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3. 18:16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1
개선문
高昌遗址
孔林
귀주 강가 작은마을
崂山松石
鲁迅乡土
봄 갈대못
竹舍
물논
밀레의 집
홍콩의 밤
뿌리
湘西古城
서장(티벳)설산
宋人花籃
쌍우도
야자수와 소
舞
주력을 하고,서로다른 요소로 이루어진 화면을 취하는데, 실제적으로는 나의 묵채
혹은 유채 창작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또 회화적 눈으로 형상의 의경을 발굴하는
것이 나의 예술생애의 핵심이다라고 말한다”
오선생의 제자 흑마는 보통 어떤 곳을 갈 때 마다 오선생님은 항상 동행한 제자들에게
하루 이틀 동안엔 아무것도 그리지 말고 어디든지 다니면서 대자연의 미감적인 요소를 발견하여,
때론 그것들을 포착하고,때론 빚어내고 조합하게끔 요구를 했다라고 기억한다.경작지,
한 무더기 수풀림,한두칸의 작은 토방,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는 경물중에서도 오선생님은
오히려 의미있고 심오한 현대형식의 미감을 추상해낼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시웅빙밍은 진심으로 오선생의 작품은-먼 길을 걸어 조국의 대지위의 신비로운
경물들을 알기 쉽게 모으고, 먼 곳의 식물을 말로 표현못할 시원한 묘미와 친근함으로 물들이고,
우리 주변의 물,조그만 어촌의 조그만 배,어망,문앞의사물들을 신선하면서도 생동감있게 묘사”한다고
평했다.그의 그림은 실제 사물이 서서히 사라져 물러가고, 조형의 원칙이 최우선으로 자리잡는다.
이는 펄럭임과 뿌림(엑션페인팅)이다.
”선”은 그려냄이라 말해도 되며,결국 붓이 지면에 접촉을 하기만 하면 미련에 잡혀 놓아주길 원치 않으니,
이는 지면이 정겨운 고향땅의 地面이기에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는 고향생각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산간오지 대지곳곳을 찾아 다니는 수고스러운 여행,그림속의 선은 마치 산중의 구불구불한
길이어서,빠져 돌아오길 잊고 배회하며,자를수도 없고 ,정리할수 도 없고 다 말하지 못하는
옛일이며 심사이기도 하다.
点점은 이끼라고 말해도 좋으며 오히려 돌이며,새이며 움막촌이며 사람이다.
,때론 꽃봉오리이며,연한잎이며,비,눈,술,피이기도 하다.뚝뚝떨어지고 ,성기고 빽빽하며 높이올라
찬란하기도 하다.오관중의 점과 선은 이미 추상과 구체와는 유리되었고 형과 정의의 경계를
초월한다.선율과 리듬으로 구성된 음악이며 떠서 움직이고 출렁이는 고향의 정이기도 하다.
오관중
1919년7월 강소성의흥현출생.1842년 국립항주예술전문학교졸업.중경대학건축과 조교.
1943년 사천중경사핑청년궁에서 첫번체 개인전.1946년 중격대학교부속 초등학교원 주병금과 결혼.
교육부주관 유럽유학시험을 통해 프랑스파리국립고등미술학원에서 유화 연구
1948년 파리 춘계샬롱전 및 추계샬론전 출품.1950년 귀국
1951년 중앙미술학원 교편
1953년 교수법차이로 인해 청화대학교 건축과로 옮김 이때부터 경물화위주 화풍으로 바뀜
1956년 북경예술학원 교수
1970년 문혁기간에 하북농촌으로 하방되어 노동
1973년 북경으로 돌아와 호텔화창작에 참가
1978년 중앙공예미술학원 오관중작품전 주관 /북경 및 전국각지순회전시
1979년 중국미술관주관”오관중회화작품전 /중국미협상무이사 당선
1981년 서아프리카 3국 방문 및 파리벗 방문
1985년 중국미술작가회 오관중신작전 주관/전국정협위원 임명
홍콩예절제”현대중국화 인식”그림전시회 및 토론회 참가
1987년 홍콩예술중심 오관중 회고전 주최,개막 40분전 전부매진
1988년 싱가폴,일본,마카오 주관”오관중화전”개막식 및 강연
1989년 파리에서 사생,동경 오관중화파리전 주관/미국에서 작품순회전
묵채< 高昌遗址>이 187만 홍콩달러로 중국그림으로는 현존 화가중 국제그림으로는 최고가 기록을 세움
1990년 홍콩 싱카폴 태국전시회 및 강연/사생,유화<파리몽마르뜨>가 104만(홍콩화폐원)으로
중국유화로는 국제그림으로는 최고가 기록
1991년 프랑스 문예최고공훈장 받음/
묵채화<《交河故城》이 225만 <홍콩화폐>에 경매됨
1992년 대영박물관 파격적 첫번째
1993년 파리 싸이니우치 박물관-세계로 나아가는
파리시 금마장 수여
1994년 정국정치상임위 당선,유럽5개국 방문/인도방문 및 사생
1996년 이정도 박사 주최:과학과 예술 토론회 참가,
1997년 대만역사박물관 주관 오관중화전,가오시웅시 산미술관 순회전시
1999년 문화부주관 :오관중예절전
2
吴冠中(1919年~2010年6月25日) 江苏宜兴人,当代著名画家,油画家,美术教育家。 1942年毕业于国立杭州艺术专科学校,曾任教于国立重庆大学建筑系; 1946年考取教育部公费留学,1947年到巴黎国立高级美术学校, 1950年秋回国,先后任教于中央美术学院、清华大学、北京艺术学院、中央工艺美术学院。 双燕 江村 吴家作坊 大宅 大熊猫 石榴 春又至 吴家庄 鹤舞 情结 绍兴小景 秋声赋 虎 |
《水巷》
蘇醒》
《東風開過紫藤花》
《百衲衣》
吳冠中 江南人家
吳冠中 雙燕
吳冠中 魯迅故鄉
3
우관중,吴冠中,wuguanzhong(1919~2010)江苏,宜兴,항저우(杭州)국립예술대졸
Title:天府梯田-천부제전
우관중,吴冠中,wuguanzhong(1919~2010)江苏,宜兴,항저우(杭州)국립예술대졸
작품제목;티벳여성
우관중,吴冠中,wuguanzhong(1919~2010)江苏,宜兴,항저우(杭州)국립예술대졸
高粱与棉花
지난 6월 25일 자정을 몇 분 앞둔 시각, 중국 미술계의 거성은 마침내 찬란한 빛을 거두었다. 중국의 모든 매체가 연일 사망 소식과 관련 뉴스를 보도하고, 포털사이트에는 전용 링크가 개설돼 그 생애와 업적을 기리는 가운데 ‘우관중이 죽었으니, 이 나라에 더 이상 대사(大師)가 존재하는가?’라는 공개적인 탄식은 이미 그의 생전 궁색해지기 시작한 어떤 이들을 더욱 불편하게 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다수 소장한 중국미술관은 즉시 추모전 준비에 돌입했고, 그 외 국내외 수많은 미술관과 미술계 인사들이 분분히 애도를 표하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중국 제도권 미술의 부패와 문제를 비판하던 그는 최후의 길까지도 한 치의 긴장을 풀지 않았다. 전 세계로부터 추앙받던 거장은 장례식도, 묘비도 거절한 채 바다에 뿌려져 이 역사를 계속 맴돌기로 했다.
그러나 미의 세계에 눈뜬 청춘기 소년은 주저함 없이 당시 중국에서 가장 진취적인 미술학교 항저우예전(杭州藝專)에 원서를 제출했고, 린펑미엔(林風眠) 등에게 수학했다. 졸업 후 전국에서 단 한 명뿐인 국비생의 신분을 획득한 그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 파리로 건너가 동서 문명의 충돌을 직접 체험했다. 추상화가이자 파리 고등미술학교 교수인 J. M. Souverbie는 낯선 동방에서 온 젊은 화가를 깊이 주목했으며, 그가 회화의 순수 형식과 언어 문제를 연구하는 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도자가 되었다. 우관중은 최고의 활동무대에서 풍요로운 예술을 만끽했으며,
졸업 전 이미 살롱전에 두 차례나 입선했다. 졸업이 다가오자 자오우지(趙無極), 주더췬 등 그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파리에 남아 화업을 지속할까 깊이 고민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토양에 기반을 둔 예술을 연구하겠다는 결심으로 귀국을 선택했다.
그는 제도권에서 가장 빈번히 경질되는 교수 중 하나였고, 그 때문에 가장 시간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은 극한의 창작활동으로 자신을 몰고가는 것이었다.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전국 각지로 돌며 자신의 예술 탐구를 지속했다. 열악한 숙식, 험난한 환경을 감내하면서도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식사조차 거르던 스케치 여행은 일종의 고행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는 이렇게 간신히 혹은 필사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예술 신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절망은 더욱 짙어만 갔다. 사청(四淸)운동과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작품 훼멸도 모자라 아예 창작 금지령이 내려졌다. 삶의 유일한 수단마저 박탈당하고, 병든 몸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자살 충동을 느낄 만큼 심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이미 극한에 달한 오기인지 곧 발광할 히스테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차라리 ‘그림으로 죽으리라’ 절규하며 또다시 붓을 집어들었다. 파리에 남은 친구들이 자유로운 무대에서 일가를 이루는 동안, 우관중이 이렇게 견뎌낸 시간은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되었다.
1978년 마오쩌둥 집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우관중도 기나긴 암흑의 세월에서 벗어났다. 이미 화단의 원로가 된 그는 기나긴 겨울을 이겨낸 기름진 춘토(春土)가 되었다. 웬만한 이론가의 논리력과 필력을 넘어서는 그는 ‘회화의 형식미’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 ‘추상미에 관하여’ 등의 글을 통해 제도권의 창작 이념에 공식적으로 도전했고, 자신의 복권된 지위를 통해 젊은이들의 창작과 연구를 이끌고 지원했다. 35년에 달하는 교직 기간 중 그는 단 한 명의 직계 제자조차 둘 수 없었지만, 저우춘야(周春芽), 황루이(黃銳), 마오쉬휘(毛旭輝), 장샤오강(張曉剛) 등 현대미술의 수많은 주량은 자신의 토대로 그를 지목한다.
우관중의 작품은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되 농촌의 필부까지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을 추구했고, 추상과 구상이 절묘하게 결합된 양식으로 유화와 중국화 양쪽에서 모두 일가를 이뤘다. 30년 역경의 세월을 흔적도 없이 무색하게 만든 그의 뜨거운 창작열은 국내를 넘어 유럽, 미국, 아시아의 수많은 미술관에까지 전달되었다. 젊은 날 그에게 모더니즘을 알려주었던 파리시는 문화예술 최고훈장으로 다시 돌아온 그를 포옹했다. 평소 “<837C>”(의미:씀바귀, 독, 불꽃 같은 맹렬함과 왕성함)라는 서명을 즐겨 쓰던 그는 안거를 자처할 만한 최후 말년까지도 제도권을 향한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조국을 통렬히 비판하되 동시에 필생의 애정을 다했던 그의 예술과 인생에 대해 사람들이 보내는 지지와 성원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국 현대미술 시장이 채 형성되기도 이전, 그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위작 시비를 가리는 재판에 참가해야 했다. 현재까지도 2000년 이래 옥션 거래 총액 집계가 17.8억 위안(약 3200억원)에 이를 만큼 그의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하고, 다섯 평방미터의 작은 방에서 삶을 마감했다. 그에게 있어 역사란 위엄도, 명예도, 권력도 아닌 다만 그렇게 불꽃처럼 뜨겁고, 왕성하고, 절절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보연 미술평론가 haiyue01@naver.com | 제173호 | 20100704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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