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쾌대, <여인의 초상>

2018. 10. 21. 15:02미술/한국화 현대그림

 

 

 

 

 

작품의 운명 ⑫ 이쾌대의 <여인 초상>


이쾌대가 그린 부인 유갑봉의 미스터리한 초상 /
열애 끝 결혼 평생 '뮤즈'이자 모델이었지만 한국전쟁 때 이쾌대 월북으로 영영 이별 /
신비스럽고 오묘한 표정 서린 단호함의 의미는 /

 

       

 

 

 

이쾌대 작 <여인초상>(45.5×38cm). 40년대 중후반 해방공간기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유화 소품이다.

           

 

 

어둠 속에서 젊은 여인이 살며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앞을 쳐다본다.

눈길이 야무지다. 차돌멩이처럼 여물게 그린 눈동자가 확 다가온다.

한복 저고리 입은 그의 존재는 먹빛 속에 잠겨들어가는 듯한데, 얼굴만은 형형하게 드러난다.

뚫어지게 정면을 주시하는 눈, 옆으로 돌린 얼굴과 예민한 눈매, 오뚝한 콧날, 앙다문 붉은 입술의 자태......

그림 속 여인의 인상은 미묘하다.

얼굴의 형상선은 부드럽지만, 시선을 담은 표정은 단단하고 단호해 보인다.

얼핏 보고 여인의 감정이나 마음 구석을 짐작하기란 어렵다.

여인은 자신이 그려질 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정확히 연인인 화가한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

70여년 전 굳은 결의의 눈빛으로 자신을 그려준 연인 화가를 바라보던 모습일까?

아니면, 연인과 사랑을 나누고 회심의 표정을 짓고있는 것인가?

무언가 연인한테 화가 나서 토라진 모습일까?

알듯 모를듯한 표정 덕분에 일부 애호가들은 이 그림을 ‘한국판 모나리자’라고까지 추어 올려 말한다.

 

 

 

 

결혼 뒤 찍은 이쾌대와 유갑봉 부부의 사진.

 

 

모나리자?

 

한국 근대 리얼리즘 회화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월북화가 이쾌대(1913~1965)가 40년대 후반 그렸다는

작은 그림 <여인초상>(45,5cm×38cm)은 다빈치 걸작 못지않게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모델로 삼은 이는 화가가 열정을 바쳐 사랑했던 부인 유갑봉(1914~1980)이다.

유갑봉은 그림 속에서 몸을 옆쪽으로 향하고 있다.

단, 머리를 살짝 오른쪽으로 돌리고 눈동자 또한 오른쪽으로 돌려 찌를 듯 바라본다.

날카로운 눈매에 단호하면서도 엄정한 기운이 감도는 시선이다.

그려진지 70년이 지나 얼굴과 목, 옷깃 등에 물감안료가 떨어져 군데군데 희끗희끗한 흔적이 보인다.

하지만, 세월의 잔영이 되려 얼굴이 내뿜는 신비스러움을 더욱 돋우워주고 있다.

 

 

 

 

포로수용소에서 이쾌대가 그린 부인 유갑봉의 초상 드로잉.          

 

 

<여인 초상>은 40년대말 성북회화연구소를 운영했던 이쾌대가 당시 보문동 집에서 부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렸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갑봉은 이쾌대가 즐겨그린 인물화의 가장 유력한 모델이자 영감을 주는 뮤즈였다.

초기작 드로잉부터 한국전쟁 전까지 이쾌대가 그렸던 거의 모든 여성그림의 모델이자 원형적 모티브가 되었다.

휘문고보 졸업반 시절, 인근 진명여고에 다니던 유갑봉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불같은 연애를 했고, 바로 혼인하고 일본으로 같이 유학을 떠나 신혼생활을 했다.

유유자적하면서도 행복했던 신혼의 삶은 유갑봉의 음영진 앞 모습이 이쾌대의 뒷모습과 함께 화면을 채운 <카드놀이하는 남녀>(1930년대)로 대변된다.

유갑봉의 모습은 1936년 잡지 <신여성>8월호의 표지와 <무희의 휴식>(1937년작)<운명><상황>(이상 1938년작) 등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리워져 있다.

 

이쾌대의 인물화는 1941년 조선 향토색과 근대 리얼리즘의 조화를 도모한 신미술가협회의 결성을 작가가 주도한 뒤로 더욱 숙성되어 간다.

해방 뒤에는 이상적이고 보편적인 면모의 조선 남녀상을 구현하고, 역사성과 사상성이 들어간 대작 그림으로서 큰 이야기와 큰 구도를 도모하는 경지로 일취월장하였다.

그림에 묘사된 유감봉의 인상도 차츰 변화하는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1936년 잡지 <신여성>8월호 표지에서는 레이스 달린 옷을 입고 자연스럽고 앳된 미소를 짓던 여인으로 묘사되었던 유갑봉의 모습은 40년대 이후로 여린 이미지에서 좀더 이상화되고 단단하게 여문 표정으로 바뀌어간다. <여인초상>의 단호하면서도 복잡한 의미를 내뿜는 얼굴 이미지는 이쾌대 화풍의 숙성을 보여주는 작은 징표와도 같다.

해방공간의 시대인 1940년대말 그린 <봄처녀>와 <해방군상> 등의 걸작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조선여인의 모습을 예고하는 것이 바로 <여인초상>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원색의 사용을 피하고 엷은 층의 붓질에 어두운 색조의 간색들을 주로 구사해 화면들을 뒤덮었다. 마치 르네상스기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티치아노의 인물화를 보는 것 같은 특유의 구성력과 색채감각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포로수용소 시절 나무를 깎아 만든 이쾌대의 유일한 목조각상.

 이쾌대에게 수용소에서 그림을 배운 화가 씨의 유족이 년 공개한 작품이다.

 부인 유갑봉을 그리워하며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여인 초상>은 문단의 마당발 시인 조병화(1921~2003)가 오랫동안 비장해온 작품이다.

부인 유갑봉의 신비스런 용모를 그려넣은 이 작은 수작을 왜 다른 지인에게 건넸을까.

미루어 추정할만한 단서가 있기는 하다.

예술판까지 번진 극심한 좌우 이념 대결 구도를 피하고 싶었던 이쾌대는 해방공간 시절 김기림, 설정식 등의 중도 성향 모더니스트 문인들과 가까이 어울렸다. 김기림이 각별히 아끼는 후배시인이던 조병화와도 친분이 이어지면서 그림이 시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1989년 <월간미술> 기자로 당시 막 해금된 월북미술가들의 작품과 행적을 취재했던 근대미술사연구자 김복기씨는 좀더 구체적인 증언을 했다. 당시 조병화 시인의 혜화동 작업실을 찾아갔다가 책상 위 벽에 걸린 이쾌대의 여인초상을 처음 보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40년대 후반 작가로부터 <여인초상>을 받은 뒤 40여년간 외부에는 이쾌대 작품이란 얘기를 하지 않고 마치 집기처럼 보관해온 것이지요. 지금 떠올려보면, 그림을 받았을 때 경위나 사건에 대해선 조 시인이 별다르게 특별한 얘기를 한 기억이 안나요.”

김복기씨는 그뒤 신세계백화점 미술전시 담당자였던 지명문씨와 함께 이쾌대의 주요 작품들을 1988년 해금된 이래로 처음 전시했다.

월북화가 기획전과 유족들이 비장해온 이쾌대의 <군상> 연작 같은 대작들을 1991년 신세계미술관 회고전을 통해 첫 공개했는데, 앞서 1990년 열린 해금작가 유화전 당시 당시 여인초상을 함께 선보였던 기억이 난다는 게 그의 회고다.

아직 해금작가들에 대해 정부와 우리 사회의 시선이 경직되어 있던 시절이라, 여인초상이 국립현대미술관의 품에 들어오기까지는 그 뒤로도 20여년을 지나야 했다.

조병화 시인이 2003년 작고하고, 12년이 지난 2015년 고인의 유족이 <여인초상>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하고서야 미술관 쪽은 기민하게 움직였고, 결국 1억원대의 가격에 작품을 사들였다.

그리고 2015년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이쾌대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시’에 전시하면서 <여인 초상>은 비로소 대중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쾌대가 1930년대 일본 유학시절 그린 <카드놀이하는 부부>.

카드놀이하는 유갑봉과 뒤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이쾌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서울에 머물렀다. 병고에 시달리던 노모와 만삭의 부인을 돌보느라 피난을 가지 못한다.

북한의 강권으로 미술동맹에 가입해 김일성 초상을 그리는 등 부역행위를 해야했다.

1950년 9월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앞두고 신변 보호를 위해 집을 떠난 작가는 부인과 영영 이별하고 만다.

그뒤 국군의 포로 신세가 되어 부산 수용소에 갔고,

유갑봉을 그리워하며 나무 조각상을 만들고 드로잉을 그렸다.

하지만 휴전에 따른 포로 교환 때 부인과 가족들을 남겨둔 채 북행길을 선택한다.

북한으로 가서도 그림을 계속한 그는 이별한지 딱 15년만에 위장병으로 시골에서 숨졌다.

 

유갑봉은 남편이 진작 숨진 사실도 모른 채 벽장 속 다락방에 그림들을 돌돌 말아 숨겨놓고 15년을 더 살았다.

가까운 하늘아래 서로 생사를 모른 채 속절없는 그리움에 몸을 떨었을 부부의 운명은 영영 엇갈렸다.

<여인 초상>은 생이별을 하기 몇년 전에 그려진 작품이다.

하지만, 죽는날까지 이별의 고통 속에 그리워했을 두 연인의 숙명을 무녀의 신탁처럼 예언하는 듯한 분위기가 우러나온다. 어둠 속 여인의 결연한 표정을 뜯어볼수록 그런 느낌이 강해진다.

남편의 월북 뒤 연좌제의 감시와 고난 속에서도 사랑하는 이의 그림을 지켜냈던 유갑봉의 노력과 의지는 상상과 상식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쾌대는 이런 훗날의 상황을 무의식중에 체득하고, 암시한 건 아니었을까.

이제는 영원히 실체를 알 수 없게된 두 연인의 깊은 마음 속내를 놓고 이 작은 초상그림은 숱한 공상을 피워올리게 만든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현대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