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사 / 부르사 // 파묵칼레 // 에페소 셀수스 도서관

2023. 10. 4. 13:52튀르키에 (2023)

 

마니사, 부르사는 저도 이번에 처음 가보는 동부 해안 도시입니다.

부르사는 오스만터키의 첫번째 도읍지라네요. 큰 도시입니다. 네번째로?

튀르키예는 대부분이 숲이 없어 황량한데, 

이쪽 남동부쪽으로는 산에 숲이 제법 우거졌어요.

 

 


1. 부르사

 

 

 

 

 

 

 

 

오스만제국을 건설한 시조, 오스만 가자의 무덤과 그의 아들인  2대 황제의 무덤.

부르사 ─ 오스만제국의 첫번째 도읍지.

 

 

 

 

 

 

 

 

 

 

 

 

 

 개요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남동유럽 세 대륙에 걸쳐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며 유럽을 위협하던 국가이다.

1299년 아나톨리아 내륙의 오스만 가지( Osmān Gāzi)라는 베이(Bey, 부족장)가 다스리던 작은 나라에서 시작하였으며, 정복전쟁을 통해 룸 셀주크 멸망 이후 난립했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성장, 아나톨리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마침내 1453년에는 건국 이래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을 정복하며 교통과 무역의 요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 수도로 삼고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북으로는 러시아 폴란드, 서로는 오스트리아 모로코, 남으로는 에티오피아, 동으로는 이란과 접하는, 전 세계적 영향력을 미치는 강력한 패권국가가 되었다.

후대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은 보수적 성격으로 인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한 데다가 무능한 술탄들이 연이어 배출되고 근위대인 예니체리의 전횡이 심해지면서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특히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전파가 늦어진 탓에 영토를 하나하나 잃으며 위세가 수축되다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동맹국의 일원이 되는 악수를 두고 협상국에 패배하였다.[25] 이후, 내부 소수민족 대다수가 독립하고, 그리스에게 국가의 발상지인 아나톨리아의 해안가까지 점령당하며 강대국들의 뜻에 의해 갈라지었다. 튀르크 전체가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할 뻔했으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휘 아래 기사회생하여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족의 국민 국가, 튀르키예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1922년 11월 1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오스만 제국의 백성들 가운데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종교는 이슬람이었다. 셀림 1세 칼리파 직위를 물려받은 시점부터 이슬람이 제국의 국교로서 확고하게 굳혀졌지만, 밀레트 제도에 의해 다른 종교 및 그들의 종교법 또한 존중했으며, 압뒬하미트 2세 시절에 미트하트 파샤가 주도한 '1876년 헌법'(1876 kanun-ı esasi)에서 이슬람을 제국의 국교로 삼았음을 늦게나마 규정했다.
 

국명

오스만 제국이라는 이름은 제국의 황가인 오스만 가문에서 따 온 것이며, 오스만 가문은 제국의 초대 군주인 오스만 가지(عثمان غازى, Osman Gazi)의 이름에서 딴 것이다. 영어권에서는 중세 라틴어식 표현인 오토마누스(Ottomanus)에서 유래한 오토만(Ottoman)이라고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오스만 제국,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으로 부르며, 과거에는 오스만 터키라고 하기도 했다. 튀르키예어 발음으로는 투르크가 아니라 튀르크이기 때문에 오스만 튀르크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다만 학술적으로는 오스만 투르크나 오스만 튀르크 둘 다 잘못된 표현이며, 오스만 제국이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튀르크가 민족 정체성을 뜻하게 된 것은 오스만 제국 말기의 민족주의 물결에 따른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강성하던 시절에는 신민들을 종교에 따라 나누어 다스렸을 뿐, 민족 정체성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 말기가 되자 유럽에 불던 내셔널리즘 열풍의 영향을 받은 신민들이 민족 의식을 형성하고 단일 민족 독립 국가 건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이런 독립운동들이 성공하면서 제국의 다민족국가적 특성은 점점 약해졌고, 거기에 더해 제국의 국력 자체가 쇠퇴하여 많은 영토를 유럽 열강에 빼앗기면서 제국 내에서 '수니파 이슬람을 믿고 오스만어(튀르키예어)를 쓰는 아나톨리아 출신 사람들'의 인구 비중이 전례 없이 커지게 되었다. 이 지역 패권국가로서의 선배 격인 동로마제국이 쪼그라들면서 안 그래도 높던 제국 내 정교도 그리스어 사용자의 상대적 비중이 더욱 올라가서, 말기에는 사실상 그리스 민족국가나 마찬가지가 된 것과 놀라울 정도로 거의 같은 현상이다. 여하튼 이들을 가리키기 위한 표현으로 재발견된 말이 바로 튀르크이다. 이후 튀르크 민족주의가 제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게 되고, 그 거두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오스만 제국을 멸망시키고 튀르크 민족국가를 표방한 튀르키예 공화국을 건국하면서 튀르크 민족이라는 개념이 완성되었다.

오스만 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신민들을 가리킬 때 쓴 말은 오스만인(Osmanlı)이었다. 이 말은 오스만 제국이 소규모 군장국가이던 시절 오스만 가문의 추종자들을 의미하던 말인데, 제국이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중앙 정부의 관리나 군인 등 제국 지배층과 식자층을 주로 가르키는 말이 되었다. 바예지드 1세 룸 셀주크에서 분열된 국가들을 정복하고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과정에서 룸 술탄(رُّومُ سلطان)을,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고 룸 카이사르(قیصر روم,‎ Kaysar-i Rûm)를 자칭하면서, 오스만 제국 전기에는 ‘로마국(مَمْلَكَةت رُّومُ, Memleket-i Rûm, دیارت رُّومُ, Diyâr-i Rûm, اقليمت رُّومُ iklîm-i Rûm)라는 국호도 사용되었으며, 부유하고 인구밀도가 높아 오스만 제국의 핵심 지역이었던 동로마 고지의 그리스 북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 지역의 지배층과 식자층에게 로마는 자신들의 문명, 문화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했다.[27] 그들은 또 로마 지방(동로마 고지)에 산다는 의미에서 로마인(Rûmi)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로마 계승 의식과 로마인이라는 표현은 바예지드 2세 쉴레이만 1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각각 쇠퇴하고 점차 제국 내의 그리스 정교회 신민들을 가리키는 쪽으로 의미가 굳어 그리스 독립 이후에는 확실하게 후자로 의미가 고착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흐메트 1세 메흐메트 4세는 종종 로마의 황제[28]를 자칭했다. 오스만인들에게 있어 사파비 제국을 비롯한 동쪽의 외국(عجم, Acam)과 대비되는 내지는 로마(Rûmi)였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 바깥의 다른 튀르크계 국가나 민족들 역시 오스만 제국을 오스만, 아나톨리아, 룸(Ruhm, Rum) 등으로 불렀다. 제국 말기에 튀르크 민족주의가 득세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은 튀르크라는 정체성이 없었고,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민족들도 범튀르크주의와 투란주의가 유입되기 전까지 오스만인들을 튀르크로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튀르크 민족의 이런 상세한 사정에 대해 잘 몰랐고, 오스만 제국 사람들을 전부 '튀르크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 당대에도 정식 국호인 오스만을 잘 쓰지 않고 그냥 튀르크 제국(Imperium Turcicum, Imperium Turcarum), 터키(Turchia) 등을 훨씬 많이 썼다. 오스만 투르크라는 표현은 이런 역사적 배경에 무지한 사람들이 기존의 관습적 표현인 튀르크에 원래 국호인 오스만을 덧붙여 만든 잘못된 이름이다.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 이전엔 그냥 투르크나 터키라고 불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이 들어서자 오늘날 터키(튀르키예 공화국)가 아닌 옛날 터키(오스만 제국)를 가리키기 위해 투르크, 터키 앞에 오스만을 덧붙인 것이다. 21세기 들어 용어를 엄밀하게 따지는 학술용어로서 이제 거의 쓰이지 않지만, 일반인들의 글에서는 한국이든 서구권이든 오래된 습관이 잘 바뀌지 않아서 아직까지 오스만 투르크(Ottoman Turks)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고 있다.

 

국력

 
역대 이슬람 제국[30][31] 가운데 매우 강대한 제국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번 마음먹고 군대를 보냈다 하면 전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을 정도로 강력한 제국이었다.
  • 중동 제국들 가운데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제국 페르시아, 오스만 제국밖에 없다. 다른 중동 제국들은 많이 동원해 봐야 10만 명 미만이었다.
  • 영토의 크기를 기준으로 보면 우마이야 제국보다는 훨씬 적었다. 오스만 제국의 경우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아나톨리아 그리스를 차지하고 동유럽까지 영향력을 끼치기는 하였으나 우마이야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알 안달루스)와 페르시아까지 정복했었다.
  • 그런데도 오스만 제국이 우마이야 제국보다 더 강한, 역대 이슬람 제국 가운데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는 까닭은,
    • 우마이야 제국보다 영토 전반에 대한 장악력과 동원력이 더 높았다. 이는 그만큼 오스만 제국의 관료 제도가 매우 효율적이고 잘 짜여졌다는 뜻이다.[32]
    • 동로마 제국, 하자르 칸국 프랑크 왕국에 틀어막혀 유럽 중심부와 동유럽, 발칸 반도에 대한 공세가 좌절된 우마이야 제국에 비해 대항해시대 르네상스 시대 세계에 대한 자신감이 팽배했던 근세 유럽의 영역에 끊임없이 공세를 가함으로써 이후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유럽 국가들의 입장에서 '더 무서운 적'이었다.
    • 이와 관련하여 후대에 들어와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열강들 가운데 약체화 된 18~19세기 이후에는, 유럽 식민 제국주의가 나머지 비서방세계를 비교적 일방적으로 침략, 정복할 만한 절대적 군사 우위를 누리기 시작했기에 '서구 문명을 위협한 최후의 동방/비서구 제국'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 당부분 유럽 중심의 관점이고 결과론적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어쨌건 우마이야 제국은 백 년도 못 가고 망한 반면 오스만 제국은 당장 현대 폴란드-우크라이나 변경 지대 포돌리아 아제르바이잔 같은 제국의 끝자락이요 국경지대 각축장을 제외하고는 한 번 점령한 지방은 백 년은 넘게 장기적으로 통치하는데 성공했다. 확장의 한계점 끝자락이자 최전방 전선이었던 헝가리만 하더라도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승전하고부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50년 이상 영유했고,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같은 유럽 내 핵심 지방들은 14-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거진 4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통치했다.
  • 다만 존속기간은 오스만이 훨씬 길었어도 오늘날 중동으로 분류되는 지역 전체를 통일하는 것에 보다 근접했던 것은 분명 우마이야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최강대국이었긴 하지만 최초의 세계제국의 후예인 페르시아만큼은 끝까지 정복하지 못했고, 비록 대부분의 기간을 오스만이 우세를 점하긴 했지만 페르시아 또한 정복되지도, 패권에 순종하지도 않은 채 끝까지 오스만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는 2인자로 남았다. 또한 북아프리카 역시 모로코의 끈질긴 저항 때문에 결국 오스만이 정복을 포기하며 북아프리카 전체 정복을 이뤄내지 못했다. 반면에 우마이야 제국과 페르시아 제국은 당대 중동 세계에서 2인자 혹은 라이벌이라 부를만한 국가 자체가 없었던 말 그대로 온리 원이었다. 유럽세계에 얼마나 더 위협이 됐는가에 대해서도 오스만과 우마이야의 시대에 유럽의 강국, 중심지가 각각 달랐기 때문에 함부로 속단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동로마를 멸망시키고 발칸 반도 정복에 성공한 것은 분명 오스만이지만, 오스만 제국 시대의 동로마는 수많은 풍파를 거치며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작고 쇠약해진 상태였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마이야가 오스만이 못한 스페인 정복을 해냈지만 우마이야 시대의 서고트 왕국과 오스만 시대의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는 같은 스페인이라도 넘사벽의 국력차가 존재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또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도 빼놓을 수 없는데 우마이야와 오스만은 시야를 중동 밖으로 넓히면 동시대에 각각 당나라, 그리고 스페인 제국/명나라가 존재하는데 페르시아의 경우 중동 밖의 세계를 따져봐도 1대1로 대적할 국가가 없는, 중동 최강을 넘어선 세계최강이었기 때문에 이런 시각에서는 페르시아가 역대 최강일 수도 있다.
  • 유럽 중부·동부에 제대로 된 공포를 느끼게 해 준 단 뿐인 제국인 데다가 메흐메트 2세, 쉴레이만 1세 등 멋진 명군이 활약한 이야기는 세간에 유명하기도 하다. 유럽사에서 악의 축이나 마왕 같은 이미지로서, 서로 전투를 벌이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이 상대라면 신성 동맹등 기독교적 명분 아래 한 뜻이 되어 연합군을 편성하는 일도 빈번했다.
  • 당시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악명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케메네스 제국에 대한 악명과 비슷하였다. 유럽 국가들뿐만 아니라 같은 이슬람이고 부분/전면적으로 튀르크계 국가이기까지 한 카라만 베이국, 백양 왕조, 사파비 제국, 맘루크 왕조도 다같이 유럽 국가들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게 대항하려 했을 정도다. 19세기에 러시아가 부상하기 전까지 유럽 세계 공공의 적은 오스만 제국이었다.

단 이것은 학계의 정설이나 진지한 토론의제 같은 것이 아니라 역사덕후들 사이에서 오가는 의견일 뿐이며, 이조차도 우마이야,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등 이견이 갈리니 참고할 것.

수많은 민족들과 국가들이 난립해서 항상 어지러운 중동, 북아프리카, 동유럽에 위치한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오래 존속한 제국 중 하나인데 무려 600년 넘게 존속하였다.[33] 게다가 적어도 부르사, 에디르네 초기 양대 수도 점령 이전까진 거의 구전 설화 수준으로 기록이 없긴 하지만, 이후로는 몇몇 술탄 개인이 문약한 성격이었거나 술탄의 모후들이 권력을 휘두르거나, 예니체리 친위대에게 황제권이 농락 당한 예외적인 경우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제국들 중 독보적으로 오랫동안 안정적인 황제권을 휘두른 국가이다. 동시대 사파비 제국은 훨씬 일찍 18세기 초반, 그것도 내부 권력 구조의 취약함이란 근본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방 토후였던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반란으로 멸망했고, 무굴 제국 또한 알람기르 1세 치세의 과다한 전쟁으로 인해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반란을 틀어막지 못한 채 18세기 초중반 이후로는 델리 일대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식물 정권으로 마지막 한 세기를 보낸 걸 보면 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은 끝에서 네 번째인 압뒬하미트 2세(1876~1909년 재위)까지만 하더라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말 그대로 전제 권력을 유지했으니 이슬람 제국 국가들 중에서는 독보적으로 근대까지 비교적 안정적인 중앙 집권 전제군주정을 유지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핵심이었던 소아시아 튀르크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여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의 특성을 상당 부분 부정하고 세워졌기에 둘 사이의 연속성은 있더라도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다. 당장 무스타파 케말의 개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케말리즘 또는 '여섯 개의 화살'은 공화주의, 민족주의, 인민주의, 국가 통제, 세속주의, 혁명인데, 이 가운데 공화주의는 오스만 제국에 명백히 반대하는 것이고, 민족주의도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다. 또 모두는 법 앞에 평등하다는 인민주의도 무슬림과 무슬림이 아닌 자(즘미)를 차별하던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지배층이 이슬람을 믿었던데다 황제는 아예 칼리파이기도 했던 오스만 제국의 체제와 세속주의 역시 명백히 위배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이 튀르키예 공화국의 전신인 것은 맞지만[34]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 공화국의 관계는 대한제국 대한민국의 관계와 유사하다'

전성기 시절에는 튀르키예 본토는 물론이고 흑해 일대와 남동유럽(발칸 반도) 전체, 헝가리, 북아프리카[44][45], 서아시아[46], 캅카스 아르메니아, 아라비아 반도 남부 예멘까지 세력이 뻗칠 정도로 거대한 제국이었다. 소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라는 묘사로 종종 회자된다.

한창 전성기이면서도 기독교 세계와의 대립이 절정에 이른 16세기 후반~17세기 초중반에는 북쪽 헝가리,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직접적인 대결뿐만 아니라 저 동쪽 멀리 인도네시아 아체 지방에서 포르투갈과 대립하는 현지 무슬림 소국들에 병력과 무기를 지원해 주고 포르투갈이 점령했던 무스카트를 잠시 정복하였고 이후 1650년에 건국된 무스카트 술탄국은 오스만 제국의 주요 속국중 하나였다. 그리고 남쪽 소말리아 해안에서 역시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는 기독교 왕국 에티오피아에 맞서 무슬림 아달 술탄국을 지원해 에티오피아를 멸망시킬 뻔 하기도 했을 정도로 본격적인 세계 제국으로서의 국력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직접 지배하고 있는 곳 외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수니파 이슬람권의 큰형님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영향력은 스페인 제국 내부의 모리스코(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슬림)인들에게도 미쳤다. 스페인 제국은 항상 모리스코 공동체에 미치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우려하였고 이는 모리스코인들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결국 1567년 모리스코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때 오스만 제국은 무기와 병력을 지원하였다. 1522년 로도스 공방전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침략이 수시로 이루어 졌으며 몰타 공방전에서 구호기사단이 승리하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할 것을 우려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시들시들해진 19세기에도 칼리프국이라는 영향력이 남아 있었는지 청나라의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 독립을 시도했던 야쿱 벡이 오스만 제국과 수교하며 에미르로 인정받고 군사고문 파견을 요청하였다.

또한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이 온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47], 비슷한 시기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는 멸망직전까지 몰린 이후 청야전술같은 극단적인 방어에 급급할 정도로 오스만 제국에게 밀리는 형세였다. 또한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이 정복하지 못했던 모로코의 사드 왕조는 1545년 술탄이 전쟁포로로 잡혀가는 등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며 동맹을 맺었고 오스만 제국은 모로코의 술탄을 교체하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다.[48]

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이슬람 토호국들, 몰디브나 인도의 이슬람 제후국들, 소말리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인도네시아 아체의 지원 요청을 받고 원정군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대부분 포르투갈인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인도양의 무역 루트를 둘러싼 이슬람-가톨릭 세력의 갈등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건 영문 위키의 일련의 사건 참조.
 

인구

거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전성기가 시작되는 1500년대의 인구가 1,100만~1,500만명이었으며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 직전 제국의 최대 판도를 자랑할 당시의 인구가 대략 3,000만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당대 중국 및 인도는 이미 1억을 넘는 수준이라 비교가 안 되고, 고대 로마 제국 동부의 인구가 3,400만명 정도고 오스만과 동시기 유럽의 인구 대국이었던 프랑스 인구가 2,000만명을 넘었다. 프랑스와 오스만 간 영토 크기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로마 제국 동부 역시 오스만 제국보다 작다. 반면에 동시대 유럽 전체의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어 오스만의 4배나 되었다. 그나마 3천만 명도 오스만 제국이 전성기 때의 인구로, 인구상으로 최정점을 찍은 시기인 1856년에 고작 3,500만명, 코스탄티니예 주변과 중동 일대만 간수한 말기인 1914년에는 2,000만명도 안 되는 1,852만명에 불과했다. 동로마가 갓 분열되었을때가 3,000만명 정도의 인구로 추정되는데, 오스만의 영토는 분할통치 동로마 지역의 영토에서 마그레브와 메소포타미아를 더한 영토인데다 1000년 넘게 후대의 제국인걸 감안하면 정말 영토대비 인구는 참 적은 국가라 할 수 있다.

참고로 1906년 조사 기준으로 무슬림 인구 비중이 74%에 불과했다. 그리스인이 14.6%, 아르메니아인이 5.5%, 불가리아인 3.7% 등 기독교인 인구도 많았다. 문제는 이 당시 유럽에서 인구가 가장 적었던 열강인 이탈리아보다 1천만 이상이나 적었다. 즉, 20세기에 와서는 인구에서 유럽 전체도 아니라, 유럽 열강의 한 국가보다도 열세였던 것. 오스만이 망하고 들어선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도 인구가 고작 1,463만명에 불과했다. 참고로 신생 튀르키예 공화국과 한바탕 전쟁을 벌인 당시 그리스 인구가 약 750만 정도로 튀르키예에 거주하는 그리스계가 200만 명 정도이니 그리스 입장에선 해볼 만하다고 느낀 셈이다.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인구와 농토가 로마 시대에 정점을 찍었으나 지속적인 사막화로 인구부양력이 오히려 감소한다. 두 지역의 인구가 오늘날까지 유럽보다 적은 것도 이것 때문이다. 인구와 농토가 지속해서 감소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시대에 이르면 풍요롭던 옥토의 상당수가 사람 살기 어려운 땅으로 변해버렸고, 살 만한 땅도 끊임없는 전쟁과 간헐적인 학살로 인구가 상당히 감소했다.[54]

 

외교

 

오스만 제국의 외교방침은 전근대시대 중화제국과 유사한 점이 있다. 이슬람 국가들에 대해서는 칼리파의 권위를 이용한 종속 혹은 전쟁 양자택일을 강요했으며, 유럽에 대해서는 과거 동로마 제국의 대유럽 외교정책을 담습하여 외국인 조계지와 교역권한을 부여하는 증서를 부여해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제노바를 시작으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Kapitülasyon(카피튈라시용),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Ahidnâme(아히트나메)라고 불린 특권증서를 부여했는데, 이것은 해당 국적의 상인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의 한정된 지역에서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즘미(zımmi, 비무슬림)상인의 중개[55]를 통해 오스만 제국의 상품을 교역할 수 있는 권한, 협정을 맺은 국가가 오스만 제국에 대사를 파견할 권리, 외국인의 안전보호 보장과 조계지내 군사징집, 지방세, 거주지 수색의 면제, 조계지 내 치외법권을 포함한다. 이 증서는 상인 개인에게 부여되기도 했으나, 국가를 대상으로도 부여되었으며 특히 쉴레이만 1세 시절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1535년경 프랑스 국민 전체에게 해당 증서를 부여했으며, 이후 대유럽교역 활성화를 목적으로 여기저기에 발급하기도 했다. 이 카피튈라시용을 통한 외교관계는 오스만의 시각에서는 제국을 상대국보다 우위에 두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졌다. 술탄들은 이를 제국의 관대함을 보이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를테면 유럽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오스만이 제국이 외국에 상주대사를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셀림 3세시기인 1793년 런던에 대사관을 개설한 이후의 일이다.

유럽 국가들이 파견하는 상주대사는 포로이자 인질로 취급되었고 오스만 조정의 심기가 불편해지거나 분쟁이 벌어지면 투옥당하는 신세였다. 카피튈라시용에는 대사에 대한 처우도 포함되었지만 18세기까지 유럽의 국제법은 오스만에서 전혀 준수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대사는 스파이 혐의를 받아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갤리선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이런 행태는 술탄의 심기를 거스른 사신의 목이 뎅겅뎅겅 잘리는 중동에서는 문제가 아니었지만 유럽에서는 야만적이라고 인식되었고 오스만의 대외관계와 이미지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더 큰 문제는 외교관의 부재로 인해 오스만이 외교전과 정보전에서 계속 뒤처졌다는 것이다.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오스만에는 서유럽 언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관료가 없어 영국과 네덜란드의 주선으로 조약을 체결해야 했을 지경이었지만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라는 것을 절감한 18세기부터 전문 외교관을 훈련시키기 시작했다. 이들 대부분은 개종한 기독교도였다. 18세기 오스만 정부 내 외교관의 비중과 위상은 계속 상승하며 마침내 18세기 말에는 상주대사를 파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상주대사의 파견은 오스만 제국이 비로소 유럽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사건으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18세기 오스만 제국이 상대국보다 우위였기 때문에 상주대사를 파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넌센스다. 유럽 열강과의 전쟁을 최소화하고 외교전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주대사 파견이 필수였으며 오스만은 이를 목표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 주력하고 외교관을 체계적으로 양성했다. 17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이 유럽국가와 체결한 조약에는 항구적인 평화 운운이 자주 나오는데 불신자와의 항구적인 평화는 모든 국가를 잠정적인 정복대상으로 봤던 16세기 오스만 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오스만 조정이 유럽과의 국력 격차를 인식하고 전쟁을 회피하려 했다는 증거다.[56] 18세기 오스만은 유럽 열강들에 외교를 맡기다시피 했고 이들 국가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를 압박해서 자국에 유리한 평화조약을 주선할 때마다 특혜를 퍼부었다.[57] 오스만의 상주대사들의 또다른 임무는 파견국의 선진문물을 기록하고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의 서구화 개혁은 상주대사들의 보고서를 많이 참조했다.

이미 15세기부터 외국자본은 오스만 경제를 잠식했고 19세기에 접어들면 경제가 외국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은 면직물의 50-70%를 외국에서 수입하고 있었다.[58] 1838년 오스만 제국이 쇠퇴기에 들면서 밀레트 제도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내정간섭의 주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카피튈라시용을 발급한 나라들은 다음과 같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계기는 크림 전쟁이후 1856년에 체결된 파리 조약 이후이다. 파리 조약에는 러시아에 대항해 당시 동맹국인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로 구성된 유럽국가협의회에 오스만 제국을 포함시킴으로써 오스만 제국을 근대식 주권국가 체제에 포함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항이 포함되어있다. 또한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을 유럽국가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되어있기때문에 오스만 제국과 그 계승국인 튀르키예 공화국의 역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전환점이기도하다.

카피튈라시옹은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1914년에 무효화되었으며 공식적으로는 1923년 로잔 조약을 체결하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유럽 열강들에게 짓눌리기 전 지역의 패권을 잡았었다는 공통점이 있는 청나라와는 17세기, 18세기엔 별 다른 마찰 없이 지내다가[59] 위구르 무슬림 야쿱 벡의 반란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은 위구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야쿱 벡을 에미르로 인정하고 군사 고문까지 파견하여 지원했다.[60] 또한 의화단 운동이 한창일 때 독일 제국의 권유로 오스만 제국이 의화단을 진압하러 군대를 파병할 수도 있었기에 만약 오스만 제국이 군대를 파병했다면 오스만-청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영토가 갈가리 찢겨져 유럽 열강에게 저항하느라 더 이상 중국 내 무슬림의 독립을 지원하는 일은 없어졌다.
 

경제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는 명실공히 루멜리아 즉 발칸반도였다. 오스만 유럽 영토에서의 세입은 16세기 오스만 정부수입의 절반을 차지했고 18세기에는 3분의 2를 차지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기본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동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부터는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면서 이를 통하여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다. 또한 실크 로드를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무역을 중개하면서 아시아의 향신료와 비단 등을 유럽에 팔았고, 유럽의 황금과 은을 그 대가로 받아챙겼다. 당시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오스만 제국은 아시아로 향하는 동지중해 인근의 모든 무역로들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나와있으며, 이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과 인근의 이슬람 국가들에게 울며 겨자먹기로 압도적으로 비싼 무역세를 지불하면서 아시아와의 무역을 진행해야만 했다. 이같은 고관세, 고세율은 종교 문제와 함께 유럽과 오스만 제국 간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던 핵심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이같은 종교에 따른 관세 차별은 시대가 흐를수록 더욱 심해졌는데, 특히 셀림 1세의 재위기에는 무슬림 상인들은 2%의 관세만 지불하면 되었던 것에 반하여, 외국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의 기독교 상인들은 4%에서 5%에 달하는 관세를 오스만 정부에 납부해야 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자국 상인보다는 유럽 상인들이 더 많은 많은 특혜를 누렸다. 높은 관세는 카피튈라시옹을 체결한 국가의 상인들에는 적용되지 않았지만 오스만 상인들은 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각종 규제를 받아야 했다. 중세부터 이슬람 군주들은 세입과 경제 활성화를 위해 최대한 많은 외국 상인과 자본을 유치하려 했다. 이슬람 국가들은 의외로 해외무역 장려에는 무관심했는데 국고에도 이익이 안 되고 국부가 유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럽과의 무역은 유럽 상인조합과 회사들에 의해 전적으로 통제되었다. 따라서 오스만 상인들은 국내와 해외 모두 불리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했다. 세법을 보면 1838년까지 오스만 제국은 수입과 수출 모두에 3%의 관세를 부과했고 자국과 외국 상인 모두 상품을 제국 내 다른 지역으로 유통할 때 8%의 관세를 납부해야 했다. 1838년 이후 오스만 제국은 수출에는 12%, 수입에는 5%의 관세를 부과했지만 외국 상인은 제국 내 관세를 면제받았다.

오스만 제국은 전신인 셀주크 튀르크에게서 아나톨리아 반도의 육상 교역로를 넘겨받았고, 이 교역로를 이용하는 카라반이나 대상들에게서 세금을 받았다. 특히 교역로 중간중간에 초소와 국영 여관 등을 설치, 운영하면서 이를 통한 수입을 따로 챙기기도 했다. 다만 도로의 질은 당대 술탄의 통치 능력이나 정부의 효율성에 크게 달려있었기에, 16세기와 17세기에 도로의 질이 가장 좋았으며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자 오히려 도로의 질이 옛 시절보다도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해상 무역의 경우, 오스만 제국은 국가 차원에서 해상 무역에 뛰어들지는 않았으며 그저 선박들이 해상 무역로를 이용하는 데에 세금을 걷는 데에만 만족했다. 다만 가끔씩은 예외적으로 해상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설 때도 있어서, 조세를 늘리기 위하여 선단을 동원하여 일시적으로나마 향신료 무역을 실시했던 적도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해양 활동 범위는 주로 동지중해와 에게 해, 그리고 흑해 홍해, 페르시아 만 등이었다. 에게 해와 동지중해를 다니는 선박들의 주요 거래 품목은 밀이었으며, 흑해에서는 밀과 목재를 주로 거래했다. 아시아와 가까웠던 홍해와 걸프 만에서는 향신료들이 주요 물품이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튀르키예 고고학자들이 지중해에서 이집트에서 이스탄불로 향하던 길이 43m의 거대한 난파선을 해저에서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 적재량만 1,000톤이 넘었으며 이탈리아의 자기, 인도의 향신료, 아라비아의 향초, 심지어는 명나라의 유약 자기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당시 오스만 제국의 활발한 무역 활동을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은 어디까지나 농업국가였고 19세기까지 인구와 세입의 80%가 농업과 관계되어 있었다. 무역량이 대폭 증가한 19세기 수출입은 오스만 GDP의 2-3% 정도를 차지하며 1차대전 직전에는 11%까지 증가한다.

자체적인 산업은 19세기까지 전통수공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중세 유럽의 길드와 같은 론자(Lonca)라는 길드시스템이 주류였는데, 도제(çırak), 보조자(kalfa), 장인(usta) 순서대로 진급하면서 기술을 익히고 개점면허를 받기까지 오랜기간이 걸렸다. 또한 업종들을 길드가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장도 용이치 않았다. 예를 들면 오스만 제국 시기 서민부터 황족까지 널리 사용하던 구리제품들을 가공하는 공장들은 그릇을 만들기 위한 동판의 주조는 주조길드에서 담당하고, 이 동판들을 가져와서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대충 모양을 잡아 반제품을 만드는 길드와 그 위에 고객의 요청에 따라 조각, 부조를 새기는 길드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동제품은 내부에 주석칠을 해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도 주석칠을 하는 길드가 따로 있어서 처리했다. 이렇게 배타적인 구조가 산업 전반적으로 만연했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후 기계화를 통해 이런 진입장벽과 규제들이 사라져갔지만 오스만 제국에서는 기존 길드들의 반발로 꽤 오랫동안 난항을 겪었고, 현대 튀르키예에서도 장인증서(Ustalık belgesi)를 발부하는 식으로 아직까지 수공업계에서 남아있는 관행이기도하다.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크게 변화를 겪는다.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나 증기 기관과 증기선이 등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무역의 대량화와 신속화가 가능해지면서 물류계의 혁명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스탄불과 베네치아를 왕래하는 정기선들이 생겨났으며 그 어떠한 화물이라도, 제국의 어느 항구일지라도 몇 십일 내에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게 되면서 물류의 이동이 대거 증가했다. 전통적인 목조선들이 한 번 운행할 때마다 겨우 50톤 정도에 불과했던 것에 반해, 증기선은 거의 1,000톤에 달하는 화물을 운반할 수 있었으니 최소로 잡아도 몇 십배 이상 물류 이동이 활발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수에즈 운하 등 새로운 항로들이 연이어 생겨났으며, 선박들이 통행하기 어렵던 내륙의 강과 그 지류들에도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면서 강 인근의 무역 도시들이 번성했다. 특히 교역의 중심지였던 이스탄불의 경우, 1874년에 450만 톤의 화물들이 드나들었으며 1900년에는 무려 1,000만 톤에 달하는 화물들이 드나들었다. 또한 제국 내에서도 기술이 더 발전한 유럽과 가까웠던 발칸 반도에 집중적으로 철로와 역들이 깔리는 등 철도를 이용한 운송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오스만 제국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근본적으로 농업에 크게 의존하는 국가였다. 전체 조세의 40% 정도가 농민들에게서 나왔으며, 대부분의 인구가 자작농이나 소작농으로서 집 인근의 토지를 경작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어 농작물들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따로 동물들을 사육하여 그 젖이나 가죽들을 내다 팔기도 했으며, 당시 열악한 도로 사정 탓에 발칸의 농민들이 몇 달씩 이동하여 아나톨리아나 시리아에 생산품을 팔러 떠나기까지 했다. 또한 유목민들도 가죽을 팔거나 직물을 짜서 이를 거래하고는 했는데, 아무래도 정착하는 생활을 하지 않는 유목민들은 농민들에 비하여 정부의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18세기 들어서 대대적으로 유목민들을 강제로 도시에 정착하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이후 도시화와 산업화가 급격하게 이루어졌고, 발달된 재배 기술이 유입되면서 농경지와 효율은 급속도로 높아졌다. 다만 미국에서 엄청난 양과 저렴한 가격으로 곡물이 대량 수입되면서 곡물 가격이 폭락, 제국이 붕괴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오스만인들은 국내외 무역에도 굉장히 공을 들였다. 코스탄티니예, 셀랴니크, 할레브 등의 대도시를 거점으로 수많은 화물들이 오고가기도 했다. 1890년대에는 세 개의 지방 도시들을 따로 뽑아 조사해 본 결과, 이들을 경유하는 화물의 양이 당시 오스만의 국제 무역량의 5%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 지방 도시만 해도 이랬을진데, 이스탄불, 베이루트, 다마스쿠스, 알레포 등 대도시들에서는 얼마나 많은 양의 화물들이 오고갔을 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제대로 된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 오스만 제국은 이미 쇠퇴하고 있던 마당이었고, 갈수록 제국의 영토는 좁아지고 부정부패가 행정을 좀먹는 탓에 제국의 내수는 점점 쪼그라들어만 갔다. 한편 국제 무역의 경우, 19세기 들어 오스만 제국 역시 국제 무역장에 활발히 참여하면서 18세기에 비하여 무역량이 10배에서 16배 정도 증가하기는 했다.[61] 국제항으로서 가장 번성한 곳은 당연히 수도 이스탄불과 유럽과 가까운 발칸의 항구들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으로 수출되는 양모의 양은 몇 배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무역 균형의 경우 20세기까지도 수출입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오스만 경제의 파탄을 무역수지 불균형 탓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국제무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중계무역이 점차 인기를 잃고 몽골제국 이후 통합정치제의 공백과 그나마 등장한 통합정치제의 단명으로 중동과 중앙아시아 전역의 구매력이 낮아졌다는 사실은 기억할만하다.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는 시점까지 유럽의 대인도 무역은 육로인 아나톨리아 반도와 발칸반도를 경유하거나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흑해를 건너는 경우가 많았지만, 신대륙 개척이 완료되고 점차 유럽과 신대륙간의 무역경제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면서 굳이 육로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더욱이 포르투갈, 네덜란드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직접 진출하고, 영국을 필두로 해양과학기술(위도 및 경도 측정법의 발달, 시계측정법의 발달, 돛의 배치 변경, 항로 제정, 조선술의 발달 등)과 행정기술(해사보험과 보험회사의 탄생, 해사정보지의 발간, 주식시장의 개설, 해양 관련 법령의 제정 등)이 발달하면서 해양무역의 안정성과 직접 무역을 통한 수익 증가로 이어지면서 아나톨리아 반도를 경유할만한 이유가 많이 사라진 데 있다.

러시아 제국 또한 시베리아 개척을 통해 중국과의 무역 경로를 새로이 뚫고 시베리아 각지에 안정적인 자원수급기지를 개설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통한 중계무역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낮아졌고,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여러 토후국을 합병하면서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주된 시장 중 하나를 뺏어가는 효과도 생겨났다.

오스만 제국 또한 이러한 변화를 감지했으나 현대에도 이러한 무역양상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근세시대에 대응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오스만 재정의 경우, 거의 대부분을 농민들에게서 거두어들였으며, 타 중동 제국들과 반대로 도시, 궁전, 군대에 상품을 공급하기 위해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한편 상업 활동을 통제했다. 그러다가 16세기의 화폐개혁 이후,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까지 오스만 경제는 거의 500%에 달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게 된다. 당시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유입되었는데, 이미 산업 기반이 탄탄했던 네덜란드나 프랑스, 영국 등은 오히려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졌을지 몰라도 경제구조가 취약했던 스페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경제는 인플레이션으로 상당한 수준의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아니 차라리 스페인이라면 모를까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에서 오는 상인들이 악화로 수입대금을 결제하고 오스만 제국이 여기에 대해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인플레이션 문제는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근세에서 근대로 갈수록 오히려 문맹률이 점진적으로 증가하고, 베두인들을 계속 농촌에 정착시키는데도 불구 중동이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인구마저 감소하는 등등 생활수준 역시 악화되었다. 18세기 인플레이션은 더 심화되었고 마흐무트 2세 시기 화폐가치가 90% 이상 절하되고 물가가 12배 이상 치솟는 것으로 절정에 달했다. 오스만 제국은 1850년대까지 유럽에서 거의 유일하게 해외에 한 번도 빚을 지지 않은 국가였다. 기독교 국가들에게 채무를 진다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고 대출을 최대한 회피한 것인데, 이같은 노력도 1850년대의 크림 전쟁 시기에 오스만 제국이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면서 어쩔 수 없이 1854년에 유럽으로부터 첫 채무를 지게 된다. 유럽 열강들은 이 빚을 이용하여 오스만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제국이 더 많은 채무를 지도록 반강제적으로 유도함에 따라 한 번 생겨난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1875년 경의 오스만 제국은 무려 2억 4,200만 터키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의 채무를 유럽에 빚지고 있었으며, 이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1년 수입의 절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오스만 정부는 '국가채무위원회'를 만들어 빚을 변제받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였고, 1914년의 국가채무규모는 1억 3,900만 터키 달러 정도까지 하락했다. 다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국가 경제는 유럽 자본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국가채무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직후부터 오히려 유럽 열강들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경제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유럽 열강들은 빚을 빌미로 제국 내에 철도, 항만, 역 등의 건설권을 따냈으며, 막대한 양의 자본을 활용하여 상대적으로 초기자본이 부족했던 오스만의 튀르크계 은행과 자본가들을 억눌렀다. 게다가 가뭄과 자연재해 등이 겹치면서 세수가 하락하며 오스만의 재정이 무너졌고, 전역에서 일어나는 독립주의자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전비를 소모하면서 제국 재정의 해외 의존도는 날로 심해졌다. 이때문에 오스만 정부는 이미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튀르키예의 재정은 파탄 직전의 단계였다.

 

여타 유럽국가들과의 비교


거대한 영토에 비해 오스만은 인구가 적은데다 경제적으로도 발달하지 못했다. 오스만의 경제제도는 동시대 유럽에 비해 원시적이었고 조세행정도 극히 비효율적이어서[62] 여기저기 누수가 심각했으며 국력을 효과적으로 동원할 수 없었다. 연구에 따르면 오스만의 세입은 1500년부터 1800년까지 거의 변동이 없었지만[63] 1800년부터 1차대전 사이 무려 15배나 증가했는데 19세기 서구화 개혁으로 유럽식 제도를 도입한 덕분이었다. 정부 세입은 19세기 후반 GDP 7%를 찍고 1차대전 직전에는 13%까지 증가했다.

최전성기인 쉴레이만 시절 오스만 중앙정부 세입은 은 132톤, 지출은 118톤으로 프랑스와 스페인[64]에 비해 턱없이 적었고 베네치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지방정부의 수입을 전부 합해도 306톤으로 동시대 유럽 열강들에 비해 경제력에서 현저한 열세를 보였다. 17-18세기 서유럽과의 격차는 더 벌어져서 오스만의 세입은 200톤에 머무는 반면 프랑스와 영국은 1612톤과 1370톤을 돌파하여 1229톤의 청나라를 상회했다. 오스만 일개 지방보다 영토와 인구가 작은 네덜란드도 350톤의 세입을 거두었다.

이렇게까지 엄청난 차이가 나는 이유는 경제와 행정이 중요한 요인이지만 서유럽이 이미 동유럽과 중동보다 훨씬 풍요로웠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15세기 서유럽 국가들의 1인당 소득은 오스만 제국의 2-2.5배에 달했고 제국의 부와 재화가 집중되는 이스탄불 임노동자와 서유럽 임노동자를 비교하면 후자의 구매력이 50% 이상 높았다. 17-18세기 서유럽 국가들의 1인당 세입은 오스만의 수배에 달했고 영국은 12배, 저지대는 13배가 넘었다.[65] 19세기에 접어들면 오스만 세제의 서구화에도 불구하고 수십 배에 달하는 차이가 발생했다.
 
 
 문화
 

오스만 제국은 몇 백여년에 걸친 세월 동안 아나톨리아와 발칸 반도 전체, 그리고 이집트와 동지중해 연안 지방 등을 다스렸기에 문화적으로 다채로운 편이었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는 기본적으로 페르시아화된 셀주크 제국의 문화와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전 몇 천년 동안 지중해 동부를 통치했던 동로마 제국의 문화도 섞여 있었다. 이후 제국이 점차 확장되면서 유대인, 아랍인, 동방정교도, 아르메니아인 등 타 민족들을 흡수하고, 밀레트 제도를 통하여 이들의 문화 보존을 허락하면서 이들의 문화 역시 오스만 제국 내에 점차 녹아들어갔다. 다만 역시 오스만 문화의 주류는 크게 3가지로, 첫 번째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틴 문화, 두 번째가 아라비아 반도의 아랍 문화, 마지막이 이란 지방의 페르시아 문화가 오스만 문화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궁정에서는 옛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시를 잘 짓는 것을 지식인의 상징으로 보았고, 이때문에 고관대작들이 시를 짓는 것을 연습하거나 즐기는 경우가 흔했다. 특히 고전 페르시아의 시들이 사랑받으며 잊힌 페르시아어 단어들이 시를 통하여 다시 부활하였으며, '가젤'(gazel)이라고 하여 사랑과 이별에 다룬 페르시아풍의 시들도 유행했다. 한편 19세기부터는 점차 서구식 개혁인 탄지마트의 영향과 그 반작용으로 튀르키예 고유의 전통에 대한 관심이 부상하면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민간 문학들의 급부상으로 인하여 주로 궁정이나 엘리트층에서나 즐기던 고전 시문학도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으로 따지면 양반들이나 사대부들이 애용했으나 근대화를 거치며 명맥이 거의 끊어져 버리고 만 시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시와 비슷한 문학양식인 산문의 경우, '사즈'라고 하여 아랍의 고전적인 각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었기에 시에 비하여 큰 문학적 성취는 없는 편이었다. 오스만의 산문 문화는 18세기,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서양의 소설이라는 장르가 들어오면서부터야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과 튀르키예 문화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캘리그래피라고 하는 이슬람권 전통의 서예다. 캘리그라피는 종교의 영향으로 식물이나 동물 등을 함부로 그릴 수 없던 이슬람 문화권에서 구불구불한 아랍 문자들을 대신 예술에 활용한 서예이자 장식 기법이다. 아바스 제국 시기에 본격적으로 기틀이 잡혀 발전하기 시작한 캘리그래피 문화는 오스만 제국 초기에 '디와니'라고 하여 유려한 곡선으로 아랍어를 써서 이를 장식용으로 쓰는 등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며, 16세기와 17세기 초 동안에는 기존의 아랍식 캘리그라피에서 탈피하여 네스탈릭, 리카 같은 오스만 풍의 캘리그라피가 따로 만들어졌고 특히 쉴레이만 1세의 재위기에 그 정점을 찍었다. 제국의 술탄과 관리들도 자신의 서명을 이 캘리그라피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가장 대표적으로 하기아 소피아에 걸려있는 것이 바로 이 쉴레이만 1세의 캘리그래피 서명이다.

공예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으로 현대까지도 유명한 튀르키예의 카펫 제작술이 있으며, 이 카펫들은 서양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갈 정도로 그 품질과 인기가 좋았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 카펫에 넣어진 문양과 색의 화려함으로 주인집의 부를 짐작할 수 있었으며, 특히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은 이 카펫을 바닥의 깔개로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벽이나 천장에 장식용도로 걸어놓는 태피스트리처럼도 이용했다. 또한 모스크에 가장 빈번하게 기부되는 물품도 바로 이 카펫이었고, 어떤 지방에서는 일부러 공물처럼 카펫을 세금으로 걷어들이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이스탄불에서 60km 정도 떨어진 헤레케 지방에서 짜낸 카펫을 최고급으로 쳐줬으며, 그 외에도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외뤽의 카펫과 우샥, 밀라스 지방에서 만들어진 카펫들도 그 질이 굉장히 좋아 고급품으로 유통되었다. 한편 세공술의 경우에는 특히 금과 은세공술이 굉장히 발달했다.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귀금속은 은이었으며, 황금은 귀족층이나 황실에서나 주로 사용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 세공술은 오스만 제국이 옛 동로마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분야들 중 하나로, 일부러 성화를 새겨넣거나 비잔틴 양식의 돋을새김을 넣는 등 비잔틴풍의 금속 세공품들은 오스만 역사 내내 엄청나게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참고로 대부분의 보석 세공사들은 유대인이나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이었으며, 시계에 관심이 많았던 오스만 제국에서 일부러 서구에서 시계 제작가들을 초빙해오면서 이들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대중 공연 분야도 있었다. '멧다'(Meddah, مداح)라고 하여 커피집 등에서 소규모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원맨쇼도 있었으며, 민화, 국제관계, 일화집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논하면서 주로 그 속에 들어있는 교훈적인 내용 등을 전달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물론 길거리나 일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메다들은 사교나 유흥을 위주로 한 것이라 음담패설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재미있어할만한 호메로스 일리아스, 혹은 오디세이아 등 심지어 그리스 서사시까지 읊어주기도 했다. 특히 이 멧다를 하는 사람들은 1인극 특성상 한 사람이 여러 인물의 역을 맡아야 했는데, 이때문에 지방별 사투리를 따로 연습하거나, 아예 목소리를 바꿔서내는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또한 작은 우산이나 손수건, 모자 등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했고, 간단한 마술을 보여주기까지 했으니 당시의 만능 엔터네이너인 셈. 2008년에는 이 멧다가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카라괴즈'라는 이름의 그림자 인형극, '메디안'이라는 이름의 대형 연극도 사람들이 즐겨 관람하는 편이었다.

 

종교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종교개혁이 대두하고 기독교 세계 전체가 개신교 각종 종파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성격이 크게 바뀐 가톨릭 교회로 분열되고, 이에 따라 이전 중세의 일상 사회문화적 종교적 느슨함과 동남부 유럽 변경지대에서 이교, 이슬람, 유대교 등 비기독교 이교도들이 본격적인 박멸과 청산의 대상으로 떨어진 동시대 유럽과 달리[73] 근세의 오스만 제국은 일반적으로 신민들의 일상 사회적 차원에서 종교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특정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스만 황실과 정부는 분명 칼리파가 다스리는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강조했고, 엄연히 폭력적인 정복 전쟁으로 인해 건설된 나라인 만큼 피정복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기세를 꺾는 과정에서 각종 잔학행위와 제노사이드를 저지른다든지, 현지 기독교 성인의 유해를 소각한다든지[74], 특정 종교 민족 집단을 집중적으로 박해하던 일들 또한 많았던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의 종교 정책은 깊은 연구와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단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성격을 강조하는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여러 종교인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거 자체는 굳이 다민족 다문화 국가가 아닌 종교국가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반대로 이런 사례를 가지고 전근대 왕정국가에서 종교와 민족과 관련되어 정말 어떠한 차별과 탄압이 없으며 종교국가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핀트를 잘못 잡은 주장이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국가라고 하는 것은 오스만 국가 내에서 이슬람이 핵심 계층 혹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사실 분명 지배 계급과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숭상하고 출세하고 싶으면 무조건 믿어야 하는 '국교'도 있지만 민간 사회에서의 종교적 다양성까진 굳이 건드리지 않는건 저 멀리 오스만 제국까지 갈 필요도 없고, 당장 우리네 동아시아에서도 자연스러운 풍조였다. 조선만 하더라도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불교계의 정치적 권력은 철저하게 때려잡고, 사회문화적으로도 확실하게 주류의 위치에서 끌어내렸지만 굳이 불교 전체, 불자 개개인을 때려잡으며 강제개종하려고 들진 않았고, 중국에선 이마저도 훨씬 덜했다. 일본의 경우도 20세기 국가신토란 괴상망측한 전체주의 사이비 사상 비슷한거 이전엔 애초에 국교를 일괄적으로 강제할만큼 특정 종교가 중앙 정치 권력을 독점한 경우도 없고, 센고쿠 시대 승병 집단들이 보여주듯 불교계의 독자적인 정치적 권력도 일정부분 계속 유지가 되었지만 어쨋든 에도 막부 성립 이후 공식적인 관이 권장하는 사상은 유교였다.

다른 동시대 문화권을 예를 들자면, 인도에 자리 잡은 무굴 제국이 황실은 이슬람을 믿으면서도 토착 힌두교를 전반적으로 존중한건 유명한 경우고, 무굴 제국 역사상 예외적으로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다는 아우랑제브도 최근 역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실 진짜 동시대 유럽 국가처럼 동네 마을 주민들도 강제개종 시킨게 아니라, 정치적으로 토착 힌두교 귀족, 사원 세력과 마찰을 겪으면서 이 와중 사원 파괴 같은 종교적 탄압 또한 따라온 것이라 보고 있다. 같은 근세 이슬람 제국 중 가장 종교적으로 억압적이었다 볼만한 시아파 사파비 제국 페르시아도 막상 탄압의 집중 타겟은 '같은 무슬림'인 수니파였지, 아예 종교 자체가 달랐던 유대인, 아르메니아 기독교인들은 대체적으로 존중했던 편이다.

결국 애초에 '종교 국가' 운운하려면 전면적으로 나라 안에 다른 종교 모두 전체를 영구적으로 소멸시킬만큼 종교적 통일성, 단일화를 추구한 경우 자체가 따지고 보면 종교 개혁이란 그 지역 일대에서 중요했던 사건을 겪었던 근세 유럽의 특수성이라 봐야지, 다른 문명권에 유럽만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해당이 안되니깐 '종교 국가라 할수 없다'는건 지나친 비약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명나라, 조선은 '유교 국가'가 아닌게 되고, 사파비조 페르시아는 12이맘 시아파 종교국가가 아니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주장도 할수있다. 그리고 사실 근세 자체가 엄연히 시대의 한쪽 발은 중세에 걸치고 있었던 만큼, 유럽 안에서도 이런 '종교적 다양성 자체는 인정하지만 정치적으로 국교는 확실한 나라'는 자세히 찾아보면 많다. 당장 이런 '근세 유럽 교법화 과정'의 끝판왕인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수장인 바로 그 교황령만 하더라도 대중동 무역망 유지란 이유로 안코나에 예외적인 유대인, 무슬림, 동방 기독교인 커뮤니티의 존재를 용인했던 바가 있다. 그것도 다른 교황도 아니고 트리엔트 공의회 시대 가톨릭 교회의 교조화, 배타성 증가를 상징하는 인물 그 자체라고 평가 받는 바오로 4세 교황 시절 일이다.

각종 현실적인 여건에 의해서 자국 내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거하고 국가 내에서 종교의 중요성 자체하곤 전혀 다르다는 말이고, 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제국'으로서 면모는 충분히 중요하다. 일단 애초에 오스만 제국의 팽창 전쟁 명분 자체가 이교도를 쳐서 이슬람의 땅을 확장한다는 종교적 명분이었다. 각종 공문서, 대외 외교문서 등에서 오스만 제국은 특히 '이슬람의 땅을 침략했던 이교도들을 거꾸로 정벌하는 제국', '무슬림들의 복수를 위해 보내진 지상의 하나님의 그림자 [75]' 같은 전투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강조했다. 사회적으로도 오스만 제국이 '다른 종교에게 관용을 배풀었다'는걸 '종교 정책 전반에 흥미 없었다'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오스만 제국의 종교정책은 사실 따지고 보면 다른 비유럽권 근세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아예 종교 자체가 다른 이교도 신민들의 공존도 인정했지만, 이와는 별개로 무슬림 커뮤니티 내에선 이런 저런 종교 정책도 적극적으로 국가가 나서서 관여한 편이다. 당장 나라 정치구조 자체가 개종자 유럽인들이 엘리트 집단을 차지했던 나라다 보니 이런 출세와 신규 지배층 편입 과정을 담당하는 예니체리 양성기관 엔데룬 학교를 중심으로 원래 발칸반도 전반에 퍼져있던 신비주의적, 비문자적 성향을 강조한 벡타심 수피 교단을 황실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반면 이면으로 도저히 국가 내에서 인정해주기 힘들고,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험하기까지한 아나톨리아 동부, 특히 시아파 페르시아와 접경 지대의 반체제 시아파와 신비주의 수피 교단, 이를 따르는 튀르크나 아랍 부족은 핍박하고, 오늘 현대 튀르키예에서의 알레비 박해 같은 이슬람 내에서의 타자화, 핍박 현상의 역사적 기원을 마련했다. 17세기까지 오스만 내에서는 이교도 박해보다 소수종파 박해가 더 심했다고도 볼수 있다.[76]

정리하자면 오스만 제국의 국가 이데올로기에서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성격은 한번도 중요하지 않은적이 없었다. 다만 이슬람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이 실제 사회에서 수많은 비-수니파 무슬림 신민들이 엄청나게 많고,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아예 국가 운영은 커녕 성립 자체가 불가능한 현실과 굳이 상호배제적인게 아니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런 면에서 오스만 제국은 분명히 종교적 다양성, 공존을 공식적인 국가 이데올로기, 정책 차원에서 명시했고 이는 17세기까지는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러나 이게 오스만 제국이 무슨 이슬람 제국으로서 정체성 자체를 표방 안했다더니, 아예 현대 세속 민주주의 국가급의 종교적 평등을 추구한것처럼 오버해서 해석하는것도 곤란하다. 상술된 사례들도 있지만 제국 초창기에나, 전성기를 누리던 고전기에나, 쇠퇴기에나, 말기에나 아예 계획적으로 해당 종교 자체의 씨를 말리려고 한건 아니었지만 어쨋든 피지배 민족들 입장에선 종교적 탄압이라 느낄법한 억압 사례도 분명히 종종 있었다. 사실 종교적 명분보다는 근대 민족주의적 명분아래 자행된거지만 어쨋든 나라 자체가 망하면서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아나톨리아 그리스인,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아랍인들에게 아예 줄줄이 케밥 돌림빵으로 제노사이드급 탄압을 저지른 사례를 보면 아예 이거 나머지 전반적으론 민족, 종교적 관용으로 유명했던 그 제국 맞나 등골이 서늘해지기까지 한다. 와하비즘을 비롯한 현대 이슬람권에서 기승하는 근본주의 문제는 사실 따지고보면 오스만 제국 끝자락 말기 이전까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런저런 근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인식적으로 가장 시대적으로 가까운 통합 중동 이슬람 제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사례가 전혀 상관도 없는 문제에 끌려오는것에 불과하고... 결국 특히 근세의 관점에서 특정 나라가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적극적으로 표방하는 것하고, 아예 사회적으로 이교도의 존재 자체를 포용하냐 마냐는 별개의 문제란 점을 인정한다면 오스만 제국은 타종교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충분히 '이슬람 제국'이라 할만큼 종교적 정체성 또한 중요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오스만 제국 황실과 국가 엘리트층이 '수니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이란 종교적 정체성을 강조한것과 별개로 실제 집행에 있어선 한창 종파적 배타성이 팽창해가던 동시대 유럽 뿐만 아니라, 그 이전이나 이후 다른 이슬람 제국 국가들에 비해서도 유연함과 관용이 돋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초창기에는 튀르크 부족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로마와의 성전"을 명분으로 세력을 끌어모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시기 까지 가지(Gazi)로 대표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국가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영토 확장으로 대규모의 비무슬림 피정복민들을 끌어안는 상황이 되자 이는 수정이 불가피했다. 오스만 제국의 수립 당시부터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켜 이집트와 레반트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제국 내에서 비무슬림 인구가 무슬림 인구보다 더 많았고, 이후에도 비무슬림 인구의 수가 상당한 세를 차지했다.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멸망 당시 까지도 제국의 백성들을 '그들이 믿는 종교'에 따라 공동체(Millet, 밀레트)를 형성하게 하여 각자의 종교법에 따라 통치하고, 형법(Kanun) 만큼은 모든 밀레트가 공통적으로 지키게 했다.

때문에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국이 조각나기 시작하는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종교 문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자의 종교법에서 금지하는 것[77]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서로 다른 밀레트 간의 민사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자신의 밀레트에 속하지 않은 판관에게 가서 재판을 요구하는 일도 매우 흔했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 역사>가 당시의 풍토를 잘 묘사하고 있는데, 자신을 소를 떼먹고 돌려주지 않는 아들에게 샤리아법대로 돌려받기를 원하는 정교회 신자 아버지나 남편과 이혼하기 위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척)하고 남편을 '불신자'로 보아 혼인 무효를 이끌어내는 크로아티아인 가톨릭 여성,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 튀르크인 선원, 마을에 알 수 없는 재난이 자꾸만 발생하자 정교회 성직자, 가톨릭 성직자, 유대인 랍비, 이슬람 이맘을 불러 구마 의식을 하다가 도저히 해결 안되자 튀르크인 마법사를 불러 푸닥거리를 하게 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리아의 한 시골 마을 같은 이야기를 보면 당시의 사회가 오늘날 이슬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매우 이질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심지어 무슬림은 튀르크인들조차도 포로로 잡힌 영국 선원들에게 '이슬람을 믿을 것을 권하다가' 이들이 한사코 개종을 거부하자, 선실 하나를 내주어 교회로 개조하게 하여 '그럼 기독교라도 열심히 믿어야지!' 하며 예배를 독려하는 튀르크인 선장 이야기라든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자 '왜 성모님께 기도하지 않소?' 라고 개신교인 선원에게 힐난하는 무슬림 선원 등의 일화가 줄줄이 나열된다.

오스만 초기 황제들 또한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보호하고자 했다. 성 소피아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 장본인인 메흐메트 2세는 전란으로 허물어진 로마 제국 시절의 정교회 성당 복구에 금전 지원을 했고 보스니아를 정복한 뒤에는 '제국 신민들 중 그 누구도 기독교도들이나 기독교회에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라는 내용의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으며[78], 셀림 1세 아토스 산에 막대한 지원을 하여 수도원들을 수리하게 하는 동시에 "그간 전쟁, 천재지변으로 무너지거나 손상된 정교회 성당, 수도원을 수리할 것이며 이들을 절대로 파손해서는 안 된다." 칙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정교회나 가톨릭, 유대교에 대한 지원을 간간히 한 기록이 발견되며, 성 니콜라오스의 교구였던 미라의 성당 또한 러시아 차르와 함께 오스만 황제의 지원을 통해 복원이 이루어졌다.[79] 그러나 중후기 오스만 황제들은 타종교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사용할 때가 많았고 이는 나라에 망조가 들기 전인 17세기부터 보여진다. 패전 후 만만한 기독교도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도 17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사소한 부분으론 겉으로는 이슬람 국가이면서도 전면적으로 을 금지하지 않았다. 가끔 술탄의 명으로 금주령이 내려진 적은 있으나 일시적인 사례일 뿐이다. 애초에 오스만 황실의 기원인 튀르크인들부터가 술에 관대한 편이고, 옛 동로마 제국의 황실 문화를 대폭 받아들이고 유럽 지역과 교류를 하는 과정에서 술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되었다. 게다가 위에 계속 나왔듯이 당장 비(非) 무슬림 계열 백성들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술을 완전 금지한다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아예 술탄 본인이 술을 즐기는 주당인 경우도 있었을 지경.

일각에선 바티칸에 비교하면 피상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를 보고 오스만 제국의 탄압을 그 동기로 지목하는 모양이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망한 이후 아예 국가적 차원에서 정교회를 대표하는 정치적 교권은 아예 상실했지만, 딱 이 이상으론 본 적이 없는 수박 겉핥기 수준의 피상적인 평가다. 정복 후 총대주교좌 또한 처음에는 하기아 소피아 다음으로 격이 높았던 성 사도 성당을 쓰게 해주었다. 성 사도 성당은 몇 년 뒤 다시 뺏기고 아예 해체, 현재 그 자리에 있는 정복자의 모스크로 바뀌었지만 이건 황실의 종교적 편협성과 심술보의 산물이 아니라 건물 자체의 노후화 문제로 생긴 문제로, 옮긴 옆의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상당히 권위 있는 건축물이었다. 파마카리스토 성당 또한 16세기 후반 오스만 황실이 뺏어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때 새로 받아 아직까지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좌 성당인 성 요르고스 성당(아야 요르기)도 상당히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성당의 규모는 모스크보다 작아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크기 자체는 작으나 적어도 지금 현대 모습으로 18세기 재건축할 때는 황실에서 당대 최신식 유럽의 건축가, 건축 기술 다 끌어오며 공들여 지은 것이며, 자세히 조목조목 살펴보면 당장 외부부터 대리석 떡칠에 속으로 들어가면 상당히 호화롭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오스만 정부가 콘스탄티노플 세계 총대주교를 어떻게 대접했는지만 봐도 종교적 박해나 탄압이 없었던게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현대 이스탄불에서 백년 전엔 이 도시의 반이 그리스어를 쓰며 정교회를 믿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로마인이라 불렸던 현지 그리스계 공동체가 사라진 건, 오스만 제국이 망한 이후 공화정 시절 각종 재산권 분쟁을 빌미로 한 실질적인 민족 탄압 정책이 실시된 20세기 중반의 일이다. 물론 튀르키예 내 그리스계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자 업보라고 볼 수 있는, 그리스 내 튀르키예계 공동체가 그리스의 변방인 서트라키아와 도데카니사 제도 정도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에서 거의 해체되어버린 일도 일어났지만 말이다.

막상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 모욕적이고 가슴아픈 건 매한가지겠지만, 사실 중세와 근세 지중해권의 관점에서 보면 저렇게 특정 정복국가가 피정복민들의 종교적 중심지를 뺏어 새로운 지배자들의 종교적 건물로 재개장하는건 해당 국가의 장기적인 종교적 관용, 불관용 정책 자체하곤 큰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여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있는데, 애초에 이슬람권, 기독교권 불문하고 지중해와 유럽권 도시 전반에서 주교좌 성당, 금요일 모스크 같은 종교적 중심지는 시장과 시청 같은 다른 경제, 정치적 실무 기관하고 딱 붙어있는게 일반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특정 도시를 지배하는 정치 집단의 이데올로기는 이런 중심적 건물에 녹아들기 마련이고, 이런 문맥에서 피정복민들에 대한 관용과는 별개로 방금전까지 치열하게 맞서싸우던 적대 세력의 온갖 왕사, 휘장, 예술품 기타등등을 휘황찬란하게 전시하고 있는 중앙 종교 건물을 그나마 좀 세련되게 용도만 바꾸든, 미개인마냥 우악스럽게 때려부수든 간에 어떻게든 새로운 정복자의 정통성을 과시할 용도로 바꾸는 건 필연적인 선택이다.

당장 여기서 서술된 오스만 제국을 비롯한 기독교 세력과 싸운 서아시아 이슬람 국가들도 그랬고, 이전 중세 레콩키스타 전쟁 시절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카스티야, 아라곤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 무어인들을 정벌하면서 쿠르투바, 잇시빌랴, 가르나타 등 무어인 도시의 중심 모스크들은 재깍재깍 기독교 성당으로 개조했지만, 막상 무슬림들에 대한 강제 개종과 추방은 300-200년 뒤인 1400년대 후반에서야 집중적인 국가 공식 정책이 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정복한 기독교 정복지들도 동네의 중심 성당들은 모스크로 개조했지만, 이보단 약간 급이 낮거나 도시 중심지에서 떨어져있는 성당은 피정복민들이 쓰라고 존립시킨 경우가 보편적이다. 동로마 제국시절부터 오스만 정복 이후로도 한번도 모스크로 개종당한적 없고 지금까지 계속 정교회 성당으로 남은 진귀한 기록을 가진 이스탄불 시내의 몽골인들의 성모 성당이 이러한 경우.

하여간 오스만 제국은 이교도에게 특별히 잔혹한 나라는 아니었지만 특별히 관대한 나라도 아니었다. 이베리아라면 모를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이교도라고 무조건 죽이거나 추방하는 일은 없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처럼 타종교 비율이 높았다면 오스만 치하 기독교도나 유대교도처럼 2등 시민으로 살았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그랬다. 되려 신교도 국가들은 오스만과 친선관계를 유지하며 몇 안되는 자국 내 무슬림에게 특혜를 부여하기도 했다.
 

출처 : 나무위키

 

 

 

 

 

 

 

 

 

 

 

 

 

 

 

 

 

 

 

 

 

저게 붓글씨인지, 그린 것인지......????

 

 

 

 

 

 

 

 

 

스쳐 지나가서 이곳에 뭔 관광지가 있는지 모르겠음.

  





2. 파묵칼레

 

 

 

 

 

 

 

 

 

 

 

 

 

 

 

 

 

 

 

 

 

 

 

 

 

 

 

 

 

 

 

 

 

 

 

 

 

 

 

 

 

 

 

 

 

저걸 타고 구경하면 60 유로.

 

 

 

 

 

 

 

 

 

 

 

 

 

 

 

 

 

 

 

 

 

 

 

 

 

 

 

 

 

 

 

 

 

 

 

 

 

 

 

 

 

 

 

 

 

 

 

 

 

 

 

 

 

 

 

 

 

 

 

 



 

 

5.  에페소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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