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3. 15:56ㆍ詩.
ㄹ자
- 이은상
평생 배우고도 미처 다 못 배워
인제사 여기 와서 ㄹ자를 배웁니다
ㄹ자 받침 든 세 글자
자꾸 읽어 봅니다
제 '말' 지키려다
제 '글' 지키려다
제 얼' 붙안고 차마 ㄶ지 못하다가
끌려와
ㄹ자 같이 꾸부리고 앉았소
(1942년)
겨울 물오리
- 이원수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 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귀여운 새야'
나도 이제 찬 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이원수 선생님이 병상에서 쓴 마지막 시 <겨울 물오리>를 읽으면서 콧등이 찡해졌다.
이 분은 이렇듯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노래하고 있구나. 꿋꿋한 삶을 얘기하는구나.
지금 내 처지가 얼음장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지만
그까짓 것 이겨내지 못할 일이 어디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이원수 선생님이 쓴 글 한토막이 생각난다.
"어른스러운 어린이가 되지 말고,
장래에도 어린이다운 어른이 되자."
이 상 (李箱)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 용대가리 떡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만두니 서운하다.
...... 우선 그만둔다. 한동아 조용히 공부나 하고 따는 정신병이나 고치겠다.
- <오감도 작자의 말>에서 -
「포플라 나무 밑에 염소 한 마리를 매어 놓았습니다.
구식으로 수염이 났습니다.」
「시계를 보았다. 9시 반이 지난.
그건 참으로 바보 같고 우열한 낯짝이 아닌가.
저렇게 바보 같고 어리석은 시계의 인상을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한 일이 없다.
9시 반이 지났다는 것이 대관절 어쨌단 거며 어떻게 된다는 것인가.」
「나는 얼굴을 씻으면서 사람이 매일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번쇄한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사실 한없이 게으름뱅이인 나는 한 번도 기꺼이 세숫물을 써 본 기억이 없다.」
「시원치 않은 별이 들었다 났다 하는 밤섬.」
「무슨 일이건 불쾌하다는 걸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불쾌하다.
그러자 이번은 이웃 방 사람들의 식사하는 소리가 들리어 온다.
꼭 개가 죽 먹을 때의 그 소리다.」
「체대가 비록 풋고추만 하나 깡그라진 계집이 제법 맛이 있다.」
「처녀가 아닌 대신에 고리키 전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독파했다는 처녀.」
「햇수로 여섯 해 전에 이 여인은 정말이지 처녀대로 있기는 성가셔서
말하자면 헐값에 즉 아무렇게나 내어주신 분이시다.」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딘지도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이상화 '나의 침실로')
나막신
이병철
은하 푸른 물에 머리 좀 감아 빗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목숨 '수(壽)'자 박힌 정한 그릇으로
체할라 버들잎 띄워 물 좀 먹고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삽살개 앞세우곤 좀 쓸쓸하다만
고운 밤에 딸그락 딸그락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화가 L을 위하여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느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려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도로 자
조운
자고 나서 보아 해도
잘 일밖에 다시 없어
자고 도로 자고
자다가 눈 떠 보면
생시가 꿈인 양 하이
깨는 듯이 도로 자
아버지 걸으시는 길은
임길택
빗물에 패인 자국 따라
까만 물 흐르는 길을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골목길 돌고 돌아 산과 맞닿는 곳
앉은뱅이 두 칸 방 우리집까지
하느님도 걸어오실까요.
한밤중,
라면 두 개 싸들고
막장까지 가야 하는 아버지 길에
하느님은 정말로 함께 하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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