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7. 14:19ㆍ책 · 펌글 · 자료/정치·경제·사회·인류·
독재정권의 지배와 내전이 끝나자 해당 국가와 국민들은 기로에 섰다.
최근까지 역사의 일부였던 무수한 피해자들, 암매장된 시신들과 아직도 만연한 공포 분위기,
사실이면서도 공식적으로는 부인된 사실들을 어찌할 것인가?
극심한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상처들이 아직 아물지 못해 생생히 입을 벌리고 있는데,
어제까지 적이었다가 화해했다고 해서 어떻게 그 적들과 더불어 하나로 뭉칠 수 있단 말인가?
멀쩡히 대로를 활보하는 수백, 수천의 가해자를 어찌할 것인가?
그 같은 일이 미래에 또다시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새 정부는 어찌해야하는가?
개개인의 생존자들은 직접 목격한 고문이나 대량학살의 끔찍한 기억을 달래면서
산산조각 난 삶을 어떻게든 꿰맞추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총체적 존재로서의 사회는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고, 평화를 회복해 살만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적들이 어떤 형태로든 서로 화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그 사건들을 과거사로 갈무리해야만 한다.
과거 범죄에 대응함에 있어 국가는 여러 가지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있다.
예컨대 가해자들을 응징하고, 진실을 확인하고, 피해를 배상하고, 희생자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추후에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 등이다.
그 외에도 과거에 대한 길등을 해소하여 국민 화합을 증진하고,
새로 출범한 정부가 인권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높은지 강조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다음의 목표들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경우도 많다.
즉, 범죄자들을 자국 내에서 혹은 국제적으로 법정 심판대에 세우고,
범죄자들을 공직 혹은 보안 관련 직장에서 축출하고,
조사위원회를 만들고, 비밀문서에 개인들이 접근할 수 있게 허용하고,
피해자 배상과 기념비나 위령합건립, 군대와 경찰, 사법부의 구조를 포함한 각종 제도를 개혁하는 것 등이다.
재판에 의한 정의가 최우선시되며, 제일 분명한 요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과거 정권하에서 자행된 악랄한 범죄에 대해 책임을 가진 자들을 법적으로 처리하려는 시도는 수도 없이 있었으나
성공한 예는 이제까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를테면 엘살바도르, 남아공, 칠레에서처럼 정권 교치기의 정치 타협 때문인데,
이 타협은 과거의 압제자들을 처단하지 않겠다는 면책 약속을 어떤 형태로든 포함한다.
심지어는 그들의 권력을 일부 보존해주거나, 새 정부에 구권력층 인사들을 기용하기조차 한다.
독재자나 그 밖의 가해자들은 자기들의 정권 지배가 끝나는 시점이 되면
본인들이 저지른 범행에 대한 책임을 감량시킬 방도를 강구하기 마련이다.
새로운 집권층(그중에는 과거 정권에 적극 저항했던 사람, 반대 활동으로 인해 구금과 고문을 당했던 사람도 있을 수 있다.)이
최선을 다하고자 하고, 또 피해자나 인권운동가들이 큰 목소리로 정의를 외치지만,
그럼에도 민주화 과도기에 과거에 대한 정의가 구현된 적은 거의 없다.
재판이 열린다 해도 몇 차례에 불과하고,
때로는 죄가 있음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자에게조차 유죄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위시하여 필자가 직접 방문한 나라들에서는 극소수만이 처벌되었다.
그리하여 재판부의 무능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힘겨운 몸부림이 전개되고 있었다.
독재정치 혹은 억압정권이 끝난 뒤, 대체로 사법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재판관들은 정치적으로 타협하거나 부패해 겁쟁이처럼 뒤로 빠져 있기 일쑤다.
전문성이나 자질이 떨어지는 경우도 흔하다.
드문 일이지만 혹여 재판부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해 정당하게 재판을 진행하고, 사면을 승인하지 않는 분위기일지라도,
가해자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보니 실제 처벌은 전체 대상자에 비해 아주 적은 수에 불과할 것이다.
- 위 책에서 일부 발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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