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5. 12:28ㆍ이런 저런 내 얘기들/네 얘기 · 쟤 얘기
역사의 질곡을 몸에 새기며 산다.
유명한 지사가 떠오르는가. 나는 나의 셋째 형을 떠올린다.
형은 농부 또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참 고생스럽게 살았다.
위로 둘씩이나 중 고등학교를 다니는데 자신은 그렇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벌이로는 셋째의 학비까지는 댈 수 없었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 야간 중학교를 다녔으나 그나마 끝내지 못하였다.
그 후 월남전에 참전하였다. 용병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그 후 2차례나 사우디로 가서 값 싼 노동력으로 혹사당하였다.
형은 역사의 질곡을 피하지 못하였다. 몸에 새기면서 살았던 민초였다.
이와는 다른 대극점에 선 사람도 있다.
백낙청(白樂晴, 1938.1.10~)의 아버지는 6.25 때 납북되었다.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유년기에 아버지의 납북과 고향 상실이라는 가족사적 배경으로 분단의 고통을 일찍부터 체험하였다.
이 체험은 뒷날 민족문학, 분단극복 문학의 정서적 바탕이 되었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에서 영문과 교수로 역임하였다.
창비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분단의 고착화에 반대하였다.
친일파들이 짓밟는 민주주의의 싹을 지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형과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의 질곡을 몸에 새기고 살았다.
그는 민초가 아니라 선비였다.
나는 그의 삶을 가치 있는 삶의 한 전형으로 여긴다.
이문열은 백낙청과 달랐다.
그의 아버지도 북에 있었다.
납북되었는지 자진 월북인지는 모른다. 분단 고착 세력들에게 이용당하였다.
시대와의 불화라 하였으나 비겁한 자의 변명에 불과하였다.
이용 당한 자는 이용 가치가 없을 때 안다. 토사구팽 당하였음을. 끈 떨어진 연이 되어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을.
분단 극복의 역사 속에 그의 존재감은 없다.
바른 눈을 가진 이들은 그를 외면한다.
친일파들이 걷는 길을 자진해서 걸어가는 그를 왜 쳐다 보겠는가.
백낙청의 대극점에서 이문열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무척 많다.
일제강점기에 혜택을 누린 집안의 후손인 덕으로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는 이장무가 그러하다.
이들에게도 일제강점기와 6.25.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의 시기를 살았으나 역사의 격랑은 그들과 무관하게 흘렀다.
이들을 두고 역사의 질곡을 몸에 새겼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소경을 쓴 굴원은 동시대인의 조롱을 받았다.
강물이 맑으면 갓 끈을 씻고 강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라는 충고를 어부에게서 듣는다.
그러나 그는 한 줄기 맑은 풀을 찾아 차이나 천하를 헤맨다.
풀, 바로 향기나는 풀, 난(蘭)이나 혜(蕙)를 찾아 헤맨다. 군자의 덕을 상징한다.
그는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개죽음이라 하지 않는다.
역사와 일체화된 삶이었다. 더 쉽게 말하면 백낙청 같은 삶이었다.
부정의 역사에 저항하고 긍정의 역사로 끌어가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는 역사의 난(蘭)이 되었다.
대원군이나 추사가 왜 난을 가꾸면서 난을 그렸는지 아는 이 드물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이소경을 외웠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 굴원의 이소경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어떤 댓글에 답글로 쓴 글이다.
그래서 원색적으로 싣는다. 댓글은 글쓰기의 새로운 문화이므로.
풍상 2009/03/04 18:12
도올에 대한 다른 견해을 가진 것은 좋은데
도올처럼 원고지 만장이나 되는 분량의 논어역주를 세상에 한번 내놓으시고 큰소리 쳐보시는건 어떠한지...
왜...하이에나처럼 이놈 저놈 달려들어 비판하고 씹어댈까 두려우신가요?
다른 사람이 쓴 방대한 책의 몇 몇 부분만 뽑아 비판하고 딴죽거는 것은 무척 쉽습니다.
내정도만해도 니체나 하이데거의 책을 보고 어줍쟎은 비판을 제법 폼잡고 늘어놓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비판하는 것과 직접 방대한 양의 책을 써서 내놓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
염치는 갖고 삽니다. 좀더 자성하시길...
고들빼기 2009/03/05 00:47
도올은 읽을 필요조차 없는 책인데 내가 왜 읽나.
그의 책은 그의 삶처럼 겉돈다. 그 누구도 인용하지 않는 책이라는 말이다.
물론 자네 같은 아마추어는 즐겨 읽겠지. 그러나 강단의 학자들은 들추지도 않는다.
김홍신의 <인간시장>이란 통속 소설을 누구도 인용하지 않는 것과 같은 얘기지.
요즘 와서는 이문열의 책도 누구도 인용하지 않지. 조중동을 제외하고는.
왜인지 생각해 보게.
지적담론에 포함되지 못할 정도로 저질이거나 시대와의 불화 또는 시대와 따로 놀기 때문이지.
도올은 둘 다에 모두 포함된다.
이문열의 소설 이제는 안 팔린다.
시장에서 거의 사라진 수준이다.
이승에서 빛 본 사람 저승에서 피 보게 돼 있다. 역사 앞에서 비겁하게 겉돌았기 때문이다.
박종화, 길고 재미 없는 소설 쓴 사람이지.
마찬가지네 이사람아.
도올의 책 10년만 지나 봐라. 아무도 안 본다.
역사를 세탁하면서 편하게 산 자의 인과응보지.
그가 시끄럽게 떠들고 기행을 일삼았던 이유가 무얼까.
내 눈에는 책 파는데 일조를 하는 것 같네.
무의미한 소란이네. 세상을 오래 속이지는 못하게 되어 있어.
나 논어 20번 가르쳤어. 그는 나처럼 논어 못 가르치지.
아무도 없는 무대, 박수소리도 관중도 없는 무대에서 울먹이면서 혼자라도 읽겠다는 마음 가짐이 그에게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야.
무대? 원래부터 공부는 무대에서 할 수 없는 것이지.
또 자네는 내가 도올과 같은 책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도올의 논어가 원고지 1만 장이나 된다고 앞으로 쓸 수는 있겠지만 지금까지 쓴 것은 약 4000매쯤 되겠더라.
나는 원고지 1만 5000매 가량 쓴 사람이고, 내 책은 학계에서 인용이 되는 책이지.
또 나는 도올의 말 중에서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했는데 자네는 왜 피상적인 말을 늘어놓나.
도올의 삶을 말해 주마.
매천 황현은 경술국치의 치욕을 당하여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을 하였다. 바로 역사와 인간 삶의 일치야.
도올은 만석꾼의 아들인지 손자로 태어나
그의 형은 고려대 교수이고 누나는 이화여대 총장이니 세속적 성공을 거둔 가문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일제강점기, 광복의 혼란, 6.25라는 동족상잔, 박정희 독재의 어두운 터널을 거치는 중에
대만, 일본,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를 한 그야말로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족처럼 살았어.
도올 가문처럼 저렇게 병화와 가난을 피하여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세상과 유리된 채 겉도는 거다. 그의 책까지도 겉도는 거다.
노자 강의 할 때 그 모습은 달나라에서 온 광인의 모습이었다.
도올 집안은 친일파 가족의 전형적 삶이니 자신을 우리나라의 질박한 고난의 역사에 놓을 수가 없는 것이지.
그러므로 그가 애국지사를 말해도 공허하고 그가 환경운동을 말해도 울림이 적은 거야.
친일파 가족이 아니라고 하겠지만 독립운동과는 무관하였으므로 상대적 혜택을 받은 집안이야.
자신도 광복 후의 혼란과 박정희의 독재를 경험했다고 하겠지
그러나 역사로 인한 고난은 역사와 궤를 같이 했다고 하지만
남들이 고생할 때 호의호식한 것을 역사와의 일체라고 말하지 않아.
나의 형처럼 월남전에 쫄따구로 가기, 사우디에 가서 땀 흘리고 돈 벌기와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야.
공부하고 와서 입 바른 소리 하다가 투옥되는 것과는 또 다른 삶이지.
바른 말을 소리 높이 외치게 되면 세상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고 말지.
그런데 아무런 탈이 없어. 왜인가. 역사와 사회가 만나는 핵심 지점과 피했기 때문이지.
나는 이런 식의 말로 남을 공격하는 거 싫어한다만 자네가 나에게 이런 말을 꺼내게 한 거다.
앞으로는 학술적인 논쟁 구체적인 논쟁이 아니면 말하지 말게나.
나는 내 말에 화가 나.
6.25가 동족상잔일까. 민족 학살의 장본인들이 책임을 외부로 떠넘기려는 수작이 아닐까.
6.25는 미국인이 저지른 한민족 학살전이었지. 이걸 왜 동족상잔이라고 해.
자네 <논어>에 正名論 아나. 공자의 말이 아니라 후대 법가들이 논어에 끼워 넣은 거라고도 하지.
하여간 名과 實이 다르면 무언가 치받치는 거야.
글쓴이 송명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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