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 10:15ㆍ여행/이태리
이태리 관광은 송수신가 없고서는 가이드가 불가능한 상황이던데,
그런데 여행 첫날에 인솔자가 송신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소매치기한데 감쪽같이 바꿔치기 당해서리, 아이고~
현지에서 그때 그때 송수신기를 빌려서 사용했는데 수신상태가 불량해서리~
지금 바로 설명글을 붙이진 못하겠고 사진만 올려놓습니다.
(제대로 들었다 해도 마찬가지겠지만 ㅋㅎ)
휴게소 들를 때마다 에스프레소 한 잔씩. ㅋ
*
범위가 꽤 넓습니다. 다 둘러보자면 한나절 잘 걸릴 겁니다.
저는 일부만 본 것입니다. 3분의 1쯤?
당시의 돌바닥 그대로입니다. 마차가 다니는 도로와 인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울퉁불퉁하지만 당시엔 맨질맨질했겠디요.
요 두 사진은 아이패드로 찍은 거네.
저 조형물들, 청동상은 폴란드의 현대 조각가 작품입니다.
↘ 목욕탕
그러고보니깐 여기선 송수신기도 없었구나.
묘
이건 뭐고, 저건 뭐고, 일일이 써붙이기 귀찮소. 궁금한 거 있으믄 물어보시구랴.
내 나이 육십이오.
저 산봉우리가 베수비오 山인데, (지금도 휴화산임.)
원래 높이에서 300미터인가 500미터가 싹둑 날아간 거라고 합니다.
↘ 잘살던 부잣집
*
폼페이 유적,
한 시간쯤 보고 나왔습니다. 별 재미는 없었습죠.
식당
이태리 피자는 화덕맛이랍디다.
스파게티는 가는 곳마다 주더구만은......아주 싸구려 수준 상차림이디요?
완전 예술작품이더군.
이번 여행 동안에 날씨는 기막히게 맑고 좋았수.
이 지역 평년기온이 45도 내외인데 금년엔 이상기온으로 30도밖에 안된다고 합디다.
그늘에 들어가면 시원하다오. 습도가 없어서리.
1 베수비오 화산 폭발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小)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小)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小)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그의 숙부인 대플리니우스는 당시 함대의 제독으로 군함을 타고 나가 구조 활동을 펼쳤지만 독성이 강한 화산 가스에 질식해 그만 죽고 말았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는 폼페이의 최후는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가 멸망하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하여서 약 2천여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로마의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광장과 대규모의 호화스러운 건물과 극장, 상가,그리고 당시의 최고의 설비를 자랑하던 스타비안 목욕탕이 화산재에 묻히고 말았다. 화산 폭발 후 조사차 이곳을 방문한 학자 플리니우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며 피해상황이 하도 엄청나서 로마는 폼페이의 발굴 및 재건에 손도 못 댔고 일확 천금을 노리는 도굴꾼만 득실대었다고 한다.
2 폼페이 발굴 (1)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4/5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나온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748년 발굴로 광장, 목욕탕, 원형극장, 약국 유적지등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3분의 2가 발굴되었다. 따라서 발굴이 완료된다면 로마 미술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받는 '큐피드 벽화'와 '춤추는 폰의 동상'등의 수준높은 문화재들이 더욱 많이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2 - 1 폼페이 발굴 (2)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발굴은 현재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어왔다. 초기의 발굴작업은 대체로 무책임했으며, 발굴자들은 주로 웅장한 건물이나 박물관에 진열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종식되었다.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그림 참조).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고대의 문·가구·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발굴작업은 1951년 아메데오 마이우리의 지휘 아래 집중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1924~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다. 제1구역과 제2구역에 있는 아본단차 가도 남쪽의 넓은 지역이 발굴되었고, 시 성벽 외곽에 쌓인 파편들이 치워졌다. 그 결과 노케라 문과 이 문으로부터 누케리아까지 이르는 도로의 양편에 나란히 뻗은 멋진 공동묘지가 드러났다. 현재 폼페이의 3/4이 발굴된 상태이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으며,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되었다. 그후의 발굴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중이다. 열주에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과 목욕탕이 있는 산마르크 별장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다른 별장들은 그라냐노와 폼페이 근처, 스카파티·도미첼라·토레안눈치아타 근처, 보스코레알레 및 보스코트레카세 근처의 베수비오 산 아래 경사면에서 발견되었다. 그중 많은 별장들은 발굴 후 다시 묻혔지만, 유명한 수수께끼 별장을 비롯한 여러 채는 지금도 볼 수 있다.
4 폼페이 위치
폼페이는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 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는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격렬한 폭발에 의해 헤르쿨라네움 및 스타비아이와 함께 매몰되었다. 이 고대도시들의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독특한 자료가 되고 있다. 오늘날의 폼페이 시(인구 2만 5,081명[1991])는 고대도시의 동쪽에 있으며, 순례요지인 산타마리아델로사리오 바실리카가 있다.
▲한평우 목사(로마한인교회). |
폼페이를 방문하면 21세기를 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없다. 2000년 전에 거주했던 사람들도 놀라운 문명의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 폼페이에는 세탁소와 극장, 약국이나 경기장도 있었다. 집집마다 수도관을 연결했고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만들었을 정도다. 전문가에 의하면 선거 벽보도 발굴되었는데, “나를 찍어 주면 시민들을 위해 이런 일을 하겠다”는 구호도 있었다고 하니 말이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이 새롭게 와 닿게 된다.
이곳은 BC 8-7세기경에 그리스 사람들이 지배했던 도시다. 그 후 BC 89년에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정복되어 로마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나폴리를 지배했고, 거기서 가까운 이곳 역시 그리스 사람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실 나폴리라는 말은 헬라어 네오폴리시(신도시)라는 의미다. 그들의 후예라서 그런지, 나폴리 사람들은 그리스 사람들과 키가 작다는 공통점이 있다.
폼페이에서 멀지 않은 살레르노의 파에스툼(Paestum)도 그리스 사람들이 BC 5세기에 세운 도시다. 거기에 있는 두 신전은 얼마나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지, 아테네에 있는 신전보다 더 완벽한 모습이다. 이런 여러 면을 볼 때, 항해술이 뛰어났던 그리스 사람들이 일찍이 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녔고, 도착하는 항구들마다 신도시를 건설한 것 같다. 그리스에는 섬이 약 5천 개나 존재하기에, 섬과 섬을 잇는 바닷길을 내야 했고, 그것은 항해술의 발달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폼페이를 공중에서 보면 생선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다. 경기장은 그 머리 부분에 있기에 마치 생선의 눈처럼 구성되었다. 그런데 꼬리 부분에는 치미테로(Cimitero, 공동묘지)가 있다. 이런 건설은 인생의 종착역은 죽음이라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웬일인지 폼페이 멸망 전에 살다가 죽은 이들의 무덤들에 대한 관심이 간다. 역사는 침묵하고 있지만, 그 무리들 중에는 대단했던 인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도 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존재라는 동질감도 작용할 것이고……
폼페이는 화산재로 묻혀 잊힌 도시였다가, 1549년에 운하 공사를 하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나폴리를 지배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가 발굴한 유물들을 가져갔고, 그 후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1856년경에 본격적으로 발굴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었다. 이 유물들을 통해 2천 년 전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것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티투스 장군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지 두 달 만의 일이었다. 그는 유대인 여자를 불같이 사랑했지만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원로원의 허락을 얻을 수 없자, 홀로 지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생 도미티아누스(Domitianus)는 야망이 세조 만큼이나 많았던 인물이었기에, 아버지가 형에게만 세자 교육을 시키는 것에 대해 평소에 불만이 많았었다. 그는 황제가 되고 싶어 안달했는데, 형이 2년 만에 죽는 바람에 어부지리로 황제가 되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냥 두면 반란도 불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와 관련된 내용이 폼페이에 존재하기에 그 부분을 써 보려고 서론을 길게 나열했다.
사도행전 24장 24절 이하에 보면 로마의 총독 벨릭스가 나오는데, 그의 아내는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였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들었으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겠다”고 미뤄,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천금의 기회를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는 복음을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바울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다(행 24:25).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한다.
그런데 총독 벨릭스가 유대인 여자 드루실라와 결혼하게 된 이유는, 그녀가 굉장한 미녀였기 때문이었다. 드루실라는 AD 39-44년 유대를 통치했던 아그립바 1세의 셋째 딸이자 아그립바 2세의 막내 누이로, 버니게(행 25:13)와 자매였다. 그녀는 콤바게네(Commagene)의 왕자 에피파네스(Epiphanes)와 약혼하였으나, 그가 할례를 거절하고 유대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파혼했다. 그녀는 15살이 되던 해에 에메사(Emesa)의 왕 아지주스(Azizus)와 그가 할례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다. 그 후 그녀의 미모에 미혹된 총독 벨릭스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와 결혼했다.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드루실라는 벨릭스에게서 아그립바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옥스퍼드성경원어대전에서 인용함).
당시 폼페이는 바닷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였으며, 로마인들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항상 환락이 함께한다. 남편이 유대 총독 출신이었고 평소 탐욕이 대단했던 자였기에 많은 돈을 모았을 것이고, 그 결과 이런 별장 지대에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당시에 로마 사람들의 로망이었던 이곳 폼페이에 거주했다. 요즘으로 본다면 폼페이는 우리의 제주도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수려한 환경과 시원하고 맑은 공기는 휴양지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폼페이에 살던 중, 아들과 함께 AD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재앙을 만났다. 당시 폼페이에는 약 3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날은 폼페이 사람들이 불의 신 ‘불칸’(Vulcan)을 섬기는 축제의 날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폼페이는 불을 섬기는 축제 중에 불로 망하고 말았다.
보통 이탈리아의 8월은 더위가 최고로 치닫는 때니, 이때 화산이 폭발했다는 것은 뜨거운 화산재, 또는 유독가스가 무더운 기온을 더욱 상승하게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폼페이 뒤에는 두 개의 산, 즉 베수비오(Vesuvio, 1,277m)와 솜마(Somma, 1,132m) 산이 쌍둥이처럼 있는데, 불을 뿜은 것은 솜마산이었다. 그런데 어찌 그 많은 화산재가 그곳에서 12km나 떨어진 폼페이까지 날아와 이 도시를 수 미터나 덮어 버렸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화산으로 인해 2천여 명이 안타까운 사연과 함께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런데 폼페이가 화산재와 가스로 멸망하는 광경을 똑똑하게 목격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해군 사령관으로 마즈노 곶(사도 바울이 하선했던 보디올 근처)에 있었던 대 플리니우스(Plinius)였다. 그는 검은 연기와 함께 화산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구조하려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유독가스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함께 있었던 그의 조카 소 플리니우스는 당시 18세의 나이로 그 처절한 광경을 자세히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인 리튼 발워가 ‘폼페이 최후의 날’을 썼다.
폼페이는 아주 방탕했던 도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유적들을 보면 당시 이곳에 술집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술에 취하면 가는 곳이 정해져 있었는데,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매춘소였다. 매춘소를 방문하면 손님들이 다양하게 선택하도록 매춘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지금 봐도 얼굴이 붉어진다. 죄의 양태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이 배가 부르게 되면 추구하는 길은 방탕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하는 검은 구름과 가스 속에서, 술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살려 달라고 울부짖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폼페이가 화산 폭발로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과 함께 삶을 마무리해야 했던, 총독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가 귀에 쟁쟁히 들려오는 듯하다. 이런 처참한 소리들을 듣고 삶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폼페이, 사라진 로마 도시의 화려한 일상
- 메리 비어드 지음, 강혜정 옮김 / 글항아리
서기 79년 8월 25일 폼페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다. 많은 책과 영화 그리고 가이드 북은 화산 분출이 있던 마지막 날에 초점을 맞춰 폼페이를 하루 아침에 사라진 비극의 도시로 기록한다. 과연 그럴까. 영국 역사학자 메리 비어드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이 같은 통념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폼페이는 여러 차례 붕괴를 거듭했고 주민들은 철수했으며 뒤이은 약탈도 이뤄졌다고 했다. 그는 “폼페이 사람들은 며칠 전, 아니 적어도 몇 시간 전에는 위험을 예고하는 신호들을 감지했다”며 “훗날의 판단과 상상력을 결합해 보면 베수비오 분화구에서 버섯구름이 솟구치기 시작한 뒤에도 탈출은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발견된 유골이 약 1100구로 미발굴 지역 유골을 포함해도 희생자가 최대 2000명 수준이다. 폼페이의 도시 규모를 토대로 산출한 당시 인구 6400∼3만 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치이다.
책은 이렇게 폼페이에 대한 통념을 뒤집고 유적 등을 통해 로마의 뒷골목을 탐색하듯 도시를 가로지르며 폼페이의 일상을 추적해 들어간다. 폼페이는 지극히 평범한 지역이었다. 상업·산업지구, 주거지역으로 명확히 구분되는 현대 도시와 달리 지역 간 구분이 없는 도시였다. 폼페이에서 나온 은잔에는 “쾌락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다”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 쾌락을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상류층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서민은 빵, 올리브, 포도주, 치즈, 채소를 주로 먹었을 뿐 격식 차린 만찬은 귀족 집에서도 이례적인 행사였다. 또 검투사와 사자가 뒤엉킨 폼페이 원형경기장에 대한 통념도 사실과 다르다. 저자는 현재까지 증거를 종합해 보면 폼페이 쇼에 등장한 동물들은 개나 염소 정도였다며 현재와 비교하면 어린이 동물원에 가까운 분위기였다고 분석했다. 책은 우리가 폼페이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만 의외로 모르는 것도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현미 기자 ch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