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13. 21:30ㆍ미술/일본화·중국화·기타
우타가와 히로시게
- 도카이도(동해도) 53경 -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동해도오십삼차(東海道五十三次)>는 에도의
니혼바시(日本橋)에서 시작하여 시나가와(品川)을 거쳐 교토의
가모가와(鴨川) 삼조대교(三 大橋)까지 모두 53개역의 풍경을 그린 판화로 히로시게가
다이묘 수행원의 일원으로 도카이도를 여행하고 나서 1년 뒤인 1833년 제작했다. 히로시게의 이
연작은 큰 성공을 거두어 프랑스 인상파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천하를 통일하고 에도를 수도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에도는 습지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후 100년 동안 에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의 다른 어떤
도시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정치, 군사, 경제적 힘을 갖춘 중심지가 되었다.
에도시대에는 무사들이 에도와 그들의 영지를 정기적으로 왕복하는 교토부터 수도 에도까지 두 지역을 잇는 도카이도(東海道) 같은 도로가 발달하였다. 그 결과 사무라이 귀족계급뿐 아니라
승려와 일반인들까지 여행이
빈번해 졌다.
산야의 사찰과 신사와 경승지를 순례하는 것이 대중화 되었지만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는 동부의 거대한
수도 에도였다.
히로시게 자신이 직접 여행하면서 사생과 인상을 담아 제작한 목판화는 유명한 명승지를 계절과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전통을 활용하여 신사와 사찰, 찻집과 식당, 극장과 가게, 강과 운하 같은 분주한 일상의 모습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히로시게는 지형의 세부를 정확하게 묘사하면서도 특이한 원근법과 계절에 대한 암시, 그리고 뛰어난 색채를 이용하여 각 화면마다 신선함과 함께 따듯한 서정성을 부여했다. 에도 경치의 아름다움과 물질적 번영을 찬미했던 히로시게는 에도시민과 여행객,
나아가 유럽의 일본애호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重廣:1797~1858)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重廣:1797~1858)는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우키요에(浮世繪) 화가였다. 그는 에도(江戶)에서 세습적인 직업으로 불 끄는 소방관 일을 담당했던 하급무사 가문
출신이다. 그는 전통적 일본 그림에서부터 서양의 회화기법까지 두루 익히고 새로 개발된 교토와
나라를 있는 도로를 따라 여행하면서 현실감과 현장 사생을 극대화하여 무수한 걸작을 만들어 낸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을 움직인 100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등재되었다.
위쪽의 그림은 판화의 실물크기(부분도) / 아래그림은 전체를 찍은 것이며
그림마다 역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도카이도 53경의 시발점...1833년의 활기찬 에도(도쿄)
니혼바시의 아침
니혼바시가 처음 설립된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연
1603년이라고 전해진다. 오늘의 니혼바시는 동경시에서 1911년 석조로 완성한 것으로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일본교는
동경의 중심지 천황이 거주하는 코우교(皇居)와 도쿄역이 바로 지척에 있고, 긴자(銀座)와 간다(神田)를 잇는 다리로 유명 백화점과 고급
전문점이 즐비한 일본 경제의
중심가에 있다.
니혼바시 북쪽 미츠코시(三越) 백화점 정문에는 히로시게가 그린 <강호명소준하정(江戶名所駿河町)>이라는 그림과 함께 미츠코시 백화점이 창업
336주년을 기념한다는 작은 안내문이 남색 노랭이 아래 설치되어
있다. 한 우물을 파는 일본의 기업정신의 단면이다.
히로시게가 1833년 제작한
<니혼바시(日本橋)>는 긴자와 간다를 잇는 다리 위로 아침 일찍 상인과 짐꾼들이 부지런히 물건을 나르는 역동적이고 활기찬 표정을 그려내고 있다. 거의 200년 전 니혼바시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은 비록 다르지만 에도와 도쿄의 중심지로서의 삶의 활기는 여전하다. 역사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발전하여
세월의 구력과 삶의 지층이 쌓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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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도 53경의
마지막 경치...교토의 다리
고흐가 사랑한 화가 ─
우타가와 히로시게 歌川豊重 1797 - 1858
안도 도쿠타로(安藤德太郞), 안도 히로시게(安藤廣重)
대표작 :〈東都名所〉, 〈도카이도(東海道)의 53경치〉,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역참〉, 〈설월화〉, 〈명소 에도 100경〉, 〈에도 근교 8경〉, 〈가나자와 8경〉
19세기 우키요에 판화의 대가 중 한 사람인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고흐가 사랑했던 화가로도 유명하다. 일본이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면서 파리 사교계와 문화계에는 일본 열풍이 불어 닥쳤고, 유럽 서양 미술 전반에 그 영향을 떨쳤다. 이를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하는데, 우키요에는 마네, 모네, 로트렉, 보나르, 고흐 등 수많은 화가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고흐는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의 초상〉 등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을 뿐만 아니라 우타가와 히로시게를 좋아해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일본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시적으로 그려 낸 화가이다. 그는 1797년 에도의 변두리인 아즈마지에서 하급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안도 도쿠타로로, 안도 히로시게라고도 불린다. 그는 13세 때 부모를 연이어 잃고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여 에도 성의 소방일을 담당하는 무사로 일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15세 무렵 우타가와 도요히로(歌川豊廣)의 문하에 들어갔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듬해 스승에게서 우타가와 히로시게라는 이름을 받았고, 22세 때인 1818년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한 장짜리 판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도요히로의 문하에서 약 17년간 가부키 배우와 미인을 소재로 한 판화를 제작하면서 여타 우키요에 화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화가로 활동하면서도 무사의 일은 계속했다. 그는 1823년 조부인 주에몬의 아들 나카지로에게 일을 물려주고 우키요에에 전념했다.
1828년 스승 도요히로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2대 도요히로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을 권유받았지만 자신만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히로시게는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2년 후 히로시게는 '이치유사이(一遊齋)'라는 호로 〈동도명소(東都名所)〉를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풍경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간바라〉
〈도카이도의 53경치〉 중 〈쇼노〉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일본 풍경화에 서구의 원근법과 빛의 변화를 표현하는 기술을 적용한 대담한 것이었다. 그는 교토, 나라, 에도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사생한 바를 토대로 현실의 풍광을 그려 냈다. 특히 섬세한 필치와 차분하고 조화로운 색상으로 서정적이고 시적인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히로시게의 대표작 〈도카이도의 53경치(東海道五十三次)〉는 1832년 가을, 왕실에 말을 진상하는 막부 관리로 선발되어 교토에 올라가면서 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이다. 도카이도는 에도에서 교토에 이르는 도로인데, 이 길을 통해 에도와 교토 간에 물자와 사람이 이동했다. 히로시게는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작품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에도의 니혼바시에서부터 교토의 가모가와 삼조대교까지 53개 역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풍광을 섬세한 필치와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한 걸작이다. 이 작품은 훗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히로시게는 〈오미 8경〉, 〈오사카 명소 그림〉, 〈교토 명소 경치〉, 〈기소가도의 69역참〉 등 수많은 명소를 그렸으며, 이 중에는 이미 간행된 그림을 토대로 그린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대표작은 〈도카이도의 53경치〉와 같이 스스로 관찰한 바를 토대로 한 작품들이다. 그는 사물을 직접 보고 묘사한 것을 토대로 현실 세계를 옮겨야 진실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답사하여 눈으로 확인한 후 이를 자신의 내면 세계와 조화시켜 표현했다.
히로시게는 직접 관찰을 토대로 지형을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원근법을 사용하여 화면을 구성했다. 또 계절과 날씨,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광선 변화를 표현해 서정적인 분위기를 부여했다. 그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시적인 감수성을 발견해 내는 감성적인 인물이었는데, 그의 그림은 이런 특유의 감수성에 전통 일본화풍이 조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명소 에도 100경〉 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
〈명소 에도 100경〉 중 〈가메이도 매화가 있는 찻집〉
평생 일본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담은 풍경화를 그린 히로시게는 '눈과 달과 꽃의 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말년에 발표한 〈설월화〉 3부작 〈기소지의 산천〉, 〈가나자와 8승지의 야경〉, 〈아와나루토 풍경〉 때문에 생긴 별칭인데, 이 연작은 일본의 자연을 가장 일본적인 감수성과 색채로 표현한 동시에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히로시게는 말년에 〈명소 에도 100경〉을 비롯해 〈에도 근교 8경〉, 〈가나자와 8경〉 등 에도와 근교의 풍광을 그렸다. 특히 〈명소 에도 100경〉은 에도 토박이로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친밀하게 여겼던 에도의 100가지 풍경을 그리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중 〈대교에 내리는 소나기(大はしあたけの夕立)〉와 〈가메이도의 매화가 있는 찻집(龜戶梅屋鋪)〉은 고흐가 우키요에에 매료된 계기가 되었다. 고흐는 히로시게의 이 그림들을 모사하기도 하고, 그림의 배경에 우키요에를 넣을 정도로 심취했다.
그러나 야심만만한 계획인 〈명소 에도 100경〉은 히로시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완성되지 못했다. 원인은 당시 에도에 창궐한 콜레라였다고 한다. 임종 당시 히로시게는 "동로(東路)에 붓을 놓고 나그네의 하늘, 서방의 명소를 바라보네."라는 와카를 남겼다. '에도의 집에 붓을 놓고 이제부터 서방정토로 명소를 구경하러 떠난다'라는 시구는 평생 자연을 관찰하고 그린 화폭 위의 시선답다고 할 만하다.
· 1812년 : 우타가와 도요히로의 문하에 들어가다.
· 1830년 : 〈동도명소〉를 발표하고 풍경화가로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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