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8. 08:41ㆍ산행기 & 국내여행
사진만 보자면 좀 싱겁지요?
그런데 제가 이 <청암사>나 <수도암>에 대해서 특별히 아는 바가 없어서 썰을 풀 것이 없습니다.
'다음 지식'에서 스님에 대한 일화 몇 개 베껴와봤습니다.
나중에 큰스님에 대한 것은 책 좀 더 읽어서 따로 장을 만들어볼 생각이 있습니다.
조선 500년을 거치며 불교는 ‘박제’가 됐다. 승려는 천민 신분이었다.
유생들이 사찰을 찾을 때면 승려는 가마를 메거나, 술 시중을 들어야 했다.
신라와 고려를 거쳐 내려오던 ‘선맥(禪脈)’도 가물가물해졌다.
일제 식민시대는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불교는 이름만 있을 뿐, 숨결을 찾긴 힘들었다.
그때 ‘한국 불교’에 불씨를 지핀 이가 경허 선사다.
그에겐 내로라하는 제자가 셋 있었다. 수월과 혜월, 그리고 만공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경허의 세 달’로 부른다.
수월은 멀리 북간도에서, 혜월은 남녘땅에서,
그리고 만공은 중간 지점인 수덕사를 중심으로 법을 펼쳤다.
공부하는 절 분위기가 역시 다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철야정진이 있다는군요.
경내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눈에 띄는 큼지막한 청기와 집이 이채롭습니다.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대선사의 맏상좌인 수월선사는 충청남도 홍성출신인데,
남의집 머슴살이 하다 나이서른에 서산 천장사로 출가하여 성원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글 가르침을 포기하고
땔나무 해오는 부목 공양주 소임을 3년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같은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때
부전스님이 천수대비를 송하고 있는데 442자의 난해한 글자들이 모두 외워지는것입니다.
이때부터 나무나 밥지을때 계속 염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땅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대비주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비주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비주를 외워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수대비주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비주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오고.....마침내 7일째 되는 날,
수월스님은 문을 박차고 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잠을 쫓았습니다.! 잠을!'"
이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중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중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지방 등에서 오고 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천수대비주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저런 경우를 실제로 봤습니다.
금산군 추부면 서대산에 《원흥사》라는 절이 있습니다.
스님은 바지사장으로 데려온 거라서 일년도 안돼서 바뀌곤 했고, 절 주인은 83세 된 할머니였습니다.
생긴 얼굴이나 목소리가 꼭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같았죠.
팔십 넘은 할머니가 뭘 알겠냐 싶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총무를 보시던 또 다른 할머니가 계셨는데, 그 할머니 무지하게 똑똑하셨습니다.
나이가 칠십 둘인가셨는데, 왜정때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셨답니다.
그런 학력인데도 주지(?) 할머니한테 꼼짝을 못했습니다. 설설 겼습니다.
한번은 할머니가 제 사주를 봐준다며서 들어오라고 하시더군요.
할머니가 젊었을때는 용하다고 금산군내에 소문이 짜르르했었답니다.
그래선지 많이 줄긴 했어도 여전히 쌀자루 짊어지고 오는 신도들이 많은 절입니다.
그런데 제게 난데 없이 삼국지에 나오는 '정욱'(조조 참모) 얘기를 꺼내는 겁니다.
삼국지 한 두번 읽어서는 하기가 쉽지 않은 얘기거든요.
아니, 할머니가 어떻게 '정욱'을 다 아시느냐고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옆에서 총무 할머니가 바로 위에 수월선사와 같은 얘기를 들려주는 겁니다.
할머니가 글도 못배운 일자무식꾼으로 어려서부터 절집에 들어와서 밥 짓는 일을 했었다는데,
나이 삼십인가 즈음에 갑자기 확 열리더랍니다.
그렇더라도 두꺼운 삼국지 책을 어떻게 다 읽었냐니깐, 그깟걸 뭐 읽고 자시고 하냐는 겁니다.
손바닥으로 그냥 책 뚜껑 한번만 스윽 문대면 다 알아진다면서요.
진짜로 글씨를 못 읽으시던 분입니다. 확실합니다.
믿어지지가 않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총맞아 죽기 얼마 전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황국화를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리는데, "곧 나라에 뭔가 변괴가 있을게야!" 그러시는 겁니다.
할머니가 박정희를 좋아하셨거든요.
뭔가가 짚이냐고 여쭸더니 천기누설은 하는 게 아니라며 말을 닫습디다.
바로 며칠 뒤에 박정희 죽었죠.
올단풍이겠지만 더러 단풍이 들었습니다.
열흘만 지나면 온 산이 다 물들게 생겼습니다.
금년엔 늦게까지 비가 와서 단풍이 고울 것 같지는 않은데...
하긴 요 근래에는 단풍이 곱게 든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대웅전에 석불을 모신 건 이번에 처음 보는 듯합니다.
친구 얘기를 들으니 더러 있다더군요.
'대적광전'이란 건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데라면서요?
화엄종의 법맥을 잇는 사찰에서 본전(本殿)으로 건립하며,
청정한 法身佛인 비로자나불은 항상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常寂光土)에서 설법한다고 한
〈화엄경〉에 근거한다는 뜻에서 화엄전(華嚴殿),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을 봉안하므로 비로전(毘盧殿)이라고도 한다.
원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보신불(報身佛)인 아미타불과
화신불(化身佛)인 석가모니불, 즉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함으로써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선종(禪宗)의 삼신설에 의해 비로자나불의 좌우에 노사나불(盧舍那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으며,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삼신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을 봉안하여 오불(五佛)을 봉안하기도 하는데,
이는 약사전(藥師殿)과 극락전(極樂殿)을 대적광전에서 함께 수용한 형태로
우리나라에서 중요하게 신봉되는 불·보살을 한 곳에 모아둔 셈이다.
아미타불의 좌우 협시보살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약사불의 협시보살로는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봉안한다.
후불탱화(後佛幀畵)로는 보통 법신탱·보신탱·화신탱 3폭을 각각 불상 뒤에 봉안하는데,
전각의 규모에 따라 1폭의 삼신탱(三身幀)을 봉안하기도 한다.
또한 대적광전의 위치가 대웅전과 대등할 경우에는
신중을 모신 신중단(神衆壇)과 영가를 모신 영단(靈壇)이 함께 마련되며
신중단에는 신중탱화를, 영단에는 감로탱화(甘露幀畵)를 봉안한다.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의 대적광전과 전라북도 완주군 위봉사의 보광명전 등이 대표적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약광전석불좌상과 삼층석탑은 보물로 지정되었을 겁니다.
보물급은 보면 티가 나지요. 균형미가 있습니다.
'국보' 와 '보물' 구별하는 법 아십니까?
한마디로 고즈녁한 절입니다.
청암사나 여기나 가을에도 물론 좋지만 봄에 오면 좋을 절입니다.
봄에 산나물이 많이 나오답니다.
친구가 꼬불꼬불 운전하고 와서 위치를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스키장이 있는 무주 설천면을 경유해서 갔습니다.
행정구역상만 김천시일 뿐이지 여기서 50분 거리나 된답니다.
입구를 막아놨습디다. 조사전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더군요.
예전에는 경허스님인가 효봉스님인가의 글씨가 있었다는데, 어디로 갔나 모르겠답니다. (친구)
산이 꽤 깊습니다. 여기가 해인사 뒷켠이라더군요.
그래선지 계곡에 물이 많은 편입니다.
보십시요, 이게 어디 암자 규모입니까?
청암사랑 비교해서도 어디가 큰 지를 모를 정도입니다.
절이 아주 푸근하게 느껴집니다.
가람의 배치나 건축 형태가 아주 정감이 가게 생겼습니다.
마땅히 찾아갈 절이 없는 분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절입니다.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제게는 여성적으로 느껴지더군요.
친구가 왜 이 절을 그토록 칭찬했는지를 알겠습니다.
내년 봄에 다시 와 볼 생각입니니다.
매월 첫째주 일요일 11시에 법문을 한다니까 거기에 맞춰서 와야겠습니다.
어제 날씨도 기막히게 좋았습니다.
가을 들어 첫 나들이를 아주 기분좋게 잘했습니다.
친구야 고맙데이~!
아, 수월선사 얘길 하다말았군요.
수월은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방아 찧어 스승과 절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글을 몰랐던 그는 경전 공부도 못하고, ‘천주다라니’만을 외워 삼매에 들었다.
누구고 가릴 것 없이 중생에게 베푼 그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게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 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메워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제 만공은 생전에 “수월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월은 늘 머슴처럼 일만 했지만 밤에 아랫마을에서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올 정도로 방광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조실로 모셔졌으나 누가 조실로 부르던 머슴으로 부르던 아랑곳없이
오직 머슴처럼 일만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숨곤 했다.
북녘을 유랑하던 수월은 1912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갔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은 젊은 시절 각기 따로 스승을 찾아 북간도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 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었다.
수월의 행적을 듣기 위해 예산 덕숭산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을 찾았다.
설정 스님은 “지금은 열반했지만 수월 선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지선 노스님’으로부터
‘수월 선사가 천장암 아래 갈산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진 ‘全’씨가 아닌 ‘田’씨이며 독자인데
아주 어려서 출가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또 수월의 행적을 좆아 1989년 중국을 답사했던 설정 스님은 “수월 선사가 살던 옛 간도의 고을에서
80~90살 든 노인들은 수월에 대해 자기는 없고 중생만을 위했던 자비의 화현보살로 기억하고 있었다”며
수월이 간도로 갔던 이유를 전했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지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따뜻한 물과 밥 한술을 먹이고,
신을 삼아 보내며 생애 마지막 수십 년을 헌신하다 그는 소리 없이 떠나갔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조용히 헌신하다 자취 없이 떠난 바람이었다. .
경허 선사의 맏상좌로 그 시대 가장 존경받은 선사였지만 그는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근대의 고승 중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만해 한용운이 발행하던 <불교>는 수월이 북간도에서 열반한 6개월 뒤에야 열린 추도식에 즈음해
‘전 조선을 통하여 현대의 유일한 대선지식이신 전수월 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보도해
그가 1928년 열반한 것은 확실시되지만, 그가 태어난 때는 확실치 않다.
경허보다 9살 적은 1855년생 설이 주로 전해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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