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 바로읽기』(고형진)

2011. 1. 17. 12:10詩.

 

 

 

 

 

1. 여우난골의 이야기

 

 

 

 

 

 정주성(定州城)

 

 

산턱 원두막은 뷔였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느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터

반디불이 난다 파란 혼들 같다

어데서 말있는 듯이 크다란 산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무이

한울빛 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1935년 8월 30일 조선일보에 발표한 작품으로 데뷰작이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 여우난골족 : 여우난 골 부근에 사는 일가 친척들.

* 진할머니 진할아버지 : 아버지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 포족족하니 : 빛깔이 고르지 않고 파르스름한 기운이 도는.

* 매감탕 : 엿을 고거나 메주를 쑨 솥을 씻은 물로 진한 갈색.

* 토방돌 : 집의 낙수 고랑 안쪽으로 돌려가며 놓은 돌. 섬돌.

* 오리치 : 평북 지방에서 오리 사냥에 쓰이는 특별한 사냥 용구.

* 반디젓 : 밴댕이젓.

* 저녁술 :저녁 숟가락 또는 저녁밥.

* 숨굴막질 : 숨바꼭질.

* 아르간 : 아랫간. 아랫방.

* 조아질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 아이들의 놀이 이름들.

* 화디 : 등장을 얹는 기구. 나무나 놋쇠로 만듦.

* 홍게닭 : 새벽닭.

* 텅납새 : 처마의 안쪽 지붕.

* 무이징게 국 : 민물새우에 무를 넣고 끓인 국.

 

 

 

이 시는 백석 시의 개성이 마음껏 발휘된 문제작이다.

백석 시 형식의 여러 줄기 가운데 하나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의 초기 대표작의 하나로 꼽힌다.

 

이 시는 여우가 난 골짜기, 즉 산골마을의 친족이 지내는 명절풍속을 그린 시다.

시의 시작은 유년의 '나'가 명절날 아침 엄마와 아빠를 따라 큰집으로 나서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어 큰집에 도착한 후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 풍성하게 장만한 음식을 먹고

엄마와 아이들이 제각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장난치며 재미있게 놀다가

다음날 아침까지 잠을 자는 일들을 차례대로 진술한다.

이 시는 아침부터 저녁과 밤을 지나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지는 시간적인 진행 속에

여러 인물들이 펼치는 구체적인 삶의 행위들이 진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분희 '서사적'이다.

이러한 독특한 서사형식은 우리의 전통문학인 '판소리 사설'이 지닌 언어와 형식에 깊이 접맥되어 있다.

 

백석이 활동하던 1930년대, 일군의 모더니즘 시인들은 외래어 구사로 시어의 낯선 효과를 겨냥한 바 있는데,

백석은 오히려 변방의 순우리말로 그런 효과를 십분 발휘한 셈이다.

백석은 시의 형식은 물론이고 시어의 구사에서도 이처럼 의표를 찌르면서 독창적인 세계를 일궈나갔다.

 

 

 

 

 

 

 

 흰 밤                                                  

 

 

옛 성(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이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어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달 있는 제사

 

                 이용악

 

 

달빛 밟고 머나먼 길 오시리

두 손 합쳐 세 번 절하면 돌아오시리

어머닌 우시어

밤내 우시어

하이얀 박꽃 속에 이슬이 두어 방울

 

 

 

 

 

 

 

 

 

 가즈랑집                                                  
 

 

승냥이가 새끼를 치는 전에는 쇠메든 도적이 났다는 가즈랑고개


가즈랑집은 고개 밑의 산 너머 마을서 도야지를 잃는 밤 짐승을 쫓는 깽제미 소리가 무서웁게 들려 오는 집

닭 개 짐승을 못 놓는 멧도야지와 이웃사촌을 지나는 집


예순이 넘은 아들 없는 가즈랑집 할머니는 중같이 정해서 할머니가 마을을 가면

긴 담뱃대에 독하다는 막써레기를 몇 대라도 붙이라고 하며


간밤에 섬돌 아래 승냥이가 왔었다는 이야기

어느메 산골에선간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


나는 돌나물김치에 백설기를 먹으며

옛말의 구신집에 있는 듯이

가즈랑집 할머니

내가 날 때 죽은 누이도 날 때

무명필에 이름을 써서 백지 달아서 구신간시렁의 당즈깨에 넣어 대감님께

수영을 들였다는 가즈랑집 할머니


언제나 병을 앓을 때면

신장님 단련이라고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

구신의 딸이라고 생각하면 슬퍼졌다


토끼도 살이 오른다는 때 아르대즘퍼리에서 제비꼬리 마타리 쇠조지 가지취 고비 고사리 두릅순

회순산나물을 하는 가즈랑집 할머니를 따르며

나는 벌써 달디단 물구지우림 둥굴레우림을 생각하고

아직 멀은 도토리묵 도토리범벅까지도 그리워한다


뒤울안 살구나무 아래서 광살구를 찾다가 살구벼락을 맞고 울다가 웃는 나를 보고

밑구멍에 털이 몇 자나 났나 보자고 한 것은 가즈랑집 할머니다

찰복숭아를 먹다가 씨를 삼키고는 죽는 것만 같아 하루종일 놀지도 못하고 밥도 안 먹은 것도  

가즈랑집에 마을을 가서 당세 먹은 강아지같이 좋아라고 집오래를 설레다가였다

 

 

 

* 가즈랑집 : '가즈랑'은 고개 이름.'가즈랑집'은 할머니의 택호를 뜻함.

* 쇠메 : 쇠로 된 메.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고 자루를 박음.

* 깽제미 : 꽹과리.

* 막써레기 : 거칠게 썬 엽연초.

* 구신집 : 무당집.

* 구신간시렁 : 걸립(乞粒) 귀신을 모셔놓은 시렁. 집집마다 대청 도리 위 한  구석에 조그마

한 널빤지로 선반을 매고 위하였음.

* 당즈깨 : 당세기. 고리버들이나 대오리를 길고 둥글게 결은 작은 고리짝.

* 수영 : 수양(收養). 데려다 기른 딸이나 아들.

* 아르대즘퍼리 : '아래쪽에 있는 진창으로 된 펄'이라는 뜻의 평안도식 지명.

* 제비꼬리 - 회순 : 식용 산나물의 이름.

* 물구지우림 : 물구지(무릇)의 알뿌리를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둥굴레우림 : 둥굴레풀의 어린 잎을 물에 담가 쓴맛을 우려낸 것.

* 광살구 : 너무 익어 저절로 떨어지게 된 살구.

* 당세 : 당수. 곡식가루에 술을 쳐서 미음처럼 쑨 음식.

* 집오래 : 집의 울 안팎.

 

 

 

 

 

 

 

 

 오금덩이라는 곳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어 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 잘 먹고 가라 서리서리 물러가라 네 소원 풀었으니 다시침노 말아라

 

벌개눞녘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숡에 저린 팔다리에 거마리를 붙인다

 

여우가 우는 밤이면

잠없는 노친네들은 일어나 팥을 깔이며 방뇨를 한다

여우가 주둥이를 향하고 우는 집에서는 다음날 으례히 흉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국수당 : 국사당. 성황당

녀귀 :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나물매 : 이것저것 맵시 있게 진설해 놓은 나물

비난수 : 귀신에게 비는 소리

벌개눞녘 : 벌건 빛깔의 늪 방향

바리깨 : 주발 뚜껑

피성한 : 피가 성한

눈숡 : 눈시울

여우가 우는 밤이며 : 여우의 울음은 죽음을 의미

 

 

 

 

 

 

 

 

 국 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기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러났다는 먼 ?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루?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친한 것
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 김치가재미: 북쪽 지역의 김치를 넣어 두는 창고, 헛간
* 양지귀: 햇살 바른 가장자리
* 은댕이: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이무기의 평안도의 말
* 분틀: 국수 뽑아내는 틀이라 한다.
* 큰마니: 할머니의 평안도의 말
* 집등색이: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재치기
* 댕추가루: 고추가루
* 탄수: 석탄수
* 삿방: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깐 방 // 아르?: 아랫목 //
* 고담(枯淡): (글, 그림, 글씨,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아니하고 아취가 있음

 

 

 

 

 

 

적막한 식욕

 

              박 목 월 


모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床에 올라
새사돈을 대접하는 것.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허전한 마음이
마음을 달래는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
또한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의
너그럽고 넉넉한
눈물이 갈구하는 쓸쓸한 食性.
아버지와 아들이 겸상을 하고
손과 주인이 겸상을 하고
산나물을
곁들여놓고
어수룩한 산기슭의 허술한 물방아처럼
슬금슬금 세상 얘기를 하며
먹는 음식.
그리고 마디가 굵은 사투리로
은은하게 서로 사랑하며 어여삐 여기며
그렇게 이웃끼리
이 세상을 건너고
저승을 갈 때,
보이소 아는 양반 앙인기요
보이소 웃마을 이생원 앙인기요
서로 불러 길을 가며 쉬며 그 마지막 주막에서
걸걸한 막걸리 잔을 나눌 때
절로 젓가락이 가는
쓸쓸한 음식.


※ 단일 음식으로 씨를 쓴 거은 이 두 편이 유일함.

 

 

 

 

 

 

 

 

 

 

2. 물총새가 된 아이들

 

 

 

 

 

 

 

 주막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八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 한 잔盞이 뵈었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으 따러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붕어곰 : 붕어곰국

팔모알상 : 팔각상

장고기 : 조그마한 고기

울파주 : 울바자, 울타리

엄지 : 짐승의 어미

 

 

 

 

 

 

 

 오리 망아지 토끼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나려간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어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버린다

 

장날 아츰에 앞 행길로 엄지 따러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러 가는 아배의 지게에 치워 나는 산山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어났다

나는 서글퍼서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오리치 : 동그란 가고리 모양으로 된 오리를 잡는 도구

동비탈 : 동쪽 비탈

동말랭이 : 동쪽의 등성이

시악 : 성미로 부리는 악

엄지 : 짐승의 어미

매지 : 망아지

새하다 : 땔나무하다

 

 

 

 

 

 

 

 

 하답夏沓

 

 

짝새가 발뿌리에서 닐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눞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짝새 : 뱁새

닐은 : '일어나는'의 고어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황토 마루 수무나무에 얼럭궁덜럭궁 색동헝겊 뜯개조박 뵈짜배기 걸리고 오쟁이 끼애리 달리고

소삼은 엄신 같은 딥세기도 열린 국수당고개를 몇 번이고 튀튀 춤을 뱉고 넘어가면

골안에 아늑히 묵은 영동이 무겁기도 할 집이 한 채 안기었는데


집에는 언제나 센개 같은 게사니가 벅작궁 고아내고 말 같은 개들이 떠들썩 짖어대고

그리고 소거름 내음새 구수한 속에 엇송아지 히물쩍 너들씨는데


집에는 아배에 삼춘에 오마니에

오마니가 있어서 젖먹이를 마을 청능 그늘 밑에 삿갓을 씌워 한종일내 뉘어 두고 김을 매려 다녔고

아이들이 큰 마누래에 작은 마누래에 제구실을 할 때면 종아지물본도 모르고

행길에 아이 송장이 거적뙈기에 말려나가면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하였고

그리고 깨때에는 부뚜막에 바가지를 아이덜 수대로 주룬히 늘어놓고 밥 한덩이 질게 한술 들여틀여서는

먹였다는 소리를 언제나 두고두고 하는데


일가들이 모두 범같이 무서워하는 이 노큰마니는

덕살이같이 욱실욱실하는 손자 증손자를 방구석에 들매나무 회채리를 단으로 쩌다 두고 따리고

싸리갱이에 갓신창을 매여놓고 따리는데


내가 엄매 등에 업혀가서 상사말같이 향약에 야기를 쓰면 한창 피는 함박꽃을 밑가지채 꺾어주고

종대에 달린 제물배도 가지채 쩌주고 그리고 그 애끼는 게사니알도 두 손에 쥐어주곤 하는데


우리 엄매가 나를 가지는 때 이 노큰마니는 어느 밤 크나큰 범이 한 마리 우리 선산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것을

우리 엄매가 서울서 시집을 온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이 노큰마니의 당조카의 맏손자로 난 것을 대견하니

알뜰하니 기꺼히 여기는 것이었다 

 

 

넘언집 : 산 너머, 고개 너머의 집을 의미.
수무나무에 :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산기슭 양지 및 개울가에 남.
뜯개조박 : 뜯어진 헝겊조각
뵈짜배기 : 베쪼가리, 천조각
오쟁이 : 짚으로 작게 엮어 만든 섬.
끼애리 : 짚으로 길게 몪어 동인 것. 꾸러미.
소삼은 : 소(疏)삼은. 성글게 엮거나 짠.
엄신 : 엄짚신. 상제가 초상 때부터 졸곡때까지 신는 짚신.
딥세기 : 짚신.
국수당 : 마을의 본향 당신(부락 수호신)을 모신 집. 서낭당.
영동 : 기둥과 서까래.
센개 : 털빛이 흰 개.
게사니 : 거위
벅작궁 : 법석대는 모양.
고아내고 : 떠들어대고.
너들씨는데 : 한가하게 천천히 왔다갔다하며 아무 목적없이 주위를 맴도는 것을 나타냄.
청눙 : 마을 입구의 그늘진 곳 또는 야산 끄트머리 그늘진 곳.
큰마누래 : 큰마마, 손님마마. 천연두
작은마누래 : 작은마마, 수두 또는 홍역.
종아지물본 : 종아지는 홍역을 일으키는 귀신이고, 물본은 근본이치, 까닭이므로

                 '홍역으로 죽어 나가는 까닭도 모르고'로 해석하여야 함.
주룬히 : 주렁주렁. 어떤 물건이 줄지어 즐비하게.
질게 : 반찬.
구덕살이 : 구덕이.
욱실욱실 : 득시글득시글.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들끓는 모습.
들매나무 : 산딸나무. 층층나무과에 속하는 낙엽 활엽 교목. 정원수로 심고 열매는 식용으로 쓰임.
갓신창 : 옛날의 소가죽으로 만든 신의 밑창.
상사말 : 야생마. 거친 말.
향약 : 악을 쓰며 대드는 것.
야기 : 어린아이들이 억지를 쓰고 마구 떼쓰는 짓.
종대 : 꽃이나 나무의 한가운데서 올라오는 줄기.
제물배 : 제물로 쓰는 배.
당조카 : 장조카, 큰조카.

 

 

 

 

 

 

 

 

 동뇨부(童尿賦)

 

 

봄철날 한종일내 노곤하니 벌불 장난을 한 날 밤이면 으레히 싸개동당을 지나는데

잘망하니 누어 싸는 오줌이 넓적다리를 흐르는 따근따끈한 맛 자리에 펑하니 괴이는 척척한 맛

 

첫여름 이른 저녁을 해치우고 인간들이 모두 터앞에 나와서 물외포기에 당콩포기에 오줌을 주는 때

터앞에 발마당에 샛길에 떠도는 오줌의 매캐한 재릿한 내음새

 

긴긴 겨울밤 인간들이 모두 한잠이 들은 재밤중에 나혼자 일어나서 머리맡 쥐발 같은새끼 요강에

한없이 누는 잘 매럽던 오줌의 사르릉 쪼르륵 하는 소리

 

그리고 또 엄마의 말엔 내가 아직 굳은 밥을 모르던 때 살갗 퍼런 막내고무가 잘도 받어 세수를 하였다는

내 오줌빛은 이슬같이 샛말갛기도 샛맑았다는 것이다


 

 

벌불 : 들불

싸개동당 : 오줌싸개의 왕

지나는데 : 지내는데의 뜻으로 쓰임.

잘망하니 : 잘고 얄밉다

물외 : 오이

당콩 : 강낭콩

재밤중 : 한밤중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울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망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없다

 

 

  

디운귀신 : 지운귀신, 땅의 운수를 맡아본다는 민간의 속신.

조앙님 : 조왕님, 부엌을 맡은 신, 부엌에 있으며 모든 길흉을 판단함.

데석님 : 제석신, 무당이 받드는 가신제의 대상인 열두 신,

            한 집안 사람들의 수명, 곡물, 의류, 화복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본다 함.

굴통 : 굴뚝.

굴대장군 : 굴때장군, 키가 크고 몸이 남달리 굵은 사람. 살빛이 검거나 옷이 시퍼렇게 된 사람.

얼혼이 나서 : 정신이 나가 멍해져서.

곱새녕 : 초가의 용마루나 토담 위를 덮는 짚으로, 지네 모양으로 엮은 이엉.

털능귀신 : 철륜대감. 대추나무에 있다는 귀신.

연자간 : 연자맷간. 연자매를 차려 놓고 곡식을 찧거나 빻는 큰 매가 있는 장소.

연자당귀신 : 연자간을 맡아 다스리는 신.

회리서리 : 마음 놓고 팔과 다리를 휘젓듯이 흔들면서.


 

 

 

 

 

 

 

 

3. 박각시 붕붕 날아오면

 

 

 

 

 

 

 비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박각시 오는 저녁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각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당콩 : 강낭콩

바가지꽃 : 박꽃

박각시 : 박각시나방

한불 : 하나 가득, 한묶음 

골우래 : 도루래, 땅강아지

팟중이 : 팥메뚜기

강낭밭 : 옥수수밭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거랑닢도

머리카락도 헝겊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門長)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갖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장이도 큰 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쌍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갓신창 : 부서진 갓에서 나온, 말총으로 된 질긴 끈의 한 종류.

* 개니빠디 : 개의 이빨.

* 너울쪽 : 널빤지쪽.

* 짖 : 깃.

* 개터럭 : 개의 털.

* 재당 : 재종(再從). 육촌.

* 문장 : 한 문중에서 항렬과 나이가 제일 위인 사람.

* 몽둥발이 : 딸려 붙었던 것이 다 떨어지고 몸뚱이만 남은 물건.

 

 

 

 

 

 

모닥불

                   안도현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어두운 청과시장 귀퉁이에서
지하도 공사장 입구에서
잡것들이 몸푼 세상 쓰레기장에서
철야 농성한 여공들 가슴속에서
첫차를 기다리는 면사무소 앞에서
가난한 양말에 구멍난 아이앞에서
비틸진 역사의 텃밭가에서
사람들이 착하게 살아 있는 곳에서
모여 있는곳에서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얼음 장이 강물위에 눕는 섣달에
낮도 밤도 아닌 푸른 새벽에
동트기 십분전에
쌀밥에 더운국 말아먹기전에
무장 독립군들 출정가 부르기전에
압록강 건너기전에
배부른 그들 잠들어 있는시간에
쓸데없는 책들이 다 쌓인 다음에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언 땅바닥에 신선한 충격을주는
훅훅 입김을 하늘에 불아넣는
죽음도 그리하여 삶으로 돌이키는
삶을 희망으로 전진시키는
그날까지 끝까지 울음을 참아내는
모닥불은 피어오른다
한그루 향나무 같다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가지취 : 참취나물

금덤판 : 금점판. 금광 일터

섶벌 : 나무섶에 집을 틀고 항상 나다니는 벌

머리오리 : 머리카락

. 불경처럼 서러웠다 : '불경을 읽고 있는 여인' 세속의 고통과 서러움을 잊으려...

. 파리한 여인은 힘없고 나약한 모습인데, 그런 여인이 나이 어린 딸을 때리는 행위에...

. 여인의 고생은 지아비의 가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아비는 금을 찾아 금광터를 떠도는 듯...

 

 

 

 

 

 

 수라(修羅)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언제인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

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

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

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히 보드러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수라(修羅) : 싸움을 일삼는 귀신.

싹기도 : 흥분이 가라 앉기도.

싹다 : 삭다. 마음이 가라앉다.

가제 : 갓, 방금.

 

 

 

 

 

 탕약湯藥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육미탕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만년 녯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녜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어진다

 

 

 

 

 

 

 

 

 

 

 

 

 

4. 통영에서 북관까지

 

 

 

 

 

 

 통영 1

 

 

녯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핟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듸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ㅈ녁 소라방등이 불그레한 마당에

김냄새나는 비가 나렸다

 

 

 

 

 

 

 

 

 

  통영 2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장은 갓 같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것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아장수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로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늘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 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지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고당 : 고장

갓기도 하다 : 같기도 하다

황화장수 : 일용잡화를 파는 봇짐장수

오구작작 : 여럿이 한곳에 모여 떠드는 모양

녕 : 지붕

손방아 : 디딜방아

 

 

저 북쪽 남자는 애인을 만나려고 반나절 물길을 따라 통영에 도착한다.

그 애인의 이름은 난(蘭)이다.

통영은 바람도 물맛도 다 짭짤하다.

전복·해삼·도미·가자미·파래·아가미젓갈·호루기젓갈 따위가 지천인데,

그 해산물과 젓갈들은 미각을 자극하고,

북이 “쾅쾅” 울고, 배가 “뿡뿡” 울리며 내는 소리들의 풍성함은 청각을 즐겁게 한다.

곧 애인을 만나리라는 기대, 그리고 항구의 활기와 낯선 풍물이 일으키는 흥분 속에서 마음은 한껏 들뜬다.

그런데 남자는 난이를 만나지 못했다.

난이가 산다는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을 찾지만 난이는 없었다.

항구의 활기 넘침은 단박에 북쪽 남자와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 싸늘하게 식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를 내려다본다.

여기에 그냥 눌러 앉아 바다에 뱃사공이라도 될까, 궁리하는 그 남자 그림자가 쓸쓸하다.

 

 

 

 

 

 

 

함주시초(咸州詩抄)

  

 

 

 

 북관北關 

 

명태明太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뷔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北關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新羅 백성의 향수鄕愁도 맛본다

 

 

 

끼밀고 : 깨밀고, 씹고

배척한 : 조금 비린

가느슥히 : 히미하게

 

 

 

 

 

 

 

 노루  

 

장진長津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둥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았다

 

 

 

넘석하는 : ~을 한번 넘어다 보다

자구나무 : 자귀나무

차떡 : 찰떡

막메등거리 : 베로 만든 홑옷

당콩순 : 강낭콩순

다문다문 : 드믄드믄

너슬너슬 : 부드럽고 성긴 모양

약자에 쓴다는 : 약재

가랑가랑 : 찰랑찰랑

 

 

 

 

 

 고사古寺

 

 

부뚜막이 두 길이다

이 부뚜막에 놓인 사닥다리로 자박수염난 공양주는 성궁미를 지고 오른다

 

한 말 밥을 한다는 크나큰 솥이

외면하고 가부틀고 앉어서 염주도 세일 만하다

 

화라지송침이 단채로 들어간다는 아궁지

이 험상궂은 아궁지도 조앙님은 무서운가보다

 

농마루며 바람벽은 모두들 그느슥히

흰밥과 두부와 튀각과 자반을 생각나 하고

 

하폄도 남즉하니 불기와 유종들이

묵묵히 팔장 끼고 쭈구리고 앉었다

 

재 안 드는 밤은 불도 없이 캄캄한 까막나라에서

조앙님은 무서운 이야기나 하면

모두들 죽은 듯이 엎데였다 잠이 들 것이다

                                      (귀주사歸州寺 - 함경도 함주군)

 

 

 

 

자박수염 : 끝이 비틀리면서 아래로 젖혀진 콧수염

성궁미 : 칠성미

화라지 : 가로로 뻗은 곁가지

송침 : 솔가지

단채로 : 한묶음이 통채로

농마루 : 반자 천장

그느슥히 : 어두침침하게 비치는

 

 

 

 

 

 

 선우사膳友辭

 

낡은 나조반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이 소리를 들으며 단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착해서 세괃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하폄 :하품

유종 : 놋그릇 종발

재 안 드는 : 불공이 없는

선우 : 반찬 친구

물닭 : 오리

소리개 : 솔개

세괏은 : 매우 기가 억센

 

 

 

 

 

 

 산곡山谷

 

 

돌각담에 머루송이 깜하니 익고

자갈밭에 아즈까리알이 쏟아지는

잠풍하니 볕바른 골짜기다

나는 이 골짝에서 한겨울을 날려고 집을 한 채 구하였다

 

집이 멫 집 되지 않는 골안은

모두 터알에 김장감이 퍼지고

뜨락에 잡곡낟가리가 쌓여서

어니 세월에 뷔일 듯한 집은 뵈이지 않었다

나는 자꼬 골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골이 다한 산대 밑에 자그마한 돌능와집이 한 채 있어서

이 집 남길동 단 안주인은 겨울이면 집을 내고

산을 돌아 거리로 나려간다는 말을 하는데

해바른 마당에는 꿀벌이 스무나문 통 있었다

 

낮 기울은 날을 햇볕 장글장글한 툇마루에 걸어앉어서

지난여름 도락구를 타고 장진長津땅에 가서 꿀을 치고 돌아왔다는 이 벌들을 바라보며 나는

날이 어서 추워져서 쑥국화꽃도 시들고

이 바즈런한 백성들도 다 제 집으로 들은 뒤에

이 골안으로 올 것을 생각하였다

 

 

 

 

잠풍하니 : 바람이 잔잔히 부는

터앝 : 울 안에 있는 작은 밭

산대 : 산꼭대기

돌능와집 : 너와집

남길동 : 저고리 소매에 이어서 대는 ㅏㅁ색 천

해바른 : 양지바른

장글장글 : 햇볕이 따가운

도락구 : 트럭

 

 

 

 

 

 

 

 

 

 

산중음(山中吟)

 

 

 

 

 산숙山宿

 

 

여인숙旅人宿이라도 국숫집이다

모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옷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 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木枕들을 베여보며

이 산山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木枕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골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들믄들믄 : 더운 느낌

그즈런히 : 가지런히

 

 

 

 

 

 향악饗樂

 

 

초생달이 귀신같이 무서운 산산골 거리에선

처마 끝에 종이등의 붉을 밝히고

쩌락쩌락 떡을 친다

감자떡이다

이젠 캄캄한 밤과 개울물 소리만이다

 

 

 

 

 

 

 야반夜半

 

 

토방에 승냥이 같은 강아지가 앉은 집

부엌으론 무럭무럭 하이얀 김이 난다

자정도 훨씬 지났는데

닭을 잡고 모밀국수를 누른다고 한다

어늬 산山 옆에선 캥캥 여우가 운다

 

 

 

 

 

 

 백화白樺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甘露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山 너머는 평안도平安道 땅도 뵈인다는 이 산山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故 鄕

  

나는 北關에 앓어 누어서

어느 아침 醫員을 뵈이었다

醫員은 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들이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도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平安道 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氏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氏를 아느냐 한즉

醫員은 빙긋이 웃음을 띄고

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醫員은 또 다시 넌즛이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다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절망

 

 

북관에 계집은 튼튼하다

북관에 계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계집은 있어서

흰 저고리에

붉은 길동을 달어

검정치마에 받쳐입은 것은

나의 꼭 하나 즐거운 꿈이었드니

어늬 아츰 계집은

머리에 무거운 동이를 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 끌고

가퍼러운 언덕길을

숨이 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길동 : 소매 끝동

여기서 북관계집은 백석이 가르쳤던 여학생일지도 모른다.

깔끔한 교복을 입은 튼튼하고 아름다운 북관의 여학생을 보는 것이

시인의 북관생활에서 유일한 꿈ㄴ이었는데,

그 여학생이 졸업하고 그저 억센 아이엄마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선생으로서 서글프고 절망하는....

여기서 절망은 한국여인들의 절망인 셈이다.

 

 

 

 

 

 

 

 

 구장로球場路

   - 西行詩抄 서행시초 1

                             백석(白石)

   

 

 

삼리 밖 강 쟁변엔 자갯돌에서

비멀이한 옷을 부숭부숭 말려 입고 오는 길인데

산 모롱고지 하나 도는 동안에 옷은 또 함북 젖었다

 

한 이십리 가면 거리라든데

한겻 남아 걸어도 거리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느 외진 산길에서 만난 새악시가 곱기도 하든 것과

어느메 강물 속에 들여다보이던 쏘가리가 한자나 되게 크던 것을 생각하며

산비에 젖었다는 말랐다 하며 오는 길이다

 

이젠 배도 출출히 고팠는데

어서 그 옹기장사가 온다는 거리로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먼저‘酒類販賣業주류판매업’이라고 써붙인 집으로 들어가자

 

그 뜨수한 구들에서

따끈한 삼십오도 소주나 한 잔 마시고

그리고, 그 시래기국에 소피를 넣고 두부를 두고 끓인 구수한 술국을 뜨근히

몇 사발이고 왕사발로 몇 사발이고 먹자

 

 

 

 

 

 

 

 

 

 북신 北新

              - 서행시초 2

 

 

 

거리에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이었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小獸林王을 생각한다 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팔원(八院)

             - 서행 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 승합자동차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은 예서 삼백오십 리 묘향산 백오십 리

묘향산 어디메서 삼촌이 산다고 한다.

새하얗게 얼은 자동차 유리창 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 주재소장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내임 : 냄, 배웅, 전송

 

 

 

 

 

 

 

 

열심히 산다는 것

 

                      안도현

 

 

 

산서에서 오수까지 어른 군내버스비는
400원입니다
운전사가 모르겠지, 하고
백원짜리 동전 세 개하고
십원짜리 동전 일곱 개만 회수함에다 차르륵
슬쩍, 넣은 쭈그렁 할머니가 있습니다
그걸 알고 귀때기 새파랗게 젊은 운전사가
있는 욕 없는 욕 다 모아
할머니를 향해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무슨 큰일 난 것 같습니다

30원 때문에 

 

미리 타고 있는 손님들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운전사의 훈계 준엄합니다 그러면,
전에는 370원이었다고
할머니의 응수도 만만찮습니다
그건 육이오 때 요금이야 할망구야, 하면
육이오 때 나기나 했냐, 소리 치고
오수에 도착할 때까지
훈계하면, 응수하고
훈계하면, 응수하고
됐습니다
오수까지 다 왔으니
운전사도, 할머니도, 나도, 다 왔으니
모두 열심히 살았으니!

 

 

 

 

 

 

 

 

 

 

 

 

 

 

5. 외롭고 높고 쓸쓸한 길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달재 : 주둥이가 길고 몸에 가시가 많은 바닷고기

진장 : 진간장

 

 

 

 

 

 

 

 

 

 멧새소리

 

 

 

처마 끝에 명태를 말린다

명태는 꽁꽁 얼었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긴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별은 서러웁게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문턱에 꽁꽁 얼어서

가슴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시에 대한 해석과 패러디가  김은자 시인이 '튀튀새가 산다 - 백석에게' 에 있다고 하는데,

시를 못 찾겠습니다.

시 제목이 멧새소리인데, 멧새는 등장하지 않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히

 

 

 

 

 

 

 

 

 북방에서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扶餘)를 숙신(肅愼)을 발해(勃海)를 여진(女眞)을 요(遼)를 금(金)을
흥안령(興安嶺)을 음산(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든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든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든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야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한울로 땅으로 ― 나의 태반(胎盤)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장풍 : 창포

오로촌 :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

멧돌 : 멧돼지

쏠론 : 중국 동북지방 소수민족

앞대 : (평안도 아랫지방)

돌비 : 비석

햇귀 : 햇발

보래구름 : 보라빛 구름

 

 

 

 

 

 

 

 조당燥塘에서 

 

 

나는 지나支那 사람들과 같이 목욕을 한다
무슨 은이며 상이며 월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후손들과 같이
한물통 안에 들어 목욕을 한다
서로 나라가 다른 사람인데
다들 쪽 발가벗고 같이 물에 몸을 녹히고 있는 것은
대대로 조상도 서로 모르고 말도 제가끔 틀리고 먹고 입는 것도 모도 다른데
이렇게 발가들 벗고 한물에 몸을 씻는 것은
생각하면 쓸쓸한 일이다
이 딴 나라 사람들이 모두 니마들이 번번하니 넓고 눈은 컴컴하니 흐리고
그리고 길즛한 다리에 모두 민숭민숭하니 다리털이 없는 것이
이것이 나는 왜 자꼬 슬퍼지는 것일까
그런데 저기 나무판장에 반쯤 나가 누워서
나주볕을 한없이 바라보며 혼자 무엇을 즐기는 듯한 목이 긴 사람은
도연명은 저러한 사람이였을 것이고
또 여기 더운물에 뛰어들며
무슨 물새처럼 악악 소리를 지르는 삐삐 파리한 사람은
양자라는 사람은 아모래도 이와 같었을 것만 같다
나는 시방 녯날 진이라는 나라나 위라는 나라에 와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만 같다
이리하야 어쩐지 내 마음은 갑자기 반가워지나
그러나 나는 조금 무서웁고 외로워진다
그런데 참으로 그 은이며 상이며 월이며 위며 진이며 하는 나라 사람들의 이 후손들은
얼마나 마음이 한가하고 게으른가
더운물에 몸을 불키거나 때를 밀거나 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제 배꼽을 들여다보거나 남의 낯을 쳐다보거나 하는 것인데
이러면서 그 무슨 제비의 춤이라는 연소탕이 맛도 있는 것과
또 어늬바루 새악시가 곱기도 하 것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한가하고 게으르고 그러면서 목숨이라든가 인생이라든가 하는 것을 정말 사랑할 줄 아는
그 오래고 깊은 마음들이 참으로 좋고 우러러진다
그러나 나라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글쎄 어린 아이들도 아닌데 쪽 발가벗고 있는 것은
어쩐지 조금 우수웁기도 하다

 

조당 : 짜오탕, 대중목욕탕

나주볕 : 저녁볕

양자 : 염세사상가 쾌락주의

연소탕 : 제비집 스프

바루 : (거리) - 쯤


 

 

 

 


 

 

 허준(許俊)

 

 

그 맑고 거룩한 눈물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그 따사하고 살틀한 볕살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여

눈물의 볕살의 나라에서 당신은
이 세상에 나들이를 온 것이다
쓸쓸한 나들이를 단기려 온 것이다

눈물의 볕살의 나라 사람이여
당신이 그 긴 허리를 굽히고 뒷짐을 지고 지치운 다리로
싸움과 흥정으로 왁자지껄하는 거리를 지날 때든가
추운 겨울밤 병들어 누운 가난한 동무의 머리맡에 앉어
말없이 무릎 위 어린 고양이의 등만 쓰다듬는 때든가
당신의 그 고요한 가슴 안에 온순한 눈가에
당신네 나라의 맑은 하늘이 떠오를 것이고
당신의 그 푸른 이마에 삐여진 어깨쭉지에
당신네 나라의 따사한 바람결이 스치고 갈 것이다

높은 산도 높은 꼭다기에 있는 듯한
아니면 깊은 물도 깊은 밑바닥에 있는 듯한 당신네 나라의
하늘은 얼마나 맑고 높을 것인가
바람은 얼마나 따사하고 향기로울 것인가
그리고 이 하늘 아래 바람결 속에 퍼진
그 풍속은 인정은 그리고 그 말은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 것인가

다만 한 사람 목이 긴 시인(詩人)은 안다
'도스토이엡호스키'며 '조이스'며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일등가는 소설도 쓰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듯이 어드근한 방안에 굴어 게으르는 것을 좋아하는 그 풍속을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엿 한 가락을 아끼고 위하는 아내에겐 해진 옷을 입히면서도
마음이 가난한 낯설은 사람에게 수백량 돈을 거저 주는 그 인정을 그
리고 또 그 말을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그 멀은 눈물의 또 볕살의 나라에서
이 세상에 나들이을 온 사람이여
이 목이 긴 시인이 또 게사니처럼 떠돈다고
당신은 쓸쓸히 웃으며 바독판을 당기는구려




              
별살 : 톡 쏘는 햇빛

               게사니 : 거위



허준 (1910. 2. 27 ~ ?)

 

이효석, 이태준, 최명익 등과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소설가.

조선일보 기자와 만주 신경생활을 거쳐 북한에서 김일성 대학 영문학과 교수를 역임.

작품에는 '탁류', '습작실에서', '속 습작실에서', '평대저울', ' 잔 등' 등이 있고

심리적인 내면의 묘사를 솔직하고 사실적으로 하여 일경지를 이룬 작가.

 

백석과 동시대의 소설가였던 허준은 백석이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던 몇 안되는 지인 가운데 하나다.

백석의 생애는 유랑의 연속이어서 문단과도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가까이 지내는 문인이 별로 없었다.

백석은 지독히도 결벽한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백석이 자신의 작품을 허준을 통해서 발표하게 할 정도였던 걸 보면 둘 사이에 신의가 얼마나 깊었는지......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

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영상에 이어 사랑했던 사람의 영상이 스친다.

그 여자는 지금 결혼해 다른 남자와 산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 옆에 끼고

지아비와 마주 앉아서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 모습은 더없이 따뜻하고 단란해 보이며,

그 영사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하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시인의 쓸쓸한 감정이 북받치거나 질척거리는 감상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떠나간 사랑의 행복을 따뜻하고 담담하게 드러내는 어조에서 쓸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넉넉하고 객관적인 시선이 느껴진다.

인생은 본래 쓸쓸한 것이라는 생에 대한 깊은 성찰의 태도가 이 객관적인 시선에 담겨 있다.

 

- 고형진, 《백석 시 바로 읽기》에서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삿 : 삿자리, 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

쥔을 붙이었다 : 세들었다

딜옹배기 : 둥글넙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진 질그릇

굴기도 하면서 : 구르기도 하면서

나줏손 : 저녁무렵

바우섶 : 바위 옆

갈매나무 : 2~5미터의 활엽수. 가지에 가시가 있고 잎이 마주나고 톱니가 있으며

               5월에 연한황록색의 잔꽃이 한두 송이씩 핀다. 열매는 약용이고, 껍질은 염료로 쓴다.

 

 

 

이 시는 시인이 북쪽에 남아 분단으로 갈라지기 전에 발표된 마지막 작품이다.

객지에서 자신의 생애를 응시하며 삶의 운명과 자세에 대해서 성찰해보는 이 시는

앞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시도된 시적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인데,

시적 표현에서 또 다른 창의성이 발휘된다.

이 시는 우리말의 구문에 대한 백석의 인식이 최고 수준에 올라서 있는 작품이다.

'남신의주' '유동'은 지명이다. '박시봉'은 목수일을 하는 집주인의 이름일 것이다.

이 시는 화자가 객지에 홀로 떨어져서 자신의 근황을 적어 띄우는 편지를 연상케 한다.

이 시는 1948년 허준이 주관하던 <학풍>지에 발표된 작품이다. 

 

- 고형진, 《백석 시 바로 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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