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재 허백련

2010. 11. 1. 14:18미술/한국화 옛그림

 

 



의재(齋) 허백련(鍊)

1891고종2년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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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허백련화조(95.5*96)

 

 

 

 

 

 

日出而作

 

 

 

 

 

溪山淸趣

 

 

 

 

 

 

山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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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景山水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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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화란?

 

[개설]


남종화는 남종화가로 분류되는 여러 화가들이 구사했던 수묵산수화의 복합적 양식을 일컫는다.

남종화라는 용어는 중국 나라 만력연간에 막시룡(莫是龍, 1537~1587), 진계유(陳繼儒, 1588~1639),

동기창(董其昌, 1555~1636) 등 문인 서화가에 의해 주창된 남북종론에서 나온 것이다.

남·북종화파의 분류는 여러 학자들 사이에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수묵산수화의 시조라 불리는 나라 왕유를 남종화의 선구로,

착색산수화를 그린 나라 이사훈(李思訓), 이소도(李昭道) 부자를 북종화의 선구로 보았다.

이후 같은 기준에 의해 남종화가와 북종화가를 분류하였는데,

실제로는 화풍상의 분류라기보다는 문인과 직업화가라는 화가의 신분에 따른 분류이다.

이 때문에 남종문인화라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남종화는 17세기에 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로 중국화가들의 문인화 작품이 직접 유입되기도 하였고,

청초에 발간된『고씨화보(顧氏畵譜)』『당시화보(唐詩畵譜)』『십죽재서화보(十竹齋書畵譜)』『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통해 형식화된 모습으로 유입되어 그 전파가 가속화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강세황(姜世晃)이나 이인상(李麟祥), 심사정(沈師正)을 비롯한 문인화가뿐 아니라,

김홍도이인문 등 화원화가들의 그림에서도 남종문인화풍이 보이게 되었다.

즉, 문인화의 본래 개념인 문인이 여기로 그린 그림에서 특정한 준법이나 구도의 전형이 이루어지면서 형식화되었다.

19세기에는 18세기 조선 남종화의 기초 위에 추사 김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에 의해 본격적인 남종화의 세계가 전개되었다.

이방운(李昉運), 신위(申緯), 정수영(鄭遂榮) 등 문인화가들뿐 아니라

조희룡(趙熙龍), 전기(田琦), 허련(許鍊) 등 여항화가들의 활약이 남종화의 발달에 큰 몫을 차지하였다.

이후 남종화는 본연의 취지나 정신에서는 멀어지고 하나의 양식으로서 간주되어 명맥을 이어왔다.

[형성배경]


19세기 남종문인화의 대가 허련은 전라남도 진도 출신으로

31세 때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 김정희의 문하생이 되어 그의 집에 머물면서 서화수업을 하였다.

문인화를 중심으로 특유의 필치를 구사한  허련의 회화는 당대에도 추사 김정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소치를 따를 만한 화가가 없다”거나 “소치 그림이 내 것보다 낫다”는 찬사를 들을 만큼 빼어났으며

당시 화단을 풍미하였다.

허련은 49세 때인 1856년에 진도로 낙향하여 화실인 운림산방을 마련하고 작품 활동을 하였다.

허련의 화풍은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1852~1931), 손자인 남농(南農) 허건(許楗, 1907~1987),

방손인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1~1977)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에 의해 호남화단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내용 및 특징]


호남남종화의 본고장인 진도에서는 허련과 허형의 뒤를 이어 많은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허련의 집안에서만 해도 허형의 아들인 허건과 임인(林人) 허림(許林, 1917~1942)을 비롯하여

허림의 아들 임전(林田) 허문(許文), 허건의 장손자인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허진을 비롯한 여러 후손들이 화업을 잇고 있다.

허건은 그림을 시작한 초기에는 가전화풍인 허련의 화법을 따라 전통회화의 계승에 노력하였으나,

남종문인화를 현대적 화풍으로 승화시켜 특유의 ‘신남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일구어낸 화가이다.

소치에서 미산을 거쳐 내려온 전통 남종문인화의 맥을 이어 허백련과 더불어 현대 호남화단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다.

문하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동생과 조카, 손자들에 이르기까지 집안의 화맥을 계승케 하였다.

허건의 문하에서는 도촌(稻邨) 신영복(辛永卜),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김명재(金明在) 등이 남농의 회화정신을 바탕으로

각자 독특한 화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허백련남농과 함께 한국남화를 남도의 전통화풍으로 자리 잡게 한 중심인물이다.

허백련은 중국의 전통 남종화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남도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감성이 녹아든 사의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그는 1938년 광주에 정착하여 전통서화 진작과 후진양성을 목표로 연진회(鍊進會)를 결성하여 많은 화가를 길러냈다.

[현황]


19세기 허련에서 시작된 진도 남종화의 맥은 현대에까지 이어진다.

진도 출신의 화가들은 허건이나 허백련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으며 호남과 전국 각지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다.

특히 허백련이 발족한 연진회가 그 발판이 되었다.

허백련의 동생인 목재(木齋) 허행면, 제자인 옥산(沃山) 김옥진, 시경(時耕) 박익준(朴益俊), 백포(白浦) 곽남배(郭南培) 등은

국전을 비롯한 여러 전람회에 거듭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성장하였다.

회화뿐 아니라 서예에 있어서도 소전(素筌) 손재형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영향을 받은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를 비롯한 많은 서예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진도 디지털 문화 대전 에서 옮김)

 

 

 

 

 

 

남종문인화의 대가 허백련 선생

 

의재 허백련 화백은 1891~1977 진도 출신으로 조선중기의 남종화가 소치/허련의 방손이다.

그는 허련의 아들 허형에게서 화필의 기본을 익히고 서울과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는데

1922년 제1회 조선미술 전람회에 전통 산수화를 출품하여 입상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1938년 이후 광주에 정착한 의재선생은 작품활동과 "연진회"를 통한 후진양성에 전념하여

1949년 부터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초대작가가 되었고 1955년 전남 문화상,

1962년 한국 문화훈장,1966년 대한민국 예술원상,197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을 수상하였고

197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우리나라 남종문화인의 마지막 대가 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선생은 시와 서예와 회화는 분리될수 없는 하나이고 ,

작품은 올바른 정신과 삶을 통하여 나온다고 생각했다. 활달하면서도 힘찬 필묵과 깊고도 맑은 동양사상,

부드러운 남도의 풍치와 시적인 흥취를 지닌 작품들은 문인이 지녀야할 삶의 태도를 고스란히 담아낸 그릇이다.

 

그리고 그 그릇속에는 우리 민족이 간직해야할 정서도 담겨있다.

그는 세간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 고아한 경지로 자신을 이끌었는데 ,

그런 그를 품어준 곳이 바로 무등산 자락 학운골이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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