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8. 19:56ㆍ미술/ 러시아 회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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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리 소로카의 작품세계 - Grigory Soroka
러시아화가 1823~1864
그리고리 소로카는 베네치아노프가 사랑한 제자였다. 그의 재능을 아낀 스승은 소로카를 농노신분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해주기를 주인에게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인나리가 이를 쉽게 허락할 리 만무했다. 게다가 1847년 베네치아노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학교도 문을 닫자 소로카는 빛 한 줄기 보이지 않는 절망으로 빠져든다.
우크라이나로 끌려간 트로피닌이 노예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묵묵히 버틴 끝에 자유를 찾은 반면, 소로카는 절망 속에서 주인을 원망하며 술에 탐닉하였다. 그리고 1864년, 지역에서 발생한 농민해방운동에 연루되어 무거운 체형을 받은 그는 자살하고 만다.
소로카의 풍경화는 독특하다. 극도로 사실적이면서도 매우 비현실적인 그의 그림 <낚시꾼>을 처음 보았을 때, 시간을 훌쩍 넘고 회화의 발전단계를 몇 차례 건너뛰어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트의 분위기와 닮은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사적으로 볼 때 오르막길을 가던 소로카와 내리막길을 오던 마그리트가 기법 상 우연히 스쳐간 것이겠지만, 극심한 절망에 사로잡혀 있던 소로카의 심리와 20세기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아분열이 서로 맞닿은 데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로카의 죽음에는 안타까움과 함께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그가 삶을 마감한 1864년은 1861년 알렉산드르 2세의 역사적인 농노해방령이 내려진 이후이다. 이미 농노제가 철폐되었는데 무슨 ‘농민해방운동’에 연루되었단 말인가. 말이 ‘철폐’라지만 불충분한 점이 매우 많아 귀족과 농노 쌍방으로부터 불만과 반발이 들끓었던 혼란 속에서 그에게 찾아온 불운이었던 것일까.
각자 처한 상황이 물론 달랐겠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행복을 찾았던 트로피닌의 경우와 소로카의 비극이 자꾸 오버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로카가 조금만 더 삶을 믿고 버텨내었더라면 다른 결과를 맞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던 푸시킨의 시도 그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한 듯하다.
베르치아노프와 소로카 외에도 여러 명의 농노출신 화가들이 18~19세기 러시아 화단을 장식하였다.
F.S. 로코토프(1735~1808)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교수자리에 올랐으며 한때 차르의 초상까지 그렸으나 결국 궁정에서 쫓겨나고 만다.
국민시인 푸시킨의 수많은 초상화들 가운데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작품을 그린 O.A. 키프렌스키(1872~1836)도 농노출신으로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그는 아카데미가 보내준 이탈리아 유학시절 유럽의 자유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다가 차르의 미움을 받게 된다.
그 후 키프렌스키는 진보적 인텔리겐차들과 교감하며 그들의 초상들을 여러 점 남겼다. 유명한 푸시킨의 초상도 그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에 오래 머물 입장이 못 되었다.
차르 니콜라이 1세의 극심한 보수반동 탄압을 피해 이탈리아로 건너갔던 그는 끝내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로마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19세기의 러시아미술
19세기 초에 나타난 중후한 신고전주의 작품으로 페테르부르크의 해군부(자하로프 설계)·알렉산드라극장(로시 설계) 등이 있으나 그후에는 활기찬 건축활동을 볼 수 없다.
회화의 세계에도 아카데믹한 고전주의가 우세하였으나 나폴레옹전쟁(1812)이 민족감정을 뒤흔들고 또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25)에서 시작된 반절대주의(反絶對主義) 사회투쟁이 소용돌이치기에 이르자 일부 화가들은 이미 귀족적인 아카데미즘의 안일 속에 잠겨 있을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서구 낭만주의의 새로운 동향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대상에 대해 정열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창조 의욕은 키프렌스키와 트로피닌의 초상화에서, 베네치아노프의 농촌정경화(農村情景畵)에서, 브률로프의 《폼페이 최후의 날》이나 이바노프의 《그리스도의 민중에의 출현》 등의 화면에서 뚜렷하게 읽을 수 있다. 페도토프의 《소령의 구혼》 《귀족의 조반》, 그 밖의 일련의 작품은 고골적인 풍자정신과 예리한 비판의식에 의하여, 비판적 리얼리즘의 선구가 되었다.
1870∼1880년대에 회화 발전의 주축이 된 것은 미술아카데미에 항의하고 퇴학한 젊은 화가들의 단체를 모체로 1870년에 '이동파'운동을 일으킨 화가들(페로프, 크람스코이, 니콜라이 게, 시슈킨, 사프라소프 등)과 조금 뒤에 참가한 탁월한 세 화가 레핀, 수리코프, 레비탄이다.
그들은 당시의 사건이나 풍속을 직접 묘사한 작품 외에도 먼 과거의 사건을 주제로 한 역사화나 조용한 관조에 몰두한 풍경화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표현 기술면에서는 아카데믹한 훈련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한 야로셴코, 베레시차긴, 폴레노프, 아이바조프스키 등의 창작도 이동파와 공통된 방향을 나타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활약했던 이동파가 후퇴하고 그 대신 근대주의의 여러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한 과도기를 대표하는 사람은 사실의 깊이를 잃지 않고 담담하게 기발한 새 형식을 탐구한 세로프와, 비극적 심정을 우의적(寓意的) 이미지에 실어 표현한 환상의 화가 우루베리 등의 이색적인 두 화가이다.
한편 19세기 말에 탄생한 새로운 단체로는 코로빈, 아르히포프, 바스네초프, 기타 많은 인상주의 또는 상징주의의 동조자들이 가담한 러시아 화가동맹과, 이동파 아류의 천협(淺狹)한 교훈성·지방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예술을 위한 예술'을 표방한 미르 이스쿠스토바(藝術世界:1898∼1904)가 있고, 이어서 한층 더 급진적으로 형식을 개혁하려고 한 다이아몬드의 잭, 푸른 장미, 금빛 양털, 기타 많은 단체가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이런 와중에서 당시의 국제적인 전위예술의 첨단을 걷는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 실험이 행해졌는데, 1917년의 혁명을 전후하여 이 미술가들의 일부는 국외로 빠져나갔고, 일부는 남아서 새 정권에 협력하였다. 이와 같이 소비에트연방으로 옮겨가기 전의 세기말부터 1920년대에 걸친 러시아미술은 예술의 전 역사를 통해서도 보기 드문 파란만장한 것이었다.
그리고리 소로카 [Grigory Soroka, 1823.11.27~1864.4.22]
소로카는 베네치아노프 미술학교에서 단연 두드러지는 학생으로, 스승인 베네치아노프는 이러한 소로카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주인의 완강한 반대로 소로카는 농노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로카는 러시아 농촌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정경을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고요와 적막만 있을 뿐 약진하는 생동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대표작에는 《낚시꾼 Fishermen》(1840년대), 《리디아의 초상 Portrait of Lydia Milyukov》(1840년대), 《시골소년 Peasant boy》(1840년대) 등이 있다.
세상에서 가장 담담한 그림이 하나 있다. 그림을 그린 이는 그레고리 소로카(Grigoriy Vasilyevich Soroka). 19세기 중반, 러시아에 머물다 사라진 화가였다. 그는 농노(農奴), 곧 노예로 태어나 죽을 때도 그 신분으로 죽었다.
일찍이 그림에 재능을 보여, 당시 러시아 화단을 풍미하던 베네치아노프(Alexey Venetsianov)에게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거기까지가 화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한계치였다. 그림 공부를 마치자 그는 다시 그의 '주인' 밀류노프(Milyukov)에게로 돌아갔다. 아니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20대와 30대, 화가로서 한창일 나이에 그는 시골의 주인에게로 돌아가 시골 교회의 종교화따위를 그리며 세월을 보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영민한 젊은이에게는 여자가 따르는 법일 게다. 주인의 딸인 리디아와 소로카는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강제로 농노 출신의 여자와 결혼을 해야 했다.
1861년에 있었던 러시아의 노예해방운동 뒤에도 소로카는 여전히 농노의 신분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채찍질 뿐이었다. 그는 목을 매 자살을 했다. 위키사전에 따르면 그가 사랑했던 리디아도 그의 사후에 음독자살을 했단다.
그가 남긴 <낚시꾼>이라는 작품을 처음 본 순간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그것, 참 담담하게 그렸다 것이었다. <낚시꾼>은 1840년대, 그러니까 그가 베네치아노프 밑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짐작되며, 그렇다면 그의 나이 20대 초반에 그려진 그림일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 나이인가. 그 눈부신 나이에, 눈부신 햇살 아래서 그가 느낀 것은 시간이 멈춘 듯 한 적막감이었던 것이다. 그림 속에는 소로카의 담담함이 창백한 물빛 속에 투영되어 있다. 그러고 보면 담담함의 정체는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일수도 있겠다.
본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간의 허무함'이란 아주 부르주아적인 발상으로 위험분자로 찍기 마련이다. 어쨌든 소로카의 시대는 아직 혁명 전이었으니 그의 개인적 허무함이 인민에게 영향을 미치거나 말거나 따위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적을 이 '낚시꾼'이란 그림에서 느끼면서 사실 어떤 초현실주의 작가의 것인줄 알았다.
분명히 살아있는 것을 그리고 있고 움직이고 있고 바람이 불고 있지만 살아있는 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하다. 보통 우리가 '잘그렸다'라고 풍경화를 보고 감탄할때는 꽃의 향기가 느껴지고 새소리가 들리고 촉촉한 비가 느껴진다.
하지만 분명 이 살아움직이는 것들 속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것에 그의 삶에대한 짧은 정보는 단박에 이 고립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 그는 자신의 모든것을 걸고 그림을 그렸다는것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리 소로카[Grigory Soroka : 1823~1864]는 화가이기 이전에 농노였다. 농노는 농사짓는 노예, 지주의 재산이었다. 서유럽에 비해 개혁이 느렸던 러시아는 아주 근대에 까지 농노제가 있었다. 우리 나라의 장영실도 그러할진데 러시아의 그 수많은 농노들중에 어찌 재능있는 천재가 없었겠는가.
당시 상트뻬쩨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는 귀족들 외에도 이런 재능있는 농노들이 많았는데 이 아카데미의 '농노 학생 추방사건'으로 인해 의식있는 한 사람 베네치아노프는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웠다. 소로카는 바로 이 미술학교 출신이다.
농노출신 화가들 중에도 다행히 어느정도 능력을 인정받아 후에 신분해방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소로카는 그렇지 못했다. 아카데미의 교육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빛을 그리고 살아있는 모습들을 그리지만 말 그대로 그의 눈에 살아있는 피사체들은 자신과는 동떨어져있다.
그의 인생에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신에대한 감사로이어지는 그런 사치스러운 감성은 없다. 마음의 문은 닫혀있고 매일가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는 주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근근히 생의 끈을 잡아온것이다.
무엇을 보고있어도 그의 그림은 철저하게 자기위주인것 같다. 자신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수많은 피사체들과 교감을 시도하지만 너무나 굳게 닫혀있었던것 같다. 강물은 흐르지않고 시간은 멈추어있고 햇살이 비치는 방안은 따뜻하지 않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느꼈던 놀랍도록 탐스러운 빛은 그의 손에는 닿지 않는 자유와 같다.
스승 베네치아노프는 그의 주인에게 끝까지 신분해방을 요청했지만 아주 욕심쟁이 주인은 차르의 농노해방령이 내려지기 까지 절대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러시아 미술사'의 내용을 빌자면 그림도 그릴줄 아는 아주 유용한 노예를 풀어주기 아까운것도 있었겠지만 말 그대로 그는 '자유롭던 말던 내 알바가 아닌' 하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베네치아노프의 사후 안타깝게도 소로카는 희망을 완전히 잃고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가 죽기 몇년전 농노해방령이 내려졌지만 결국 소작데기 삶밖에 없었던 그는 삽화를 그리며 근근히 살아가고 그림은 완전히 포기해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농민해방운동에 연루되어 극한 형벌을 받고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 소극적이고 소심하고 병약한 한 남자는 갖힌 눈으로 세상을 보고있다. 아무말도 할 수 없는 개인의 감정이 이 토록 강하게 전해져 온것도 처음인것 같다. 우리가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의 뒤섞인 머릿속을 조금이나마 예상해볼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억눌리고 억눌려서 자신의 감성을 피사체속에 숨겨놓고 있다.
출처] 그리고리 소로카의 작품세계 - Grigory Soroka|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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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드래기 창작소
*** 본 포스팅은 2010년 7월 母블로그에 포스팅 했던 글을 정리 편집 한 것입니다. 간간히 상황이 묘한 부분이 있다면 과거의 글이라 그런것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우연히 읽었던 '러시아 미술사' 때문에 요즘 '상트 뻬쩨르부르크'병에 걸렸습니다. 시베리에 횡단열차에 대한 로망에 빠져 경의선개통이 블라디보스톡까지 되면 꼭 가보리라!!!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시국을 보니 그건 안될 말) 완전히 러시아에 대한 불이 붙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 하면서도 도대체 그림을 볼 때는 어떤 것을 보아야 아름답다고 하고 감동을 받는다고 하는 것일까 의문에 빠졌는데, 어려도 나이를 꽁으로 먹은 것은 아닌지 요즘은 그쪽으로 신경이 예민해져서 매일같이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있는 화집이 있는데 '케테 콜비츠'와 몇 장 없는 '그레고리 소로카'의 그림입니다.
2000년대 초 여느 예술대생들이 그랬던것 처럼 클림트를 위시한 오스트리아 분리파의 화려하고 강한 인상의 작품들에 빠져있다가 우연히 알게된 케테 콜비츠의 판화들이 석탄가루처럼 숨에 턱하니 막혀온 뒤로 그림이란 것이 비단 아름다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은 눈으로 보여지는 것인데 어떻게 작자의 마음이 비추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그 마음이 전달되는가 이해하지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강하게 전달받게 된 계기라고 할까요.
역시나 글도, 음악도, 그림도 인간의 진심이 담겨져 있지 않다면 그저 예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 러시아의 농노 화가 그리고리 소로카의 그림 한장으로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습니다. 원화였다면 뻥을 좀 보태서 정말 기절했을지도요. 다독을 하는 아이가 논술을 잘 하는것 처럼 그림도 보고보고 보고보고 보고보고 보다보면 진심이 느껴질런가요. 러시아의 풍속화가 본격화 되기 직전 비참한 농노계급이었던 소로카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풍경화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고립과 외로움이 전해졌습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나 느꼈던 '이어폰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듯 한' 정적을 이 '낚시꾼'이란 그림에서 느끼면서 사실 어떤 초현실주의 작가의 것인 줄 알았습니다. 마그리트의 추구하는 바가 그러했고 성과가 그랬던 것 처럼 이사람에게도 어떠한 철학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아주 성급한 결론.
하지만 분명 이 살아 움직이는 것들 속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골때리는 야후 영어 사이트들과 '러시아 미술사'를 읽으면서 알게된 그의 삶에 대한 짧은 정보는 단박에 이 고립된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림을 그렸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더욱 슬프게 합니다.
그리고리 소로카[Grigory Soroka : 1823~1864]는 화가이기 이전에 농노였습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바로 그 농노. 농사짓는 노예, 지주의 재산입니다. 서유럽에 비해 개혁이 느렸던 러시아는 아주 근대에 까지 농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의 장영실도 그러할진데 러시아의 그 수많은 농노들 중에 어찌 재능있는 천재가 없었겠습니까. 당시 상트뻬쩨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는 귀족들 외에도 이런 재능있는 농노들이 많았는데 이 아카데미의 '농노 학생 추방사건'으로 인해 의식있는 한 사람 베네치아노프가 농노들을 위한 미술학교를 세웁니다. 소로카는 바로 이 미술학교 출신입니다.
농노 출신 화가들 중에도 다행히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아 후에 신분해방이 되는 사람도 있지만 소로카는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아카데미의 교육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고 빛을 그리고 살아있는 모습들을 그리지만, 말그대로 그의 눈에 살아있는 피사체들은 자신과는 동떨어져있습니다. 그의 인생에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 하나하나가 신에 대한 감사로 이어지는 그런 사치스러운 감성은 없습니다. 마음의 문은 닫혀 있고 매일 같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면서 그는 주인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면서 근근히 생의 끈을 잡아온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있어도 그의 그림은 철저하게 자기위주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수많은 피사체들과 교감을 시도하지만 너무나 굳게 닫혀있었던것 같습니다. 강물은 흐르지않고 시간은 멈추어있고 햇살이 비치는 방안은 따뜻하지 않습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느꼈던 놀랍도록 탐스러운 빛은 그의 손에는 닿지 않는 자유와 같습니다.
베네치아노프의 사후 안타깝게도 소로카는 희망을 완전히 잃고 술에 취해 살았으며 그가 죽기 몇 년 전 농노해방령이 내려졌지만 결국 소작데기 삶밖에 없었던 그는 삽화를 그리며 근근히 살아가고 그림은 완전히 포기해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농민해방운동에 연루되어 극한 형벌을 받고 끝내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어떻게 그림을 보는 거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저도 사실은 그림을 보이는 아름다움과 구도, 형식적인 것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림은 어떤 예술보다도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최고로 위선적인 활동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림에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2009년 예술의 전당에서 클림트전을 보고도 베토벤 프리즈의 규모, 그의 스케치를 보게되어 기뻤다 라는 말 이외에는 표현 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것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확실한건 클림트는 여성을 매우 좋아했다는 것 만은 정확히 느끼고 왔습니다.)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유행하는 것, 새로운 것, 참신함도 물론이지만 단순히 '아이디어'와 '사회적 메세지' 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척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잭슨 폴락의 과격한 추상화가 아니어도, 고흐의 각막에 비추어진 빛깔이 아니더라도 표현하지 않는 소극적인 작가의 감성은 그림에도 역시 묻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도 중요하겠지만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공부입니다. 저 따위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서도 사실 학부생들 조차도 미대생이란 그림그리는 기계로 보입니다. 그럴 바엔 애초에 학문으로 만날 필요도 없이 공방을 나가는게 낫습니다. 중국의 그림거리처럼 복제화를 그리면서 테크닉을 쌓으면 될 것입니다. 학부의 커리큘럼은 점점 실기 위주로만 바뀌거나 이론이나 감상을 위시할 학부는 점점 폐쇄되어가는 분위기 입니다. 폼으로 미대를 다니는 사람도 사실은 무척 많이 있습니다.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가 한 획을 그을 인물이 되거나 대단한 학자가 되진 못하겠지만서도 미술이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단순히 현란한 눈요기나 분위기를 의식한 메세지 만이 아니란 것을 알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건 정말 그냥 기술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다 그리고 싶다 하면서 안타까운 것은 항상 좁은 시야로 건방진 자신감으로 도전했던 그때에 비해 내가 얼마나 보잘것 없는가를 느낄 때입니다. 그리는 것이 다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무궁무진 합니다. 사람들이 보지 못한 세계 여러 곳의 정말 아름다운 그림과 소통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내가 그 교두보가 된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꿈에 지나지 않지만 사람은 꿈을 꾸어야 사는 가치가 있다 하지 않습디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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