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봄날》-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賢人들

2021. 3. 5. 08:30책 · 펌글 · 자료/ 인물

그해 봄날(반양장)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저자

김언호 출판한길사 | 2020.10.30. 페이지수544 | 사이즈 140*210mm 판매가서적 17,100원

 

책소개

『그해 봄날: 출판인 김언호가 만난 우리 시대의 현인들』은 1980년대 역사의 현장 최전선에서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열여섯 분의 생각과 실천을 담았다.
출판인 김언호는 한 권의 책은 한 시대의 생각과 말씀을 담아낸다는 정신으로 44년째 책을 펴내고 있다. 이 책은 오늘 우리들 삶의 빛이고 희망이었던 현인들과 오랫동안 온몸으로 만난 기록이다. 열여섯 분의 삶과 정신을 가슴으로 써냈다. “해석을 앞세우지 않고 현인들의 육성을 충실히 받아 적는 기록자이자 전달자가 되고자 했다.”
말하고 쓰는 것은 물론이고 생각하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던 엄혹한 그 야만의 시절, 열여섯 분의 생생한 증언과 육성을 통해서, 어둠의 시대와 마주하여 뜨겁게 맞섰던 그분들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지혜의 길을 제시한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의 길, 삶의 지혜를 말한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미래를 만들어나가자는 김언호의 문제의식이다.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 인물로 읽는 현대 한국의 정신사다.
한길사 창립 44주년 기념기획으로 출간한 이 책은 우리들의 삶의 가치를 밝혀주는 빛이고 희망이었던 현인들의 이야기며 책 만들기 44년 된 저자 김언호의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이 책의 해설을 쓴 김민웅 교수는 “『그해 봄날』이 오늘 우리가 마주한 시대의 허위, 야만, 폭력에 굴하지 않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정신과의 대화”라며 “고전적 정신과 육성을 재현해낸 김언호가 고맙다”고 했다.
지금 레트로 열풍이 불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그때는 그랬어’라고 말하는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가 공유해야 할 우리 정신사의 살아 있는 레트로다. 우리가 가야 할 길,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김언호 출판인, 전 기자

1944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신문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다.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1976년 한길사를 창립하여 지금까지 그 대표로 있다.

1977년부터 '오늘의 사상신서'를 펴내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인문서. 미술서, 어린이 책등 2,500여 권의 책을 펴냈다. 1985년부터 한길역사강좌. 한길사회과학강좌. 한길역사기행 등을 기획하여 독자와 저자와 출판인이 함께하는 역사인식운동을 펼쳤다.

1980년대 후반부터 파주출판도시를 건설하는데 앞에서 참여했고 1990년 중반부터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구상하고 건설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목차

 

제1부 행동하는 양심으로



1. 함석헌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 한다”는 글을 5·16 직후에 써서, 5·16군사쿠데타를 통렬히 비판한 함석헌 선생. 선생은 1950년대부터 1980년대 그 엄혹한 시대에 이 나라 청년들의 희망이었다. 출판인 김언호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선생을 뵙고 말씀을 듣고 그 책을 만드는 일을 행복해했다. 출판인인 그에게 주어진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선생은 평화운동, 같이살기 운동을 주창하고 남과 북에 통일정신을 일깨워준 시대의 스승이었다. 꽃과 나무와 어린이를 사랑하고 동서고금을 넘나든 사상가였다. 아시아에 우뚝 서는 정신과 사상의 빛이었다. 아름다운 우리말과 우리글을 구현해보인 시인이었다. 출판인 김언호는 함석헌이라는 시대에 우뚝 서는 사상과 정신의 아이콘을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1976년에 출판사를 시작한 나는 1980년, 그 '서울의 봄' 부터 함석헌 선생님의 전집 작업을 시작하였다. 선생이 1970년부터 발행해온 『씨알의 소리』편집위원이던 안병무. 송건호. 계훈제. 김성식. 김용준. 고은. 법정. 김동길 선생이 접짐의 편집위원이 되었다. (『씨알의 소리』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서 1980년 폐간당했다.)

1982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함석헌 전집』은 1988년 전 20권으로 일단락 되는데, ...............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 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6. 25는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 민중의 시대에 민중이 살아있어야 할 터인데 민중이 죽었으니 남의 꼭두각시밖에 될 것이 없지 않은가."

─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6. 25 싸움이 주는 역사적 교훈」에서 말씀하셨다.

 

 

 



2. 김대중 : 통일은 우리의 권리이자 우리의 의무 


인류의 가슴에 살아 있는 평화주의자 김대중 선생은 민족통일을 준비한 위대한 정치가다. 성찰하고 준비하는 위대한 독서가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을 ‘내란음모’죄로 구속하고 사형을 선고한다. 6년에 걸쳐 감옥에 있으면서 그가 밖으로 내보낸 옥중편지는 우리 현대사가 창출해낸 위대한 정신유산이자 빛나는 역사적 증언이다. 수난과 역경을 딛고 세계에 우뚝 서는 우리의 정치지도자 김대중은 죽음을 넘고 넘어 1998년 대통령이 된다.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과 역사적인 6ㆍ15공동선언을 이끌어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철학하는 대통령이자 평화정신을 세계인에게 심는 리더십을 구현했다.

 

한길사는 1994년 1월 김대중선생의 『나의 길 나의 사상』을 펴낸다. 제1부 역사 민족 민주주의, 제2부 새로운 세게질서와 민족통일의 전략 제3부 나의 통일정책을 말한다 제4부 글로벌 데모크라시의 구상

 

 

 



3. 송건호 : 민족통일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언론


“현실의 길이 아닌 역사의 길을 걷겠다”며 목숨 걸고 ‘자유언론 수호’를 실천한 송건호 선생. 한국 현대 언론사에 선생이 있었기에, 그 중심을 잡고 민족과 세계를 조망할 수 있었고 진실을 향한 언론운동이 가능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지만 결코 그 지조를 꺾지 않았다. 선생은 1980년 봄날 ‘지식인 시국선언’을 주도하고 해직기자들과 국민 언론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1977년 9월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1권으로 펴내면서 출판을 시작한 출판인 김언호는 송건호 선생과 늘 인사동 고서점에서 만났다. 책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고 출판인 김언호를 격려해주신 선생님은 김언호와 시대의 명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펴낸다.

 

 

'한 권의 책'이 역사 현실의 바깥 또는 개인의 담 안에 앉아 있는 文字人에 의해 저술될 수도 있겠지만, 시대를 호흡하는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저작이란 당대의 현실을 열정으로 만나는 실천적 인식으로 창출될 것이다.

 

"지난 날이나 오늘 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윤리와 민족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된다.

 

 

 

 



4. 리영희 :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이성의 빛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이고, 뒤집혀 있고, 일그러져 있는 세상에, 이성의 빛이 활짝 비추기를 손 모아 기도하고 있었다”는 리영희 선생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지만 시대를 호흡하는 풍운아였다. 그의 이론과 사상은 비수같이 동시대인들의 가슴과 머리에 각인되었다. ‘스스로 공부해서...’ 세계에 보편적인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내는 ‘주체적이고’ ‘토종적인’ 인문학이었다. 때로는 그 현실의 한계상황 또는 역경을 훌쩍 초월하는 정의와 진실의 협객 같은 사나이였다.
선생의 이론과 사상, 열정과 문제의식은 분단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것으로, 한 시대의 문제를 고뇌하는 양심적인 실천의 상징으로 지식인들이 주목하는 존재가 되었다. “진정한 인간해방과 진실이 지배하는 사회”를 원했던 리영희 선생은 우리 시대의 청년정신이다. 김언호는 선생의 자전 『대화』를 펴내고 『리영희전집』 전 12권을 펴냈다.

 

 

"나의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책의 이름을 일컬어 『우상과 이성』이라 한 이유다."   (1977년)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한길사 창립 30주년 기념기획으로《리영희 저작집》전 12권을 작업하여 2006년 8월에 동시 간행하였다. 강만길. 고은. 박석무. 백낙청. 이만열. 이상희. 이이화. 임재경. 최일남 선생이 간행위원이었다. 사진작가 배병우 선생의 소나무 사진느오 표지를 장식했다.

 

 

 

 

 

 



제2부 진실과 정의의 이름으로



5. 윤이상 : 민족문화는 저 창공처럼 엄숙하고 영원하다


“나의 작품들에서 시종 흐르는 것은 정의와 평화정신”이라는 윤이상 선생. 동베를린 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는다. 물사발이 얼어붙는 혹한의 감옥에서 장자의 꿈을 소재로 한 오페라「나비의 꿈」과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을 작곡한다.
“정치가는 음악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할 수 있다”며 예술로 ‘최고의 정치’를 보여준 윤이상 선생은 생애에 걸쳐 ‘민족의 혼’을 노래했다. 쇼팽, 바그너, 베르디 같은 음악예술가들처럼 우리나라 예술가들도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기를 던질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윤이상 선생은 “남도 북도 나의 조국”이라며 “휴전선에서 민족의 음악, 민족의 소리를 울리게 해서 민족화해의 광장을 만들자”고 했다.
출판인 김언호는 윤이상 선생의 음반을 만들기 위해 베를린을 방문해 선생의 자료를 갖고 귀국한다. 그러나 김언호는 이 자료를 김포공항에서 압수당하고 ‘윤이상 전집’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김언호는 1년 6개월 동안 ‘출국정지’를 당한다.
“하루 한 시간도 내 조국 내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윤이상 선생은 이국 땅 베를린에서 서거하는 날까지 조국을 노래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입니다. 흔히 정치에 비해 예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민족의 혼과 양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중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 예술입니다."

 

"나는 이 남북음악제를 위해 지난해에 「나의 땅 나의 조국이여」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45분 가량의 이 곡은 남한의 양심적 민족시인들의 작품이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민족과 조국의 영원함을 노래하면서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애국적인 혼이 담겨져 있습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 진압 소식을 접한 나는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못할 비극이 내 조국에서 일어나고 있음에 경악하다 못해 정신을 잃을 뻔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떨리는 가슴으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습니다.  (선생이 서거하기 한 해 전인 1994년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 그 작업을 해냈다. <화염 속의 천사>가 그것이다. 선생이 서거하던 그 해 5월 9일, 도쿄필하모니에 의해 일본에서 초연되었다.)"

 

 

 

 



6. 강원용 : 대화는 일체의 편견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개신교 목사임을 넘어서는 사회운동가· 문화운동가 강원용 목사. 박정희 정부가 동아일보를 탄압하자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농성하는 기자들을 찾아 격려했고 박정희 유신정부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강원용은 우리 국가사회가 요구하는 정치인의 모델은 몽양 여운형이라며 여운형을 이상적 민족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의 민주주의는 ‘대화를 상실한 민주주의’라면서 인간화를 이루기 위한 대화운동의 일환으로 아카데미하우스를 만든다. ‘사회운동 지도자들을 키워내는 산실’이었던 크리스찬아카데미에 유신권력은 ‘공산주의’라는 올가미를 씌워 탄압하고 강원용은 이 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저 남산 지하실에서 온갖 고문을 당한다.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대중을 구명하기 위해 전두환과 담판을 벌인다. 그러나 이 일로 강원용은 참담한 정신적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새로운 시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혼을 내던졌던 강원용은 진정한 선과 진리를 추구한 정신과 실천의 지도자였다.

 

 

 

 


7. 안병무 : 수난의 길에서 나는 민중을 만났다


수난의 길에서 민중을 만난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분신한 전태일의 죽음에 안병무는 충격을 받는다. 죽어가고 있는 사회와 신음하는 민중을 보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뼈저린 반성을 하고 군사독재와 맞선다. 1976년 ‘3·1민주구국 선언’에 동참해 체포된다. 안병무는 그 감옥에서 사회 밑바닥의 민중을 만난다. 민중의 실체를 깨닫는다. 민중신학의 이론은 더 강고해진다.
안병무는 “나의 주제는 제도권 밖에 있는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는 민중들로 이들이 오클로스”라며 그들이 세상 변혁의 주체가 되는 소망을 품었다. 선생이 쓴 ‘민중신학’ 6부작은 이 오클로스의 기록으로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우리의 빛나는 학문적· 실천적 이론이고 사상이다.

 

 

 

 



제3부 역사와 역사정신



8. 신영복 : 나는 나무들이 합창하는 숲에 서고 싶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만에 특사라는 형식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신영복. 그는 분단시대 진보적 지식인의 수난을 상징한다. 민중의 가장 절박한 현장인 감옥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절대의 한계 속에서의 깊은 사색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고전의 정신과 마주하면서 더불어 함께 세상을 바꾸는 길을 탐색한다. ‘나’에서 ‘우리’로, 그래서 관계의 철학은 그의 사유에서 핵심이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더불어 산다는 신영복의 글과 말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불어 정신’이고 ‘여럿의 숲’이다. 그의 성찰, 그의 글과 말은 우리 모두의 관계 속에서 살아 있다. 편안하고 따뜻한 말과 글, 정신과 사상은 우리의 숲이다. 우리가 신영복을 그리워하는 이유다. 김언호는 1989년 월간 『사회와 사상』에 석방 후 최초로 그와 본격적인 인터뷰를 해 그의 생각을 싣는다. 그가 누구인가를 알게 하는 다큐다.

 

 

 



9. 이우성 : 식민지사관 극복 않고는 민족사학 불가


상아탑에 갇혀 있지 않고 민족사의 진취적 지향을 염두에 둔 민족사학자 이우성 선생. 선생은 식민지 사관을 극복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캐내는 작업을 했다. 선생의 역사학은 ‘민족사학’이다. 그러나 관념적· 국수적인 사학을 경계하고 과학적인 사회관계 분석을 강조했다. 신라의 토지 사적 소유를 증명하고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실학의 ‘내재적 발전론’ 정립 등 선구적 연구로 한국사 연구를 진전시킨다.
1960년 ‘학원의 민주화’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해직됐다가 복직하지만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비판하는 ‘교수 361인 선언’을 주도해 또다시 ‘해직교수’가 된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선생을 정신문화연구원에 영입하려 했지만 강직한 신념을 끝내 굽히지 않고 단호히 거부했다.
“지금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 이 땅의 역사학도에 주어진 절실한 과제”라며 상아탑에 갇혀 있지 않은 민족사학자로서 학문하는 자의 주체적 자세를 부르짖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과 심산 김창숙 선생을 기리는 일에 앞장선 선생은 일찍부터 우리 고전을 천착했다. 김언호는 선생의 『우리 고전의 발견』을 펴낸다.

 

 

 



10. 김진균 : 정의에 바탕하고 연대로 실천하는 민중운동


민족적· 민중적 학문을 제창한 ‘우리 모두의 스승’ 김진균 선생.  선생은 ‘재경교수 361명 시국선언’과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참여하면서 계엄령 포고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4년 1개월 동안 ‘해직교수’가 된다. 김진균에게 ‘해직’은 고통이었지만, 지식인으로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문제의식을 심화시키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를 ‘위대한 각성의 시대’라고 말한 선생은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민주화 운동에서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영역이 없었다.
『한국민중사』와 『자본론』을 법정 변호하며 ‘사상·출판의 자유’를 성명했으며 비판적·진보적 새 학자군의 산실로 상도연구실을 열어 반독재ㆍ민주화 운동과 연대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해간 젊은이들 생각으로 늘 가슴 아파한 선생은 한국 사회과학의 진로에 희망의 길을 열어나갔다. 『사회과학과 민족현실』Ⅰ·Ⅱ를 써내 단재상을 수상했고 무크지 『한국사회연구』를 통해 새롭고 주체적인 한국적 사회과학을 모색했다.

 

 

 



11. 이이화 : 민족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서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고 민족사 바로 세우기에 앞장선 역사가 이이화 선생. 역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 쉰다면서 선생은 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출판인 김언호는 ‘세계화 시대엔 우리 역사 제대로 읽기’가 더 필요하다면서 대중이 감동하면서 읽는 한국통사를 써보자고 이이화 선생에게 제의하고 ‘아치울의 결의’를 맺는다. 선생은 10년 작업 끝에 정치사ㆍ사상사ㆍ문화사ㆍ사회사ㆍ생활사를 총합한 ‘21세기 국민독본’ 『한국사 이야기』 전 22권을 출간해낸다. “역사는 특정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니며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선생은 역사를 가슴으로 느끼며 읽게 하고 현실과 연결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었다. 한길역사기행의 현장강사로서 독자들과 늘 소통했다.
선생에게 역사는 지식의 산물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학문”임을 확신한 선생이 평생에 진력한 것은 동학농민혁명이었다.

 

 

 



12. 최영준 : 길의 역사 길의 사상


길의 문명, 길의 정신을 성찰한 역사지리학자 최영준 선생. 선생은 우리가 걷는 국토탐험· 역사탐험의 탁월한 길잡이였다. “길은 인간이 이룩해놓은 문명 가운데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선생은 길에 담긴 사연을 읽어냈고 문명의 깊이를 드러내주었다. 서양의 길이 물질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심리가 내재되어 있다면 동양의 길은 “통로, 방향, 순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개념인 이성과 도덕을 의미”한다고 했다. 길은 우리의 생활사를 종횡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며 고려시대부터 진행된 강화도 간척의 역사는 네덜란드보다 앞선다며 역사의 현장을 찾기도 했다. 선생의 ‘국토사랑’은 『한국의 짚가리』라는 독특한 책에 녹아 있다. 민족사의 발전과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이야기해준 선생은 농사일이야말로 가장 좋은 수신修身의 길이며 땅 위에서 만나는 예술이라며『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을 펴냈다.

 

 

 

 



제4부 함께 걷는 길



13. 이오덕 : 어머니와 조국이 가르쳐준 말


생애에 걸쳐 삶의 교육을 실천한 이오덕 선생은 “글쓰기만큼 좋은 인간 교육은 없다”고 했다. 선생은 맹렬하고 집요하게 우리말과 글쓰기 교육에 헌신했다. “우리 아이들과 우리 겨레를 살리는 길은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되는 삶을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하는 데 있다”는 선생의 체험적 교육정신은 이 시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사상이었다.
선생은 조국이 가르쳐준 우리말을 왜곡하는 현실을 고쳐나가야 한다면서 『우리글 바로 쓰기』를 출간한다. 선생에게 우리말 우리글 바로 쓰기 운동은 곧 올바른 교육운동이자 이 국제화 시대에 더욱 요구되는 민족운동·민족문화운동이었다.
1988년 단재상 수상연설에서 선생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쓰며 깊이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곧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며 선생의 글쓰기 정신과 방법을 천명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남의 말, 남의 글로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로 창조하고 우리말로써 살아가는 것”이라며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글은 우리말로 쓴 정직한 글이라고 했다.
풀· 꽃· 나무· 흙· 바람, 무엇보다 어린이를 사랑한 선생은 그런 문학과 교육을 위해, 그런 문학과 교육을 하는 참문학인·참교육자들과 함께 생각하고 연구하고 글을 쓰고 교육으로 실천했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 아이들을 믿게 된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면 아이들을 배우게 된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 느낌과 생각은 그대로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어린이는 시인임을 나는 믿는다.

글을 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인간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글쓰기보다 더 좋은, 아이들을 지키고 가꾸는 교육이 있는지를 나는 모른다.'

 

이오덕 선생은 우리 아동문학사의 또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 권정생 선생(1937-2007) 과 젊은 시절 주고받은 편지를 잘 보존하고 있었다. 그 편지들이 너무 아름다워 나는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2003년) 가 그것이다. 세상에 이런 우정의 편지가 또 어디 있을까.

거창 샛별초등학교의 주중식 교장선생은 책 끝에 두 분의 편지를 해설해주는 글을 붙였다.

"이 책에서 어떤 분은 영혼의 깊은 사귐을 맛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과 마음에 큰 아픔을 지니고 외롭게 살아가는 분은 큰 위로를 받으실 터이고, 남을 위해 살아가려는 분은 참된 용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현복이의 일기』(1987년)

"나는 현복이한테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어떤 책을 읽었느냐고.

그런데 현복이는 내가 읽었을 것이라고 믿었던 책, 내가 읽기를 바랐던 책들을 한 권도 읽지 못했다.

대체 이 아이가 일기에 적어놓은 이 착한 마음,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태도, 소박하면서도 삐뚤어지지 않는 생각, 풍부한 감정과 섬세한 느낌을 적은 말들, 이런 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배웠을까."

 

 

나는 올해가 일흔이 꽉 찬 나이인데도

아직도 어린애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간다.

산속에 가서 한 포기 풀같이 살아가는 꿈,

산속에 가서 한 마리 새같이 살아가는 꿈.

간밤에도 자리에 누워

가슴 두근거리며 잠을 못 잤다.

아침 햇빛을 받아 온몸을 떠는 풀이 되어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나뭇가지에 눈 감고 앉아 있는

한 마리 새가 되어.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하늘과 구름

해와 달

별과 바람

이른 봄 담 밑에 돋아나는 조그만 풀싹

초가을 도랑가에 핀 하늘빛 달개비꽃

풀숲에 울어대는 벌레소리.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많은 형제들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뜬눈으로

이 밤에도 꿈을 꾼다.

 

─ 시집 』무너미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14. 이광주 : 인간은 교양으로 자유에 눈뜨고 사회를 의식한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서양지성사를 풀어낸 서양사학자 이광주 선생.  선생은 책방을 찾아가는 길은 “일상에서 해방되는 참으로 자유로운 자유인의 길”이고 책은 “자신을 정화하는 지성의 연금장”이라며 책을 찾아 세계를 여행한 애서가였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다 해직되기도 한 뒤 교양과 지성을 담론하는 자유분방한 에세이풍의 글쓰기를 보여준 선생은 이 땅의 독서인들을 아름다운 인문의 세계로 안내했다. “좋은 사회, 바람직한 사회는 서로가 담론을 즐기는 다원적 열린 사회”라며 어떠한 도그마나 권위도 부정한 교양인이다.
“결국 세계는 한 권의 아름다운 책에 이르기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말라르메의 시를 좋아한 독서인이자 애서가인 선생은 책 속에서 책을 가슴에 안고 산, 책 읽는 책의 ‘여정’을 누린 독서인이었다. 선생과 함께 책방 순례에서 만나는 19세기 책의 장인 윌리엄 모리스는 출판인 김언호의 영원한 책 스승이 된다.

 

 

"책방을 찾아갈 때 나는 대체로 혼자다. 술은 대작이 좋고 극장에서는 동반자의 존재가 흥을 돋우지만, 책방은 혼자서 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다. 우연히 책방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외면하는 것이 예의일 성싶다. 群書 속에서 오랫동안 갈망하던 책을 찾아냈을 때, 온몸을 휩쓰는 짜릿한 엑스터시!

 

많은 애서가들과 마찬가지로 나에게도 책은 읽는 것이기에 앞서 보는 것이요 여기저기 어루만지는 것이다. 나는 도서관을 자주 이용하는 편이지만 도서관의 장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효용성을 위해 분류된 그 '책의 집'에는 책을 둘러싼 놀이의 즐거움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등. 인권. 복지가 좌파 진보의 키워드라면 우파 보수의 키워드는 민족. 정통. 자유여야 할 것이다. 구태의연한 반공이데올로기에 매여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민족정기를 받드는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진즉부터 발간되었어야 했다.

 

 

 



15. 박태순 : 오늘도 나는 나의 산하 나의 국토를 걷는다


국토인문학을 구현한 문학가 박태순은 국토, 그 역사와 삶의 현장에서 文·思·哲을 탐구했다. 『국토와 민중』은 국토인문학의 한 이정표가 되었다. ‘국토의 편력과 민중세계의 답사는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한 선생은 “국토는 자연으로서 금수강산이었고 인문지리로서는 민중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선생은 국토 전역을 가는 인문예술의 축제 ‘한길역사기행’에 늘 동반하는 강사이자 길꾼이었다. 우리 국토 전역이 ‘기행의 주제’라며 ‘새로운 국토’를 만나기 위해 박태순은 평생을 두 발로 걸었다.
문학인은 역사가이며 사상가라고 주장한 선생은 원효에서 현대인 모습 살피는 등 역사를 올바로 ‘깨치기’ 위한 역사인물의 ‘활현’ 작업에 몰두했다. “국토언어는 희망의 언어”라며 선생의 몸과 마음은 언제나 우리 역사, 우리 삶의 현장 국토에 서 있다.

 

 

 



16. 최명희 : 언어는 정신의 지문, 모국어는 모국의 혼


“어둠은 결코 빛보다 어둡지 않다”는 작가 최명희는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소설 『혼불』을 써냈다. 시대의 고단한 삶을 사는 우리들을 위무하는 글의 힘, 정신의 힘이 되는 대하소설 『혼불』은 시대와 역사의 어둠과 빛을 풀어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고 모국어는 모국의 혼이기 때문에 쭉정이가 아니라 진정한 불빛 같은 말의 씨를 심고 싶었다”는 최명희는『혼불』을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심정으로 써냈다.
한밤중에도 새파란 불을 밝히는 만년필의 촉 끝에 사로잡힌 작가 최명희는 아날로그를 고수한 만년필주의자였다. 출판인 김언호는 각계 인사들과 손잡고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작가를 성원했지만 그는 혼불이 되어 저 하늘을 날아올랐다.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51세로 요절했다.

 

 

『혼불』은 조탁된 문장의 힘이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이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

 

 

" ....... 지금도 나는 다 못한 이야기를 뒤쫒느라고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 일을 위하여 천군만마가 아니어도 좋은, 단 한 사람이라도 오래오래 나의 하는 일을 지켜보아 주셨으면 좋겠다. 그 눈길이 바로 나의 울타리인 것을 나도 잊지 읺을 것이다."

 

 

"저무는 동짓달 눈 내릴 듯 흐린 날씨의 적막함, 스산하면서도 그립고, 회색의 하늘이 뭔지 사람을 불러들이는 것 같은, 침묵의 습자지 같은, 그걸 어떻게 써볼까. 『신동아』의 마감 독촉은 빗발치는데, 나는 창문을 열고 사흘 동안 어둠을 노려보았습니다.

꼼짝도 안하고 첫날은 공기가 버석거리더니, 둘째 날은 농밀해졌고, 사흘째 되던 날, 비가 오려고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한기가 쫙 끼치는데 그대로 동지섣달 추위가 느껴졌어요. 그 탁한 여름 공기가 어느 저녁에 회색과 보라로 뒤섞이면서 푸른 비늘이 이는 걸 봤지요.

그 공기의 혼은 나의 정수리로 밀밀하게 흘러 들어와 감기었습니다. 그길로 '날이 저문다'하고 쓰기 시작했지요."

 

 

"남들은 한 번 쓰고 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일필휘지가 갖고 있는 한순간에 우주를 꿰뚫는, 정곡을 찌르는 강력한 힘도 있지만, 천필만필이 주는, 다듬어진 힘이 나는 좋다."

"무릇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우리는 과연 이 시대에 어떤 정신의 지문을 찍는 것일까."

 

 

"나는 어려서 집안 어른한테 들었다. 저 나무는 땅 위의 둥치와 가지 모양과 길이로 그대로 반대편 땅속에 똑같은 모양과 길이로 뿌리를 내린단다. 땅속의 뿌리가 한 치 자랄 때 땅 위의 가지도 한 치 뻗어 오른다는 것이다.

뿌리는 제 힘을 다하여 자랄수록 눈부시고 아름다운 지상의 햇볕 속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깊고 어두운 밑바닥으로 내려간다.

아, 사람의 생애도 그러하리라. 절망이 어떻게 삶의 위로가 되고, 상처가 어찌하여 생의 텃밭이 되는지를 깨닫게 하는 삶의 역설.

내가 어둠속에서 눈물로 눈물을 덮으며 캄캄하게 울고 있을 때,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영혼의 가지는 그 깊이만큼 더 높은 곳으로 자라고 있을 것인가. 나의 눈물의 뿌리가 어둠의 핵에 가 닿으면, 내 정신의 가지는 저 찬영한 빛의 핵에 이를 것인가.

지상의 아름드리 거목 둥치와 용틀임하는 지하의 거대한 뿌리가 서로 위와 아래, 안과 밖으로 나뉘지 않고 대칭으로 한 덩어리를 이룬 입체적인 그림은 나에게 항상 풍요로운 상징을 안겨준다. 어둠이 빛이고 빛이 어둠인 세계."

 

 

대하소설 『혼불』전 10권을 끝낸 큰 작가 최명희는 1998년 12월 11일 '사랑하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운명했다. "아름다운 세상, 잘 살고 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5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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