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7. 12:30ㆍ음악/우덜- ♂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시에 붙인 노래가 다 좋은 노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따금, 어쩌면 저렇게 궁합이 잘 맞을까, 싶은 노래들도 있다.
내가 박인환의 시를 처음 만난 것은 이해인 수녀의 친구이기도 한 박인희의 노래를 통해서다.
그 박인희가 부른 노래 가운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바로 <세월이 가면>이다.
뒷날 음악다방 같은 데 갈 때면 꼭 이 노래와 박인희가 낭송한 <목마와 숙녀>를 청해 듣곤 했다.
........
........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이는데
가을 바람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이동원(1951~살아있음)
1984년쯤이었나?
대마초 때문에 활동이 묶여 있던 가수들이 규제에서 풀리던 해였는데,
나는 그 가수들 가운데 두 사람, 임희숙 이동원 재기 음반에 곡을 써 줬다.
(제일 많이 알려진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도 그때 발표한 곡 중의 하나다.)
이동원 형이 어느날 집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죽이는 시'가 있다고 하면서 <이별노래>를 보여줬다.
무슨 화장품 사보 같은데 실려 있는 걸 우연히 봤는데
노래를 붙이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얼마 뒤엔 그 시가 들어 있는 정호승 시집《서울 예수》를 며칠 끼고 다니더니
시가 참 좋다면서〈우리가 어느 별에서〉란 시를 하나 더 골라냈다.
<이별노래>는 작곡가 최종혁 선생님이,
<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내가 곡을 붙이기로 했다.
이동원은 이 음반으로 가뿐히 재기했다.
이후로 이동원은 '시를 노래하는 가수'의 이미지를 새로 얻었고,
시에 붙인 노래를 꾸준히 발표했다. 1989년엔 정지용의 <향수>로·····
이동원만큼 시가 몸에 잘 붙는 가수가 또 얼마나 있을까.
그가 내는 소리엔 인생의 '쓴맛'을 아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깊은 맛이 배어 있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그대 떠나는 곳
내 먼저 떠나가서
나는 그대 뒷모습에 깔리는
노을이 되리니
옷깃을 여미고 어둠 속에서
사람의 집들이 어두워지면
내 그대 위해 노래하는
별이 되리니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
- 정호승 <이별노래>
위엣 글은『백창우, 시를 노래하다 2』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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