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와 투표율

2009. 7. 14. 12:03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한국 사회를 흔들어 놓았다. 압도적인 다수가 개인적·정치적인 슬픔과 열패감을 느꼈다. 처음의 충격이 옅어지면서 이제 남은 것은 그 슬픔이 긍정적인 효과로 전환될 것인지 여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있으며 위기에 직면해 있는가. 이 비극이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심화하고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이끌 수 있을 것인가.

그레고리 헨더슨은 1968년 <소용돌이의 한국 정치>라는 저작에서 이른바 ‘소용돌이’ 현상에 대해 기술한 바 있다. 여기서 소용돌이는 ‘대중 사회’의 동적인 요소들을 매우 불안정한 권력 정점까지 끌어올린 후 일소해버리는 상승 기류를 뜻한다. 한국전쟁의 전·후와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을 관찰하면서 헨더슨은 한국이 본래 불안정한 나라이며 한국인들은 감정적·비합리적이고 민주적 제도를 구축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봤다.

헨더슨은 자신이 관찰했던 ‘소용돌이’ 같은 정치 형태가 권위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일어났던 주기적인 대중 투쟁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권위주의 체제는 외세의 간섭으로 유지됐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외세들은 ‘위대한’ 민주주의 강국인 미국과 일본이었다).

압도적 다수가 정치적 열패감

민주주의는 오직 대중들의 항거가 최고조에 이를 때 진전될 수 있다. 그 과정은 무질서하다. 48년부터 92년까지 모든 정부가 시민 항쟁이나 군사 쿠데타를 통해 출범하거나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는 압제를 외부에서 지원하는 세력들의 힘을 증명하는 것이었지, 한국의 특성에 ‘소용돌이’라는 결함이 내재해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오랜 투쟁의 결과로 한국은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국가, 시민사회에 기반한 민주국가가 됐다. 그러나 만약 김대중이 옳다면, 이 성과는 겉보기보다 훨씬 불안정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민 주권은 자신들의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던 아테네 시민들의 주권과 같은 의미일 수는 없다. 하지만 민주국가의 주권은 선거철마다 몇몇 정당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 이상을 뜻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국에서 특히 노무현은 대중 동원의 에너지와 열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사회 운동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고, 집권 초기 시민과 정부를 연결하기 위해 ‘직접적’이고 전자적인 수단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고 너무 많은 시민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민주적 정부와 시민들 사이의 간격이 점차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현상이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체계가 대중의 민주적 통제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준다. 또 최근의 역사는 참전 결정을 비롯한 중요한 결정을 엘리트들이 독점하고 있으며 언론이 이 결정을 소급해서 정당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스스로 통치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김대중이 지적한 대로 적극적인 시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 일본, 한국의 예에서 보듯이 근대 민주정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시민들의 투표 불참 현상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투표 행위가 자신들과 관련된 일이라거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 만약 투표 불참자들이 하나의 정당이라면 그들은 주요 선거에서 모두 승리할 것이다.

미국의 2008년 대통령선거 투표율은 56.8%로 40년 만에 가장 높았다. 이는 10명 중 4명 이상이 투표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간선거의 경우 이 수치는 거의 3명 중 2명에 달한다. 선거 연령대에 속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이 없다. 이들 중 250만명 이상은 수감자들이다. 미국이 전 세계 평균보다 5배 많은 수의 사람들을 수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도 투표율은 여전히 낮고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버락 오바마가 전체 투표수의 53%를 얻었기 때문에 그의 승리는 전체 유권자 중 약 32%의 지지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래의 다른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소수당’의 대통령이다.

영국의 최근 선거 투표율은 미국보다 높긴 했지만 그래도 60% 정도에 불과했다. 노동당은 97년 43%, 2001년 41%, 2005년 35%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5년 총선에서 전체 유권자의 21%만이 노동당을 지지했다는 뜻이다.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노동당은 미국 민주당 행정부보다 더 작은 소수당인 것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으로 평가되는 승리를 거뒀다. 고이즈미의 카리스마가 우정 민영화와 ‘개혁’ 등을 주장하며 불러일으킨 흥분이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유권자들을 투표하러 가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32.5%의 유권자는 투표에 불참했다. 전체 투표수 가운데 38%를 획득하면서 고이즈미는 전체 유권자 25.6%의 지지로 당선됐다.

2007년 12월 한국에서 이명박의 한나라당이 얻은 ‘압도적인’ 승리는 이명박이 전체 투표수의 49%를 획득했으며 2위 후보보다 500만표를 더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투표율은 62.9%로,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가 40%에 달했다. 2002년에 투표했던 200만명 이상이 2007년엔 불참했다. 높은 불참률 때문에 이명박이 ‘압승’으로 얻은 총득표수는 노무현이 5년 전 누렸던 득표수보다 50만표 정도 적다.

그 슬픔, 긍정적 효과로 전환되나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아직까지 상당한 대중적 지지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 한국 중에 대중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정부가 있는 국가는 없다. 누구도 이들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데 의문을 제기하지 않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이명박의 지지 기반은 극적으로 침식되고 있지만 그는 남은 4년간 임기를 보장받는다. 영국과 일본, 한국은 말로는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실제 정신은 그렇지 않은 셈이다.

이들 모든 국가에서 투표는 자발적인 행위다. 이와 대조적으로 호주와 30여개 국가에선 1924년 이래 투표가 의무다. 시민들은 투표해야 하며 현재 투표 참여율은 95% 정도다. 필자와 같은 영국 시민들을 포함하는, 비(非) 호주시민을 위한 범주도 따로 있다. 이들은 투표해야 하며 만약 정당한 이유 없이 투표하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 한다. 이런 제도에 반대하는 주장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이 같은 사실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권자가 누리는 특권은 민주적 절차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를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개혁은 그 자체로는 의미있는 민주 주권에 대한 한국의 탐색에 해결책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탐색 과정에 더 잘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전제조건은 될 수 있다. 만약 그런 제도가 적소에서 운영되고 있었다면 현재 한국이 경험하고 있는 고통과 소동을 일부라도 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Democracy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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