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26. 13:05ㆍ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마피아-CIA에 대한 케네디의 반격
피그만 침공과 쿠바 위기 사태를 계기로 케네디는 '샘 지앙카나'와 '마이어 랜스키'로 상징되는 마피아-CIA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케네디는 먼저 자신과 한 마디 상의 없이 쿠바 침공을 시도한 CIA의 앨런 델레스 국장과 카벨을 해임한 데 이어,
CIA 조직의 축소와 쿠바 침공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으로 임명해 마피아를 비롯한 지하 범죄 조직과 전쟁을 선포한다.
이는 대선 과정에서 그를 도와준 마피아 보스 '샘 지앙카나'와 '마이어 랜스키'에 대한 배신이자 정면 도전을 의미했다.
실제로 샘 지앙카나의 딸 '앙투아네트'는2005년 출간된 ≪JFK와 샘:지앙카나와 케네디 암살 커넥션≫에서
1963년에 발생한 케네디 암살 사건은 자신의 부친이 부하들에게 시킨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케네디와 마피아 보스 '랜스키'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57년 뉴욕에서 헤로인 값이 1Kg당 1만 2000달러에서 2만 2000달러로 폭등하자
마피아는 미국과 시실리에서 대규모 컨벤션을 개최하고 국제적인 마약 거라 활성화를 위한 본격적인 투자에 들어갔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베트남이었다.
라스베이거스와 하바나의 대규모 호텔-카지노가 마약의 수요처라면,
내전으로 어지러운 베트남은 마약의 훌륭한 공급처였던 셈이다.
이를 위해 '랜스키'는 CIA가 베트남에 파견한 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아 마약을 생산하고 있었다.
미군의 이탈리아 상륙작전에서처럼 마피아-CIA 커넥션은 윈-윈 관계였다.
비밀 임무 수행을 위한 자금이 필요한 CIA 입장에서 마약 판매를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보다 안전한 비자금은 없고,
마피아 역시 CIA의 보호 아래 안심하고 마약 사업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랜스키'에게 쿠바의 카스트로와 같은 눈엣가시가 베트남에도 있었다.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이 그 주인공이었다.
'랜스키'는 CIA를 끌어들여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은 케네디의 전임자 아이젠하워가 퇴임하면서 경고한 군산복합체가 기대하던 바였다.
하지만 케네디는 다시 한 번 '랜스키'와 군산복합체를 실망시키고 만다.
1963년 8월, 베트남 대사를 해임하고 존 리처드슨 CIA 사이공 지국장을 경질한 그는
자신이 직접 고른 인물을 후임 대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어 9월에는 TV를 통해 베트남 내전은 베트남 스스로 해결할 문제라고 천명함으로써
내전 개입에 대한 반대 의지를 명확히 한 데 이어, 12월 1차로 베트남에서 1000명의 군사고문단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는 CIA와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취임 당시 4000명이던 군사 고문단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1만 5000명으로 늘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CIA도 다른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케네디의 고문단 철수 발언을 무력화하려는 CIA의 1차 시도는 베트남의 지도자 고딘디엠과 그의 동생 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혼란에 빠진 사이공에 베트공이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면서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1963년 11월 1일, CIA의 사주를 받은 베트남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날 고딘디엠과 그의 동생 뉴를 비롯해
일가족 전체를 학살한다.
그로 인해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고, 호치민이 대공세를 개시함으로써 베트남은 공산화 위기로 치닫는다.
하지만 쿠바 침공을 통해 CIA의 생리를 파악하고 있던 케네디는
예정대로 12월 말까지 1000명의 군사고문단 철수를 재확인한 데 이어,
향후 2년 안에 베트남의 군사고문단 전원을 철수시키겠다고 천명하기에 이른다.
(실제로 케네디가 암살되고 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한 이듬해 8월2일, 베트남 통킹만에서 작전 중이던
美 해군 구축함 매독스號가 북베트남 어뢰정 공격을 받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주변에 있던 항공모함 등이
즉각 반격에 나서 어뢰정 한 척을 격침하고 두 척을 손상입혔다고 주장했다. (......)
그에 따라 8월7일 美 의회가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통킹만 결의'를 통과시킨뒤 베트남 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통킹만 사건은 렘니쳐 합참의장이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제출한 '노스우즈' 계획안처럼 여론 조작을 위한
전형적인 CIA 군사작전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즈가 펜타곤의 방대한 베트남 비밀보고서인'펜타곤 문건'을 입수해 연재하면서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同書 p 123~124)
하지만 케네디가 미국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금융 엘리트를 격노케 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케네디는 아예 그들의 자금줄인 FRB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 것이다.
미국에서 화폐를 발행하려면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고 FRB에서 이를 인수해 화폐가 발행되는데,
이때 정부는 그에 대한 이자를 FRB에 지불해야 한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정부의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데,
케네디는 1963년 6월 4일 FRB의 화폐 발행권을 재무부로 이관할 것을 지시하는 '대통령 행정명령'에 사인한 것이다.
이는 FRB로부터 조폐 업무를 대출함으로써 금융 엘리트의 사슬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으로,
금융 엘리트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이 같은 정책은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미국의 어느 지도자도 시도하지 않은 혁명적인 화폐 개혁안이었다.
이밖에 미국 내 흑백 갈등 문제와 중국과 국교 정상화 등을 준비하던 케네디는
안타깝게도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갑작스런 죽음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
- 임종태. 『악마들의 거처, 바티칸』p113~118 -
이번에 북유럽 여행 갔을때 제 룸메이트인 宋 선생님에게 해드린 이야기입니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러시아로 넘어간 날 저녁입니다.
그 날, 러시아 국경에서 뭔 일이 있었는지 아시죠? ( 제 여행기를 참조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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