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告白』

2021. 8. 13. 19:45책 · 펌글 · 자료/문학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적 순간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안도현 시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 문예반에 입학하여 문학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인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다. 이후 전라도에서만 40년을 살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림살이를 늘려왔다. 경상도에서 삶과 문학의 뿌리를 내린 시인은 전라도에서 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그리하여 영남과 호남의 정서를 한 몸에 갖춘 보기 드문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얼마 전 안도현 시인은 전라도를 떠나 고향 예천으로 귀의했다. 자신의 삶이 시작된 곳에서 또 다른 문학의 발아를 꿈꾸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고백』은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거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해, 시를 쓰는 비밀을 간직하고 살기 시작하던 나의 스무 살에게” 바치는 책이다. 『고백』에는 안도현이 걸어온 시인의 길, 시인의 눈으로 본 것, 시인의 마음으로 감각하고 체득한 것,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적 순간들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지나온 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격려와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

변하지 않는 견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
안도현 시인에게 문학은 삶에 대해 질문하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 노정에서 발견한 깨달음을 이 책에서 ‘고백’한다. 총 5부로 구성된 『고백』에는 시인의 예리한 눈길로 포착해낸 대상과, 그 대상과의 관계맺음을 서정적 언어로 표현해낸 문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누군가가 지구를 움직이겠다고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누군가가 손에 들었던 돌멩이 하나를 땅에 내려놓고 있을지도 모른다.”(본문 23쪽)

싸움은 대항함으로써 승리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까지 수용하고 포용하는 데 있다. 상대편에서 날아온 돌멩이에 맞서 자신도 돌멩이를 들기보다는 슬그머니 돌멩이를 내려놓는 자세. 안도현 시인은 스스로를 무장해제 함으로써 모든 갈등과 폭력을 무력화시키는 사랑의 길을 제시한다. 아울러 변하지 않는 견고한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녁은 안으로 나를 집어넣어야 하는 시간이다. 나무들이 그렇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본문 114쪽)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가. 떠날 때 보면 안다.”(본문 153쪽)

안도현의 문장은 주체와 객체를 전복해서 표현함으로써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안도현의 문장은 거룩한 삶의 경구를 동원해서 읽는 이를 압도하지 않는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처럼 자분자분 다가오는 안도현의 문장을 읽다 보면 어느새 시인이 꿈꾸는 세계에 가닿게 된다. 시인이 꿈꾸는 세계는, 자연의 변화와 섭리 속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
안도현 시인은 ‘시적인 순간’에 대해서도 말한다. 시인은, ‘우주가 불러주는 노래를 받아쓰는 사람’이다. 시인이 되려는 사람이라면, 재능에 기대어 시를 기다리지도 말고 재능이 없다고 포기하지도 말고 스스로 운명의 조타수가 되어 시를 찾아 나서라고 조언한다. 시인은 사실보다 진실에 복무하는 사람이다, 시는 사람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시인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발명가’가 아니라 ‘발견자’에 가깝다고 정의한다.

“시를 쓰는 일은 이전에 쓰인 시가 낳은 오류에 대한 반성의 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반성을 자꾸 덧칠하는 일이다. 자기 자신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꽃잎 위에 또 꽃잎 쌓이듯이.”(본문 213쪽)

“시를 쓰는 사람의 귀는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해 오감을 활짝 열어놓을 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를 쓰는 일은 세상을 두루 공부하는 일이다.”(본문 214쪽)

『고백』에는 안도현 시인의 빛나는 문장과 함께 다양한 사진이 수록되어 읽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제공한다. 계절마다 이 땅을 아름답게 수놓는 들꽃과 나무들, 산과 강과 바다의 멋진 순간을 담은 사진과 시인의 문장이 잘 어우러져 감동을 더욱 배가시킨다. 부록으로 안도현의 문학적 연대기를 수록하여 작가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1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은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쯤에 발생한다.

어른이란 열일곱 열여덟 살에 대한 지루항 보충 설명일 뿐이다.

하지만 그 나이를 지난 후에는 다시 그 나이로 돌아갈 수 없다.

 

 

 

2

진정한 여행은 세상의 출구이자 입구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아는 것, 돌아올 때 돌아올 줄 아는 것이다.

모아둔 돈을 쓰기 위해, 여가를 즐기기 위해, 눈요기를 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3

주인이란, 손때를 가장 많이 묻힌 사람을 말한다.

절실하지 않은 책은 두 번 다시 읽지 않는다.

손때 묻은 물건들이 아름다운 것은 손때를 묻힌 사람의 간절함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4

사람은 앞모습을 보고 만난다. 앞모습을 보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앞모습을 보면서 결혼사진을 찍고 '우리는 하나'라고 굳게 믿게 된다.

그러나 균열의 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랑하던 대상에게서 아예 등을 돌리고 떠나는 것을 고려하거나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등을 돌린다는 것은 뒷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앞모습에 빠져 있다가 보면 뒷모습을 의외로 쉽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사랑의 속성이다.

옃모습이라는 말, 얼마나 좋은가.

앞모습만 사랑하지 말고 옆모습도 사랑할 일이다.

........

 

 

5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그저 '보기(見)'가 아니라 '꿰뚫어보기(觀)'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통찰력이 가미되어야 예술로서 요건을 갖추게 된다는 뜻이다.

사진가는 대상을 선택한 다음, '꿰뚫어보기'에 의해 셔터를 누른다.

선택에 의한 사진은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되고, 예술가로서의 세계관을 강력하게 드러내게 된다.

 

 

6

국도변의 낡은 정미소를 보면 나는 가슴이 아프다. 녹슨 양철 지붕도 마음을 쓰리게 한다.

 

 

7

사람은 사람대로 사는 방식이 있고, 풀은 풀대로 사는 방식이 있다.

또한 풀들은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일생을 보낸다.

잎이 넓은 풀은 자기의 그늘을 더 많이 확보하려고 잎이 넓은 것이며,

그 끝이 날카로운 풀은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든 풀이든 얼마나 현명한가, 아니 얼마나 예리한가.

 

 

8

기차는 아무리 빨리 달려봤자 멀리는 못 간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달릴 뿐이다.

기차는 정해진 길밖에 갈 줄 모른다. 아침마다 풀잎 끝에 매달리는 이슬이 얼마나 영롱한지,

뽕나무에 열리는 오디의 빛깔이 얼마나 검고 윤이 나는지 기차는 알 수 없다.

그건 정해진 길만 달리기 때문이다.

 

 

9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서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10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가. 떠날 때 보면 안다.

 

 

11

모든 감동은 교감에서 온다.

詩의 감동은 일차적으로 시인과 독자의 교감, 즉 소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모든 시가 다 울림을 갖는 것은 아니다.

허망한 소통보다는 고독한 단절이 오히려 서로를 행복하게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12

한 편의 詩를 쓰는 일은 한 채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계도면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수행할 인부와 필요한 재료와 공사기간이 있어야 한다.

시가 하나의 유기체적 구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행을 바꾸거나 연을 나눌 때에도 시인의 의도가 충분히 개입해야 하는 것이다.

 

 

13

詩에서 묘사에 충실해야 하는 이유는 

대상의 현상을 생생하게 그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묘사의 생생함이 대상의 본질에 이르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묘사를 통해 대상과 시적 話者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14

처음부터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배 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놓기만 하는 詩는 나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어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나나 몸이 아플 것인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나를 슬프게 한다.

詩란 강물 위에서의 노 젓기와 같아서 감정을 밀고 당기는 데서 그 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한 자리에 뱅뱅 도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15

흔히 '시의 행간을 읽는다'고 할 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말의 뒷면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 행간은 시인이 버린 말을 읽는 일이며, 독자의 입장에서는 숨어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16

시를 보는 미학적 관점과 언어에 대한 경험이 자연스럽게 일치할 때 시적 감동은 증폭될 것이다.

 

 

17

시를 쓰는 사람의 귀는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을 향해 오감을 활짝 열어놓을 때 가능할 것이다.

 

 

18

아무리 아름다운 소재라고 하더라도

시인의 미적 인식에 의해 재발견되지 않으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으며

죽은 인식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죽은 인식은 죽은 언어를 불러온다. 시인은 죽은 언어를 과감히 버리고 살아있는 언어를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