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그림들》

2021. 9. 26. 14:19미술/미술 이야기 (책)

 

살아남은 그림들

─ 파란의 시대를 산 한국 근현대 화가 37인의 작품과 삶

저자 조상인 출판 눌와  |  2020. 9. 11.

 

 

 

나혜석은 생전에는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사후에는 한국전쟁 중에 그림을 보관하던 오빠 집을 북한군이 점령하는 바람에 '살아남은 그림'이 50여 점에 불과하다.

구본웅은 일제가 소개령을 내려 쫒기다시피 이사한 수원에 그림을 옮겼으나 이후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집이 통째 사라졌다.

아마도 한국인 최초의 완전추상을 이뤘을 유영국은 태평양전쟁의 기운이 짙어지자 일본유학생활을 황급히 정리하며 작품들을 도쿄의 지인에게 맡기고 귀국했으나 작품은 영영 사라졌고, 한국전쟁으로 서울집에 두고 간 작품도 일고 말았다.

온갖 난관을 헤치고 살아남은 그림들이 바로 이 책을 채우고 있다.

 

 

 

 

목차

 

들어가며

1 고뇌에서 움트는 희망


나혜석 - 나는 인형이었네, 그네의 노리개였네
구본웅 - 붉은 눈빛에 담은 식민지 지식인의 억눌린 내면
남 관 - 나는 두 번의 전쟁을, 숱한 죽음을 보았다
이쾌대 - 해방의 기쁨을 쏟아내고, 역사의 아픔에 묻히다
이중섭 -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윤형근 - 굴곡진 시대를 겪으며 추구한 삶의 성찰
손상기 - 삭막한 도시, 하지만 희망은 있다



2 사무치는 사랑, 그리운 가족


배운성 - 옹기종기 모인 대가족, 애틋한 그리움을 채우다
김환기 - 그리운 이의 눈동자 같은 점을 모아서
최영림 - 가족과 헤어진 화가가 그린 전쟁의 비극
장욱진 - 까치 아빠의 고독과 성찰, 안식처는 가족
이성자 - 지구 반대편 향해 그리움으로 놓은 다리
김흥수 - 기인 화가를 가장 잘 이해한 이, 그의 아내



3 이 땅, 이곳의 사람들


오지호 - 초겨울 햇살의 따사로움까지 담은 청명한 그림
이인성 - 핏빛 붉은 땅, 살아남아 그날을 기다리리
박수근 - 그림으로 그린 인간의 선함, 진실함
전혁림 - 하늘을 끌어놓은 듯 푸른 남해, 정겨운 항구
변월룡 - 고려인 화가가 그린 고국의 봄
박고석 - 전쟁 속에서도 놓지 않은 삶에 대한 의지
변시지 - 처연한 바람에 휩싸인 누렇고 검은 제주



4 자연의 아름다움, 그 생명력


도상봉 - 지친 마음을 보듬는 싱그럽고 온화한 꽃다발

 

 

 


윤중식 - 그렇게 시간은, 빛은 층층이 내려앉는다
유영국 - 산은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이대원 - 풍요와 행복을 품은 생동감 넘치는 산
김종학 - 자유롭게 어울려 살 부비며 함께 사는 자연

 

김종학 화백 - ' 여름'

 

김종학 화백 - ' 야생화 '

 

김종학 화백 - ' 야생화 '

 



5 전통에서 벼려낸 새로움


이상범 - 일상의 자연, 대가가 사랑한 한국의 풍경
변관식 - 반골 화가가 그려낸, 꿈틀대며 치솟은 바위
이응노 - 통일과 화합을 염원하는 흥겨운 군무
권영우 - 찢긴 한지에 스민 젊은 날의 아픈 초상
서세옥 - 화폭 가득, 붓 지난 자리마다 펼쳐지는 춤사위



6 끝없는 미의 추구


곽인식 - 물성 탐구의 효시,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권옥연 - 휘영청 뜬 보름달, 간밤 꿈 같은 풍경
김창열 - 쏟아져 내릴 듯한 송글송글 물방울
박서보 - 비움이 새겨진, 체념한 듯 발버둥치는 선
이우환  -화폭 뒤덮은 수백 개의 점, 교감의 미학
최욱경 - 그래도 내일은, 다시 솟는 해로 밝을 것입니다
이승조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출판사서평

맑은 별빛처럼 청아하다. 치열한 근현대사를 뚫고 살아남은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노라면 우리 앞 세대의 삶의 무게까지 진지하게 다가온다. ‘역사는 발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치지 않는 현장 인터뷰와 치밀한 사료의 교차 점검으로 망각으로 흐를 한국의 근현대미술이 새로운 서사를 갖추고 재탄생하게 되었다. 기쁘고, 반갑고, 다행이다.
-양정무(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 근현대미술의 아프고 치열했던 발자취


본격적으로 서양미술이 들어온 지 백여 년, 한국 근현대미술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화가들을 비롯해 오지호, 변관식, 김창열, 이우환, 이승조 등 각자의 영역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미술가 37인의 삶과 작품을 담았다.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고, 드라마틱했다. 전쟁과 독재, 가난 탓에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고난을 겪어야 했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먹고살기도 힘든 와중에 떠난 유학 생활 중 생계를 유지하려 막노동을 한 이들도 있다. 하지만 모두들 아무리 힘들어도 그림 그리기를,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길 멈추지 않았다. 숨 막히는 식민지배 하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붓을 놀렸고, 총탄이 날아드는 피난길에도 스케치북을 들고 다녔다.
그림이 영원히 사라지고 말거나, 혹은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긴 경우도 많다. 나혜석과 구본웅의 그림은 상당수가 전쟁의 와중에 불타 사라졌다. 이중섭의 그림은 친구 박고석의 집에서 불쏘시개로 사라진 것도 여럿이다. 월북화가 이쾌대의 그림은 남쪽에 남은 부인이 다락방에 꽁꽁 감추어둔 덕에 엄혹한 시절을 견뎌내고 다시 빛을 볼 수 있었고,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시기인 1940년 전후에 완전 추상을 이룬 유영국의 초기작들은 망실된 지 반세기가 지난 뒤에야 딸 유리지와의 협업으로 재제작되어 비로소 세상에 소개될 수 있었다. 어려운 시절을 견뎌낸, 말 그대로 ‘살아남은’ 그림들이 책에 실려 독자들에게 소개된다.

그림, 시대와 인생을 담다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꼭 그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예술은 시대의 거울이 되기 마련이다. 화가의 삶, 그리고 그림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감동은 배가 된다. 그렇다면 일제의 식민지배, 해방 이후 겪은 분단과 한국전쟁, 독재와 그에 맞선 투쟁, 급속한 근대문물의 유입과 산업화까지. 이 모두를 불과 한 세기에 겪은 우리 근현대사는 미술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었지만 숱한 시련을 겪어야 했던 나혜석은 어딘가 불안한 눈빛의 〈자화상〉을 남겼다. 일본을 통해 서양미술을 들여왔다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오지호는 본인도 일본에 유학해 미술을 배웠지만 이후 한국의 빛과 색을 그려내려 애썼고 또 성공했다. 한국전쟁으로 가족과 생이별한 최영림은 전쟁이 끝나고 20년도 더 지나서야 그간 간직해 온 감정을 실어 한국전쟁의 비극을 그렸다. 강직한 성격 탓에 권위주의 정권...

 

 

 

 

 

 

 

 

 

  이성자 (1918-2009) 

 

“사실 아버지는 이혼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 시대엔 남자 외도를 아내가 그냥 참아야 하는 분위기였고, 아버지가 우리들(세 아들)까지 뺏어왔으니까, 어머니가 자식들 보고 싶어서 굽히고 들어올 줄 아셨던 게지. 그런데 어머니는 그러기는커녕 프랑스로 떠나신 거예요. 아버지는 충격 받으셨지.”

이성자(1918-2009) 화백의 막내아들인 신용극 유로통상 회장이 들려준 이야기다. 예전에 나는 이 화백이 51년 파리로 떠난 게, 외도한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라고 잘못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시작한 이성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스케일 큰 추상화들, 삶의 흔적이 담긴 자료들에는 그런 스토리에 어울릴 법한 처연함 대신 호방한 기개가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자의 ‘투레트의 밤 8월 2, 79’(1979), 캔버스에 아크릴릭, 150x15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의 ‘여성과 대지’ 연작 중 하나인 ‘내가 아는 어머니’ (1962), 캔버스에 유채, 130x195cm.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를 프랑스 화단에서 처음 인정받게 한 ‘여성과 대지’ 연작도 그렇다. 모국과 아이들을 생각하며 “땅을 깊이 가꾸듯” 그렸다는 두터운 질감의 추상화들이다. 거기엔 분명 그리움의 서정이 느껴지지만, 비애감보다는 대지를 경작하고 굽어보는 자의 넉넉함이 있었다.

또한 ‘도시,’ ‘음과 양’ 등의 연작에서는 동아시아 상형문자에 바탕을 두고 이성자가 창조한 추상 기호들이, 마천루에서 내려다본 기하학적 도시풍경, 또는 나무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작가의 말대로 음과 양, 동양과 서양, 자연과 기계의 합일을 추구하는 작품이었고, 동아시아 여성인 자신이야말로 그 균형 잡힌 합일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엿보였다. 절망에 빠져 떠밀리듯 프랑스로 간 ‘비운의 여인’의 작품이라고 볼 수 없었다.

 

결국 이성자기념사업회를 이끌고 있는 신 회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과의 생이별에 이 화백 자신의 선택도 일부 있었다. 오로지 자식을 위해 남편의 외도 등 모든 것을 참아 넘기며 이름 없이 ‘누구 어머니’라고 불리며 사는 대신, 홀로 서서 ‘이성자’라는 이름으로 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이름에는 제1세대 한국 추상미술의 주요 화가, 한국 최초의 성공적인 해외파 작가, “한국과 프랑스 모두에게 현대 미술사의 중요한 증거”(미술사학자 강영주, 정영목), “한국과 프랑스의 풍경과 전설이 서로 대화하도록 해준 동녘의 대사(大使)”(소설가 미셸 뷔토르) 등의 칭호가 붙는다.

 

사실 아들들은 어머니의 그 선택에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65년 이 화백이 금의환향해 서울대학교에서 개인전을 열면서 15년 만에 성장한 아들들과 재회했을 때, 아들들은 어머니가 미안해하길 내심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화백은 아들들에게 당당했다.

“그땐 이해가 안 갔는데 더 나이 먹고 어머니 계신 프랑스를 드나들며 마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어머니의 그런 의연한 태도, 또 예술과 삶에 대한 치열함이 저희 3형제에게 영감을 주어서 저희가 강하게 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 회장의 말이다.

 

이성자는 불어도 잘 못하고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30대 중반에 파리에서 처음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 하는 일인 의상 디자인을 정식으로 배워 (그는 아들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곤 했다.) 한국에 와서 의상실을 열 생각이었었다. 하지만 그의 화가로서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의 권유로 파리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해 회화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좁아터진 다락방에 살며 뼈를 깎는 노력을 한 끝에 불과 3년여 만에 성공적인 화단 데뷔를 하게 됐다. 신 회장의 말대로 “타고난 재주와 절박함이 만난 결과”였다.

그 후 이성자는 ‘여성과 대지’ 연작으로 프랑스 화단의 인정을 받고, 샤르팡티에 같이 당대에 유명한 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성공한 연작에 안주하지 않고 5~10년마다 새로운 주제와 화풍과 재료로 새로운 연작을 실험하며 정진해갔다. 회화뿐만 아니라 목판화와 도예도 깊게 탐구했다.

 

노년기인 92년에는 프랑스 남부 투레트에 많은 미술가들의 로망대로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스튜디오를 짓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음과 양의 모티프를 딴 두 동의 건물이다. 그곳에서 ‘양의 시간’인 낮에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올리는 ‘양의 작업’ 회화를 하고 ‘음의 시간’인 밤에는 목판을 파는 ‘음의 작업’ 판화를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치열하게 작업하셨습니다. 한국에 오실 때는 도예 작업에 집중하곤 했죠. 한번은 프랑스에서 어머니와 위스키를 마시며 (어머니가 위스키를 좋아하셨어요.)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머니께 여쭤봤습니다. 다른 많은 화가들은 어떤 작품이 성공하면 계속 그 스타일로 밀고 나가던데, 어머니는 왜 계속 바꾸시느냐고, 왜 편한 길을 가시지 않느냐고. 어머니가 그러셨죠. ‘편한 게 뭐냐. 예술가는 멈추면 안 된다. 내 그림이 50년 후,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생각하면서 계속 새로운 걸 실험해야 한다.’ ”

그런 그를 신회장은 “존경하는 예술가이자 한 인간이자 어머니”라고 했다. ‘희생하며 산 불쌍한 엄마’ 대신 이성자는 그런 존재가 된 것이다.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삶이 그의 말대로 50년 후, 100년 후의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발상의 전환을 촉구한다. ‘엄마는 희생하는 존재’라는 관습적 사고에 눌려 죄책감에 시달리는 워킹맘들에게, 또 새로운 도전을 하기엔 늦었다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 말이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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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상과 추상이 어우려진 초창기 작업을 거쳐 1960년 이후 삶의 존재론적인 근원에 대한 탐색을 여성과 대지, 음과 양의 세계 등의 기하학적인 상징물로 표현하셨고 말년에는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성찰을 주제로 행복한 미학의 세계 속에서 2009년 타계하셨습니다.

 

            오작교 1965, 146×114㎝, 캔버스에 유채

 

  

 

  목동자리의 도시 11월, 2003, 73×92cm, 캔버스에 아크릴



출처: https://powerspirit.tistory.com/1 [천리마의 꼬리를 잡고]

 

 

 

 

 

 

 

 도상봉 

 

 

 











































































































































































출처: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가을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