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30. 20:41ㆍ책 · 펌글 · 자료/ 인물
김교신 金敎臣
1901(함남 함흥) - 1945. 4. 25
<요약>
순수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수립하고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주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 독립에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니던 중,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일본 무교회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 일원이 되면서 신앙적 토대를 쌓아 갔다. 1927년 귀국,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월간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1930년 6월부터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성서연구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죽었다.
<신앙의 형성기>
아버지는 염희(念熙)이고, 어머니는 양신(楊愼)이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 속에서 한학을 수학, 함흥보통학교를 거쳐 1919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했다.
1920년 4월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路傍傳道를 통해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에 접했다.
노방전도에 깊게 감명받아 4월 18일부터 도쿄에 있는 성결교회에 출석, 6월에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11월 교회내분에 깊은 충격을 받고 6개월 동안 교회출석을 끊고 방황하다가,
일본 無敎會運動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를 만나면서 체계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에 접하게 되었다.
그뒤 약 7년간 우치무라가 주도한 '성서연구회'의 일원으로 신앙적 토대를 형성시켜갔다.
그는 우치무라를 그리스도교 신자인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자주성을 주장한 일본의 진정한 애국자로서 이해하면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는 것이 조국 조선을 구하는 일'이라는 신념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성서연구회'에는 함석헌·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양인성(梁仁性)· 유석동(柳錫東) 등
조선인 유학생이 있었다.
이들과 더불어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체계적인 성서연구에 몰두했다.
1921년 세이소쿠 영어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옮겨 1927년 3월 졸업했다.
<국내활동>
1927년 4월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다음해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옮겨 이후 1940년까지 12년간 재직을 하다가
복음전도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1940년 9월부터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또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했지만,
1942년 3월 '성서조선사건'으로 15년에 걸친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는 박물학을 가리키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교사활동 이상으로 천직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쏟았던 것이
〈성서조선〉이라는 월간 종교잡지 발행과 성서연구집회를 가지는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함석헌· 송두용· 양인성· 유석동 등 우치무라 문하생들의 동인지로서 창간되었다.
제16호까지 편집책임자는 정상훈이었지만,
1930년 5월 제17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이 되어 1942년 3월 제158호까지 발간하였다.
〈성서조선〉 발행과 표리일체를 이루었던 활동은 일요일마다 열린 성서연구회였다.
이것은 1930년 6월부터 주로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성서연구회와 동시에 1932년 이후 매년 연말연시에 1주일 간 전국 각지의 신앙 동지 및 〈성서조선〉 독자들이 함께 모이는 동계성서집회를 약 10년 동안 계속했다.
성서연구회 및 성서집회에서 행한 연구 및 강의 ·강연은 〈성서조선〉에 게재되었다.
그는 참된 그리스도교를 천명하고 성서에 의하여 새롭게 거듭나는 인간을 만들어내,
조선의 참된 독립을 추구하는 것을 이러한 종교활동· 집회의 궁극적인 목표로 확신했다.
〈성서조선〉은 일제로부터 불온한 책으로 지목되어오다가,
1942년 3월호 권두언의〈조와 弔蛙〉가 조선민족의 순수한 영혼을 찬양했다는 이유로 폐간처분을 당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 송두용· 유달영· 김교신 등 13명이 투옥되어 1년 옥고를 치렀다.
1943년 3월 김교신은 불기소처분을 받아 출옥한 후 1년간 각지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1944년 질소비료공장회사에 현지징용 형식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무자의 복리후생을 위하여 교육· 의료· 주택· 대우 등을 개선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강제징용된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신앙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죽었다.
〈성서조선〉
성서조선 창간호 사람들이다. 앞줄 두 번째가 김교신
ⓒ Asfreeas/wikipedia | CC BY-SA 3.0
<무교회주의 신앙>
김교신의 무교회주의 신앙의 핵심은 순수한 '조선산(朝鮮産) 그리스도교'의 수립이었으며,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은 서양 교회의 모방에 대한 강력한 비판으로서 시종 反宣敎師的 색채로 차 있었다.
조선산 그리스도교의 수립이라는 목표는 예수의 복음에 토대를 둔 그리스도교적 애국심으로 발현되었다.
"김교신이 예수보다도 그의 조국인 조선을 더 사랑했다"고 한 송두용의 회고에도 나타나 있듯이,
그는 조국에 대한 애정(조국독립)과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일체화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적 과제의 인식과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독립이라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한편 민족의 고난을 지고 투쟁해나가는 생활 속에서
그의 신앙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신앙인으로 믿어지는 속죄· 부활· 재림의 신앙으로 중층적으로 발전해갔다.
〈성서조선〉의 초기시대인 1930년대 초반까지는 속죄신앙이 중심이며,
1935년 무렵부터 부활신앙이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1930년대 후반 신사참배 문제 등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이 가혹해지자
많은 신도들이 절망 속에서 개인적 차원의 카타르시스를 구하는 신앙으로 전락하고 있을 때,
그는 부활신앙에서 재림대망신앙(再臨待望信仰)으로 나아갔다.
〈조와〉라는 글은 그의 부활신앙과 재림신앙의 확신을 표명한 것이며,
표현은 극히 성서적이나 그 속에 투영된 내용은 민족해방을 갈구하는 강렬한 지향을 담고 있다.
결국 그는 하느님이 우리민족에게 위탁한 귀한 섭리사적 사명이 무엇인가를
한국의 고난의 역사를 바탕으로 찾는 일을 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저서로는 〈산상수훈연구〉(1933) · 〈우치무라와 조선〉(함석헌 공저, 1940) 등이 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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