입맞추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도.

그때
벽이란 벽은 모두 젖어
살 속에 가만 가만
부서지는 모래

부서지고 껴안고
다시 병들어

형체도 없다.
형체도 없이
아비여
우리는 떠내려간다.

동쪽으로
서쪽으로
줄줄
쪼르르·······.

 

 

 

 

 





 

 

 




바리데기의 여행노래


저 혼자 부는 바람이
찬 머리맡에서 운다.
어디서 가던 길이 끊어졌는지
사람의 손은
빈 거문고 줄로 가득하고
창밖에는
구슬픈 승냥이 울음 소리가
또다시
만리길을 달려갈 채비를 한다.

시냇가에서 대답하려무나
워이가이너 워이가이너

다음날 더 큰 바다로 가면
청천에 빛나는 저 이슬은
누구의 옷 속에서
다시 자랄 것인가.

사라지는 별들이
찬바람 위에서 운다.
만리길 밖은
베옷 구기는 소리로 어지럽고
그러나 나는
시냇가에서
끝까지 살과 뼈로 살아 있다.



 

 

 

 


배추들에게


비 내리는 장터에 모여앉은
너희들을 본다.
옹기종기 쓰레기더미 위에 엎딘
너희들을 본다.

비바람에 푸른 살 찢기우고
목숨 꽂은 언 땅에서도 쫓겨나
탐욕의 비늘 낀 손 기다리는
아아 너희들
동강난 뿌리.

너희들은 울고 있다.
파도빛 이파리 허공에 악물어
펄럭펄럭 왼 동리에
눈물 섞어 휘날리며
허리춤엔 낙동강 흙내를
가슴께엔 두만강 솔바람을.

모가지여
이 비탈에도 눈이 오면
한 무더기씩 두 무더기씩
없는 피 쏟아내릴
모가지여
머리엔 흰눈이 내려
흰눈 펄펄펄 엎어져

천지에 흐느낌 괴는 지금은
어스름 저녁, 잔별도 돋지 않는.


 

 

 

 


벽 속의 편지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별똥별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봄 無事


도시가 풀잎 속으로 걸어간다.
잠든 도시의 아이들이
풀잎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빨리빨리
지구로 내려간다

가장 넓은 길은 뿌리 속
자네 뿌리 속에 있다.




 

 

 


봄이 오고 있다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흔들리는 바람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이 밟은 아침 햇빛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반짝이는 이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붉은 강 1


가서는 안 옵니다.
그대는 물이 되었는지 또는
그림자가 되었는지
흔적도 없습니다.

뵈지 않는 하늘에다 목매달아
빼곡히 골목골목 어둠이 되어

그래 여긴 사철
눈물이 모래알들을 눕히는지요?

나무란 나무 가지마다
터럭이란 터럭 끝마다
피묻은 그림자 주렁주렁 열리는지요?

그대는 깊디깊은 강
슬픔들은 저녁 되어
그 누더기 옷을 벗으니

그대의 온몸은 빨갛게 물듭니다.
끝에서 다 쓰러진 꿈 하나
비틀거립니다
몰래 춤춥니다.

 

 

 

 




 

 

 

 

 


붉은 해


여기서 해는 서산으로 지는데
붉은 해 등진 큰 벌에서
바리바리 피를 모으던 어머니
좋은 날 좋은 시를 가렸지만
부끄러워라 우리 살은
한 대접 냉수에도 쉬이 풀리는
소금이라 하더이다.




 

 





부르는 것들이 많아라
부르며 몸부림치는 것들이 많아라
어둠 속에서 어둠이 오는 날
눈물 하나 떨어지니
후둑후둑 빗방울로 열 눈물 떨어져라
길 가득히 흐르는 사람들
갈대들처럼 서로서로 부르며
젖은 저희 입술 한 어둠에 부비는 것 보았느냐
아아 황홀하여라
길마다 출렁이는 잡풀들 푸른 뿌리.

 

 

 

 

 

 

 

 

 

그림출처. http://cafe.daum.net/jandk2001/PX3F/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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