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요일] 당신은 우는 것 같다 - 그날의 아버지에게

2019. 2. 9. 17:34詩.






당신은 우는 것 같다(시요일) 2018. 4






독자들의 일상을 시로 물들인 큐레이션 앱 ‘시요일’이 론칭 1주년과 이용자 20만 돌파를 기념해 선보이는 시산문집 『당신은 우는 것 같다』. 그간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은 키워드인 ‘가족’을 테마로 펴낸 시산문집으로,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간 여러 산문집에서 호명되어온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조명하고 있다.
시와 산문이 고루 사랑받는 신용목과 한국 시의 새로운 얼굴 안희연, 두 시인이 아버지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버지의 존재가 버거웠던, 때로는 아버지의 부재가 애틋했던 우리를 대신해 백석, 김수영, 나희덕, 함민복 등 시인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을 만나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와 불화해본 이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신용목 시인 : 1974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에 '성내동 옷수선 집 유리문 안쪽'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바람의 백만번째 어금니'가 있다. 시작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등을 받았다.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안희연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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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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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_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날 깊은 물속에서 갑자기 벗어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그를 좋은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나쁜 아버지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돌아가시기 한 달전쯤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나는 이렇게 고백했다. "다음 생에도 부자지간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아버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꼭 아버지에게 앙갚음하고픈 무엇이 남아서만은 아니다.


"아버지 내년 봄에 구례 산동에 산수유꽃 보러 가요."  답이 없어서,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화는 언제쯤 필까요?"  다시 물으면, "그만큼 봤으면 됐다."  국수를 먹으러 가서는, 내가 다 먹기도 전에 주섬주섬 일어나 계산부터 하고 물끄러미 막차 지나가는 바깥을 바라보곤 하셨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부쩍 혼잣말이 느셨다. 나는 한참 뒤에야 그게 셋째 형과 나 사이의, 그러니까 지금은 세상에 없는 누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가 제법 불러온 어느 날, 복통과 함께 하혈이 있었다. 서둘러 병원에 갔으나 유산되고 말았다. 돈 걱정에 서둘러 퇴원하려 했지만 퇴우너도 정산을 해야 가능한 일이라 돈을 구할 때까지 어머니는 며칠 더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수단으로 아랫동네 친구 이름을 대며 길을 나섰다.

늦은 시각에 온 아버지는 빈손이었다. 유산한 것도 아픈 것도 힘들었지만 집에도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창피한 것도 잊은 채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고 했다.



박꽃 _마종기 / 
기러기 _이면우 /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고 말해주었다
서울, 273 간선버스 _신미나 /  국수를 먹으러 간다
여름의 발원 _안미옥 /  벗어났다고 생각했다면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의 손바닥 _이안 /  나는 참 순순히 잠이 들었다


물고기 그림자 ― 아버지에 대해 _김중일 /  날개는 녹슨 물의 금고에 맡겨두고
아빠의 내간체 ― 실연의 힘 _박형권 /  아빠도 엄마 만나기 전에 실연 한번 당했어
복수에 빠진 아버지 _신철규 /  엑스레이 필름처럼 검은 유리창 속에
그의 사진 _나희덕 /  그의 사진은 그보다 집을 잘 지킨다
저녁 _임승유 /  한꺼번에 아버지가 되려 하는 아버지


이상한 방문자 _강성은 /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아배 생각 _안상학 /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아버지는 이발사였고, 어머니는 재봉사이자 미용사였다 _안현미 /  삐아졸라를 들으며 나는 내가 다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_백석 /  어데서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아버지들 _정호승 /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 셋방이다


가족사진 _유홍준 /  자 웃어요 화분들, 찰칵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다
달 _이영광 /  죽은 아버지가 좋다
땅의 아들 _고재종 /  그러나 아버지는 죽지 않으리
별 노래 _허수경 /  물뿌리개에서 햇살이 번져 올랐습니다
너를 만지다 _유병록 /  사라진 이야기가 궁금해지면 나를 만진다




안희연 _ 아버지의 스물일곱과 만났다



넌 참 성숙한 아리로구나. 넌 어쩜 그리 애어른 같니. 우리 자매는 언제나 그런 말들을 들어왔다. 그래도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마음껏 어리광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한 적도 많았지만 언니는 달랐다. 아버지가 부재하는 집에서 누군가는 아버지 역할을 해야 했고, 그건 늘 언니 몫이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밤 언니에게서 온 문자 메세지는 그래서 아팠다. "나는 아빠한테 쪼르르 가서 안아달라고 못한 게 후회 돼." 나는 적절한 말을 고르지 못해 썼다 지우다를 반복하다 결국 "ㅎㅎㅎ"라고 적어 보냈다. 말보다 침묵이 더 편해서, 마음 안에 해결되ㅏ지 못한 뭔가가 있어서, 쑥스럽고 서툴러서, 우리는 끝내 말하지 못한다. 사랑한다. 고맙다. 미안하다. 서운하다. 그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애써 웃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던 아이야, 이제 네 자신의 슬픔을 돌보아주렴. 어리광 어리광을 부려보렴. 그랴도 된단다, 아이야.



기념일들 _이현승 /  너무 긴 칼을 가진 무사처럼 허둥대다가
우리 살던 옛집 지붕 _이문재 /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집이 되었지만
노루 _나희덕 /  저 어리디어린 노루는
블루베리 _이근화 /  아버지의 스물일곱과 만났다
비둘기 호_김사인 /  아홉 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뱀이 된 아버지 _박연준 /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지익 _박소란 /  내 아버지가 나고 자란 마을에선
당신의 얼굴 _김언희 /  눈에 붙은 이 불이 다 타는 순간까지가 사랑이라고
기차, 바퀴, 아버지 _최정례 /  얘야, 이것이 그냥 늙어 쓰러진 기차겠니
신부 입장 _신미나 /  쓰다 만 초 같은

 
젖은 옷을 입고 다녔다 _신용목 /  매번 꿈속에서 아버지를 쏟았다
여름 한때 _강성은 /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고 싶었지만 눈치만 보았다
돌의 정원 _안희연 /  굴러떨어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파주 _박준  /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아들에게 _이성복 /  고요한 시(詩), 고요한 사랑을 받아라


아버지와 나와 지렁이 _김수영 /  깨지 않을 긴 꿈을 얼마나 꾸고 싶었는...
산다 _다니카와 순타로 /  살아 있다는 것
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 _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나는 결별을 제안한다 기억은 애처롭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산속에서 버터플라이 수영하는 아버지 _함민복 /  아버지 죽어서도 나를 키우시네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_진은영 /  내 생애의 한여름에



작품 출전





출판사서평


“아버지를 처음 본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눈물이 왼뺨과 오른뺨의 길이를 재듯, 우리는 서로를 생각한다

최초·최고의 시(詩) 큐레이션 앱 ‘시요일’ 론칭 1주년을 맞아 시 산문집 『당신은 우는 것 같다: 그날의 아버지에게』(미디어창비)가 출간되었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에는 아버지를 미워하거나 그와 불화해본 모든 이에게 건네는 위로의 시와 산문이 실려 있다. 시와 산문이 고루 사랑받는 신용목과 한국 시의 새로운 얼굴 안희연, 두 시인이 ‘아버지’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당신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를 마냥 존경해야 하거나 연민하는 대상으로 그리지 않고, 시를 통해 그를 이해하고 그로부터 ‘나’를 성찰하는 시인만의 통찰력이 빛나는 산문집이다. 아버지의 존재가 버거웠던, 때로는 아버지의 부재가 애틋했던 우리를 대신해 시인이 그린 아버지의 초상(肖像)을 만날 수 있다.

시요일의 안목으로 엄선한 ‘아버지’에 대한 시

독자들의 일상을 시로 물들인 큐레이션 앱 ‘시요일’이 론칭 1주년과 이용자 20만 돌파를 기념해 시 산문집을 선보인다. 지난 1년간 다양한 큐레이션(오늘의 시/테마별 추천시/시요일의 선택)을 통해 시로 안부를 건넨 시요일은 20만이 넘는 이용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신경림 박준 등 널리 알려진 시인뿐 아니라 강다니엘의 추천으로도 화제를 모은 시요일은 다양한 세대를 넘나들며 기존의 문학 독자를 넘어서 한동안 시와 멀어졌거나, 그동안 시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독자들까지 끌어안았다. 이에 기대 이상의 사랑에 보답하고자 그간 이용자들이 즐겨 찾은 키워드인 ‘가족’을 테마로 시 산문집 『당신은 우는 것 같다』을 펴낸다. 이 큐레이션 북은 ‘가족’이라는 보편적인 호소력을 지닌 테마를 다루면서도 그간 여러 산문집에서 호명되어온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를 조명하는 점이 색다르다.

나를 세상에 존재하게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나의 한계를 심어준 사람. 이 가능과 불가능을 집약할 수 있는 대명사는 아버지밖에 없다. 그것이 ‘신’도 ‘세상’도 그의 이름을 빌려 쓰는 이유일 것이다. 더없이 고마우면서도 무한히 원망스러운, 그 애증의 골마다 보름달이 뜨고 박꽃이 핀다. 삶과 죽음이 싸우듯, 사랑과 미움이 서로를 찌르고 희망과 절망이 자리를 바꾸듯, 그리고 눈물이 왼뺨과 오른뺨의 길이를 재듯, 우리는 계절의 한 찰나에 핀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서로를 생각한다.
_신용목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14-15면)

우리가 태어나 최초로 불화한 사람,
‘아버지’라는 한 세계를 시로 들여다본다

나를 상처 입힌, 죽이고 싶을 만큼 미운 사람을 향해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가파른 사랑인지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기도 하다. 창과 방패처럼, 팽팽하게 맞서는 미움이 있어 또 다른 사랑은 태어나고 사랑은 또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_안희연 「눈...에 붙은 이 불이 다 타는 순간까지가 사랑이라고」(144면)

부모는 우리가 세상에서 처음으로 마주치는 타인이다. 어머니가 대체로 포근하고 그리운 유년의 추억으로 그려지는 데 비해 유독 아버지는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존재로 기억되곤 한다. 『당신은 우는 것 같다』에는 백석 정호승 김사인 함민복 진은영 박준 신철규 등 37인이 쓴 아버지에 대한 시(40편)와 신용목 안희연 시인이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돌아본 산문이 어우러져 있다. 분식집 김밥을 앞에 두고 이모로부터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어야 했던 시인의 어린 날은 우리에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안희연 「아홉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127-129면). “쓰다 만 초 같은” 손이어도 좋으니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신부 입장을 함께해주길 염원하는 시인의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읽는 이까지 간절한 마음을 품게 한다(안희연 「쓰다 만 초 같은」, 152-154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편지에 “다음 생에도 부자지간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아버지로 태어나고 싶습니다.”라고 쓴 시인의 고백은 누구나 공감하기에 굳이 그 까닭을 밝힐 필요가 없다(신용목 「오래 잊었던 그 밤이 왜 갑자기 생각났을까」, 14-16면).

문학이 낯선 독자들에게 건네는 시의 초대

살아 있을 때 피를 빼지 않은 민어의 살은 붉다 살아생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 아버지가 혼자 살던 파주 집, 어느 겨울날 연락도 없이 그 집을 찾아가면 얼굴이 붉은 아버지가 목울대를 씰룩여가며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_박준 시 「파주」 전문(166면)

신용목과 안희연 두 시인은 세대, 성별이 다른 만큼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과 경험도 다르다. 그럼에도 시 안에서 아버지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거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안쓰럽게 떠올려볼 때, 아버지를 향한 그들의 감정은 서로 밀접하게 교차한다. 아버지에 대해 필자들이 느끼는 이 애틋하고도 미묘한 감정은 독자 역시 결코 다르지 않기에 그 여운은 더 오래 남는다. 문학을 통해서만 가능한 이 특별한 체험에서 우리는 과연 시의 힘을 느낀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단절되고 가족마저 파편화되기 쉬운 시대에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는 시의 존재가 여전히 소중하다.

몇해 전 안산에서 만난 한 아버지는 늘 아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했다. 외투 안주머니에 담긴 아이 사진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흐릿했지만, 아버지 눈엔 아주 선명히 보인다 했다. 신원 확인을 위해 바다에서 막 건져올렸을 때의 모습을 찍어둔 것이었다. 그곳엔 그런 사진이 아주 많았다 했다. 번호 붙여진 죽음이 너무 많아서 하루가 백년처럼 흘렀다 했다. 나는 아버지를 여읜 아이가 늙는 시간과 자식을 앞세운 아버지가 늙는 시간, 둘 중 누구의 시간이 더욱 느리게 흐를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섣불리 답을 내릴 순 없었지만, 아버지가 늙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단 하루면 충분했으리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_안희연 「얘야, 이것이 그냥 늙어 쓰러진 기차겠니」(149-150면)







노루 / 나희덕



마음이 궁벽한 곳으로 나를 내몰아

산속에서 자주 길을 잃었다

달리다 보면 손은 수시로 뿔로 변하고

발에는 단단한 발굽이 돋았다

발굽 아래 무엇이 깨져나가는지도 모른 채

밤길ㅇ르 달리다가 문득 멈추어선 것은

그 눈동자 앞이었다

겁에 질린 초식동물의 눈빛,

길을 잃어버리기는 나와 다르지 않았다

헤드라이트에 놀라 주춤거리다가

도로 위에 쓰러진 노루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저 어리디어린 노루는

산속에 두고 온 스무살의 나인지도,

말없이 사라진 사람인지도,

언젠가 낳아 함부로 버린 사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둠의 일부가 되어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발굽으로

불행의 속도를 추월할 수는 없다 해도

어서 일어나 남은 길을 건너라

저 울창한 달래와 머루 덩굴 속으로 사라져라

누구도 너를 찾아낼 수 없도록







기념일들 / 이현승



오늘은 결혼기념일이고 모레는 아버지 제사다.

문득 나는 전생을 믿는 심리학자의 노트처럼 복잡해진다.


십일년 전에 나는 결홍했고

그때는 네 아이 같은 것은 상상도 못했다.

결혼이란 그러므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의 시작이다.

누군가의 기원이 된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지만

시작의 자리에 가보면 감쪽같아서

새삼 제 기원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아버지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후회란 그만큼 흔해빠진 것이지만

그것은 내일의 일이니 미리 해보는 후회는 어리석다.


일년에 열두 번 물 주는 선인장처럼

일 년에 하나씩 더하는 나이를 죽음도 두고두고 먹는다.

그러므로 오늘은 케이크 위에 양초를 켜고

모레는 향을 피우기 위해 성냥이 필요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육년 전이었다.

무언가를 준비하기에는 죽음이 이미 가까이 와 있었다.

너무 긴 칼을 가진 무사처럼 허둥대다가 당했다.

법이 그렇듯 묵묵히, 무표정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선고와 집행이 완결되었다.


따지고 보면 누가 원한을 산 것도 아닌데

어쩐지 복수심까지 들었지만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여섯 번째 대면에는

눈물 없이도 마른 곳 없이도 슬픔이 고인다.

삶과 죽음이 이렇게 엄연하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비둘기호 / 김사인



여섯 살이어야 하는 나는 불안해 식은땀이 흘렀지.

도꾸리는 덥고 목은 따갑고

이가 움직이는지 어깻죽지가 가려웠다.


검표원들이 오고 아버지가 우겼네.

그들이 화를 내자 아버지는 사정했네.

땟국 섞인 땀을 흘리며

언성이 높아질 때마다

나는 오줌이 찔끔 나왔네.

커다란 여섯 살짜리를 사람들은 웃었네.


대전역 출찰구 옆에 벌세워졌네.

해는 저물어가고

기찻길 쪽에서 매운 바람은 오고

억울한 일을 당한 얼굴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눈을 보냈네.

섧고 비참해 현기증이 다 났네.


아버지가 사무실로 불려간 뒤

아버지가 맞는 상상을 하며

찬 시멘트 벽에 기대어 나는 울었네.

발은 시리고 번화한 도회지 불빛이 더 차가왔네.


핼쑥해진 아버지가 내 손을 잡고

어두운 역사를 빠져나갔네.

밤길 오십리를 더 가야했지.

아버지는 젊은 서른여덟 막내아들 나는 홑 아홉 살


인생이 그런 것인 줄 그때는 몰랐네.

설 쇠고 올라오던 경부선 상행.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 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니, 오늘 외박하냐?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야야, 어디 가노?

─예……바람 좀 쐬려고요.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무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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