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름마치

2011. 1. 26. 17:01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진옥섭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 2007.04.12 발간

 

 

 

출판사 서평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을 마중 가는 길


제 홀로 찬란히 꽃 피웠으나 때론 홀로 남아 외로웠던 이 시대 마지막 예인들의 삶과 예술,

그 깊고 오묘한 찰나를 짠한 사진 한 컷처럼 두 권의 책에 복기하였다.

빛나는 노을처럼 삶의 마지막 기운 뿜어내는 열여덟 예인, 그들의 고아하되 애절한 사연들!

그것은 견주자면,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세월과 삶을 품은 노래와 견줄 만한 무엇이리라.

『노름마치』는 그러한 속 깊은 삶의 비밀을 품고 있는 이 땅의 최고 전통 명인들이 벌이는 다채로운 놀음의 향연이다.

먼 길 끝의 노인정과 다방, 시장의 국밥집에서 마주앉아 물은
전통 예인들의 삶에 대한 이력서

아슬아슬한 도박을 감행함은, 어렵지만 일단 무대에 서면 여태 없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걷는 건 두렵지만 춤추는 것은 두렵지 않다.

몸속에 소리와 음악이 모두 들어 있어, 선율의 흐름 따라 그때그때 춤이 달라진다.

전통이란 이름 속에서 순간순간 새것이 돋아난다.

이런 순간은 맛보는 순간 중독된다. 결국 또 들여다보고픈 과욕이 극성스런 길을 가게 한다.

정녕 보고픔도 극심한 허기의 일종인 것이다.

_' 프롤로그' 중에서

4무[武?舞?巫?無]에 사무친 한 사내가 있었다.

고수들의 무술[武]에 반했고,

날렵한 유선형의 춤[舞]에 미쳤으며,

울음을 음악으로 만드는 재주를 지닌 무속[巫]을 따라다녔고,

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을 들어내는 무[無]의 세계에 홀린 사내.

 

진옥섭,

그는 지난 시절 동안 초야에 묻혀 있던 전통 예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이끌어 무대에 세웠던 전통예술 연출가다.

예인들을 직접 찾아가 담판하여 그들을 무대로 이끌어내는 일은, 일반적인 연출자와 배우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심(心)을 움직이지 못하는 한 그들과의 담판은 허사였다.

상대를 알아야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

진옥섭의 노정은 결국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해해가는 과정이었다.


『노름마치』는 길 위에서 마주한 예술가들을 무대로 이끈 한 연출가의 세세한 기록이다.

그것은 발품 팔아 명품을 찾아 나선 길에 만난 것들이기에 더욱 각별하며,

공연을 통해 예술로 승화된 것을 스케치한 것이기에 그것 자체로 완결성을 갖추었다.

동시대의 사람들이 노명인(老名人)들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노명인들의 예술은 그들을 이해하는 연출가 진옥섭의 마음을 거쳐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 것은 소중하다는 심정적 이해를 넘어서서

액션영화를 첫날 첫 회에 봐야 하고 발레리나의 어깨선을 눈부셔하는 한 젊은이가 맛본 전통의 가장 맛있는 부위를

이 책에 갈무리했다.

젊은이의 섬세하고 세밀한 필터 덕분에 우리는 동시대의 언어와 감수성으로 우리가 몰랐던 우리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책속으로

 

해어화 피는 물가에서 꽃핀 청춘들

권번(券番), 그것은 아버지를 위해 심청이 뛰어든 인당수 깊은 물과 같다.

죽 한 사발을 놓고 서로 달려들어 머리 부딪히는 목멘 풍경을 뒤로 하고 권번에 간다.

그리고 심청이 연꽃으로 환생하듯이, 그녀들 연향(宴享)의 꽃 해어화로 피어난다.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이란 뜻으로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두고 한 말이었는데,

그후 미인, 기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 해어화를 피워내는 물가가 권번이었다.

 _'1. '예기(藝妓)', 이화우 흩뿌릴 제' 중에서

권번 출신의 '예기'라 하면 전형적인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를지 모르겠다.

그 연상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상투적으로 박제화된 거짓일지도 모른다.

예기들의 개인사에서 묻어나는 삶의 얼룩과 무늬들은 차치해두더라도,

전통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들은 진정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온 전통예술의 '전문가'들이다.

댕기머리 땋고 노닐던 시절부터 그들은 선생에게 채(회초리) 맞으며 춤 배웠고 소리 했다.

어린 시절부터 체득해온 예술은 그들의 뼛속에 단단히 사무쳐 있는, 삶과 분리되지 않는 무엇이다.

천하다고 손가락질 받기도 했으나, 그래서 자신의 춤가락을 숨기며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예술은 핏속에 숨 쉬고 있었다.

기억이 사그러들었으나 시린 물팍이 춤 기억하고 있는 천생 춤꾼 장금도,

부산 동래의 학춤 추는 이들에게 구음으로 소리 맞추며 날갯짓할 추임새 만들어주는 동래기생 유금선,

노래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시대건만 후계 없이 중고제 소리 간직한 고아한 명무 심화영,

이들의 사연을 여기에 실었다.

춤, 그것은 사내의 역사였다

무대가 밝아지며 시나위가 서서히 펼쳐질 때,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나온 한량이 꾸벅 인사하고 지팡이를 내려놓는 순간부터 차마 잊지 못할 춤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저 음악에 몸을 맡기는데, 어느덧 무이구곡(武夷九曲)이 흘러든 듯했다.

슬픔과 기쁨이 한 올에 휘감긴 시나위는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경치 앞에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고 있었다.

퇴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펼쳐들고 회고했듯이 '모르는 사이에 기쁨이 솟아나고 눈이 열리는' 시간이었다.

_ '2.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중에서

지금의 춤은 여자들만의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춤 역사는 일찍부터 남성의 역사였다.

우리의 경우로 보자면 일제강점기 예기권번 시절부터 여성을 중심으로 춤이 전승되었고,

춤에 대한 좁은 생각 때문에 헌걸찬 춤들이 '연극'이나 '놀이'란 이름으로 방치되었다.

그러나 "사내 몸이 춤 없이 멋이 되는가" 하는 한량의 풍류는 은자(隱者)의 길처럼 전해졌다.

외면하는 버르장머리를 탓하지 않고 도도하게 굵직한 본때를 간직한 것이다.

노닐던 풍류 탓인지 차림새부터 다른, 다듬잇살 잘 오른 두루마기 떨쳐입고 가벼이 두 팔 벌려 바람을 제 품에 품는

동래한량 문장원,

들여다보면 그저 빈 통에 가죽만 덜렁 씌운 북 하나에 사내들의 희로애락 다 담아 일생 바친 소리 뿜어냈던 밀양의

하용부,

선풍도골(仙風道骨)에 한산세모시 도포 떨쳐입고 학이 되어 비상하던 김덕명,

이들 세 명인의 힘찬 남무가 펼쳐진다.

장단 걸어놓고 가는 길

판소리, 세대를 바꾸면서 서로가 일궈온지라 시간의 지문이 묻어 있다.

그리고 지문의 골과 골에는 한 인간이 몰두해온 지독한 길이 박혀 있다.

일생 동안 스승의 것을 숙련하지만 저 또한 멋이 있는지라 살짝 자기 것을 덧붙인다.

이를 '더 넣었다'는 뜻으로 '더늠'이라 한다.

훗날 다른 소리꾼이 이 대목을 부를 때 "아, 여기는 누구 선생제(制)렸다" 하는 '소리풀이'로 이력을 대니,

누대에 걸쳐 불천위(不遷位)로 받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치밀하고 정교한 전승구조로 켜켜이 축적해왔기에 인류의 유전자로는 벅찬 일에 도전할 수 있었다.

 _'3. '득음(得音)', 세상에서 가장 긴 오르막' 중에서

민중을 사로잡고 사대부의 사랑방을 감돌았으며 결국 왕후장상의 귓전에까지 도달했던 그 소리, 판소리.

그렇게 찬란히 꽃피었던 판소리는 이 나라의 전통예술을 넘어, 인류가 이룩한 '또 하나의 음악'으로 인정받으며 보존되고 있다.

오랜 시간 꾹 참고 시간을 견뎌 진정한 깊은 맛을 내고 있는 그 소리들을 내림하는 사연이 이번 장에 실려 있다.

조선의 마지막 해에 태어나 우리 시대까지 동행한 마지막 조선 광대이며, 이 책의 출연자들 중 유일무이하게 유명을 달리한

양암 정광수,

육성이 그릴 수 있는 온갖 문양을 쏟아내며 자유자재로 노니는, 날것의 그리움을 간직한 소리꾼 한승호,

연좌제의 시절에 월북한 스승 박동실을 언급한 탓에 소리와 상관없이 초당에 묻혀 지내야 했던 명창 한애순,

이들의 소리 인생이 이곳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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