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展은 이응노미술관의 2015 소장품전으로 도불 이후 1960~80년 사이에 제작된 고암의 조각 작품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고암은 조각보다도 회화 작업에 주력한 화가였고 그의 주요 예술적 업적 역시 회화 분야에 집중해 논의되어 왔지만, 그의 예술적 요체인 ‘추상’이라는 개념과 연계해 볼 때 조각 역시 그의 일관된 미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르라 볼 수 있다.
이번 소장품전은 고암의 조각 예술의 흐름을 10년 단위로 구분해 양식적•의미적 변화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조명했다. 아울러 그의 조형의식이 회화와 상보 관계를 이루며 변천해 온 역사에 주목했다. 이 과정 속에서 그의 조각에 깃든 고암 만의 조형적 특질은 물론 그의 조각과 회화에 공통적으로 깃든 미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각에 대한 고암의 관심은 1960년대 초에 제작된 콜라주 작품에서 그 기본적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표면의 거친 질감과 부조적 형태감을 중시하던 그의 콜라주 작품은 마티에르가 이루는 자유분방한 형태로 인해 이후 그의 조각이 추구한 비형상성(informe)의 기본 틀이 되었다. 조각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동백림 사건으로 인한 2년여의 수감 기간 동안이었다. 이 시기에 고암은 옥중 배식으로 나온 밥풀과 종이를 이용해 전통 재료의 전형성을 넘어선 실험적 작품들을 창작했다.
고암의 조각은 1970-80년 사이에 ‘문자추상’이나 ‘군상’ 등 회화 작업과 의미적 혹은 형태적 연관성을 가지며 좀 더 과감하게 전개된다. 당시 고암은 회화의 추상 언어를 입체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의 사의적•서예적 추상에서 나타난 형상과 기호들이 조각적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군상’ 또는 ‘구성’이라 이름 붙은 1980년대, 연도미상의 조각들은 이러한 양식 실험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고암의 조각과 회화는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유사한 방식으로 발전•전개되었다. ‘문자추상’을 비롯한 회화가 선두에서 예술적 혁신을 이끌었지만 그의 조각 역시 그림에 적용된 양식, 의미, 소재를 반복하며 회화적 예술언어를 형상과 공간 속으로, 그리고 최소한의 구조로 풀어냈다. 이런 관점에서 고암의 조각 예술은 그의 추상회화의 발전선상에 놓고 바라볼 수 있으며, 평면적 성취를 입체적으로 확장시킨 보편적 모더니즘 언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소장품전에는 고암의 미망인 박인경 여사가 기증한 조각 작품 57여점이 최초로 공개된다. 이 조각 작품들은 제작 시기•장르•기법 등 제각기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암의 조각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사료로서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다. 이번 전시는 조각 작업을 통해 회화를 넘어선 현대적 조형감각을 형성해가는 고암의 여정을 추적해 볼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군상, 1980년대, 목재, 112.5x108x17cm
2015 이응노미술관 소장품전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
조각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는 이응노
❍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중 이응노의 ‘조각’ 작품 집중 조명
❍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며 장르의 외연을 확장해나간 ‘다원적 예술가’로서의 이응노 조명
❍ 3.5m에 이르는 대작 <구성> 및 옥중제작 <나무도시락> 작품 등 미공개 조각 57점 첫 선
❍ ‘조각가’로서 이응노의 국외 활약상을 담은 아카이브 첫 공개
❍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수집 및 보존•수복, 관리 현황 시민들과 공유
이응노미술관(관장 이지호)은 오는 6월 16일부터 8월 30일까지 2015 이응노미술관 소장품전으로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이응노미술관 소장품 가운데 이응노의 ‘조각’을 집중 조명하는 전시로, 1958년 도불(渡佛) 이후 1960~80년 사이에 제작된 이응노의 조각 100점과 드로잉 20점, 콜라주 2점, 회화 2점, 태피스트리 1점 총 125점을 선보인다. 이 중에는 고암의 미망인 박인경 여사가 올해 이응노미술관에 새롭게 기증한 고암의 미공개 조각 작품 57점도 포함된다.
이응노는 조각보다도 회화 작업에 주력한 화가였고 그의 주요 예술적 업적 역시 회화 분야에 집중해 논의되어 왔다. 하지만 그의 예술적 요체인 ‘추상’이라는 개념과 연계해 볼 때 조각 역시 그의 일관된 미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르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소개되는 이응노의 조각 작품들은 제작 시기•장르•기법 등 제각기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그의 조각예술 세계를 조망하는 사료로서 부족함이 없다. 특히 조각 작업을 통해 회화를 넘어 현대적 조형감각을 형성해가는 고암의 여정을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는 이응노 조각의 양식적 변화과정을 연대기적으로 조명한다. 아울러 그의 조형의식이 회화와 상보관계를 이루며 변천해 온 역사에 주목하여, 이 과정 속에서 그의 조각에 깃든 이응노 만의 조형적 특질은 물론 그의 조각과 회화에 공통적으로 깃든 미를 추정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전시실은 역시간 순으로 구성된다. ▲ 1전시실에서는 1980년대 <입체로 형상화된 군상>을, ▲ 2, 3전시실에서는 1970년대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된 이응노의 조형세계>와 <재료에 내재한 표현적 힘>을, ▲ 4전시실에서는 1960년대 <입체를 향한 조형의지의 발현>을 주제로 다룬다. 3전시실에는 고암이 철재나 목조 작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파리 근교 프레 생제르베에 마련했던 아틀리에 모습도 재현된다.
특별히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 고암이 1967년 서울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당시 배식으로 나온 나무도시락에 고추장과 밥풀을 사용하여 제작한 콜라주 작품, ▲ 사람들이 팔을 하늘로 벌리고 서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높이 3.5m에 이르는 대작 <구성>, ▲ 간결하지만 완벽한 균제를 이루며 여섯 사람이 군무 형태를 취하고 있는 <군상>, ▲ 붓글씨의 리듬과 형태가 인체 형상으로 추상화된 <군상> 조각 등이 있다. 이는 모두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는 미공개 작이다.
조각가로서 고암의 국외 활동상을 담은 아카이브 자료도 함께 전시된다. ▲ 1970년 프랑스 남부 항구 도시 바카레스(Bacarès)에 위치한 사브르미술관 주최 <국제조각심포지엄>에 초청되었을 당시 고암이 미술관 해변가에 제작한 높이 10m에 이르는 기념비적인 조각 <토템> 관련 자료, 이 외에도 ▲ 1973년 프랑스 파리 근교도시 생제르맹앙레에서 열린 <공간을 위한 형태 조각전> 포스터와 ▲ 조각이 전시되었던 도록 및 관련 기사, 잡지 원본들이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 대해 이지호 이응노미술관장은 “이응노의 조각작품이 미술관에 대거 기증되면서 고암의 예술세계를 보다 폭넓게 감상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며, “동양의 전통 서예를 부조의 형식과 조각의 형태에서 재해석한 이응노의 전위적 실험성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응노 화백의 부인이자 이응노미술관 명예관장인 박인경 여사는 지난 3월 권선택 대전광역시장의 파리 고암아카데미 방문 이후, 고암의 조각, 회화, 판화, 드로잉 등 작품 총 95점(▲조각 57점, ▲회화 3점, ▲부조 4점, ▲세라믹 4, ▲스텐실 1, ▲드로잉 26점)과 그가 직접 수집한 고암의 유럽 활동 관련 자료 총 3,576점을 이응노미술관에 기증했다.
이와 함께 4m에 이르는 대형 <토템> 목조각품 및 조각 3점, 프랑스 조폐국에서 주화로 제작됐던 브론즈 메달 2점, 회화 2점은 학술연구와 전시 목적으로 이응노미술관에 장기 기탁되었다.
이번 9차 기증에는 특별히 제작시기, 장르, 기법, 크기 등이 다양한 고암의 미공개 조각이 대거 포함되어 회화를 뛰어 넘어 조각에 이르기까지 이응노 화백의 양식적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 부족함이 없다는 평이다. 박인경 명예관장이 직접 수집한 유럽 활동 관련 전문 자료 3,576점은 자료의 희귀성과 오리지널리티에 있어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이응노미술관은 2007년 개관 이후 현재까지 구입, 기증, 관리전환 등의 방식으로 소장품을 수집해오고 있으며, 이번 기증을 통해 총 1,332점의 소장품을 보유하게 됐다. 이 가운데 조각은 70점으로 전체 소장품의 5.7%를 차지하며, 올해 기증된 조각 57점을 비롯한 작품 38점은 현재 소장품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
군상.1980.목재.123x92.5x12cm
■ 참고자료
□ 전시장 별 구성
○ 제 1 전시실 : 입체로 형상화된 군상
1980년대에 들어 이응노는 필묵 드로잉의 자유분방한 운동감을 발전시킨 ‘군상’ 시리즈를 선보인다. 그의 ‘군상 회화’ 작품들은 붓글씨의 획이 갖는 동세를 신체 움직임으로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필획이 갖는 리듬과 운동성, 사물의 형태를 해체하는 추상 효과는 그의 전생에 걸쳐 인물, 자연 등의 소재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이를 3차원 공간으로 투영한 것이 ‘군상 조각’이다. 그의 ‘군상 조각’ 시리즈 속에는 문자와 사람의 형상이 뒤얽혀 극도로 추상화되어 표현되고 있으며, 동시에 자연의 원형과 생물의 유기적 형태를 이루는 근원적 선 역시 탐구되고 있다.
연도미상의 나무 조각들을 포함해 1980년대에 창작된 조각들은 군상의 형태, 즉 사람들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 또는 팔 다리의 동작을 추상화해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연도미상의 몇몇 조각들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꽃이나 태양 같기도 하고, 미지의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조각 형상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 보면 고암이 남긴 수 백 점의 드로잉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남긴 드로잉 중에는 사람 형태의 추상화 과정을 기록한 자료들이 더러 남아있다. 고암에게 드로잉이란 사물에 대한 관찰을 기록하고, 자연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는 과정 중의 하나였다. 이 점으로 미루어볼 때, 이 조각들에게서 발견되는 미스터리한 형태는 인체의 형상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필묵 드로잉의 획이 갖는 운동감을 조각-물질화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결과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 모든 작품들 속에서 우리는 재료의 성질을 최대한 보존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하여 텅 빈 공간 속에 구체적 형태를 아로새기는 고암 조각의 정제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
○ 제 2 전시실 :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된 이응노의 조형세계
1970년대로 들어서면서 이응노의 예술은 ‘서예적 추상’으로 변모해간다. 이 시기에 그는 부조와 환조 작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조형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 가는 동시에 ‘사의적 추상’에서 나타났던 형상과 기호들을 간결하면서도 기하학적 형태로 도식화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토템>은 그 대표적인 작업 중 하나이다. 1970년 남프랑스의 포르-바카레스(Port-Barcares) 국제조각심포지엄에 초대된 고암은 10m가 넘는 기념비적인 조각 <토템>을 제작해 현지에 설치했다. 쇳덩이처럼 단단한 7톤이 넘는 아프리카산 목재 아비통(Apitong)을 장인 정신으로 한 끌 한 끌 파고 들어간 <토템>은 예술가이자 동시에 장인으로서 고암이 지닌 뛰어난 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된다. 당시 함께 심포지엄에 참여했던 조각가 문신은 다음과 같이 그를 회고했다. 그들은 1973년 프랑스의 생제르맹 앙레에서 열린 ‘공간을 위한 형태 조각전’에서 다시 한 번 조우하게 된다. 고암은 터진 나무를 잘게 쪼개어 마치 밀집한 빌딩들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형태를 가진 부조를 전시했다.
고암 이응노는 분명 화가였지만 그와 동시에 장르에 구애 받지 않고 자신의 실험적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겨놓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던 실험적 예술가이기도 했다. 재료와 사물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그의 모든 감각기관을 한시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며 그러한 집중력과 호기심이 고암을 평면으로부터 조각, 공예, 판화, 태피스트리까지 작업의 스케일을 확장시켰던 예술적 원동력이 되었다. 1970년대의 문자추상에서부터 1980년대 군상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그의 순환 작업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 고암 이응노는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를 발견하고 심화시켜 나갔다.
○ 제 3 전시실 : 1970, 재료에 내재한 표현적 힘
“나는 무엇보다 나무 조각에 전념하고 있어요. 나는 일단 끝낸 작품에는 절대 손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지요. 마치 서예에서 한번 획을 그으면 절대로 덧칠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예요.”
이 시기 고암 이응노의 조각 작품들은 마치 문자추상화의 필획을 입체로 변환해 놓은 듯 한 형태감을 가지고 있다. 유기적∙기하학적 형상을 이용한 서예적 문자추상과 군상의 형태가 뒤섞인 실험적 조각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잘게 자른 나무 조각들을 콜라주하고, 길이가 다른 나무 조각 하나를 작은 단위로 삼아 도시의 마천루, 태양, 얼굴 등의 모습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 제작된 환조 작품들이 규모에 있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것은, 다양한 면의 구사와 그 볼륨감 그리고 전체적인 조화로움 때문이다. 그 중 1974년에 제작된 복잡한 형태의 구성(composition) 작품은 위쪽이 크고 바닥 면으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이 눈에 띄는 비대칭성에도 불구하고 유기적 형태의 덩어리(mass)와 그 사이에 열린 공간이 조화를 이루며 절묘한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다.
나무와 돌을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재료와 사물에 대한 고암의 호기심은 남달랐다. 가구, 붙박이장, 스탠드, 부채, 벼루 등의 일상용품에 그림을 그리거나 새겨 넣어 사물을 장소 특정적 작품으로 변화시키기도 했다. 목가구에 문자추상을 조각하는가 하면, 직접 만든 세라믹 화병에 상형화된 기호들을 새김질하기도 했다. 예산 수덕여관 앞의 바위를 파내어 만든 문자추상 암각화, 프랑스 파리의 집 담벼락을 장식한 테라코타 부조는 그 자체로 완벽한 야외 설치작품이다. 고암의 대담한 실험정신과 분방한 창작력은 어떠한 환경에서든 그 상황에 알맞은 표현 방식을 찾아낼 수 있는 힘을 안겨 주었고 이러한 고암 이응노의 태도가 재료와 매체, 회화와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넉넉한 예술적 포용력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 제 4 전시실 : 1960년대, 입체를 향한 조형의지의 발현
고암 이응노가 조각을 시작한 것은 1958년 도불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1955년 경주 여행에서 보았던 금강역사 조각은 그에게 조각이라는 입체적 조형의지를 내재화하게끔 한 주요한 계기가 되었고, 이 내재화된 조형의지는 1958년 한국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유럽으로 떠나면서 점점 구체화 되었다. 파리에 도착한 직후인 1960년대 초 고암은 콜라주(collage) 작업에 몰두하게 되는데 잡지 조각이나 그리다 버린 한지, 신문지 조각들을 손으로 찢어 붙이거나 다시 긁어내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콜라주 작업을 통해 회화의 평면성이 부조적 형태감을 갖추어 가는 과정에 주목했고, 이 시기를 거치면서 서서히 조형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 고암이 남긴 대표적 조각은 『얼굴』과 『토템』시리즈이다. 얼굴을 표현한 몇몇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1964년 나무로 제작된 『세 얼굴』에만 눈, 코, 입이 보일 뿐 그 외 다른 얼굴 조각은 이목구비가 없는 극도로 추상화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토템』은 간결하면서도 꿈틀거리며 상승하는 선의 율동을 거칠게 끌과 망치로 쪼아 낸 직립형 추상으로, 그 거친 질감과 원시적인 형태가 빚어내는 강렬한 표현성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후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수감된 2년에 걸친 고난의 시간은 고암에게 재료와 장르적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 창작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다. 옥중 조각들을 보면 그의 조형 감각이 점점 심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고암은 밥알과 신문지를 반죽해 형상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고, 각종 재료를 긁어내거나 구멍을 뚫어 공간을 포용하는 작품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옥중 조각에는 개인의 고통스런 한이 서려있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을 향한 환희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아름답고 격정에 찬 숭고미가 이 조각품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얼마가 지나서 물감을 잉크에 풀어서 변소에 있는 종이에 데생을 시작하기도 하고 밥알을 매일 조금씩 모아서 그것과 신문을 섞어 반죽을 해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형무소의 마당에서 못을 주워 알미늄의 세면기랑, 식기에 힘껏 구멍을 내어 마음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피의 관철”을 조각하기도 했다.“
고암 이응노의 조각 작품은 1960년대에 첫 등장한다. 1958년 프랑스로 떠난 후, 콜라주 기법을 통해 재료의 다양한 변주와 확장에 집중하며 촉각적인 회화 작품을 선보인 이응노가 마침내 조각 장르에 다다른 것이다. 그동안 이응노의 작품은 주로 회화 위주로 알려졌지만, 조각 작품 수도 상당하다. 이 작품은 가운데 중심부를 기점으로 직선이 쭉 뻗어나가며 둥근 형태를 만들고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의 작품이 여러 점 존재하는데, 그만큼 이응노가 공을 들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해 같기도 하고, 어떤 생명체 같기도 한 이 조각 작품은 사람이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응노는 사람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였다. 예를 들면 회화에서는 70년대 <주역>의 문자추상에서 보이는 사람 형상이 있고, 조각에서는 사람 형상이 모티브가 되어 그것이 여러 형태로 변형되며 다양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여러 명의 사람이 서있는 모습과 한 명의 사람 얼굴에 여러 개의 팔 다리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 등으로 변형되던 이응노의 조각 작품이 이렇게 추상화되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무제>, 1980, 목재, 83×41×44cm
나무를 이용한 이응노의 조각으로 연도미상의 작품이다. 서예가 연상되기도 하고 한글이 연상되기도 한다. 동양화에서 출발한 이응노는 1958년 프랑스 도착, 1959년 1년간 독일 체류, 다시 1960년부터 파리에 정착하며 콜라주 기법을 통해 그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선보인다. 1962년 이후 이응노는 갑골문자를 연상시키거나 혹은 상형문자를 이용한 문자추상을 시도하며 다시 한 번 새로운 형태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응노는 ‘미술에 있어 용구의 혁명이 근대에는 꼭 있어야 할 것’이라며 매체와 재료의 확장을 통한 추상미술을 선보였지만, 1979년부터 <군상> 즉 사람을 주제로 한 구상 미술로 다시 돌아왔다. 붓으로 서체를 쓰듯 인간 형상을 무수히 나열한 군상은 한 번의 붓놀림이 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 주로 ‘회화’작품으로만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응노는 조각으로도 사람 형상 즉 군상을 표현하였다. 이응노의 드로잉에는 사람 형상이 점차 단순화, 추상화 되며 작품 제목이 <구성>이라고 붙여지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연도미상의 이 작품은 이응노의 문자추상과 군상이 모두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그가 조각에서도 지속적으로 조형실험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3.<무제>, 1973, 목재, 좌194×29×5cm, 우193×39×5cm
두 작품 모두 1973년작으로 1970년대 변화한 고암 이응노의 조각 경향을 잘 보여준다. 1958년 도불한 이응노는 1960년대에는 주로 콜라주 기법을 토대로 하여 재료의 물성이 극도로 드러나는 촉각적인 회화를 제작하였다. 조각에서도 나무를 거칠게 쪼아내고, 그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나무라는 재료의 원시적인 형태에 집중하였다. 반면에 1970년대에는 회화와 조각 모두 ‘서예적 추상’에 집중하여, 재료를 다듬고 형태를 간결하고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무제>의 이 작품은 나무 표면이 매끈하게 마감되었고 두께가 5센티에 불과해 마치 부조 같은 느낌을 주며, 형태는 예부터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던 ‘장승’을 연상시킨다.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감싼 형태, 즉 인체의 형태가 명확히 유추되는 것과 그렇지 않고 기호나 도형이 연상되는 형태로 구성된 이 두 작품은 이후에 인체 형상이 좀 더 추상적으로 변모하는 80년대 이응노의 조각 작품의 한 경향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경제] “음악에 맞추는 춤은 멋이 나고, 음악에 맞추지 않는 춤은 웃음이 나고, 음악도 없이 추는 춤은 어쩐지 눈물이 난다. 여럿이 추는 춤은 신명이 에워싸고, 둘이서 추는 춤은 사랑이 에워싸고, 혼자서 추는 춤은 우주가 에워싼다.”
시인 김소연이 쓴 ‘한 글자 사전’ 중 ‘춤’ 편이다. 그의 시(詩)처럼 멋과 웃음과 눈물이 나는 춤추는 사람들이 여기 있다. 이응노(1904~1989)의 ‘군상’이다. 생전의 작가는 춤추는 사람들을 그린 자신의 작품을 두고 “통일된 광장에서 환희의 춤을 추는 남북의 사람들”이라며 ‘통일무(統一舞)’를 강조했다.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는 “내 그림의 제목은 모두 ‘평화’라고 붙이고 싶다”며 “모두 서로 손잡고 같은 율동으로 공생공존을 말하는 민중의 삶이 곧 평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8년 말 유럽으로 가 프랑스에 정착한 고암 이응노의 도불 60주년 기념을 겸한 전시 ‘군상-통일무’가 18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막한다. 가나문화재단이 기획한 전시로 평면 및 조각 60여 점이 전관을 채웠다. 이 중 40여 점이 미공개 작으로 이번에 첫선을 보였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1922년 당시 화단의 최고봉이던 해강 김규진에게서 문인화와 서예를 배웠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빼어나 스승으로부터 죽사(竹史)라는 호를 받았다. 일필휘지의 먹선으로 그려낸 나부끼는 댓잎에서 덩실거리며 춤추는 사람의 형상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이응노는 1935년 일본 가와바타미술학교에서 근대미술을 공부한 후 일본화나 서양화와 차별되는 우리 고유의 화풍을 모색했다. 간략하게 그린 반추상 풍속 인물화에 집중하던 중, 195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한 그림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것에 자신감을 얻어 해외로 눈을 돌린다. 그렇게 프랑스로 가서는 당대 유행하던 앵포르멜(비정형 추상미술) 운동에 자극 받아 서예의 추상성을 구현하기 시작한다. 군상·군무의 토대가 되는 수묵인물화가 태동할 무렵인 1967년, 이응노는 동베를린공작단 사건인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감옥살이의 가장 큰 괴로움이 그림 그리지 못하는 일이라 했던 작가는 간장을 찍어 화장지에 데생을 시작했다. 끼니마다 모은 밥알을 신문지에 개어 조각도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밥풀 종이죽 조각 2점이 선보였다. 눈물과 땀으로 빚은 작품 속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한 듯 뒤엉켜 춤춘다. 먹 묻힌 붓에 힘을 주었다 빼기를 반복해 그린 풍물패는 사람도 춤추고 신들린 붓을 따라 상모 끈도 너울댄다.
요즘으로 치자면 ‘블랙리스트’ 작가였던 이응노는 조국 분단과 정치적 대립의 희생양이 됐다. 예술은 이념과 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응노에게 프랑스 측은 적극적으로 귀화를 권했고, 그렇게 품에 안은 작가를 자국의 대표급으로 평가하며 존중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두 건의 이응노 전시가 열렸다. 하나는 파리시립 세르누시미술관이 “20세기 서구와 극동아시아의 문화적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기념하는 전시”라며 기획한 대규모 개인전이었다. 또 하나는 퐁피두센터의 기증작 전시였는데, 아주 특별하지 않으면 작품 기증을 받지 않는 퐁피두의 관행으로 보면 무척 뜻깊은 자리였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유럽을 풍미한 이응노와 뉴욕으로 간 수화 김환기를 두고 “좌(左) 고암, 우(右) 수화”라고 평했다. 온통 춤으로 넘실대는 이번 전시는 다음달 7일까지 열린다. 가나아트센터는 내년 고암 타계 30주기를 맞아 대규모 전시를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