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16. 11:24ㆍ산행기 & 국내여행
오르막을 감안하면 여기 상황봉이 반쯤 온 것이다.
갈 길이 멀다. 봉우리 세 개를 더 넘어야 한다.
백운봉 / 업진봉 / 숙승봉
퍈한 능선이 오르막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상황봉보다 해발이 낮다는 걸로 위로하니 꾸역꾸역 넘어가진다..
여기 林道에서 헷깔리지 말고 직진하라고 신신당부하더라.
그럴 일이 없다. 외줄기 길이다.
아래로 수목원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다.
전망이고 뭐고 어찌나 바람이 부는지 날아갈 것만 같더라.
거기다 또 웬 바람이 그렇게 찬지 볼테기가 다 에릴 정도다.
등산을 시작하면서 잠바를 벗고놓고 갈까말까 꽤 망설였는데 된통 고생할뻔했다.
봐라. 이 정도다.
동백나무 군락인데, 100여 미터쯤...... 아직 본격적으로 개화하지 않았다.
한 달전 통영에선 활짝 폈던데, 동백도 수종이 여러가진가?
세번째 만난 백운봉이다.
상황봉도 마찬가지지만 내려다보면 아찔하다.
절벽이 100m도 넘게 생겼다.
"아줌만 얼루 가우?"
"상황봉 가예".
"아줌만 이제 죽었수."
"아이씬 어데 가는데예?"
"숙승봉 가우."
"댁에도 산 목숨 아니라예!"
여기 업진봉에서 숙승봉이 빤히 보인다. 꼭 마이산 암마이峰처럼 생겼다.
저길 설마 오르랴 싶은데, 꼬물꼬물한 게 보인다. 로프 타는 사람들인가?
얼음 녹은 지가 얼마 안되어서인지 길이 많이 질척거리고 미끄럽다.
드디어 숙승봉에 도착했다.
올라가는 길이 뒷쪽으로 나있더라.
가파르긴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
어휴-,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다들 1분도 못 버티고들 내려간다.
조망이구 뭐구 잠시 잠깐도 머물만한 여건이 아니다.
다행히 하신길은 멀지 않더라. 30분이 채 안 걸렸다.
이 때가 4시반 정도 됐을텐데, 벌써 숲속은 어둑해진다.
「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흙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가끔씩 죽는 꿈을 꾼다.
꿈에 내가 죽었다.
죽어서 병풍 뒤로 실려갔다. 병풍 뒤는 어두웠다.
칠성판 위에 누웠다.
병풍 너머에는 나를 문상 온 벗들이 모여서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서 떠드는 이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취한 벗들은 병풍 너머에서 마구 떠들었다.
내가 살았을 때 저지른 여러 악행이며, 주책이며, 치정을 그들은 아름답게 윤색해서 안주거리로 삼고 있었다.
취한 벗들은 정치며, 문학이며, 영화며, 물가를 이야기 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련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술집이며, 이발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내 귀에는 취한 벗들의 떠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저 한심한 자식들, 아직도 살아서 저런 헛소리들을 나불거리고 있구나.
이 자식들아, 너희들하고 이제는 절교다.
아, 다시는 저것들하고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나는 그렇게 적막하게 갈란다.
병풍 뒤 칠성판 위에 누워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은 자의 위엄과 죽은 자의 우월감으로 처연했고 내 적막한 자리 위에서 아늑했으며,
병풍 너머의 술판에 끼고 싶은 생각은 아예 없었다.
나는 미소 지으며 누워 있었다.
그러니 그때 나는 덜 죽은 것이었다.」
- 김훈의 『자전거 여행』.
전라도도 그렇고, 제주도도 그렇고,
묘를 쓸 때 봉분에 용미(龍尾)를 안 만드니까 꼭 바가지 폭 씌워논 거 같다.
왤까?
저기도 둘러보고 싶긴한데, 그랬다간 뒤풀이 다 끝날 것 같아서.......
"아니,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자 그럼, 출발~~ !!!"
"저어... 뒷풀이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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