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춘 박은옥

2009. 9. 29. 10:20음악/음악 이야기

 

 

5년 넘게 노래 만들기 침묵하는 가수

      -정태춘·박은옥 부부- 

                                                                                         

 
 
“내 노래는 사회적 발언, 대중과 대화 단절 느껴 접은 것”

“내 노래는 사회적 발언이었다. 이젠 접었다. 내 노래의 사회적 기능성은 다했다.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기도 싫고 싸우고 싶지도, 싸울 열정도 없다. 변화 속으로 진입하는 세상의 대열에서 나는 스스로 이탈했다. 새로운 문명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그것이 신자유주의, 신자본주의에 불복종하는 나의 방식이다.”

5년 넘게 침묵해 온 가수 정태춘(사진 오른쪽)이 침묵의 이유를 묻자 내놓은 답변이다.

지난 25일 서울 합정동에 있는 소속사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음악적 동반자이자 부인인 박은옥씨(왼쪽)도 함께였다. 오랫동안 공연 등 외부활동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들은 언론 인터뷰에 모처럼 응했다. 다음달 27일부터 서울 정동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리는 ‘정태춘·박은옥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은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두 시간 동안 털어놓았다.


 

 

-사회적 발언을 닫았다고 했는데 그동안 노래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까.

“음악회나 행사 초청공연은 다녔습니다. 그동안 침묵했다는 것은 노래를 쓰지 않았던 것이고 대중 콘서트를 통해 이전에 하던 방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던 것들을 접었다는 의미입니다. 엄밀히 말해 노래 만드는 것을 접은 것이지요. 세상이 변하면서 노래를 만들 이유를 찾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정태춘의 사회적 발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있겠지만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제가 활동할 공간으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너무 소수입니다. 대중은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몇 년 전 평택 대추리 사태와 관련해 교보문고와 보신각 옆에서 매일 거리공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철저히 무관심했고 저는 외면당했습니다. 현실이었지요. 새로운 세기의 대중, 당대의 공동 선(善)에 관해 아무런 관심도, 행동도 없는 대중 말입니다. 이 같은 대중을 만나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생산과 소비의 관계로 만나는 대중을 의미 있게 생각할 수 없었지요. 이제 문화는 산업화의 일부분일 뿐, 문화로서의 문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대중은 가수를 상품으로만 볼 뿐이고 그 이상으로 보지 않지요. 저 역시 그들의 취향을 배려한 상품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노래는 어떤 의미였습니까.

“초기엔 나를 발산하는 일기였다면 이후에는 사람들과의 대화였습니다. 그렇지만 대화상대를 잃어버렸습니다. 세상이 너무 다른 쪽으로 변해가면서 과거에 내가 만나던 대중이 변했습니다. 산업화의 천박한 변화 속에서 그 과실을 따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고 상황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도 있고…. 다들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커졌습니다. 저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사회 변화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대화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시대가 변하면서 계속 느껴왔지요. 2002년 공연 때인 것 같은데 그때도 제 방식으로 대중과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세상은 변했지만 이 가운데서 ‘어떤 공감대 형성이 가능할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니다 싶더군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대화가 아니라 그저 추억으로서의 제 노래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뒤 새 음반을 냈지만 판매도 잘 안 됐어요. 새로운 창작물 속에 내 이야기를 녹여냈는데 더 이상 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은가보다 하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한국사회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나 그동안의 운동이 해왔던 싸움들을 털어버려야 할 상황이 아닌데 이 모든 것들이 폐허가 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열정도 잃어버리게 됐습니다.”

부인 박은옥씨는 정씨가 노래를 더 이상 쓰지 않는 이유에 대해 거듭 말하는 것을 상당히 안타까워하면서 “완전히 포기하거나, 끝낸 것이 아니다”라는 부연 설명을 계속했다. “남편이기 전에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가진 동료가 스스로 곡을 쓰지 않고 닫아버린 것은 너무 안타깝고 아까웠죠. 왜 곡을 쓰지 않느냐고 계속 권유했어요. 분명히 정태춘씨에게 음악은 세상살이에 대한 소통이고 자기 속의 음악과 이야기는 더 넓어지고 깊어져서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합니다. 여전히 마음속으로는 소통하고 싶어하고 소수라 하더라도 관심 갖고 소통할 사람이 있다면 그런 활동은 해야 한다고 봐요.”

-이번 공연은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박씨가 먼저 답변했다. “원래 정태춘씨의 데뷔 30주년은 지난해였고 올해는 저의 데뷔 30주년이에요. 제가 한 번도 솔로 공연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공연을 할까 망설이는데 같이한다면 공연을 하겠느냐고 먼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도와주려고 했던 건데 어떻게 엮이게 된 거죠(웃음). 이번 공연은 그동안 우리 노래를 사랑하고 아껴준 분들에 대한 사은의 의미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간 어떤 생각을 했는지 보여드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부담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생동감도 느낍니다.”

-이번 공연이 새로운 음악인생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완전히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고 일시적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해두지요. 저는 이 공연을 통해 새로운 지형을 생각합니다. 과거 운동진영에서 대중과의 소통공간도 아니고 상업적으로 소비해줄 팬층을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의 문화소통 메커니즘 이외에 새로운 상상력과 방식이 시도될 수 있는 자리를 모색한다고 할까요. 그것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노래를 새로 만들 수도 있겠지요.”

-2004년 시집을 내셨는데 이후 꾸준히 시를 썼습니까.

“조만간 또 한 권 분량의 시를 낼 수 있을 만큼 썼습니다. 취미생활로 가죽공예도 했고 사진도 찍고 있지요.”

-시를 통해 80년대를 아름다운 시대, 90년대를 추한 시대로 규정했는데 지금은 어떤 시대입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난 지금 이 시대의 질서로부터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희망이 없다는 뜻입니까.

“단순히 이 시대가 어떻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으로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켜왔는데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지요. 그걸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제 생각은 인간 자체에 대해 가졌던 희망의 상당부분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인간이 그동안 성취하고 일궜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버리게 됐지요. 인간이 과연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거나 선하거나 지혜로운 종(種)일까 하는 질문에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고, 이 때문에 인류의 역사가 그다지 희망이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전에 발표한 시에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분노는 행동보다 더 컸습니다. 내 나름의 정의감이 있었지만 그만큼 행동하지는 못했어요. 겁쟁이였기 때문에. 더 당차게 할 수 있었는데…부끄럽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의 답변이 끝나자마자 박씨의 답변이 이어졌다. “본인이 혼자였다면 더 치열하게 살 수도 있었을 거예요. 처음엔 만류하고 싶기도 했고 불안한 생각도 있었지요. 가끔씩 원망도 됐고요. 그런데 정태춘씨가 아니었다면 저는 지극히 평범한, 내 행복만 추구하는 주부로 살았을 텐데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 대해 눈뜨고 볼 수 있게 된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박씨에게 물어봤다.

-정태춘이 없는 가수 박은옥의 존재감은 많이 약했습니다.

“왜 더 열정적으로 치열하게 살지 못했나 하는 아쉬움은 있어요. 정태춘씨의 노래로 첫 음반을 내면서 활동했고 결혼하다 보니 저는 동료이자 아내이면서 후원자로서 역할을 해왔던 것 같네요. 제가 정태춘씨만한 재능이 없다는 점은 100% 인정했기 때문에 동료로서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에게 힘을 보태주자는 뜻도 있었고요. 간간이 그런 재능이 부럽긴 했죠.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르 마음이 이해되거든요. 다음에 태어난다면 재능많은 음악인으로 태어나 더 열정을 갖고 치열하게 살고 싶어요.”

박씨의 말이 끝나자 질세라 옆에서 정씨가 “왜, 좀 더 열심히 했으면 됐지”라며 한마디 거들었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저항가수로 살아왔던 이들 부부의 일상생활도 궁금했다.

-평소 무슨 얘기를 나눕니까.

“부부끼리 밥먹고 차마시면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간의 탐욕이 어떤지 이런 주제로 대화하는 부부는 많지 않을 거예요. 저희는 딸 아이 하나를 두었는데 부녀가 밤새워 이야기할 때도 종종 있어요. 정말 아빠 성격을 많이 닮아 서로 잘 통해요. 저야 뭐 잔소리 많은 평범한 엄마죠.”(박은옥)


 
▲ 정태춘·박은옥은 누구

19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한 정태춘은 이듬해 MBC, TBC 등에서 신인가수상을 차지하며 대중가수로 화려한 생활을 시작했다.
박은옥은 79년 ‘회상’으로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80년 결혼한 이들은 이후 부부가수로 활동했다.
인생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서정적인 가사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들은 80년대 중반 들어 저항가수이자 문화운동 투사로 전면에 나섰다.
특히 90년 내놓은 음반 ‘아 대한민국’ 출반은 검열성 사전심의 철폐를 위해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건으로 문화사에 기록된다.


 
 
 

 

  글 박경은 · 사진 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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