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 소비에트 / 현대회화

2019. 4. 13. 19:44미술/ 러시아 회화 &





18세기-19세기초 고전주의
근대 러시아 미술의 태동



안트로포프, <루먄체바의 초상>보로비코프스키, <알렉산드르 보리소비치 쿠라킨의 초상>


서구화 정책을 주창하던 표트르 대제 시대에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 이후 세속적 미술이 번성하였던 서구 제국으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었다. 외국인 미술가가 러시아에 초빙되는가 하면 화가 니키친 형제, 마토베예프, 자하로프 등과 같은 러시아의 미술가들을 외국으로 유학보내기도 하였다. 새로운 러시아 미술계는 르네상스의 미술, 바로크 미술, 고대 미술 등 서구 미술의 유산으로부터 폭넓게 배움으로써 당시 세계 미술의 수준에 근접하고자 하였다. 표트르 대제 시기에는 특히 초상화, 전쟁화, 역사화, 풍경화, 풍속화 등의 기초가 다져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전의 이콘 회화의 전통과는 별개로 러시아 세속화 학파가 생겨났는데 이 학파의 중심지는 1757년에 세워진 제국예술 아카데미였다. 이 아카데미와는 러시아 최초의 전문 화가들인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 드미트리 레비츠키, 표도르 로코토프 등이 관련되어 있었다.



니키틴, <표트르 대제의 초상>



18세기 후기가 되면서 러시아 미술은 새로운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고전주의라는 휴머니즘과 시민정신을 담은 새로운 미술 양식이 등장하였다. 라디셰프, 노비코프, 바졔노프, 이바노프, 우르바노프, 체카레프스키 등의 작가, 미술가, 평론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과 유사한 새로운 시민적 예술을 러시아에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세기 후기에 들어 러시아 진보적 화가들은 애국심과 시민정신으로 가득 찬 역사화를 그렸는데, 아키모프, 소콜로프, 우그류모프가 그 대표자들이다. 이 시기에는 농민을 테마로 한 작품들도 나타났는데 시바노프의 <농민의 점심>, <결혼의 축하>와 예르메뇨프의 <노래하는 맹인들>, <노인과 소년> 등이 그것이다. 18세기의 러시아 미술 인텔리겐치아는 주로 시민들 출신이었고 당시의 뛰어난 모든 작품들은 대부분 서민 출신의 미술가들에 의해서 창작되었다는 것도 특징적인 사항이다 


19세기 전기의 러시아 미술

19세기 초의 러시아 미술은 고전주의를 기초로 발달하였다. 1800년대와 1810년대에도 제국예술 아카데미에서 고전적인 미의 규범이 유지되어 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초상화가 발전되었는데 키프렌스키와 트로피닌이 이 시기에 활약했다.

키프렌스키의 <시인 쥬코프스키>, <트루베츠코이>, <다비도프의 초상>, 등과 같은 초상화들에는 깊은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고독한 몽상가의 모습을 한 인물들이 그려졌다. 그는 개인의 심리, 모델의 자연스런 몸짓을 표현하는 데 주력하였다. 트로피닌은 자신의 초상화에서 선량하고 목가적인 단순함을 지닌 인물들을 복잡한 심리묘사 없이 표현했다. 그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아들의 초상>, <레이스를 뜨는 여자>, <기타를 치는 남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세기 전기의 러시아 풍경화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방향으로 발전하였으며 자연스러운 미를 추구하였다. 실리베스트르 쉐드린의 <소렌토 만>, <해변의 테라스>등과 레베데프의 <아리바노 근교의 길> 등의 풍경화에는 자연스런 자연의 멋이 표현되어 있다.


브률로프, <폼페이 최후의 날>

니콜라이 1세의 통치 시기(1825-1855)에 접어들어 그의 반동 정치는 러시아의 자유로운 미술을 억압하고 그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브률로프의 회화에는 이 시대의 모순과 위기의식이 잘 묘사되어 있다.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은 폼페이의 흥망이라는 역사적인 주제를 다룬 유명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러시아 회화가 고전주의로부터 진일보하여 낭만주의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페도토프, <소령의 청혼>



1840년대 페도토프는 많은 풍속화를 그렸다. 그는 '현실생활'에서 자신의 작품의 제재를 찾았다. 즉 30-40년대의 귀족, 소시민, 관리, 농민, 걸인 등 러시아의 모든 사회층의 대표자들이 그의 화폭 속에 등장하게 된다. <식객>, <피델리카의 죽음>, <약혼 예물 없이 결혼한 화가> 등은 그의 일련의 풍속화이다. 페도토프는 모든 인물과 사물들을 감촉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창조해내어 작품 속에 반영하였다. 그의 후기 작품에는 비애와 절망이 가득 찬 장면이 화폭에 담겨져있다. 그의 작품 속의 어두운 색조는 이러한 작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리얼리즘 회화와 이동파 미술

레핀, <볼가강의 배를 끄는 인부들>





















1800년대 중반 러시아에는 가혹한 전제정치 밑에 농노제도가 늦게까지 존속하고 있었다. 당시 남녀 농노의 총수가 2240만 명에 달하였으며 이는 근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었다. 한편 1853∼56년에 걸친 크림전쟁에서의 패배와 59년 이래 국내 혁명 정세의 격화는 농노해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을 국가 발전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여기고 해방령의 제정을 서둘러 결국 61년 3월 5일에 이를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농노는 인격적 자유를 얻었으나 제도의 시행이 모든 토지는 지주(地主)의 재산이라는 전제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많은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토지의 소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농노가 차지한 토지는 종래 경작한 땅의 절반 정도에 지나지 않아 결국 이들은 지주 밑에서 소작인이 되거나 토지를 떠나 노동자가 되거나 하는 수밖에 없어 생활 빈곤은 여전하였다.

개혁으로 농노제의 속박이 완화되고 다수의 노동자가 생겨남으로써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달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절대주의 군주체제의 강화 속에서 반동적 경향을 띠었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의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짐으로써 농민들을 포함한 인민의 생활수준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그로 인한 불만 역시 고조되고 있었다.

미술계는 두 방향으로 급격하게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공인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살롱 회화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들은 성당의 벽화나 장식의 제작을 인수하여 보수작업을 벌이는가 하면 부유한 귀족이나 고급관리, 상인 등 민중과는 관련없는 이들의 취미에 영합하는 미술의 제작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실을 표현하려했던 이들은 생기없는 아카데미와의 절연을 선언하면서 생생한 민중예술가로서의 포지션을 구축한다. 페로프, 크람스코이, 시쉬킨, 마코브스키, 게, 먀소예도프 등은 1870년 이동전협회를 설립하게 된다.




알렉세이 사브라소프, <까마귀들이 날아들다>(1871)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집중되어 있는 전시를 다른 도시에서도 돌아가며 연다는 의미에서 '이동파'라는 이름을 붙인
그들은 이전에 사실주의미술을 표방하던 미술가조합의 전통을 발전시키고 사실주의를 지향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벨린스끼나 체르니솁스키의 미학에 따라 민주적인 입장에서 러시아 민중의 생활․역사․노동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민중의 해방에의 의욕을 선보이는가하면 전제정치․농노제의 잔재를 폭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동파 미술운동은 농노 해방 이후 오히려 더 궁핍의 나락으로 떨어져만 가는 민중의 고달픈 현실을 바라보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아카데미 미술에 환멸을 느낀 일군의 의식화된 예술가들이 펼친 하나의 미술 운동이다. 민중과 자신들을 결부시켜 그들의 입장에서 함께 고통받고 눈물 흘림으로써 이동파 미술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이전의 초기 리얼리즘 경향의 미술을 구체화시켜 훗날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나아갈 러시아 미술사 전체에 참된 길을 제시하였다. 페로프의 작품에서, 또한 레핀과 수리코프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그 형식과 소재는 다를지언정 일관되게 러시아의 미래를 열어갈 민중에 대한 믿음과 확신, 지지를 읽을 수 있다. 




미하일 네스테로프, <바르톨로메오에게 나타난 환영>


또한 이동파 미술은 단지 내용에만 열중하느라 예술적 깊이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더 잘 표현하고 나아가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여러 기법들을 사용하였고 그러한 시도들은 그들의 정신성에 걸맞는 경지를 나타났다. 이동파 미술운동은 이러한 성과들을 통해 러시아 미술사에서만이 아니라 세계미술 전체의 역사에 있어 두드러진 족적을 남긴 위대한 미술 운동이었다.







러시아 모더니즘 - 미하일 브루벨



브루벨, <자화상>(1905)

 

  

미하일 브루벨(Mikhail Alexandovich Vrubel 1856~1910), 1910년 정신병으로 사망하기까지 그의 그림의 화두는 '악마'였다. 그의 작품은 세기말의 혼돈 속에서 피어난 데카당스와 맞닿아 있었다. 그는 또한 비잔틴 미술을 재해석해 새롭게 재창조했다. 브루벨은 회화 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 등과 같은 분야를 아우르며 시대를 앞서나간 인물로 평가받았다.

 

미하일 브루벨은 러시아의 옴스크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미술 실력을 인정 받았지만, 집안의 뜻에 따라 18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다. 하지만 변호사의 길을 포기하고 그는 아카데미 예술 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브루벨, <제자들 가운데 강림한 성령>(1885)

 
1884년 브루벨은 키예프의 키릴로프스키 수도원의 프레스코화 복구 작업에 참여하게 되고, 이 벽화 복원 과정을 통해 향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좌우할 중요한 조형적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그는 그동안 배워온 유럽 전통의 사실적이고 합리적 표현을 넘어 비잔틴 미술 특유의 아름다운 선과 장식적인 면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중세 기독교 미술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세기말의 영향으로 관능적이지만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그림으로 풀기 시작한다.


브루벨, <이탈리아의 밤>(1891)
브루벨, <판토마임>(1896) 

 

브루벨은 작품 초기부터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눈에 띄는 재능을 보여주었다. 시베리아의 극단적인 자연환경 속에서 그가 겪었던 어린 시절 형제 자매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남았고,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은 어둡고, 서늘했다.



 

브루벨, <라일락>(1901)

브루벨은 초기에 기독교 미술을 바탕으로 동방의 문화를 흡수한 헬레니즘과 고대 아시아 및 페르시아 왕조의 미술이 섞인 비잔틴 미술에 매료되었다. 비잔틴 미술은 화려하고 장엄하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중시했다. 브루벨은 그 중후하고 선명한 색채, 화려한 장식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아 내었다. 비잔틴 미술의 또 하나의 특징인 화려한 모자이크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보여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브루벨의 벽난로 장식


브루벨, <기사>(1896)

 


1890년부터 브루벨은 모스크바에서 활동을 한다. 그는 아르누보적인 그림, 도자기, 스테인드글라스, 건축, 의상, 무대 제작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같은해 브루벨은 러시아의 시인 레르몬트프(Lemontov)의 낭만적인 시와 소설에서 영감을 받아 그 유명한 '악마' 시리즈를 발표한다. 시인의 악마는 타마라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사랑했다. 타마라 역시 악마의 사랑에 화답하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신은 그녀의 목숨을 앗아감으로써 그녀를 악마로부터 떼어 놓는다. 악마는 실의에 빠진 채 다시 카프카즈의 하늘을 떠돌게 된다. 이러한 줄거리의 레르몬토프의 서사시 <악마>는 레르몬토프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 하고 있었다. 고독하고 상처받은 레르몬토프의 우수에 찬 악마의 형상을 브루벨은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브루벨, <전락한 악마>(1902)

브루벨의 악마는 중성적인 얼굴에 뾰족한 귀, 노을 지는 하늘과 장식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깍지 낀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채 먼 산을 응시한다. 그의 눈은 우수에 잠겨있고, 마치 눈물이 고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브루벨은 자신의 작품 속 악마에 대해 '여성과 남성의 외양을 통합한 영혼, 악하기 보다는 강하고 고귀한 존재로서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영혼' 이라고 말했다. 이 작품에 대해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천재의 매력적인 교향곡이라 칭송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야생적 추함' 이라고 비판을 하기도 했다.


 
브루벨, <백조공주>(1900)

1896년 브루벨은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 나데즈다 자벨라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는 아내를 위해 오페라 <백조 공주>의 무대 세트와 의상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브루벨은 화려하고 조형적인 작품들을 많이 제작한다.



 
브루벨, <여섯 날개의 천사>(1904)



하지만 사랑하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고통에 시달리던 그는 1901년 다시 '악마'를 테마로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는 심한 신경 쇠약에 시달렸고, 결국 한 정신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매독 3기로, 근육과 골격이 파괴되기 시작했고, 병마는 이미 뇌까지 침범하여 브루벨은 회복 불능한 상태였다. 그는 1906년부터는 전혀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고, 1910년 매독의 고통 속에 생을 마감했다.

 








소비에트 회화


게라시모프, <스탈린과 보로쉬노프>

파페르늬는 소비에트 건축물들을 통해 20년대 혁명기 문화와 30년대 이후 스탈린 지배하의 러시아 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의 양상들을 고찰하면서 혁명적이고 역동적이며 수평적, 다원적인 1920년대의 문화, 즉, 문화 1이 20년대 말 급격한 단절을 통해 보수적이고 정적이며 수직적, 위계적인 스탈린 시대의 문화, 문화 2로 이행하였음을 지적한다.


문화 1은 끊임없는 움직임을 갈망하는 전위와 전복, 변화와 혁명의 문화다. 타틀린(В. Татлин)의 제 3 인터내셔널 기념탑은 바로 이러한 ‘움직임’을 기계와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이상을 통해 표상하는 문화 1의 기념비이다. 물론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지어지지 못했다. 400미터 높이에 이르는 거대한 나선형 구조물은 멈추지 않는 역사의 발전을 형상화하며, 나선의 안쪽에 위치하는 세 개의 기하학적인 구조물들은 각각 일 년과 한 달, 그리고 하루를 주기로 자전하며 시간의 흐름을 따른다. 즉, 이것은 ‘움직임’ 자체에 대한 기념비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기획이었던 “레타틀린(Летатлин)” 역시 이러한 움직임을 향한 극단적인 시도였다. 그것은 인간의 근육으로 힘으로 날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하려는 시도이다. 즉, 가장 현실적인 삶의 조건으로서의 인간의 몸과 구성주의 고유의 테크놀로지가 ‘움직임’의 극한으로서의 ‘비상’으로 수렴되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 문학과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의 모티브들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지향으로서의 문화 1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가는 문화 1의 낭만주의는 마야코프스키의 계단시에서와 같이 분절된 역동적인 시행을, 장식주의 소설의 소용돌이치는 산문의 리듬을, 그리고 빛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포착하려는 아방가르드 화가들의 역동적인 회화를 탄생시켰다.


이것은 삶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거주지와 소유를 버리고 다른 어딘가를 향해 떠나갔다. 이들에게 기차의 객실과 배의 선실 같은 공간은 집과 동일한 의미를 지녔다. 이 당시에는 건축 역시 움직이는 것, 역동적인 것이 되고자 했다. 1927-28년 유제포비치가 고안한 “날아다니는 도시”는 바로 이러한 역동적 공간의 극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920년대 말이 되면서 점차 정부의 인구의 통제와 동원을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변화한다. 움직임을 특성으로 하는 다원적이고 자유로운 수평적 문화가 보여주는 혼돈과 무질서는 새롭게 도래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세계 속에서 척결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던 바, 계속되는 정부의 제도화의 노력 속에서 어느새 문화 1의 유동성은 점차 문화 2의 부동성으로 대체되게 된다.



사비츠키, <전장으로>


소비에트인들은 지상위에 고착된 부동의 존재로서 계획된 주거 공간 속에 재배치된다. 대신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수직적인 축이 지상의 공간 중심에 세워지며, 그 가장 높은 곳에는 자주 이데올로기의 표상으로서의 별 혹은 독재자의 조각상이 자리하게 된다. 이는 이오판의 소비에트 전당 프로젝트로부터 이후의 많은 소비에트 건축가들에게서 반복된다. 그것은 곧 지상과 하늘을, 현재와 미래를 혹은 현실과 이상을 잇는 매개로서의 이념이자 그 이념을 체화하고 있는 지도자의 형상인 바, 문화 2의 새로운 수직성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독재자에게는 신과 동등한 후광이 부여된다.




독재자를 그리고 있는 당대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가 자주 종교적인 성상화의 구도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전화된 예술작품들 속에서 지도자의 형상 혹은 긍정적 주인공들의 형상은 극도로 추상화되어 있다.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이라기보다 이념을 담고 있는 육체와도 같으며, 그들의 육체는 지상의 민중적, 물적 토대를 고양시켜 상위의 것으로 끌어올리는 매개체와도 같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들이 자주 영웅의 아래로부터 위를 향한 삶의 여정을 그리는 성장소설이 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소비에트 건축의 수평성과 수직성의 조화는 바로 이러한 공간적인 신화를 반영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 속의 스탈린의 형상은 스탈린 양식 건축물들의 수직성을 반복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민중들을 배경으로 전경화되는 스탈린의 형상은 종교화에서 성인의 형상이 묘사되는 방식인 동시에 소비에트 시기 건축 프로젝트가 지향한 토대로서의 수평적 지상과 그것을 천상으로 끌어올리는 매개적 수직축의 구조를 닮아 있다.


게라시모프의 “크레믈린의 스탈린과 보로쉴로프(1941)”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스탈린 양식 건축물들에 특징적인 수직적인 원칙을 반복한다. 크레믈린의 다른 벽들은 생략되고 종루만이 그려져 있으며 그것과 나란히 스탈린과 보로쉴로프의 거대한 수직적 형상이 존재한다. 스탈린과 보로쉴로프는 크레믈린의 상징성을 공유한
다. 여기서 특히 스탈린의 형상은 건물의 꼭대기를 장식하는 조각상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나란히 서 있는 보로쉴로프보다 한층 더 그에게서는 모든 인간적인 색채나 디테일들이 제거되어 있다. 그와 크레믈린 종루는 동일한 색조를 이루며 그 동질성을 강조한다. 그는 움직이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멈추어 있는 조각상에 가깝다. 이 작품에서뿐이 아니다. 대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 속에서 스탈린은 이처럼 조각상과 같은 부동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회화에서뿐만이 아니다. 그는 영화 속에서도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 속의 스탈린의 형상은 사람이라기보다 조각상에 가깝다. 이는 레닌과 대조적이다. 레닌의 형상은 많은 경우 역동적이다. 게라시모프가 그린 레닌의 형상은 깃발의 움직임과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간다. 또한 레닌은 자주 군중으로부터 유리된 것이 아닌 움직이는 군중들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부동의 수직적 형상으로서의 스탈린과는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이는 앞서 지적한 문화 1과 문화 2의 대립을 반복한다. 레닌이 움직임의 문화로서 문화 1을 대변한다면 스탈린은 문화 2의 부동성을 체화한다.


이 때 움직이지 않는 조각상과 같이 그려진 스탈린의 형상은 스탈린의 기호에 가깝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스탈린이라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예술적 전범들 속에서 스탈린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념에 대한 기호로 부활한다. 기념비는 부재를 전제로 하지만 동시에 영원성을 지향한다. 즉, 기념비의 탄생의 과정은 죽음을 통해 인성이 신성으로 치환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스탈린의 형상이 조각상의 형상으로 치환됨으로써 그는 살아생전에 이미 성상화 속의 성자들처럼 신성을 획득하고, 무한한 자기 복제를 통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수사학의 중심에 언제나 “최종적인 말”로 존재하는 태양과도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던 바, 이는 곧 소비에트 사회의 스탈린 신화화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는 이러한 신화의 반복 재생산 과정이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 카지미르 말레비치


말레비치, <자화상>(1908)

말레비치, 루복 형식으로 그려진 자서전적 삽화 연작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생애>(1914)
 

1878년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생으로 키에프 미술학교, 모스크바 미술아카데미에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는 라리오노프에게 인정받아 그들의 그룹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며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흔히 P.C.몬드리안, V.칸딘스키와 함께 추상예술의 개척자로 간주된다. 처음에는 후기인상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M.F.라리오노프 및 러시아의 전위파(前衛派) 시인들과 친교를 맺고 수프레마티즘(절대주의)을 주창하였다.


1911년 스페이드 잭’이라는 그룹전에 참가하여 러시아 입체파 운동을 추진하였다. 1912년 파리 여행 후 레제 스타일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발표하였으며, 그 이후로는 급속히 자기 방법을 발전시켜 1912<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원 ·십자 ·삼각형을 추가하고, 그러한 기본 형태에 의한 추상예술을 이론화하면서 그것을 수프레마티즘이라 이름 짓고 마침내 1913년 사물의 형상을 모두 부정하여 최소의 형태만을 남겨둠으로써 회화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고자 하였던 절대주의 회화로 완전히 선회하게 된다.


1918년에는 <흰 색 위의 흰 색> 백위에 백 시리즈를 제작하였다. 1919~22년 비텝스크 미술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혁명 직후의 소비에트정부에 의해 모스크바의 국립 응용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19211922년의 미술 정책의 급격한 전환으로 인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이주, 작품전시의 자유를 잃은 채 지냈다. 그는 1926년에는 독일에서 절대주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저서 <비구상의 세계 Die gegenstandslose Welt>를 바우하우스를 통해 간행하였다. 특히 그는 이후 러시아의 구성주의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슬라브적인 직관과 추상성이 결합된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게 된다. 말년에는 타틀린과 대립하였고 지위를 박탈당한 채 1935년 레닌그란드에서 사망하였다
 




말레비치,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장치 소묘(1913)
말레비치, <붉은 사각형>(1915)
































러시아의 전위 미술운동의 하나인 절대주의는 말레비치 한 사람에 의해 제창되고 실현된 순수한 기하학적인 순수 추상회화(抽象繪畵)운동으로 수프레마티즘이라고도 한다. 이는 입체미래주의의 주축으로 활동하였던 그가 1913년 마츄신, 크루쵼늬흐와의 공동 작업인 오페라 <태양의 승리>의 의상제작과 무대장치를 만들면서 무대 장치로 1915 <흰 바탕위의 검은 사각형>을 발표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말레비치, <절대주의적 구성> 


말레비치, <역동적 절대주의>(1916)

자연의 혼돈을 지배하는 인간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절대적 기본형태로서의 직선은 그의 기하학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자연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사각형은 절대주의의 기본요소였다. 그는 사물의 형태를 그리는 회화 예술의 관례를 부정했다. 그는 기존의 모든 형태를 파괴하고 부정하는 일종의 부정신학적 방법론을 통해 회화 예술의 본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또한 그는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고 믿었고 물질적 필요의 충족을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917년 혁명은 환영했으나, 예술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그의 작품에는 표면적인 과격함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에 러시아적 관조와 영성이 놓여 있었다.  

  

말레비치, <스포츠맨>(1928-30)


말레비치, <자화상>(1933)


말레비치는 미술가가 수동적으로 자연 환경에 반응하는 전통적 재현방법을 거부하고 자연 그 자체의 실재와 같이 의미 있는 새로운 실재들을 창조하려 했으며 그 방법으로써 사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기하학적 형태를 택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는 창작 예술에 있어서 순수감성의 절대적 우위를 말한다"라고 그의 회화의 의도를 피력했으며 이는 곧 시작적, 물질적 현실세계를 초월하여 대상 없는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정사각형을 가장 이상적 형태로 간주하여 그것이 십자형, 장방형 등 다른 절대주의 형태들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말레비치의 그림에서의 흰색바탕은 푸른 하늘의 경계를 부수고 무한한 공간으로 탈출하려는 그의 의지를 나타내며 절대주의가 전개될수록 색이 정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사각형에 채색된 선명한 색채마저 점차 배제하게 된다. 모든 불순물을 쏟아버린 무의 세계라는 말레비치의 표현에서처럼 기본적인 가하학 형태와 무색을 통해 그는 물질에 대한 정신의 절대적 우위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러시아 현대미술 - 일리야 카바코프



I. 일리야 카바코프와 '포스트소비에트'의 예술



<붉은 열차>



























망명 예술가 일리야 카바코프(Илья Кабаков)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태어났지만, 모스크바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였고 1987년 러시아를 떠나 오스트리아에 정착할 때까지 모스크바에서 활동하였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주된 모티브들은 이미 소련 시절에 완성된 것이다. 특히 화장실과 부엌을 비롯한 공공주택의 삶이나 일상의 사물들 같은 소비에트적인 모티브들은 그의 평생의 작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총제적 설치(total installation)’라는 장르 역시도 그것을 구성하는 많은 부분은 그가 이미 소련 시설 피보바로프(Пивоваров) 등과 함께 고안한 ‘앨범(альбом)’ 장르의 작품들에 포함된 삽화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러시아를 떠날 때까지 그는 불라토프(Булатов), 피보바로프 등과 함께 ‘스레텐스키 거리(сретенский бульвар)’의 멤버로, 그로부터 발전된 ‘모스크바 개념주의(Московский концептуализм)’, 즉, ‘소츠 아트(соц-арт)’ 및 이후 결성된 ‘집단 행동(коллективное действие)’ 그룹을 이끄는 대표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외에도 그는 생계를 위해 아동용 서적의 삽화를 그렸다. 이 일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오히려 카바코프는 삽화가로 인정받는다. 그는 일 년 중 3-6개월을 삽화 그리는 일에, 나머지 기간을 자신의 고유한 작품 활동에 할애하였다. 이 때 그가 그린 아동용 서적의 삽화가 소비에트 공식예술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면, 그 외의 그의 고유한 프로젝트들은 공식 예술의 경계 외부에 버젓이 존재하고 있었던 비순응적 예술,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카바코프 없는 러시아 현대 미술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모스크바 개념주의를 비롯하여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미술의 발전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앨범 장르와 이후의 총체적 설치작품들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다름 아닌 그가 공식 예술의 테두리 안에서 창조한 아동용 서적들의 삽화였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의 소재가 되는 것은 대개의 경우 지나칠 만큼 자질구레한 소비에트 일상으로부터의 사물들이었다.


그의 서구에서의 성공은 러시아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사실 러시아 예술가가 서구 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경우는 드물었다. 혹자는 그의 성공이 러시아 폄하적인 작품 경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설치미술 작품의 하나인 「공공 화장실」, 쓰레기 더미들로 가득한 소비에트 공공주택의 형상들을 보면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러시아인들 역시 존재한다. 70년대부터 주택관리소(ЖЭК: Жилищно-эксплуатационные конторы)의 예술가라 불릴 만큼 공공주택의 리얼한 삶을 그대로 보여주었던 그의 작품들은 설치미술이라는 장르에 힘입어 더욱 리얼한 소비에트적 삶에 대한 재현이 되었다. 사실상 그것은 재현이라기보다 구축이었다. 실제 소비에트의 삶을 박물관의 공간 안에 옮겨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설치미술 작품들은 그것이 보여주는 리얼리티에도 불구하고 환상적이다. 공공주택 거주자 10인의 이야기들에 대한 텍스트들로 이루어진 그의 대표작 「10명의 사람들 (10 персонажей)」은 바로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우주로 날아가기를 꿈꾸는 사람, 자신의 그림을 응시하면서 어느새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간 사람, 재능 없는 예술가, 어떤 물건도 버릴 수 없었던 수집가 등. 그러나 설치된 작품 속에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실제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를 통해 재현될 뿐이다. 이들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작품에 붙여짐으로써 관객은 그들의 모습과 삶을 재구해 낸다. 오히려 이들의 존재는 이들의 부재와 이들을 기억하는 이야기를 통해 재현된다. 이러한 공공주택 거주자들의 이야기는 소비에트 공간 속에서 늘 그 공간 외부를 꿈꾸었던 내적 망명자들의 삶을 형상화한다. 특히 이들 내적 망명자들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삶의 흔적을 담는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소비에트 폄하적’이라는 혹평에도 불구하고 다른 어떤 것보다 러시아와 소비에트에 대한 강한 낭만적 지향을, 노스탤지어를 드러낸다. 그가 설치미술을 통해 구축하는 소비에트의 사물들과 쓰레기들, 공공주택의 일상의 삶의 형상은 소비에트적인 것에 대한 해체의 기획에 연장선상에 있으며 그의 작품 속의 등장인물들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의해 거부된 아방가르드 예술을 여전히 꿈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 속에서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기획은 예술적 이상인 동시에 아이러니의 대상이 되며 소비에트적인 일상 역시 그것의 키치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유년의 기억을 대표하는 사물들로서 재의미화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예술은 소비에트적인 것에 대한 해체와 탈신화화를 꾀했던 1970년대 소츠-아트의 기획을 넘어선다.


소츠-아트와 모스크바 개념주의 예술가들은 소비에트 시대의 대표적인 기호들을 전혀 새로운 콘텍스트에 위치시킴으로써 그러한 이념적 기호들을 희화화하고 탈신화화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서 역시 1980년대 중반 이후 소비에트적인 것들은 양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해체의 대상이었지만 동시에 노스탤지어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리포베츠키(М. Липовецкий)는 브로드스키의 1980년대 말에 쓰여진 서사시 「공연(Представление)」을 분석하는 논문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상이 늘 돌아갈 수 없는 문화적 유토피아로서의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모더니즘에 대한 향수를 드러낸다고 지적하였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브로드스키의 이 작품이 그의 일반적인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구성과 내용의 많은 부분에서 모스크바 개념주의 시학의 요소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서사시는 소비에트 일상으로부터의 사물들의 목록을 열거하는 루빈슈테인(Рубинштейн)의 카드시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에서 모든 혼란스러운 소비에트 사물들의 목록은 자장가를 불러주는 어머니의 노래로 수렴된다. 이는 브로드스키의 위 작품과 거의 유사한 시기에 씌어졌으며 그와 유사한 감상성을 드러내고 있는 모스크바 개념주의 시인 키비로프(Кибиров)의 1990년작 서사시 「작별의 눈물 사이로(Сквозь прощальные слезы)」에서 또한 반복된다. 스스로를 개념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던 키비로프의 경우, 소비에트의 기호들을 열거하고 희화화하는 개념주의적 기법들과 기획들은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사라진 것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비가적 감상성에 의해 대체된다.




카바코프의 설치, <화장실>






카바코프의 설치작품 「공공 화장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2년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전의 박물관 뜰에 설치된 카바코프의 공공 화장실에는 익숙한 러시아의 문 없는 화장실 옆에 나란히 소비에트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부엌 공간이 설치되어 있다. 카바코프 스스로 지적하고 있듯이 공공주택의 부엌에는 당시의 삶의 모든 것들, “저열한 것과 위대한 것, 일상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 사랑, 그리고 깨진 접시를 두고 벌이는 싸움, 후한 인심과 전기 요금의 1-2 코페이카 때문에 벌어지는 인색한 다툼들, 그리고 방금 구운 커틀렛을 나누는 것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문제로 인한 신경전”이 공존하고 있었다. 카바코프는 지저분하고 낙서로 뒤덮힌 화장실과 나란히 방금 식사를 마친 부엌의 테이블을 위치시킴으로써 소비에트적 공간 속에서 계속된 삶의 형상을 복원한다.


특히 그의 화장실에는 작가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모스크바 예술학교 기숙사에 입학한 후 그의 어머니는 드네프로페트롭스크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아들을 위해 모스크바로 상경한다. 그러나 거주등록을 할 수 없었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다니는 기숙학교의 세탁실에서 살게 된다. 특히 과거 화장실로 사용되었던 그 세탁실에는 여전히 변기들을 비롯한 화장실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후 그의 어머니는 밀고자로 인해 그곳에서 쫓겨나게 되며 카바코프는 그 때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회상한다. 그 사건은 카바코프로 하여금 ‘집없음’의 느낌을 갖게 하였다. 그의 설치 작품 화장실의 공간은 바로 이러한 작가의 유년의 기억을 함축한다. 설치된 화장실의 공간 속에서 그가 느끼는 ‘집없음’의 감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와 고국의 형상으로 확대된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예술적 재현의 시도와 소츠-아트의 소비에트적 기호들의 해체라는 예술적 실험을 넘어 카바코프의 「공공 화장실」은 소비에트의 삶과 기억을 문제를 가장 전면으로 부각시킨다. 브로드스키와 키비로프의 서사시가 그러했듯이 소용돌이치는 소비에트적 기호들이 이루는 카오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삶에 대한 향수와 그 중심에 있는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와 고국의 형상으로 수렴된다.


이처럼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예술은 러시아 아방가르드 문화에 대한 지향과 함께 소비에트적 삶에 대한 지향을 동시적으로 드러낸다. 1998년 러시아 출신의 미국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콘스탄틴 보임(Константин Бойм)은 일련의 잃어버린 기념비(монумент)들의 모형으로 기념품(сувенир)을 제작하였다. 그가 제작한 모형에는 타틀린(Татлин)의 탑과 소비에트의 전당, 솔로몬의 성전이 포함되어 있다. 이 때 타틀린의 제 3 인터내셔널 기념탑과 소비에트의 전당은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 예술을 가능하게 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바쳐진 기념비였다. 타틀린의 탑은 늘 러시아 비공식 예술 전통의 중심에 존재했다. 많은 모스크바 개념주의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타틀린의 탑은 영감의 원천으로서 그들의 작품 속에 계속적으로 등장했다. 때로 그것은 버려진 어린 아이의 장난감과 병치됨으로써 희화화되었고, 때로 폐허가 된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한 애도를 담았다. 이들에게 타틀린의 기념비는 1920년대의 유토피아의 꿈에 대한 상징물로서 문화적인 신화와도 같았다. 위대한 소비에트의 꿈을 상징하는 소비에트의 전당 역시 이들 예술가들에게 있어 이중적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실현되지 못한 소비에트 이념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아방가르드를 계승한 유토피아에 대한 향수를 내포하였다.




카바코프 설치, <프로젝트의 전당>


카바코프에게서 소비에트의 전당은 타틀린의 기념비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그 둘은 교묘하게 하나를 이루었다(예를 들어 옆의 설치 작품 「프로젝트의 전당(Palace of Projects)」를 보라). 그것은 분명 소비에트 전당의 수직적 형상을 반복하면서 동시에 타틀린의 기념비의 나선형 구조를 반복하였다. 그 안에는 소비에트의 이념적 상징물들과 삶으로부터의 사물들, 쓰레기와 폐허가, 더 나아가 작가 자신의 이전 시기의 작품들에 이르는 소비에트적인 ‘모든 것’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이 곧 카바코프의 ‘총체적 설치’를 이룬다. 그의 설치 미술이 ‘총체적(тотальный)’인 것은 그것이 소비에트의의 ‘전체주의적(тоталитарный)’ 삶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일 뿐 아니라, 또한 소비에트 삶의 ‘모든 것’, 그것의 이념과 일상, 언어와 상징을 포괄하는 모든 것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치 아방가르드와 스탈린주의, 더 나아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성을 지적하고 있는 그로이스(Гройс)의 이론적 작업의 예술적 구현으로도 보이는 카바코프의 ‘총체적 설치’는 20세기 러시아 문화 전체에 대한 포스트-소비에트적 평가와도 같았다.

모더니즘의 정점을 이루는 아방가르드 예술이 진부한 예술형식이 되어버리고 그것을 대체하는 대중문화의 성장에 의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으로 나아간 서구의 문화 패러다임의 교체와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모더니즘이 완결되어 ‘박물관화’ 되어버릴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그것을 강제적으로 대체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러시아 언더그라운드 예술로부터 현대 러시아 포스트-소비에트 문화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모더니즘 예술이 이미 완결된 예술사의 한 지점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있고 새롭게 해석되는 미학적 원칙으로 사유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즉, 아방가르드 예술을 단절시킴으로써 러시아 문화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 소비에트 예술은 곧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방가르드 예술에 대해서 일방적 부정이나 거부가 아닌 양가적인 태도를 취하고, 더 나아가 오히려 그것을 계승하고 지향하게 된 역설적인 동인이 되었다.


그로이스는 자신의 명저 <총체적 예술작품으로서의 스탈린 - 러시아의 분열된 문화(Gesamtkunstwerk Stalin-Die gespaltene Kultur in der Sowjetunion)>에서 예술의 정치화로서의 아방가르드 예술과 정치의 예술화로서의 스탈린 시대의 문화를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조명하였다. 그는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하나의 거대한 문화로 간주하며 이 두 문화가 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사조의 두 문화적 단계임을 암시한다. 이 경우 러시아 문화사는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통합하는 모더니즘과, 그것의 뒤를 잇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속체로서 서구의 문화 패러다임 교체 모델과 유사한 형태를 띠게 된다. 결국 아방가르드와 소비에트의 문화적 전통은 현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의 준거이자 극복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카바코프의 총체적 설치는 바로 이러한 현대 러시아 문화의 역설적인 상황을, 그것의 부정될 수 없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흔적과 소비에트적 삶의 지속성을 포괄하며 포스트-소비에트적 예술의 정체성을 총체적으로 구축해 낸다. 그가 단순히 반소비에트적 예술가로 비난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카바코프는 스스로 강조하고 있듯이 분명 ‘소비에트’의 예술가였다. 소비에트적 삶의 시간을 살면서 동시에 아방가르드의 문화적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카바코프의 예술은 모더니즘으로부터 소비에트의 삶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문화에 대한 평가적 발화와도 같다.




II. 재현의 문제와 총체적 설치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그 얼굴을 지워버린다. 얼굴이 없는 자화상이란 그 자체로 모순형용이다. 이에 대해 베이컨은 자신이 그리고 있는 것이 얼굴이라기보다 그 얼굴을 지워버리는 순간의 힘의 작용이라 말한다. 들뢰즈는 그의 그림을 분석하면서 감각작용에 대한 표상의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이처럼 전통적인 재현적 회화가 그려낼 수 없었던 것들을 표상하려는 지향은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비롯한 현대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였다. 광선주의자들은 빛에 의해 현현하는 대상이 아닌 빛의 작용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으며 절대주의자들은 형과 색을 초월하는 비구상성의 절대를 형상화하고자 했다. 이처럼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재현될 수 없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려는 현대 예술의 시도는 모스크바 개념주의를 비롯한 현대 러시아 예술에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때로 이러한 시도는 역설적으로 재현성의 극한을 드러내는 시도와 결합되었다.


가령 소츠-아트와 모스크바 개념주의가 그려낸 극고전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호들은 그것이 전혀 다른 콘텍스트 속에 위치하게 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었다. 결국 이들이 재현하려는 것은 극단적으로 재현적인 스탈린의 형상이 아닌 그러한 재현적 기호작용의 메커니즘 자체였다. 오히려 이들이 창조하는 것은 그러한 재현적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콘텍스트였으며 그 속에서 신화화된 극재현적 이데올로기의 기호는 해체되었다.


이는 카바코프의 작품에서 역시 반복되었다. 그의 설치 미술 작품들 안에 존재하는 오브제들은 사물 그 자체이며 따라서 완전한 도상성을 지니는 기호들이다. 게다가 이러한 사물들에는 그것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명백한 오브제와 그 오브제에 대해 붙여진 이름이라는 잉여적 기호작용은 오히려 그러한 도상성을 위협한다. 더욱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배경 속에 위치하게 된 사물들은 모스크바 개념주의자들의 스탈린 신화 해체 작업에서와 같이 이질적인 콘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오브제 고유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고 대신 오브제에 붙여진 서사적인 텍스트에 의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작품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카바코프의 작품에서 서사적인 텍스트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는 그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의 설치 미술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의 초기 앨범 작품들은 대개의 경우 그림과 그 그림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의 텍스트는 그림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이라 할 수 없다. 오히려 텍스트는 그림을 창조한다. 옆의 그림을 보자. 이 때 그의 조형적 공간 속의 사물은 언어 기호 없이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꿈’이라는 그림에는 텅 빈 백색의 공간만이 존재한다. 그것이 ‘꿈’이 될 수 있는 것은 ‘꿈’이라는 언어기호에 의해서이다. 이처럼 카바코프의 그림에서 재현되는 대상은 언어에 의해 비로소 그 형상을 명백히 드러낸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단순히 언어를 회화적 기호로 환원하는 시도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서 전혀 재현적이지 않은 회화적 기호들은 텍스트에 의해 명명됨으로써 존재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카바코프가 재현될 수 없거나 재현되지 않는 대상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 속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사물들은 그것에 붙여진 텍스트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예카테리나 됴고찌는 카바코프를 비롯한 20세기 러시아 미술을 지배하고 있는 “기의에 대한 향수(тоска по означаемому)”를 지적한다. 말레비치의 사각형으로부터 모스크바 개념주의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작품 속에 그들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예술을 넘어 종교와도 같은 것이 되었다. 모스크바 개념주의의 경우 그들의 작품은 다분히 기호적이다. 즉, 그들의 예술에는 기의가 부재하며 이러한 부재하는 기의를 대신하여 그들의 작품의 중심에 들어서는 것은 바로 해체와 탈신화화를 위한 전략으로서의 예술이었다. 이는 카바코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그의 작품 속에서 의미되는 것들은 자주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였다. 가령 그는 공공주택의 가구들과 가재도구를 설치하듯이 천사의 날개를 설치하였다. 공공주택의 삶 속의 익숙한 사물들과 천사의 날개는 그의 작품 속에서 동일한 오브제로 전시되었다. 실제 오브제를 표방하는 천사의 날개와 나란히 존재하는 삶 속의 사물들은 일상의 관례화된 의미를 잃게 된다. 대신 그러한 일상의 사물들에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앞서 언급한 설치 미술 「10명의 사람들」 속에는 전혀 사람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이름 또한 갖고 있지 않다. 이 작품의 전신이 된 망명 전 창작된 동명의 앨범(1972-1975)에서는 각각의 주인공들에게 이름이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앨범에도 이들 10명의 사람들은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이 때 존재하지 않는 10인의 형상은 그들이 창조한 작품과 그에 대한 설명을 통해 존재하게 된다. 앨범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그들의 죽음을 형상화하는 듯 보이는 백색의 빈 공간으로 끝이 난다. 이들의 작품들과 삶 속의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의 백색 죽음의 형상을 통해 카바코프가 형상화하려는 것은 지금까지 예술이 재현할 수 없었던 그들의 공간적인 탈주의 꿈이라는 정신성의 형상이었다.

따라서 카바코프의 초기 회화 작품들은 자주 회화적 평면 너머를 상정하게 한다. 예를 들어 빈 종이와 사람들의 이름의 목록으로 이루어진 작품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부재하는 회화적 평면과 동시에 그들이 존재하고 있을 회화 공간 너머를 전제로 한다. 옆의 그림 속에서 시골 풍경의 단순화된 이미지와 작은 점에 해당하는 숫자들로 이루어진 그림은 표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의 목록과 결합한다. 그림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사람들의 존재는 표로 만들어진 목록과 그림 속의 점들을 반복적으로 대응시키는 관례화되고 기계적인 행위에 의해 실현된다. 계속해서 “누가 어디에 있는지”라는 문장이 반복되는 작품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역시 텅 빈 화폭은 그들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신 반복되는 표형식의 이름들은 존재를 강요한다. 이처럼 부재를 폭로하며 동시에 존재를 지향하는 것, 때로 그것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드러내는 것은 모스크바 개념주의를 비롯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


옙슈테인(Евштейн)이 지적하고 있듯이 자주 그의 작품 속에서 텍스트는 이미지처럼 공간 속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 이미지는 마치 텍스트처럼 시간 속에서 움직인다. 고정된 텍스트의 존재를 통해 부재를 드러내는 텅 빈 공간은 명명 행위와 그에 의한 현존의 가능성을 향해 열린다. 카바코프 작품 속에서는 때로 언어 기호마저 사물화 된다. 그러나 그의 설치 작품 속의 언어 기호는 사물 속에 언어 고유의 시간적인 속성으로서의 기억과, 서정성을 침투하게 한다. 이처럼 의미의 해체를 겪은 무의미한 사물을 지금 여기 현전하는 물로 치환하는 것, 그러한 물들의 박물관을 만들어내는 것, 사라져 버린 물들의 기억을 언어행위를 통해 사물 속에 불러오는 것. 이를 위해 카바코프는 때로 대상으로서의 물을 완전히 비운다. 대신 그의 작품에서 언어는 로고스적인 것이 된다. 초기의 소츠-아트의 작업이 소비에트의 언어적 기호들의 허상을, 그것의 비어있음을 드러내는 해체적 작업이었다면 ‘서정적인 물’들의 박물관으로서의 후기 카바코프의 기획은 이러한 포스트-유토피아의 無속에서의 새로운 창조행위였다. 그의 이후의 총체적 설치는 바로 이러한 그의 창조적 지향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카바코프의 설치, <쓰레기 상자>




카바코프의 초기 앨범은 이처럼 회화적 평면을 통해 고유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 작가는 수집가처럼 그 세계를 구성하기 위한 기억을 불러들인다. 그의 회화적 평면에는 가공의 청중이 존재하며 그의 수집품에 대해 평가하고 설명하는 가공의 화자가 존재한다. 앨범은 존재하지 않게 된 소비에트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여러 화자들의 평가와 회상을 통해 재구하는 작업과도 같았다. 따라서 그에게 텍스트의 역할은 점차 더 증대되었으며, 텍스트는 재현된 그림을 넘어서는 새로운 상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굳어진 이미지들을 새로운 대상으로 창조해 내었다. 이렇게 해서 그의 작품은 비회화적 콘텍스트로서의 시간성을 포함하게 된다. 이미지는 말에 의해 새롭게 재탄생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자주 말에 의해 명명되는 순간, 즉, 재현 그 자체를 그려내었다. 앞서 살펴본 카바코프의 그림들은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일상화된 것, 사라진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을 명명함으로써 그것을 현시하는 것. 이러한 카바코프의 창조전략은 무의미한 사물들을 회화적 공간 안으로 불러들이고 그것을 다시금 살려내는 새로운 재현 행위 자체를, 그 순간을 문제 삼는다. 회화적 공간에 시간성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작품은 극장적인 것이 된다. 그의 초기 앨범이 마치 지문과 대사, 무대 장치에 대한 설명을 갖춘 희곡과 같은 것이라면 그의 총체적 설치는 그러한 희곡을 직접 무대에 올린 극과도 같았다. 카바코프 역시 자신의 총체적 설치가 극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에 의하면 영화나 연극에서 관객은 그 세계 속에 더 깊이 빠져든다. 그림을 감상하는 관객이 그림으로부터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면 연극과 영화에서 관객은 그것이 재현하는 세계를 ‘살게’ 된다. 카바코프가 자신의 총체적 설치를 통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체험의 순간이었다. 즉, 그는 총체적 설치의 극적 공간을 통해 관객이 그 속에 재현된 삶을 직접 감각하도록 하려 했다. 그것이 순간적이고 허구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총체적 설치를 통해 이러한 감각의 순간을 보존하고자 했다.


그가 서구로 망명하여 처음 선보인 총체적 설치 「10명의 사람들」은 소비에트의 공공주택을 그대로 박물관 안에 옮겨놓은 것이다. 물론 이 설치 작품 안에 10명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의 삶의 이야기들만이 오브제와 내러티브를 통해 표현된다. 옆의 평면도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각각의 공간은 10명의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순서대로 보여준다. 관객들은 작가가 의도한 동선을 따라 공간을 옮겨간다. 음악이나 조명, 시간의 흐름까지도 모두 철저하게 작가의 의도에 따라 기획된다. 관객은 각각의 방을 둘러보면서 그 옆에 붙어 있는 주인공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는다’. 각각의 방을 옮겨가는 움직임은 연극의 막의 진행과도 같다. 관객은 장소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관객들에게 카바코프의 설치미술 작품은 하나의 ‘사건’으로 체험된다. 음악과 빛, 서사와 조형적인 구조물이 하나로 결합하여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총체적인’ 설치를 만들어 낸다. 망명 예술가로서의 카바코프 자신에게 이제는 기억으로만 남겨진, 이미 돌아갈 수 없으며 시간적, 공간적으로 단절된 소비에트의 삶은 이러한 방식으로 복원되어 박물관 안에 ‘지어진다’.

앞서 지적하였듯 이 작품은 카바코프의 초기 작품인 앨범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물론 앨범과 총체적 설치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앨범의 주인공들이 이름을 가진 것과 달리 설치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앨범이 주로 환한 백색을 배경으로 하는 삽화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설치에서는 어두운 조명과 바로크적인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두 장르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앨범이 존재하지 않는 예술가의 형상을 창조하고 있는 것에 반해, 설치 작품은 그러한 예술가가 살았던 ‘집’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전자인 앨범이 소비에트 공간 속에서 그 곳 너머를 지향하며 다른 세계를 꿈꾸어 온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라면, 후자는 그 예술가가 떠나 버리고 남겨진 집과 그 안에서의 예술가의 삶과 꿈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이다. 앨범은 총체적 설치의 부분을 이룬다.


스베틀라나 보임이 지적하고 있듯이 카바코프가 설치하는 것은 곧 “집 밖에 존재하는 집”의 형상, 즉, 소비에트의 이후 혹은 외부로부터 바라본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소비에트적 삶의 형상이었다. 카바코프의 설치 「10명의 사람들」에 존재하는 소비에트 프로파간다의 기호들과 소비에트의 저열한 삶의 모습이 아이러니의 대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스베틀라나 보임이 망명자들의 집의 선반을 장식하는 조야한 소비에트 일상의 기념품들, 러시아에서라면 절대 장식품이 될 수 없는 키치적 사물들 속에서 지적하고 있는 노스탤지어의 메커니즘을 반복한다. 이처럼 카바코프의 설치 작품 속의 사물들은 모스크바 개념주의의 해체적 기호작용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해체와 아이러니가 그리움과 노스탤지어와 공존하는 것, 소비에트 공간 속 예술가의 실패한 삶을 애도하면서 동시에 예술가의 소비에트적인 일상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 이처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소비에트의 양가적인 삶을 종합예술로서의 극적 체험의 순간을 통해 박물관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 현존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카바코프의 설치작품을 ‘총체적’이라 부를 수 있는 이유라 할 것이다.




III. <10인의 사람들>과 메타적 자기서술(автометаописание)


카바코프의 총체적 설치 「10명의 사람들」은 공공 주택에 거주하는 10명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 때 각각의 설치된 공간에 첨부된 텍스트들은 하나의 옴니버스 소설을 이룬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림 속으로 날아간 사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수집하는 사람, 자신의 방에서 우주로 날아간 사람, 재능 없는 예술가, 키 작은 사람, 수집가, 작곡가, 아무 것도 버리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묘사하는 사람,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한 사람. 이 10명의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상의 화자에 의해 제시된다. 때로 주인공은 그의 주변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묘사되며, 때로는 편지나 기타 이질적인 텍스트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제시된다.


이 때 등장하는 10명은 마치 작가 자신의 분신들과도 같다. ‘키 작은 사람’이 암시하듯이 이들은 소비에트를 살아가는 ‘작은 인간’들이며, 거주자들로 붐비는 공공주택 속에 주어진 자신만의 작은 공간에서 내밀한 자신만의 우주를 꿈꾸는 낭만주의자들이다. 카바코프가 자신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일상의 쓰레기까지도 버리지 못하고 모두 수집하며,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이야기들을 기록한다. 이들은 소비에트 공식 예술의 규범에 따라 현수막의 일회용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재능 없음을 탓하는 화가이자, 자신이 그린 절대주의적 사각형의 공간을 응시하다 결국은 그 너머의 세계로 사라져 버리고 마는 비극적인 아방가르드 예술가이고, 또한 음악을 조형적인 것과 결합하여 총체적 예술을 만들어 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음악가이다. 즉, 이 작품을 구성하는 10개의 이야기는 곧 이야기와 사물들, 언어들을 수집하고 그것에 음악과 조형성을 결합시킴으로써 창조된 이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이 때 10개의 이야기들은 아방가르드 예술로부터 총체적 설치로 이행해 가는 카바코프 자신의 예술적 진화의 과정을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 「자신의 그림 속으로 날아간 사람」이 절대주의적 예술의 세계로 사라져버린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으며, 「우주로 날아간 사람」이 이 세계 너머의 다른 세계를 꿈꾸는 20년대와 60년대의 낭만주의자들의 형상에 가깝다면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그러한 삶 속의 언어와 사물들을 수집하고 그것을 종합하여 총체적 설치를 창조해 가는 작가 자신의 창작의 여정을 반영한다. 특히 9번째 작품인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묘사하는 사람」은 명백히 이 작품 「10명의 사람들」에 대한 메타적 서술임을 드러낸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의 삶을 묘사하려 마음먹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미 긴 세월을 살아온 그 자신이 과연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였다. 그는 찬찬히 모든 것들에 대해 묘사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지난 시간동안 그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고 또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을 선별해 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동안 사실 그에게 일어난 사건이란 별 게 없었다. 기껏해야 2-3가지 정도가 고작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은 이런 저런 사람들과 사물들, 대상들로부터 받은 인상들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들을 선별하지 않고 쭉 적어가는 과정에서 그는 갑자기 이러한 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그 자신만의 의식과 기억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서로 다른 많은 의식들, 어쩌면 서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고 있는 서로 너무도 다른 개인들 각각에 속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여는 위의 인용문이 말해주고 있듯이 「10명의 사람들」은 작가 자신의 기억에 관한 것이자 동시에 소비에트의 공통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총체적인 기억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 이 9번째 이야기에서는 카바코프의 앨범의 탄생 관정에 대한 설명이 제시된다. 10명의 사람들이 무엇을 표상하며, 앨범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심지어 「10명의 사람들」의 앨범과 설치 작품의 차이점이 암시되기도 한다. 화자가 밝히고 있듯이 앨범은 어두운 공간 속에서 더 강하게 관객을 사로잡는 현대의 영화라기보다는 마치 옛 영화와도 같다. 이 때 ‘더 강하게 관객을 사로잡는 어두운 공간 속의 영화’라는 표현은 이전의 앨범에서와는 달리 어둡고 바로크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설치작품 「10명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화자는 카바코프의 초기 앨범에 등장하는 각각의 관념을 표상하는 10명의 주인공들의 이름을 직접 나열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맺는다. 앞서 지적하였듯이 카바코프의 앨범은 총체적 설치의 한 부분을 이룬다. 즉, 총체적 설치를 구성하는 10개의 이야기 중 하나를 차지하는 것은 곧 앨범을 창작할 당시의 카바코프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반면 이어지는 10번째 이야기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한 사람」은 보다 분명하게 총체적 설치 「10명의 사람들」과 같은 설치 작품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담고 있다. 이야기의 마지막 방에는 로프에 매달려 있는 다양한 사물들과 그 사물들을 움직여 물에 빠지기 직전의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해내는 방법에 대한 교시를 담고 있는 글이 존재한다. 줄에 매달린 사물들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며, 그 중에 특히 배 모양의 물건을 골라 니콜라이 빅토로비치의 보일 듯 말 듯한 형상과 수평이 되게 그 배를 움직여 그 앞으로 가져가는 것 등, 마치 복잡한 기계장치의 사용법을 연상시키는 그 글은 그러한 양식화로 인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화자는 10번째 이야기에서 공동주택의 집단적인 삶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간의 단절과 소외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 안에는 윤리적인 문제의식을 넘어서는 삶과 예술에 관한 성찰이 반영되어 있다.


옛 주인이 사라져 빈 방에 새롭게 비행사가 들어와 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가 한 이틀 정도 보이지 않는 동안 옛 주인이 나타나게 되고 이들 옛 주인과 새 주인은 마치 하나의 인물의 두 분신처럼 서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이 하나의 방을 나누어 살게 된다. 화자의 설명은 여러 가지로 불완전하다. 왜 옛 주인이 사라졌었는지 어떻게 그가 다시 나타났는지에 대한 그 어떤 정보도 주어져 있지 않다. 이 불완전한 화자는 그가 방에서 본 이상한 교시를, 두 주인의 기묘한 공존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그 방에 설치된 줄과 매달려 있는 사물들은 새로운 입주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것과 다름없다. 그에게 이 방 안에 설치된 것들은 아무 의미를 지니지 않으며 따라서 그는 삶을 위한 ‘물건을 가지러’ 어딘가로 나간다. 즉, 이 방에 공존하는 두 주인은 서로 다른 차원의 삶에 속해 있다. 옛 주인에게 그 방에 설치된 물건들이 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이 공간으로부터 언젠가 다시 ‘날아가 버릴’ 비행사에게 이 방에 설치된 사물들은 삶을 위한 사물들은 아니다. 즉, 이 두 주인을 통해 두 가지 차원의 삶이 암시된다. 옛 주인이 설치된 공공 주택의 삶의 주체였다면 새 주인은 그것을 삶으로부터 유리된 허구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이 이야기에서 물에 빠져 거의 보이지 않게 된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하는 것이란 화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실제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단지 ‘시각적인’ 것을 통해 가능하다. 어쩌면 새 주인인 비행사는 그러한 유희적인 장치를 움직임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에 빠져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해낸 것일 수도 있다. 사라진 옛 주인이 다시 나타난 것은 새로운 주인의 그러한 시각적이고 유희적인 구원 행위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화자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어린이들의 장난과도 같은, 이상하고 때로 병적이며 환상적인 방법을 통해”(176) 존재를 복원해내는 가능성에 대해서 지적한다. 그의 의미심장한 이 마지막 말은 카바코프의 설치미술이 지향한 궁극적인 목표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야기의 두 주인 중 하나가 ‘비행사’라는 점은 흥미롭다. 카바코프의 주인공은 자주 하늘을 날고 있으며 현재 그들이 처한 공간 너머로 날아가기를 원한다. 첫 번째 이야기의 「그림 속으로 날아간 사람」과 세 번째 이야기 「우주로 날아간 사람」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다. 1900년대 초반 러시아를 지배한 항공열병이나 1960년대 소비에트 세계에 만연했던 해빙기의 새로운 공간에 대한 낭만적 동경이 그러했듯이 20세기 러시아 문화 속에서 경계 너머의 세계에 대한 지향은 매우 강했다. 그리고 특히 러시아인들은 그러한 지향을 실제 속에 실현하고자 했다.


가령 러시아의 위대한 로켓학자이자 러시아의 신비주의적 우주철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К. Циолковский)는 지구 너머의 세계를 꿈꾸는 SF소설과 에세이들을 썼을 뿐더러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로켓을 연구하였다. 이 때 그의 SF소설과 에세이는 단순히 허구의 영역에 머물지 않다. 그것은 그의 종말론적, 신학적 에세이였으며 철학적 과학적 테제이기도 했다. 그가 표도로프(Федоров), 솔로비요프(Соловьев)를 계승하는 신비주의적인 러시아 우주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간주되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다. 즉, 그에게 자신의 텍스트 속의 현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한다 믿었던 신과도 같이 지구 너머에 분명히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의 원리였다. 따라서 그러한 지상 너머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그에게 당위적이었다. 그 결과 치올코프스키는 로켓 연구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로 더 잘 알려지게 된다. 혁명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로켓 연구에 착수하여 다단식 로켓과 제트 엔진의 이론을 완성하고 세계 최초로 우주 정거장을 고안해 내었다. 이처럼 치올코프스키의 생애를 통해 본다면 러시아 우주 개발의 근원에는 러시아의 신비주의적 우주철학이 존재하는 셈이다.


러시아 우주론은 사회가 처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지상의 토포스(topos)가 아닌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ou-topos)로서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때로 신성모독에 가까운 이들의 우주에의 꿈은 이들이 언제나 인간적 시선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적인 초월적 시선을 따르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사상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미래주의자 마야코프스키와 흘레브니코프의 우주적인 규모의 서사시나, 구상성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정신을 형상화하고자 했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기획, 보이지 않는 것의 증인이 되고자 했던 필로노프의 회화적 평면, 음악을 통해 법열의 경지에 이르고자 했던 스크랴빈의 관조적 선율은 모두가 이러한 러시아 우주론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20세기 초 예술가들의 미학적 기획 역시 치올코프스키의 SF소설이나 솔로비요프의 신지학적인 저술들이 그러했듯이 단순히 예술 텍스트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극적인 사건들에 영향을 주었다. 서구의 공상적 사회주의의 전통은 엉뚱하게도 러시아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다. 소연방이라는 사회주의 왕국의 건설은 러시아 우주론이 꿈꾼 우주적 이상국가의 지상 버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 즉, 지상 위에서 topos를 ou-topos로 치환하려는 소비에트적 꿈 속에서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허구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 사이의 근대적 의미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우주로 날아간 사람>




























카바코프의 설치 미술 작품들은 자주 이러한 유토피아의 꿈과 균열들을 형상화하였다. 「10명의 사람들」의 세 번 째 이야기인 「우주로 날아간 사람」에는 바로 그러한 균열이 잘 드러나 있다. 공동 주택의 가장 꼭대기 층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자신의 방에 우주를 향해 스스로를 쏘아 올릴 수 있는 발사대를 만들고 우주의 에너지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날 지붕의 천장을 뚫고 우주로 날아가 버린다. 카바코프는 그가 날아가 버리고 난 후의 폐허가 된 공공주택의 방을 설치미술로 재현한다. 그 방의 벽을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한 소비에트 프로파간다를 담고 있는 포스터와 신문들이며 소비에트적 일상의 쓰레기들이다. 발사대 아래에 남겨진 그가 날아가기 직전에 벗어 놓은 신발만이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카바코프의 이 작품은 명백히 소비에트 사회라는 지상의 유토피아 속에서 이 세계 너머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소비에트 예술가들의 미학적 삶을 형상화한다. 그의 방에는 안락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그 어떤 도구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상의 유토피아를 표상하는 소비에트 세계를 채우고 있는 것은 그 이념의 기치들 뿐이다. 그의 텅 빈 방은 이러한 두 개의 이질동상적인 유토피아 사이의 괴리를 보여준다. 그의 우주를 향한 꿈은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우주론으로부터 계속된 20세기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정신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역시 그것을 이어받은 소비에트의 유토피아를 그는 포기해 버린다. 그 어떤 삶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그의 공공주택은 삶의 공간이라기보다 우주를 향한 내밀한 꿈을 가능하게 한 철학적, 예술적 사유의 공간이었다. 이것은 「10명의 사람들」의 마지막 이야기인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하는 방법」의 로프에 매달린 사물과 니콜라이 빅토로비치를 구하는 방법에 관한 교시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옛 주인의 방을 연상시킨다. 그 공간 역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사색을 위한 주인공의 꿈의 공간이었다.


이야기 「우주로 날아간 사람」의 주인공은 과연 우주로 날아갔을까? 카바코프는 이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 남겨진 그의 신발은 그가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것인 동시에 그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카바코프의 이 작품은 우주적인 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실현된 유토피아라는 소비에트 프로파간다 속에서 언제나 경계 너머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이 때 우주로 날아간 주인공과 자신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주인공들이 앞서 언급한 마지막 이야기 속의 옛 주인의 삶의 차원 속에 속해 있다면 작품의 마지막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비행사의 형상은 이들의 삶의 텍스트를 현실의 차원으로부터 분리시키고 그것에 대해 유희적인 거리를 두며 미학적 체험의 대상으로 삼는 카바코프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다.

이처럼 카바코프는 소비에트 세계의 미니어쳐와도 같은 공공 주택의 공간에 속한 10명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예술적 꿈과 소비에트의 일상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과거의 기억들을 설치를 통해 재현하는 자신의 새로운 창작에 대해 말한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유토피아의 기획과 그러한 유토피아의 기획을 현실 속에 재현하려 하였던 소비에트 사회의 무모한 꿈에 대해 아이러니를 표현하면서,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 공간 속에서의 예술적 꿈과 삶의 기억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드러내면서 카바코프는 소비에트의 삶과 예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설치를 완성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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