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3. 11:57ㆍ詩.
백합의 선물
언젠가 한 점쟁이가 내게 말했었죠.
당신은 전생에서 이생으로 내려올 적에 길가에 난 백합꽃을 꺾었어. 백합꽃 꺾은 죄로 이생에서 고생을 하는 거라구.
가끔씩 힘들 때마다, 내려오다 백합은 왜 꺾어 이 고생이누, 아니 하필이면 내가 내려오는 그 길에 백합은 왜 피어 있었누 라고 생각했지만, 그 참 이제 보니 그건 아름다운 상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니 상징이 아니라 어쩌면 필연이었다는.
하필이면 거기에 백합이 피어 있었던 것도, 어쩌면 필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고통들이 정화된 그 자리에 백합 한 송이 피어나, 이제 비로소 그 존재를, 그리고 용도를 내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내가 당신의 힘을 빌려 내 무수한 전생들, 그리고 이생에서 보냈던 모든 시간들을 폐지해버린 자리, 내 마음의 작은 빈터 안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꽃, 백합꽃을 선물로 놓아드릴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 한 송이 백합이 어느 날 넘실대는 환한 빛 덩어리로 풀려버릴 수 있길 바라면서.
- 최승자, (1999)
참 우습다
작년 어느 날 / 길 거리에 버려진 신문지에서 / 내 나이가 56이라는 것을 알고 / 나는 깜짝 놀랐다 /
나는 아파서 그냥 병과 놀고 있었는데 / 사람들은 내 나이만 세고 있었나 보다 /
그동안은 나는 늘 사십대였다 / 참 우습다 / 내가 57세라니 /
나는 아직 아이처럼 딸랑거릴 수 있고 / 소녀처럼 포르르 포르르 할 수 있는데 /
진짜 할머니 맹키로 흐르르 흐르르 해야 한다니 /
일찌기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자화상
나는 아무의 제자도 아니며 누구의 친구도 못 된다.
잡초나 늪 속에서 나쁜 꿈을 꾸는 어둠의 자손, 암시에 걸린 육신.
어머니 나는 어둠이에요.
그 옛날 아담과 이브가 풀섶에서 일어난 어느 아침부터 긴 몸뚱어리의 슬픔이예요.
누군지 모를 너를 위하여
내가 깊이 깊이 잠들었을 때,
나의 문을 가만히 두드려 주렴.
내가 꿈속에서 돌아누울 때,
내 가슴을 말없이 쓰다듬어 주렴.
그리고서 발가락부터 하나씩
나의 잠든 세포들을 깨워 주렴.
그러면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어째서 사교의 절차에선 허무의 냄새가 나는지,
어째서 문명의 사원 안엔 어두운 피의 회랑이 굽이치고 있는지
어째서 외곬의 금욕 속엔 쾌락이 도사리고 있는지,
나의 뿌리, 죽음으로부터 올라온
관능의 수액으로 너를 감싸 적시며
나 일어나
네게 가르쳐 줄게.
.
.
.
죽은 자들은 저승에 와서 자기에 대한 책, 일종의 자서전을 쓴다.
그걸 잘 써서 통과한 사람만이 니르바나에 든다.
저승사자는 저승의 도서관에 꽂힌 책들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이 책들은 니르바나에 간 사람들이 남긴 자서전이라오.
책 표지에 이름과 생몰연대가 쓰여있는 게 보일거요.
그러고보면 이 책이야말로 죽은 자의 묘비이고 영원한 집이자 존재 증명이랄 수 있지.
남은 사람들을 위한 참고 문헌이기도 하고 말이오.'
- 김이경 《순례자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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