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시모음

2022. 12. 6. 18:00詩.

 

전율

 

누구한테 왜 당했을까

짓뭉개진 하반신을 끌고

뜨건 아스팔트 길을 건너는 지렁이 한 마리

죽기보다 힘든 살아내는 고통이여

너로 하여

모든 삶은 얼마나 위대한가 엄숙한가.

 

 - 유안진-

 

 

 

 

 

 

 

/유안진

 

 

한때는 나도 잘 나가는 잎채소 배추였지
성깔 하나 괴팍해서 어디서나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지,

모가지도 몸뚱이도 오그라들고 옴추려 들다가 뿌리채소가 되었지

 

나도 한 시절은 남자 일수 있었지
활개쳐 세상을 휘젓고 쏴 댕기며 기고만장 거친 사내, 그런 나한테
서 달아나고 망명해서 드디어 해방되었지, 해방되고 보니 여자였지

 

나는 결국 지금의 내가 되었지
나는 누구 아닌 나한테서 가장 오해받으며 살고 있지.

 

 

 

 


슬픈 약속

/유안진

 

 

우리에겐 약속이 없었다
서로의 눈빛만 응시하다
돌아서고 나면 잊어야 했다.

 

그러나 하루만 지나도
어김없이 기다려지는
너와의 우연한 해우.

 

그저 무작정 걸어봐도
묵은 전화수첩을 꺼내
소란스럽게 떠들어 봐도

 

어인 일인가,
자꾸만 한쪽 가슴이 비어옴은.

 

수없이 되풀이한 작정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닿았음직한 발길을
찾아나선다.

 

머언 기약도 할 수 없다면
이렇게 길이 되어 나설 수밖에.
내가 약속이 되어 나설 수밖에

 

 

 

 


물오징어를 다듬다가

/유안진

 

 

네 가슴도 먹장인 줄 미처 몰랐다
무골호인(無骨好人) 너도 오죽했으면
꼴리고 뒤틀리던 오장육부가 썩어 문드러진
검은 피 한 주머니만 껴안고 살다 잡혔으랴
바닷속 거기도 세상인 바에야
왜 아니 먹장가슴이었겠느냐

 

나도 먹장가슴이란다
연체동물이란다
간도 쓸개도 배알도 뼛골마저도 다 빼어주고
목숨 하나 가까스로 부지해왔단다
목고개 오그려 쪼그려
눈알조차 숨겨 감추고
눈먼 듯이, 귀먹은 듯이, 입도 없는 벙어린 듯이
이 눈치 저 코치로
냉혹한 살얼음판을 어찌어찌 헤엄쳐왔던가

 

 

 

 


13평의 두 크기

/유안진

 

 

  너무 늦은 축하가 미안해서, 양초와 하이타이 등을

잔뜩 사들고 인사를 갔었지. 13평 임대아파트에서

13평 아파트로 이사 간 집으로.

 

  쉰셋 나이에 처음 제 집에 살아본 안주인은, 종아리까지

걷어 보이며 불평불만이었지. 석달이나 지났어도

부은 것이 안 풀린다고, 괜히 넓은 집 사서 다리만 아프다고,

청소하기도 힘들다고, 평수는 같아도 크기는

엄청 다르다고.

 

  그녀의 그 어불성설(語不成說)의 화법이 이따금씩

내 두통을 쫓아주며 메아리치곤 하지.

 

 

 

 


병마총

/유안진

 

 

  서안 가서 병마총을 구경하다가, 되살아난 미치광이 폭군을 보았다,

재위 2년부터 제 무덤을 팠다는 진시황이 나를 픽 웃었다

 

  나도 중학교 적부터 내 무덤을 파고 싶었지, 시인 외에는 아무것도

안 되려던 그 때부터, 원고지 속으로 숨고 싶었지, 내가 싫어하는

<나들>을 깊이 묻어서 감추고 싶었지, 술 담그고 싶었지, 장 담그고

싶었지, 아니지, 원고지에 묻혀서 부활하고 싶었지, 포도주, 간장,

고추장처럼 <다른 나들>로 되살아나고 싶었지

 

  아직도 원고지에다 내 무덤을 파고 있다, 구겨 뭉쳐 던져버린

파지에서 살아나지 못하는 나무들의 비명에 귀 틀어막으며,

새 원고지에다 내 무덤을 파고 판다, 나도 나의 병마총에 미쳐,

혈세를 강탈하는 나의 폭군이면서-.

 

 

 

 


봄비 한 주머니

/유안진

 

 

320밀리리터짜리
피 한 봉다리 뽑아 줬다
모르는 누구한테 봄비가 되고 싶어서
그의 몸 구석구석 속속들이 헤돌아서
마른 데를 적시어 새살 돋기 바라면서

 

아냐 아냐
불현듯 생피 쏟고 싶은 자해충동 내 파괴본능 탓에
멀쩡한 누군가가 오염될라
겁내면서 노리면서 몰라 모르면서
살고 싶어 눈물나는 올해도 4월
내가 할 수 있는 짓거리는 이 짓거리뿐이라서―.

 

 

 

 

 

 

 

 

 

 

 

 

 

 

 

 

 

 


유안진 시 모음 22편











말하지 않은 말

유안진


말하고 나면 그만
속이 텅 비어 버릴까봐
나 혼자만의 특수성이
보편성이 될까봐서
숭고하고 영원할 것이
순간적인 단맛으로 전락 해버릴까 봐서
거리마다 술집마다 아우성치는 삼사류로
오염될까봐서
'사랑한다' 참 뜨거운 이 한마디를
입에 담지 않는 거다
참고 참아서 씨앗으로 영글어
저 돌의 심장부도 속에 고이 모셔져서
뜨거운 말씀의 사리가 되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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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을

유안진


이제는 사랑도
추억이 되어라

꽃내음 보다도
마른풀이 향기롭고

함께 걷던 길도
홀로 걷고 싶어라

침묵으로 말하면
눈 감은 채 고즈넉이
그려보고 싶어라

어둠이 땅속까지
적시기를 기다려
비로써 등불 하나
켜 놓고 싶어라

서 있는 사람은
앉아 있어야 할 때
앉아서 두 손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

두귀만 동굴처럼
길게 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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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꽃

유안진


지난여름 동안
내 청춘이 마련한
한줄기의 강물

이별의 강 언덕에는
하 그리도
흔들어 쌓는


그대의 흰손
갈대꽃은 피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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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익는 마을은 어디나 내 고향

유안진


섶 다리로 냇물을 건너야 했던 마을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가야 했던 동네
까닭없이 눈시울 먼저 붉어지게 하는
아잇적 큰 세상이 고향이 되고 말았다.

사람들의 희망도 익고 익어 가느라고
감 따는 아이들 목소리도 옥타브가 높아가고
장마 끝 무너지다 남은 토담 위에 걸터앉은 몸 무거운 호박덩이
보름달보다 밝은 박덩이가 뒹구는 방앗간 지붕에는 빨간 고추밭
어느 것 하나라도 피붙이가 아닐 수 없는 것들
열린 채 닫힌 적 없는 사립을 들어서면
처마 밑에 헛기침 사이사이 놋쇠 재터리가 울고
안마당 가득히 말라 가는 곶감 내음새
달디 단 어머니의 내음새에 고향은 비로소
콧잔등 매워오는 아리고 쓰린 이름

사라져가는 것은 모두가 추억이 되고
허물어져 가는 것은 모두가 눈물겨울 것
비록 풍요로움일지라도 풍성한 가을열매일지라도
추억처럼 슬픈 것, 슬퍼서 아름다운 것, 아름다워서 못내 그립고 그리운 것
그렇게 고향은 비어가면서 속절없이 슬픈 이름이 되고 있다
허물어져 가면서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 떠난 빈 집을 붉게 익는 감나무 저 혼자서 지켜 섰다
가지마다 불 밝히고 귀 익은 발자욱소리 기다리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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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 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어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볕은
성자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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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는 날에

유안진



열매 맺기 위해서
꽃은 떨어져야 한다

된서리를 맞아야
열매 또한 무르익음을

이 확실한
자연법칙을 믿으며

인간 세상
눈비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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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차라리
내가 반쯤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철따라
궂은 비 뿌리는 내 울안
벙어리 되어 흘려 보낸
어두운 세월의
어느 매듭에서


눈먼 혼을 불러
풋풋이 움 틔우며
일월을 거느려
그대 오는가


목숨과 맞바꾸는
엄청난 이 보배
차라리
내가
온채로 죽어야
그대를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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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쌓인 길에서

유안진


한 번 더
나를 헐어서
붉고 붉은 편지를 쓸까 봐

차갑게
비웃는 바람이
내 팽개친들 도 어떠랴

눈부신 꿈 하나로
찬란하게
죽고만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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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유안진


사람이 그리운 날엔
눈사람을 만들자

꿈의 모습을
빚어보자

수묵화 한 폭속에
호젓이 세워놓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 겨울을 견디리

꿈이여 언제나
꿈으로만 사라져도

못내 춥고 그리운 날엔
사람 하나 지어 눈 맞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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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

유안진


엄동 눈바람에
어쩌자고
피느냐

좋은 세월
다 놓치고
이제야 피느냐

목숨마저 켜 드는
등불임에도

별무리마저 가슴 죄어
차마
지켜 새우는

겨울 뜨락의
한 자루 촛불
나의 신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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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유안진


한얼산
기도원 올라가는 길에
소슬히 웃고 선
막달라 마리아

멸시를 이기더니
통곡을 삼키더니
영원한 남성의
영원한 사랑을 획득하고 만
여자

어리석은 그 여자가
지혜롭게 곰삭인
잘못 살아온 세월의 빛깔

보라빛 연보라
천상의 웃음 띠고
마중 나오신 성녀
막달라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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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기에

유안진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까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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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저 쉬임 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났음이라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 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
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랑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다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박꼭질 노니는 산골 자기에는
뻐꾹뻐꾹 사랑 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러움증 산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흥 빛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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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꽃

유안진


손발이 시린 날은
일기를 쓴다

무릎까지 시려오면
편지를 쓴다
붙이지 못할 기인 사연을

작은 이 가슴마저
시려드는 밤이면
임자 없는 한 줄의
시를 찾아 나서노니

사람아 사람아
등만 보이는 사람아

유월에도 녹지 않는
이 마음을 어쩔래
육모 서리 꽃
내 이름을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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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가는 길

유안진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
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
오십령 고개부터는
추사체로 뻗힌 길이다
천명(天命)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
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 길을
닳고 터진 알발로
뜨겁게 녹여 가시란다
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
자욱자욱 붉게 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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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에 즈음하면

유안진


송년에 즈음하면
도리없이 인생이 느껴질 뿐입니다
지나온 일년이 한생애나 같아지고
울고 웃던 모두가
인생! 한마디로 느낌표일 뿐입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자꾸 작아질 뿐입니다
눈 감기고 귀 닫히고 오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모퉁이길 막돌맹이보다
초라한 본래의 내가 되고 맙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신이 느껴집니다
가장 초라해서 가장 고독한 가슴에는
마지막 낙조같이 출렁이는 감동으로
거룩하신 신의 이름이 절로 덤겨집니다

송년에 즈음하면
갑자기 철이 들어 버립니다
일년치의 나이를 한꺼번에 다 먹어져
말소리는 나직나직 발걸음은 조심조심
저절로 철이 들어 늙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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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할 수 있는 용기

유안진


눈부신 아침은
하루에 두 번 오지 않습니다.

찬란한 그대 젊음도
일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질머리 사랑도
높푸른 꿈과 이상도
몸부림친 고뇌와
보석과 같은 눈물의 가슴앓이로
무수히 불 밝힌 밤을 거쳐서야 빛이 납니다.

젊음은 용기입니다.
실패를 겁내지 않는
실패도 할 수 있는 용기도
오롯 그대 젊음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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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고백

유안진


먼 어느 날 그대
지나온 세상 돌이켜 제일로 소중했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당신이라 말하겠습니다

먼 어느 날
꽃잎 마저 어둠에 물들어
별리의 문 닫힌 먼 어느 날
그대 두고 온 세상 기억 더듬어
제일로 그리웠던 이

그 누구였느냐고 묻는 음성 들리면
나는 다시 주저 없이 그 사람
당신이라 대답하겠습니다

혼자 가는 길 끝에
어느 누구도 동행 못하는
혼자만의 길 끝에 행여 다음 세상 약속한 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내겐 늘 안개 같은 이름
당신을 말하겠습니다

당신 사연 내들은 적 없고
내 사연 또한 당신께 말한 적 없는 그리운 이

세월 다 보내고 쓸쓸히 등 돌려 가야 하는
내 막다른 추억 속에서 제일로 가슴 아픈 사랑
있었느냐고 묻는 말 있으면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내 마지막 한 마디
그 사랑 당신이었노라고
고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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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기도

유안진


아침마다
눈썹 위에 서리 내린 이마를 낮춰
어제 처럼 빕니다.

살아봐도 별수없는 세상일지라도
무책이 상책인 세상일지라도
아주 등 돌리지 않고
반만 등 돌려 군침도 삼켜가며
그래서 더러 용서도 빌어가며
하늘로 머리 둔 이유도 잊지 않아가며

신도 천사도 아닌 사람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따라 울고 웃어가며
늘 용서 구할 꺼리를 가진
인간으로 남고 싶습니다.

너무들 당당한 틈에 끼여 있어
늘 미안한 자격 미달자로
송구스러워하며 살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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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도 하 많은 고향 들녘 뜸

유안진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고향은 신비로운 동화의 세상
그래서 꿈도 희망도 아이들과 함께 자라는 세상
산봉우리, 고갯마루, 산골짜기, 냇물과 바윗돌, 한 그루 나무에까지
전설을 품어 신비로운 힘과 꿈과 위로과 웃음의 비결이 되었지

집채만한 거북이가 마을로 기어드는 거북바위마을도
입향조가 이름하신 구입리 씨족마을
거북처럼 오해 살며 번성하는 장수마을 거북바위는
생남 등과 와 승진 합격 치병들
어던 소원도 다 이루어준다는 거북바위는 주민의 신령스런 종교가
되어,
거북들, 거북뜸, 거북봉, 거북재, 거북골, 거북내, 거북다리목...
조상들의 함자도 구봉이 구형이 구문이 구동이 구호 구식 구놈이 구순이...
그 어르신네 고손자들 아명도 거복, 거남, 거북, 거돌, 거식, 거남, 거봉...
새댁네 모두는 아이 아닌 거북새끼를 낳으니
거북처럼 크게 되어 돌아오는 정기 서린 길승지 명당마을
어떤 가뭄에도 풍년농사가 된다는 거북뜸을 들녁으로 농사지어
사는 농촌마을
태풍과 장마에도 거북뜸 올벼는 잘도 익은 풍년

도깨비와 불귀신과 서낭신도 거북을 닮아서
어른 아리 없이 한 두가지 이야기를 지어 보태는 이야기꾼 마을
아무리 초라하고 볼품 없어져도
고향은 이렇게 전해지는 이야기가 많아서 더욱 고향다웁고
알수 없는 영험스런 힘으로 타관 땅 어디에서도 굳세게 살아
성공하여 돌아가는 주인공이 되게 하는 바로 그런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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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지는 날

유안진


살았던 곳들은
모두 다 고향들이었구나
괄시받은 곳일수록
많이 얻고 살았구나
행차 지나간 뒤에 나팔 부는 격이지만
갈지자로 세상을 살고 나서
불현듯 마음 착해지는 날은
울고 싶은 사람 뺨쳐주는 적선이라도 하고 싶다
그런 악역이라도 자청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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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파람을 불어 다오

유안진


이 허황된 시대의 한 구석에
나를 용납해준 너그러움과
있는 나를 없는 듯이 여기는
괄시에 대한
보답과 분풀이로

가장 초라하여 아프고 아픈
한 소절의 노래로
오그라들고
꼬부라지고 다시 꺾어 들어서

노래 자체가 제목과 곡조인
한 소절의 모국어로
내 허망아
휘파람을 불어 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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