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1946-1986) / 판화

2015. 11. 24. 18:00미술/한국화 현대그림

 



민중 판화미술의 거장 ‘오윤’의 삶과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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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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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윤_자화상_삼베에 목판_17.8×13.2cm_1974

 

 

 

 

 

 오윤_탈춤Ⅱ_캔버스에 유채_38×45cm_1970년경

 

 

 

 

 

오윤_대지Ⅴ_종이에 목판_41.5×35.5cm_1983

 

 

 

 

 

 오윤  '애비와 아들'. 목판에 유채, 34.5×35.0㎝, 1983

 

 

 

 

 

 오윤_피로_종이에 목판_24.1×34cm_1982

 

 

 

 

 

 오윤_여공의 수기_종이에 목판_25.7×35cm_1985

 

 

 

 

 

오윤_마케팅Ⅰ:지옥도_캔버스에 혼합재료_131×162cm_1980 

 

 

 

 

 

오윤_마케팅Ⅱ:발라라_캔버스에 혼합재료_173×12cm_1980  

 

 

 

 

 

 오윤_팔엽일화_종이에 목판_35.5×37.5cm_1983

 

 

 

 

 

 오윤_칼노래_광목에 목판, 채색_32.2×25.5cm_1985

 

 

 

 

 

 오윤_북춤_종이에 목판_31.6×25.5cm_1985

 

 

 

 

 

 오윤_아라리요_종이에 고무판_44.5×38.8cm_1985

 

 

 

 

 

 오윤_도깨비_광목에 목판, 채색_91×218cm_1985

 

 

 

 

 

오윤_낮도깨비_광목에 목판_54.4×36cm_1985 

 

 

 

 

 

오윤_통일대원도_캔버스에 유채_349×138cm_1985  

 

 

 

 

 

오윤_검은새_종이에 목판, 채색_17×15cm_1980  

 

 

 

 

 

 오윤_소묘_종이에 수채, 파스텔_26.5×22cm_1965~1970년경

 

 

 

 

 

 오윤_소묘_종이에 먹_34×25cm_1968년경

 

 

 

 

 

헐벗은 사람들 1972

 

 

 

 

 

 오윤 <가족2> 1982

 

 

 

 

 

오윤 <사상체질도> 1983 목판 채색 353.3×51cm

 

 

 오윤_호랑이와 인물_종이에 먹_54×40cm_1984~6년경

 

 

 

오윤 소리꾼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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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ㆍ판화가. 부산광역시 동래구 출생. 소설가 오영수(吳永壽)의 아들로 서울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를 거쳐 197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69년 서울대학교 조소과 4학년 때 임세택ㆍ오경환과 함께 3명이 1980년대 민족ㆍ민중 미술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현실동인]을 결성하여 전시회를 준비했으나, 재직교수들과 관계기관이 문제를 삼아 열지 못했다. 이 당시 그는 이동주의 조선조 속화와 실경산수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의 새로운 해석과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현실동인 전시회가 실패한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경주에 머무르며 벽돌공장을 운영했다.

 한편 미술관과 유적들을 돌아보면서 한국의 전통조각, 회화를 서양미술의 기준으로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 뒤 테라코타에 관심을 가졌고, 그러한 인연으로 상업은행 구의동 지점과 동대문 지점에 부조벽화를 제작했다. 1975년 결혼했으며 이 무렵부터 책의 표지를 위해 제작하는 목판화 작업을 시작했다.

 1979년 '현실과 발언' 발기 준비모임에 참가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현실과 발언' 초기의 그림 가운데 <지옥도>(1980) <사상체질도>(1983) 등은 불화(佛畵)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도시문명의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시도한 것이며, 당시의 기존미술과는 다른 파격성으로 인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원귀도(寃鬼圖)>(1984)와 같은 역사해석을 담아낸 기념비적인 작품을 포함한 몇몇 유화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주작업은 목판화였으며, <소리꾼>(1985) <길노래>(1985) 등은 민중들의 삶에 내포된 해학과 소박성, 한(恨)과 신명 그리고 농축된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으로 이후 민족ㆍ민중 미술운동의 목판화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에는 목판화에 전념해 창작 춤판 <강쟁이 다리쟁이><도라지꽃> 등의 포스터와 <민족의 노래, 통일의 노래> 출판기념회장 걸개그림을 제작하였고, 현실과 발언 창립전(1980), 새로운 구상화가 11인전(1981), 시대정신전(1984∼1985), 삶의 미술전(1984), 40대 22인전(1986) 등의 전시회를 통해 한국 민중판화ㆍ민중예술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85년 간경화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후 40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인 그해 5월 30일에서 6월 9일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회를 가졌다.

 그는 인간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복잡하지 않고 단순 명쾌하게 표현함으로써 민중판화를 '민족미술 또는 민족문화라는 넓은 영역으로 이끌어 간 예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헐벗은 사람들>(1972) <기마전>(1974) <지옥도>(1980) <사상체질도>(1983) <징>(1985) <도깨비>(1985) <소리꾼>(1985) <길노래>(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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