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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22. 15:56ㆍ미술/미술 이야기 (책)
2017. 5. 4
아트 비하인드(Art Behind) 우리가 사랑한 예술가들의 낯선 뒷모습
책소개
예술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해답, 그 비밀을 풀어낸 『아트 비하인드(Art Behind)』.
이 책은 현직 미술관장이자 활발하게 미술 평론 활동을 해온 저자가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이라는 제목으로 2년 넘게 연재한 칼럼 중 39가지 이야기를 골라 수록한 것이다.
현실을 빗댄 내용에서부터, 미술사에서 끝없이 논쟁되어 온 문제,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들을 주제로 선택해
예술가와 예술 작품, 혹은 예술사에 관한 이야기를 발굴해 들려준다.
예술 속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은 시대별로 작품이나 작가를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독특한 테마와 특별한 방식을 내세워 미술사를 새롭게 읽어낸다.
저자 : 변종필
저자 변종필은 미술평론가이자 현 양주 시립 장욱진미술관장.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와 동대학원 미술(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된 데 이어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된 이후 미술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경희대학교, 홍익대학교, 삼육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고,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앤씨(ANCI) 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편집위원을 거쳐 현재는 전시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미술과 비평』 평론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다양한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한편
2014년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초대관장으로 선임된 이래 현재까지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단색화 미학을 말하다』, 『손상기의 삶과 예술』, 『한국현대미술가 100인』(이상 공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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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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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 예술을 읽는 또 하나의 관점을 더하다
名作은 진부하지 않다. 좋은 그림은 시대를 넘어 '여러가지 방식으로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봏는 방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다"라는 키이란의 말처럼 유의미한 예술작품은 단편적 시각, 고정관념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되짚어보게 한다. 예술의 특성이며 명작의 힘이다.
ROUND 1
ARTIST vs. ARTIST
-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예술가들의 평행이론 -
신체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
툴루즈-로트레크(1864~1901) vs. 손상기(1949~1988)
아마츄어에서 직업화가로 ─
루소(1844-1910) vs. 고갱(1848-1903)
정규 미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취미로 그림을 시작해 유명 화가 반열에 오른 사레가 있다. 앙리 루소와 폴 고갱은 아마츄어 화가로 시작해 직업화가로 생을 마감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앙리 루소는 아마츄어 바이올리니스트인데다 왈츠를 작곡하고 희곡을 쓰는 등 예술 방면에 남다른 끼를 지닌 세관원 막단 직원이었다. 아카데미 출신 화가 클레망의 추천으로 루브르박물관 模寫 허가증을 받게 된 후 자신감을 얻어 정식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후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는 화가들의 전시인 <앙데팡당>展에 출품하며 49세에 직업화가가 되었다.
루소는 장 레옹 제롬처럼 그리는 것이 꿈이었는데 정규 미술과정을 거치지 않아 그림에 필요한 기본 조형 의식이 없었다. 루소의 작품에서 원근법, 명암법, 비례와 균형 등이 무시된 표현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 아마추어리즘의 결과일 뿐인데 결과적으로 개성 강한 그림을 탄생시킨 반전의 요인이 되었다.
'진정한 화가는 아마츄어 화가와 직업화가의 단순 구분이 아닌, 화가로서 얼마나 절실하게 창조적인 삶을 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인맥의 대가 ─
마네 vs. 김홍도(1745- ?)
미켈란젤로 / 라파엘로
루벤스 / 벨라스케즈 / 다비드 /
잭슨 폴록 (=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 앤디 워홀
정선 - 좌의정 김창집, 스승 김창흡, 평생지기 이병연, 제자 조영석
김홍도 - 정조, 스승 강세황, 후원자 김한태와 김광국, 김응환, 이인문, 이명기 등의 화가들,
장승업 - 이응헌, 민영환, 흥선대원군, 변원규, 민영익, 오세차으
채용신 - 흥선대원군, 최익현, 윤항식, 전우, 김직술 등의 우국지사
뭉크 vs. 워홀
사랑과 예술이 담긴 그림 편지 ─
이중섭(1916-1956) vs. 반고흐(1853-1890)
반 고흐는 900여통의 편지를 남겼다. 이 중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668통이다.
이중섭은 아내 마사코에게 그림엽서 100여점과 편지 38통을 보냈다. 그림엽서는 결혼 전 4년간의 연애시절에 보낸 사랑의 징표이고, 편지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이별한 후 주고받은 것으로 가족을 그리워했던 이중섭의 애틋한 사랑을 담고 있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부유했을까 ─
다빈치(1452-1519) vs. 미켈란젤로(1475-1564)
19세기 이전까지는 작품을 주문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재력가나 권력가로부터 후원을 받거나 고용되어야 생존할 수 있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최고의 예술가는 누구인가 ─
피카소(1881-1973) vs. 뒤샹(1887-1968)
지난 2004년, 영국의 미술가 500명을 대상으로 "20세기 100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작품이 무엇인가?"란 설문조사를 했을 때, 뒤샹의 <샘>과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뒤샹의 작품수는 피카소의 0.1%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발표하는 작품마다 뜨거운 논쟁을 일으키며 작가들에게 끼친 파급력은 피카소를 압도한다. <샘>은 脫화폭의 시대를 열었고, 원본과 복제본의 구분을 파괴했으며, 손(手)의 예술을 거부하고 개념을 중요하게 만들었다. 회화의 지위를 무너뜨리고,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설치미술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이끌어냈다.
피카소는 65세 이후로는 더는 그릴 것이 없는 매너리즘에 빠져 미술사에 남을만한 개혁적인 작품읋 찾기 힘들다. 피카소의 신화는 명성이 쌓일수록 그 내면은 공허했다.
"피카소 없는 세계 미술 시장은 공허하고, 뒤샹이 없는 현대 미학은 무의미하다."
모네(1840-1926) vs. 피사로(1830-1903)
살롱전에 대항하듯 개최한 것이 인상주의 1회 전시이다. 1874년 4월 15일 제1회 '무명화가 협회'라는 타이틀로 살롱전보다 15일 먼저 개최한 것도 '낙선자들의 전시'라는 오명을 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이때 모네는 무명화가협회 전시를 이끌며 적극적으로 인상주의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모네는 스스로 '살롱전 출품 거부'라는 원칙을 깨뜨리고 르누아르와 함께 살롱전에 참가하여 리더로서의 신뢰를 잃었다.
간직하고 싶은 순수함 ─
클레(1879-1840) vs. 장욱진(1879-1940)
파울 클레는 단체활동이나 특정 유파에 소속되기보다 개인적으로 활동했고, 장욱진 또한 유행이나 시대적 조류를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를 탐구했다. 장욱진은 대작보다 작은 크기에 그린 세계가 더욱 진실하고, 한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감상의 대상으로서 더 적절하다는 생각에 작은 그림을 고집했다.
클레가 선, 색채, 색조의 파격적 구성을 통해 환상적 추상세계를 지속해서 탐미했다면, 장욱진은 기하핛적으로 단순화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심상의 세계를 보다 서술적인 구조로 표현했다.
클레의 말기 작품이 기하학적 형태에 고대문자 같은 기호적 추상성이 짙어졌다면, 장욱진은 어떤 구조적 틀을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상상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
달리(1904-1989) vs. 마그리트(1898-1967)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면 아리송한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이러한 그림ㅇ른 즉흥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장시간 의 생각 끝에 탄생한 것이다. 다빈치처럼 마그리트의 노트에도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빼곡했다. 수많은 고민과 철학적 사유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물인 것이다.
예술은 비즈니스, 예술가는 마케터?
루벤스 vs. 워홀
루벤스는 주문받은 그림을 빠르게 완성하기 위하여 단계별로 재능 있는 화가를 고용하여 분업화하는 제작방식을 도입했다. 젊은 화가 여러 명이 루벤스가 스케치한 것에 따라 얼굴, 의복, 장신구, 배경 등 각자 맡은 부분만 집중적으로 그리는 방식이었다.
루벤스는 미술시장의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간파했을 뿐만 아니라 각계각층의 인맥을 형성하는 재능과 성품을 갖추고 있었다. 6개 국어를 구사하며, 뛰어난 두뇌, 폭넓은 교양과 지성, 잘생긴 외모와 매너로 외교특사로 활략하며 귀족의 작위도 받았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_
클림트(1862-1918) vs. 실레(1890-1918)
술에 취하고 예술에 취하고 _
폴록 vs. 위트릴로
ROUND 2
WORKS vs. WORKS
-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 명작 속 숨은 그림 찾기 -
밤을 밝히는 사람들 _
반고흐(1853-1890)의 카페 vs. 호퍼(1882-1967)의 카페
땀 흘려 일하는 것의 가치 _
밀레의 이삭줍기 vs. 윤두서(1668-1715)의 나물 캐기
파격을 두려워하지 마라 _
마네의 누드 vs. 모딜리아니의 누드
평범한 것에 의미 불어넣기 _
샤르댕(1699-1779)의 정물화 vs. 세잔(1839-1906)의 정물화 (Still Life)
현대 사회의 속도전, 빠르게 더 빠르게 _
움직임을 담은 그림 vs. 움직임을 담은 조각
인간의 존엄성은 얼마나 존중되고 있나 _
진실을 외면한 재판 vs. 진실을 밝힌 재판
소박한 삶, 노동의 일상 _
박수근의 여인 vs. 리베라의 여인
인간의 욕망을 담은 꽃 그림 _
인생무상 vs. 부귀영화
브뤼헐의 <나무통의 커다란 꽃다발>은 화려하지만 시들 수밖에 없는 꽃의 운명처럼 인간의 세속적 욕망의 덧없음을 환기시키는데 반하여, <괴석모란도>는 모란꽃이 만개한 절정의 순간처럼 부귀영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세속적 욕망을 대변한다.
얼마나 점을 찍어야 그림이 되나 _
조르주 쇠라 <그랑 자트 섬> vs. 시냐크 <아비뇽의 교황청>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 vs. 18세기 조선 풍속화 ─
드 호흐 <술 마시는 여자> / 반 미리스 <주막집 풍경> vs 신윤복 <연당야유><이부탐춘>
타짜와 초짜의 속고 속이는 한 판 _
조르주 드 라투르 <에이스를 쥔 도박꾼> vs. 카라바조 <카드놀이 사기꾼>
스페인 황가의 얼굴 vs. 한국 대가족의 얼굴 ─
프란시스코 고야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 vs 배운성 <가족도>
미술사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춤 그림은? _
이중섭의 춤 vs. 마티스의 춤
ROUND 3
KEYWORD vs. KEYWORD
- 예술의 세계를 이해하는 흥미로운 문제와 질문들 -
타고난 재능 vs. 끝없는 열정
재능과 열정의 불일치는 거부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다.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열정이 없으면 그 재능을 살리기 어렵고, 열정이 있어도 재능이 없으면 뜻한 바를 성취하기가 어렵다.
예술은 스포츠와 같이 단번에 승부를 결정짓는 분양가 아니다. 그래서 미술은 재능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으로 더욱 값진 성과를 이뤄낼 수 있는 분야이다. 재능은 부러움의 대상에 머물 수 있지만, 열정은 삶을 훨씬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작품의 생명은 미적 가치의 유무에 따라 좌우되지만. 작가의 생명은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창작활동을 지속할 때 비로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재능은 열정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다.
미술사의 오랜 싸움 _
푸생의 선 VS. 루벤스의 색
루벤스파와 푸생파
- 김광우의 <프랑스 미술 500년>(미술문화) 중에서 -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기운 속에서 아카데미 회원이 누리던 귀족주의적인 특권은 신랄한 비판을 받았으며 다비드를 지도자로 한 많은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해산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카데미는 1816년 아카데미 데 보자르Academie des Beaux-Arts로 재출발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를 위협한 것은 예술가를 천재로 본 낭만주의적인 작가 개념이었다. 즉 예술가는 가르쳐질 수도 없고 규범에 종속될 수도 없는 영감의 빛으로 걸작을 창조하는 천재라는 관점이었다. 예술가가 곧 천재라는 개념은 18세기 영국의 저술가들 사이에서 처음 생겼다. 이 개념을 칸트가 공식화했으며 괴테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등장으로 촉진되었다.
푸생은 고대의 신화적 세계를 목가적· 시적 분위기로 다루었으며, 인물의 몸짓· 자세· 얼굴 표정 등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고, 회화에서의 문학적· 심리적 묘사에 심사숙고했다. 이 같은 그의 감정 표현은 미술 아카데미의 교칙으로 명문화되었다. 그 결과 베네치아파는 색채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경시되었으며, 플랑드르파와 네덜란드 파는 사소한 것에 대한 관심과 사실성이 그랜드 매너의 장중한 테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게 평가되었다.
르 브룅은 푸생의 이론에 따라 감정의 표현법에 관한 논문을 간행하고 일정한 정서와 심리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방법을 규칙화하고자 시도했다. 결국 아카데미는 서기관 앙리 테스트랭을 통해 회화의 모든 측면을 포함하는 엄밀하고 총괄적인 법칙집을 1680년에 간행했다. 이것은 국내에서의 반대뿐만 아니라 미술사에서 푸생 파와 루벤스파 사이의 논쟁으로 알려진 사건을 야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미술사가· 이론가 드 필과, 화가 라 포스가 이끈 개혁파는 베네치아파와 루벤스 작품에 나타난 색채의 중요성과 일정한 사실성을 주장했다.
푸생과 루벤스는 동시대 화가지만 서로 다른 경향의 그림을 그렸는데, 푸생은 고대와 르네상스로 회귀하려고 한 데 반해 루벤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바로크 풍의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성과 감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성을 중시한 푸생의 추종자들에게 바로크 회화는 기괴하고 혼란스러운 취향의 타락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는 또한 소묘를 중요시한 푸생과 색채를 중요시한 루벤스와의 차이이기도 해서 선과 색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며, 이런 대립은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추종자들에 의해 더욱 커졌다.
드 필은 루이 14세의 외교사절로 유럽의 여러 나라를 방문했으며 각 나라의 미술을 현지에서 직접 연구했다.
루벤스를 숭배한 그는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아카데믹한 드로잉의 강조에 반대하고 색채와 명암법이 회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며 루벤스파의 편에 섰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가장 높이 평가한 장르인 역사화의 개념을 확대하여 모든 종류의 테마를 이에 적용했다.
그는 『색채에 관한 대화』(1673), 『루벤스의 생애를 포함한 유명 화가들의 작품론』(1681), 『화가들의 생애론 - 화가의 완전한 이상』(1699), 『화가들의 원리와 균형에 의한 회화 강연』(1708) 등을 출간했는데, 이중 마지막 저서는 그의 이론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책이다.
샤를 라 포스는 1658~60년 이탈리아에 체류했고, 1670년대에는 주로 르 브룅의 조수로 활동했으며, 베르사유 궁전의 다이아나 회랑과 아폴로 회랑 장식을 부분적으로 담당했다. 1680년대의 그의 작품에서는 북부 이탈리아의 화파, 특히 베로네세와 코레조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그는 드 필의 친구로서 색채와 소묘의 우열 논쟁에서 색채가 중요하다고 한 드 필의 주장을 지지했다. 라 포스는 1680년대 프랑스 화단에 루벤스의 영향을 도입한 사람들 중 하나이다. 17세기 말 프랑스 회화의 쇠퇴기에 많은 예술가들 가운데 최대의 독창성을 발휘한 그의 작품에는 차세대의 경쾌하고 우아한 로코코 미술을 앞서는 것도 있다.
르 브룅은 1672년 ‘루벤스파’와 ‘푸생파’의 논쟁에서 소묘에 찬성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것이 아카데미의 공식 견해가 되어 다음 세기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리하여 17세기 중엽의 프랑스는 고전주의가 곧 아카데미즘이 되었다. 그리고 예술에서 교육과 비평이라는 개념에 정식으로 권위가 주어졌으며 이후 이 개념은 아카데미의 관점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미술사의 또 다른 오랜 싸움 _
앵그르(1780-1867)의 이성 vs. 들라크루아(1798-1863)의 감성
예술의 역할은 무엇인가 _
휘슬러의 예술 vs. 러스킨의 비평
이 그림은 1877년 런던의 갤러리에 200파운드라고 판매가격과 함께 전시되었다.
러스킨은 이 그림을 포함한 휘슬러의 야상곡 연작을 감상한 후 다음과 같은 비평문을 썼다. "교양 없고 자만심 가득한 화가가 채색도 끝내지 않은 채 엉성하고 조잡한 구성으로 그린 마구잽이 그림에 200파운드나 요구하는 어릿광대를 보게 될 줄 몰랐다." 러스킨은 스케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그림을 대단한 그림인 양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고 혹평했고 "대중의 얼굴에 물감을 던진 그림"이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이러한 악평을 전해들은 휘슬러가 격분해서 러스킨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사건으로 번졌다. 당시 러스킨은 대중의 존경을 받는 절대적인 영향력의 비평가였다. 두 사람이 법정에서 만났을 때 러스킨은 59세, 휘슬러는 44세였다. 논쟁은 그림 한 점을 넘어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론과 '예술을 위한 예술' 이론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러스킨은 어떠한 사회적 기능도 못하는 그림은 예술로서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며 인정하지 않았다. 휘슬러는 러스킨이 중요하게 여겨온 관찰과 사실주의 기법을 처음부터 무시했다. 또한 예술작품의 도덕적 역할을 강조하는 기풍도 거부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서 인정되어야 할뿐 사회적 기능이나 도덕적 역할의 여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면서 화가의 주관성과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그림 주제, 제작시간, 표현기법, 그림가격 등 논쟁이 집중되었다. "이 그림을 해치우는 데 얼마나 걸렸죠?" 휘슬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루나 이틀이면 충분합니다. 작품의 예술성은 단지 그림을 제작하는데 걸린 시간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거쳐 갈고닦은 지식의 폭과 깊이까지 포함되어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은 휘슬러의 승리로 끝났다. 휘슬러는 소송에서는 이겼지만 정작 원하던 손해배상금은 기각되고 말았다. 결국 재판비용을 갚느라 파산했고, 러스킨은 패소의 충격으로 옥스포드 미술 교수직까지 그만두었다.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 _
남성의 누드 vs. 여성의 누드
진품 vs. 위작
판 메이헤런의 페르메이르 위작 사건 & 루초모프스키의 사이타파르네스 왕관 위작
벼룩시장에서 페르메이르가 활동하던 시기인 17세기 무명화가의 그림을 사서 원작의 표면을 갈아내고 그 위에 페르메이르 화풍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위조품을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감정가들을 속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페르메이르가 완숙기에 접어들기 전 공백기, 즉 페르메이르의 잃어버린 10년을 채우는 방식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는 작품을 혼성 모방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원숙기의 작품을 감정 기준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판 메이헤런의 페르메이르 위작 <엠마오의 식사>, 1937, 유화, 117x129㎝, 보이만스 미술관
네덜란드의 거장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사칭해서 그린 한 판 메이헤런의 ‘그리스도와 간음한 여인’.
나치돌격대장인 헤르만 괴링에게 작품을 팔았다.|
예술가의 삶 vs. 뮤즈의 삶 ─
카미유 클로델(1864-1943) / 프리다 칼로(1907-1954)
뜨거운 추상 vs. 차가운 추상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 /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
결론적으로 칸딘스키는 형태에 갇혔던 색에 자유를 주었고, 몬드리안은 선에 색채를 입혔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_
‘미’의 예술 vs. ‘추’의 교훈
새로운 예술인가, 범죄인가 _
비트는 패러디 vs. 훔치는 표절
색면추상 ─
마크 로스코(1903-1970)의 45센티미터 vs. 바넷 뉴먼(1905-1970)의 1미터
로스코와 뉴먼은 인간이 시각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선 작품 앞에서 느끼는 감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들이 추구한 '숭고'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세게이며, 그 세계는 보편적 감정을 극복하는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감상자를 압도항 정도의 양이나 크기이다.
로스코는 관객들이 자신의 작품을 45cm의 거리를 두고 감상하기를 원했고, 뉴먼은 거대한 색면을 1m 앞에서 바라보는 순간 감정이 고양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로 몰입될 것이라 믿었다.
로스코의 <오렌지, 레드, 옐로> 가 경매에서 85억원에, 뉴먼의 <단일성Ⅵ>은 487억원에 낙찰되었다.
이름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 _
로댕의 <대성당> vs. 마욜의 <지중해>
미술사를 들춰보면 미술작품과 제목이 일치하지 않아 제목이 잘못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작품들이 있다.
특히 현대미술 작품은 제목이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미지만으로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제목이 아닌 전혀 생각하지 못한 단어나 문장으로 단순해 보이던 작품이 심오한 의미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재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근현대조각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로댕과 마욜의 작품 중 <대성당>과 <지중해>라는 조각상도 특별한 제목 덕분에 작품성을 인정받은 대표적 사례에 해당한다.
<대성당>은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조각가로 평가받은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의 작품이다.
<지옥의 문>, <칼레의 시민>, <입맞춤> 등 대중에게 익숙한 명작은 대부분은 그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유독 <대성당>이라는 작품만은 외형적으로 그 의미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이유는 작품제목과 형상의 불일치에서 오는 모호함 때문이다.
로댕, 대성당, 1908년, 돌, 64×29.5×31.8cm, 파리 로댕미술관 |
실물을 보면 <대성당>이라는 제목보다는 ‘두 손’이나 ‘마주하고 있는 손’, 아니면 ‘엇갈린 손’이라는 제목을 떠올리기 쉽다. 원래 이 작품은 분수 장식을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서로 마주한 두 손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게 할 계획이었다. 제목 또한 처음에는 ‘언약의 궤’였다.
그렇다면 왜 <대성당>으로 바뀌었을까? 대성당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교구의 중심이 되는 성당’을 가리킨다. 성당 같은 작은 예배당을 포함한 성당으로 규모나 성격상 대단히 중요한 장소이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써 의미와 용도가 확실한 공간특성을 지닌다.
<대성당>은 언뜻 한 사람의 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의 손이다. 성별이 불분명한 오른손이 서로 마주하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 사랑하는 연인들의 손일 수 있고, 예수와 성직자의 손일 수도 있다. 때로는 아버지와 아들이거나 어머니와 아들일 수도, 로댕 자신의 손일 수도 있다.
이토록 <대성당>의 두 손은 보는 사람에 따라 손의 주인공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익명의 손이다. 궁극에 인간의 손은 모든 창조물을 만드는 도구이다. 인간생활에 필요한 모든 사물은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완성된다.
대성당도 예외는 아니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손이 거대한 건축물인 대성당의 첨두형 궁륭(한가운데는 높고 주변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아치형 곡면구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대성당>을 보면 ‘대성당’이라는 단어가 ‘마주하고 있는 손’과 같은 단순한 제목과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지극히 단순한 구성이 대성당과 같은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로댕이 왜 ‘대성당’이라는 제목으로 바꿨는지 그 의도가 어렴풋이나마 읽힌다.
<대성당>은 제목의 독특함도 지녔지만, 신체 일부를 독립적인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유의미하다.
사실 신체 일부가 몸체로부터 분리되어 작품으로 표현된 경우는 로댕 이전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찍이 머리, 팔, 다리가 없는 ‘토르소’가 제작되었지만, <대성당>처럼 손을 하나의 독립체로 다루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대성당>은 독특한 제목과 함께 신체 일부를 독립적 예술작품으로 만든 조각 작품이라는 특별함도 지녔다.
로댕의 <대성당>만큼 이질감이 있는 제목을 지닌 조각 작품이 마욜의 <지중해>이다. 아리스티드 마욜 (Aristide Maillol, 1861~1944)는 시각장애로 40세에 조각가로 변신한 늦깎이 작가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인 태도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마욜은 로댕처럼 천부적 조각술을 지니지 않았지만, 하나의 작품을 위해 오랜 시간 탐구하는 끈기와 열정을 지녔다. 현재의 <지중해>를 완성하기 전 ‘회화(실물 크기 데생)→태피스트리→부조’의 과정을 거칠 정도로 작품 제작과정을 중시했다.
마욜, 지중해, 1923~1927년, 대리석,117.5×68.5×110.5cm, 파리 로댕미술관 |
오늘날 <지중해>는 마욜의 대표작으로 그를 근현대 조각사에서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일등공신이지만, 1905년 가을 살롱(야수파를 탄생시킨 전시회)에 청동으로 제작하여 <여인>이란 제목으로 출품했을 때 사실적 재현과 동떨어진 조각술로 심사위원과 관객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아카데미화풍이 여전히 프랑스 미술계를 지배하던 시기인 만큼 마욜의 둥글둥글한 덩어리의 집합체처럼 보이는 인체상이 대중에게는 미완성처럼 느껴져 미적 만족감을 주지 못했다.
그런데 그토록 차갑고 냉정한 비판을 받던 작품이 대중에게 의미 있는 예술작품으로 재인식된 계기가 된 것이 <지중해>라는 제목으로 바뀐 이후부터이다.
사실 마욜은 <지중해>를 완성하기 전부터 친분이 있는 문인들에게 작품의 제목을 의뢰했는데 살롱전시 이후 제목을 다시 정하게 되었다. ‘그림자 진 정원을 위한 조상’, ‘여인’, ‘라틴적 사고’ 등 여러 제목이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적으로 선택한 제목이 <지중해>였다.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던 작품이 전혀 다른 의미로 평가된 것은 <지중해>라는 제목을 얻고 난 후부터 이다.
실제 ‘여인’과 ‘지중해’라는 제목을 번갈아 상기해보면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지중해>라는 제목이 주는 무게감과 상징성이 단순히 웅크리고 앉아있는 여인을 뛰어넘어 거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품고 있는 여신상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에 <대성당>과 <지중해>가 지금의 특별한 제목 대신 처음에 사용했던 평범한 제목 그대로 불렸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처럼 여전히 위대한 작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현대미술은 개연성 없는 모호한 제목이나 상징적 의미를 지닌 특별한 제목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이는 작품제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현대미술에서는 작품의 성공 여부가 제목에서 판가름 날 정도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는 <대성당>과 <지중해>처럼 은유와 우의를 내포한 제목 하나가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수사학의 힘을 경험한 결과이다. 현대 미술가들이 철학적 사고를 유도하는 작품 제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이다.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가면에 가려진 현대인의 초상 _
제임스 앙소르(1860-1949)의 <가면과 함께 있는 자화상> /
히에로니무스 보스(1450-1516)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
참고문헌
책 속으로
◆ 사랑, 행복, 권력, 돈, 출세, 성공, 명예, 꿈, 희망 등 인간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들은 언제나 현재의 문제이고, 화가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생각하고 고민한 것은 누군가 이미 생각하고, 또 누군가에 의해 고민될 것들이다. 미술작품을 통해 자신의 일상을 돌아보고,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일은 그중 하나다.
_ 중에서
◆ 툴루즈로트레크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럼주와 브랜디를 폭음해 정신과 육체가 망가져 갔다. 주정과 광기가 심해지고, 급기야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요양소에 입원하기까지 했다. 요양소에서 나와 다시 그림을 그리는 일에 열중하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경련으로 붓을 잡지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기에 이르렀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하나둘씩 주변을 정리해 나갔다. 특히 자신의 모든 작품에 제작 연대와 서명을 남기며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화가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것으로 채웠다. 그리고 1901년 9월 헌신적으로 보살펴 주던 어머니의 곁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때 툴루즈로트레크의 나이는 37세였다.
손상기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을 때쯤 불행하게도 폐울혈성 심부전증이란 진단을 받았다. 정상인이었다면 수술을 해서 삶을 연장할 수 있었겠지만, 장애 때문에 개복 수술이 불가능했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그때부터 하루하루를 더욱 의미 있게 살고자 했다. 두 번째 사랑인 연우와 미뤄 왔던 결혼식도 올리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가족 여행도 떠났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유작을 어떻게 정리하고 보존할지에 대한 고민도 했다. 손상기 역시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화가로서 살아 온 세월이 무의미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주위의 보살핌에도 아랑곳없이 이미 죽음의 길로 접어든 그의 몸은 급격히 쇠락했다. 입원과 퇴원을 6개월 간격으로 되풀이하다가 이내 3개월, 1개월, 1주일 단위로 그 간격이 짧아졌고, 폐활량이 보통 사람의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하루를 이어 가던 그는 결국 1988년 2월 가쁜 숨을 몰아쉬며 39년의 생을 마감했다.
― 중에서
◆ 뭉크에게도 총기 사고가 있었다. 뭉크를 집요하게 사랑했던 여인 툴라 라르센이 결혼을 부정하는 그를 상대로 자살 소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총알이 발사됐다. 이 사고로 뭉크는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잃었고, 사랑과 여성에 대한 불신은 더욱 깊어졌다. 그에게 여성은 유혹당할 만큼 매력적인 동시에 위험한 존재였다.
워홀은 총격 사건 이후 도전 정신과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다. 실제로 워홀은 사건 이후 길거리에서 솔라나스를 마주칠까봐 두려움을 느꼈고 또 자신을 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총격......
사건이 한 화가에게는 삶과 죽음에 한층 깊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된 반면, 한 화가에게는 창작 의지와 열정을 사그라들게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 중에서
◆ 사실 마네와 모딜리아니가 표현한 누드화는 급격하게 변모한 파리의 모습이 반영된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는 악취와 오물로 가득했던 몽파르나스가 도시 개발로 인해 유흥가로 변하면서 매춘과 향락을 즐기던 프랑스인의 일상이 반영된 그림이다. 모딜리아니의 누드화도 마찬가지이다. 1906년에 모딜리아니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도 몽파르나스는 쇄신과 변화, 활기와 열정이 가득했다. 당대를 이끈 수많은 예술가가 모인 몽파르나스는 문학과 예술, 낭만과 고독, 불규칙과 무질서, 사치와 쾌락 등 인간의 보편적 삶의 모습들이 여과 없이 노출되는 곳이었다. 역시 그러한 문화 현상 속에서 탄생했다.
출판사서평
뭉크와 워홀은 왜 총을 맞았을까?
미켈란젤로와 다빈치 중 누가 더 돈을 잘 벌었을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뒤늦게 그림을 업으로 삼은 화가는 누굴까?
영원한 인기 유파인 인상주의의 진정한 리더는 누구일까?
인맥을 활용해 미술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인맥 끝판왕은?
알코올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그림을 시작한 화가는 누구이고,
법정 싸움으로 파산에 이른 화가는 누구일까?
특유의 이미지메이킹으로 성공에 이른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전시에 경찰이 출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잔이 그다지도 열심히 그린 사과에는 어떤 진실이 숨어 있을까?
상상력의 대가 달리가 창작 아이디어를 얻은 방법은 무엇일까?
전문가마저 감쪽같이 속인 세기의 위작꾼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이처럼 예술의 세계에서 만날 수 있는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해답, 그 비밀이 이 책을 집어든 순간 술술 풀린다.
예술사의 거장과 명작, 키워드를
한 쌍씩 묶어 비교하는 본격 비교 미술사
예술 속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책은 시대별로 작품이나 작가를 지루하게 나열하는 대신,
독특한 테마와 특별한 방식(비교하기)을 내세워 미술사를 새롭게 읽어낸다.
‘예술가 대 예술가’, ‘작품 대 작품’, ‘ 키워드 대 키워드’라는 프리즘을 통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본다.
먼저 1장에서는 ‘툴루즈로트레크와 손상기’, ‘이중섭과 반고흐’, ‘달리와 마그리트’, ‘루벤스와 워홀’ 등
삶의 모습과 작품 세계가 평행이론처럼 닮아 있는, 혹은 극과 극의 발자취를 보여 주는 한 쌍의 예술가들을 비교한다.
두 예술가의 삶을 교차하며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예술을 넘어 인생의 가치관을 재발견할 수 있다.
2장은 작품 대 작품의 비교이다.
‘밤 시간의 카페’, ‘파격적인 누드’, ‘욕망을 담은 꽃 정물’, ‘성적인 암시가 담긴 풍속화’, ‘속고 속이는 도박 그림’ 등
시대와 국적을 초월해 유사한 내용을 주제로 삼은 한 쌍의 작품들을 비교한다.
1장이 예술가라는 인물 자체에 초점을 둔 반면 2장은 특정 작품을 주제, 소재, 기법, 의미 면에서 상세하게 분석한다.
마지막 3장에서는 ‘재능과 열정’, ‘선과 색’, ‘이성과 감성’, ‘예술가와 뮤즈’, ‘진품과 위작’, ‘패러디와 표절’ 등
예술사에서 끊임없이 논쟁거리가 되었던 문제들을 키워드로 비교한다.
다소 어려울 수 있는 예술적 개념이지만 관련 그림들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책속으로 추가
◆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억지로 모델을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고야가 왕족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사냥밖에 몰랐다.
선대 왕이 이뤄 놓은 번영이 급격히 무너진 것은 그의 이런 무능함 때문이었다.
여기에 권력층의 다양한 악습이 만연하고 정치적 혼란이 난무한 상황을 지켜본 고야에게
왕족은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고, 충성심보다는 반감이 더 컸다.
이러한 마음을 감춤 없이 초상화에 그대로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들이 분개하지 않은 점이다.
자신들을 아둔하고 무능한 왕족으로 표현한 것을 모른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화면 왼쪽의 어둠 속에서 비판적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는 인물, 바로 고야 자신뿐이다.
― <사진보다 더 애틋한 가족의 초상_ 스페인 황가의 얼굴 vs. 한국 대가족의 얼굴> 중에서
◆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갈등은 상대방의 조형 의식을 비판하는 어투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앵그르는 낭만주의 회화의 불분명한 형태와 자유로운 색의 사용을 부정했다.
특히 낭만주의 화가들의 영웅인 루벤스를 ‘푸줏간 주인’쯤으로 여기고, 들라크루아를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매도했다.
이에 들라크루아는 앵그르의 소묘를 ‘퇴색한 소묘’라 모욕하며, 감정에 충실한 색과 형태를 더욱 중시했다.
두 사람의 회화적 특징은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앵그르의 작품 <그랑 오달리스크>는 붓 자국을 느낄 수 없을 만큼 매끈한 표면 처리, 천과 사물의 섬세한 질감 표현, 유연한 선, 뛰어난 양감과 부피감 표현이 돋보인다.
들라크루아의 작품 <소파 위의 오달리스크>는 불확실한 외곽선으로 형태가 불분명하다. 대신 자유로운 색채의 사용으로 앵그르의 작품과 다른 깊이감과 생동감이 있다. (...)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는 극도로 대립적인 화풍을 표출했던 두 사람이 모두 낭만주의 음악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앵그르는 낭만주의 음악가 리스트와 교제했고,
들라크루아는 창작의 고통을 불꽃처럼 폭발시키는 쇼팽의 삶을 예술가의 참모습이라고 존경했다.
그러나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두 사람이 그린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초상을 보면 역시 그림에서만큼은 영원한 맞수였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 <미술사의 또 다른 오랜 싸움_ 앵그르의 이성 vs. 들라크루아의 감성> 중에서
손상기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담벼락에 매달린 덩굴꽃...붓끝에 담은 희망
폐병으로 마흔 못넘기고 요절한 천재화가 / 초3때 허리 다쳤지만 그림으로 장애극복 / 고등학생 시절 첫 수채화 개인전 열기도 /
남보다 낮은 시선서 바라본 풍경 이색적 / 화려하지만 허무한 대도시 속성 꼬집어
화가 손상기(1949~1988)의 1984년작 ‘공작도시-독립문 밖에서’이다. 서울 풍경을 포착한 화가의 ‘공작도시’ 연작 중에서 ‘독립문 밖에서’ 본 도시의 한 단면이다. 닿을 수 없는 담 앞으로 건너지 못할 철조망까지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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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상기는 마흔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신화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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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은 상채기 난 나의 꿈과 이상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였다. …그러나 그 후 나는 현실이라는 것, 역사라고 하는 것 그리고 민중, 그들의 아픔에 대하여 직시하게 되었고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삶 그것을 또 하나의 작업과정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천재의 요절은 숙명일까. 말년의 그는 폐결핵에 걸렸고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병상에서 그린 ‘공작도시-영원한 퇴원’은 잘 정돈된 병원 침대 위에 지팡이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 병 털고 일어나는 날에는 지팡이도 떨치고 가리라. 하지만 그는 영면에 들었고 40년 안 된 인생, 20년 남짓한 화가생활로 약 1,500여점의 유작을 남겼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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