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련,『파리 예술기행』

2015. 11. 16. 18:42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파리의 미술과 건축을 탐구하다!

10여 년간 파리지앵의 삶을 살았던 파리 예술 전문가 민혜련의 『파리 예술 기행』. '신의 도시', '왕의 도시', '빛의 도시', 그리고 '인간의 도시' 등 파리 예술을 4가지 키워드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미술과 건축, 그리고 문화 등에 대해 압축적으로 다룸으로써 파리의 예술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사람들이 푹 빠지게 만든다. 아울러 저자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관심이 생생하게 녹여져 있어 파리에 대한 이해를 도와줄 뿐 아니라, 그곳을 가깝게 느끼도록 이끌고 있다. 자유사진가 손초원의 사진을 함께 실어 파리만의 감성을 우리 마음 속에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민혜련의) 파리 예술 기행 

 2010.06.15 | 페이지 수 352 

 

 

 

저자 민혜련 저서(총 8권)

 

인간이 사는 현상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주어지는 모든 것에 열정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래서 아직도 미지의 경험은 그녀를 매혹한다.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종합하여 자신의 전공분야에 깊이를 더하는 T형 인간이야말로 르네상스적인 보편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는 삶의 행보도 다채롭다.작가 민혜련은 성신여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캉(Caen)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를 수료하면서 10여 년간 파리지엔의 삶을 살았다. 와인과 프랑스 요리에 매료되어 귀국 후에 국내 최초의 프랑스 요리 전문점 ‘작은 프랑스(La Petite France)’를 창업하여 프랑스의 맛을 널리 알렸다. 이 시절 와인의 매력에 심취하여 생물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와인의 발효공정”에 관한 논문을 썼다. 대학과 기업체에서 와인 및 유럽문화뿐 아니라 과학사를 강의하면서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의미였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몇 바퀴나 돌면서 유럽의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였고, ‘르네상스적인 인간’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 모던 유러피안 레스토랑 ‘마론 키친 앤 바’(Maron Kitchen&Bar, www.maron.kr)를 경영하고 있다.저서에 『일생에 한 번은 파리를 만나라』, 『파리 예술 기행』, 『관능의 맛 파리』, 『프랑스 요리의 역사』, 『와인 양조학(공저)』 등이 있으며 『알기 쉬운 와인 테스팅』, 『와인 디바의 와인 이야기』, 『이브 생-로랑』외 다수의 도서를 번역하였다.

 

 

불어 불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는데 외려 미술사를 전공한 사람보다도 해박하네요.

핥기 미술사를 얹어서 그럴듯하게 - 격조 있는 척 - 치장한,  부잣집 딸내미가 낸 여행기 책이겠거니 쉽게 생각했는데, 

웬걸? 프랑스의 역사와 미술사를 자기 나름으로 소화해서 엮은, "프랑스 미술사 정통서적"(?)입니다.

 

(프랑스 책, 워서 베꼈디야? 이렇게 해박할 리가 없는디? ????)

 

 

 

 


1부 신의 도시


1. 바벨탑을 건설한 사람들
-파리에서 고딕과 로마네스크를 비교해 감상하기
2.레오나르도 다빈치, 루아르에서 생을 마감하다
-앙부아즈 성
3. 초상화를 보고 결혼하다
4. 메디치의 뤽상부르 공원
5. 귀족들을 위한 잔치, 바로크와 로코코
-로코코의 작가들
6. 파리의 그리스 신전
-마들렌 광장 주변의 명소
7. 학생들의 거리, 소르본과 팡테옹
-돔(Dome), 팡테옹(Pantheon)


2부 왕의 도시


1. 파리의 얼굴을 바꾼 두 사람, 오스만 남작과 르코르뷔지에
2. 파리의 개선문
3. 오페라의 유령
4. 파리의 토템
5. 영원불변의 미학을 향한 열정, 아카데미즘
6. 100프랑짜리 지폐를 장식했던 들라크루아
-외젠들라크루아 박물관
7. 왕의 집, 루브르


3부 빛의 도시


1. 파리, 이국적인 것들의 쉼 없는 매혹
2. 숲 속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3. 영원한 향수, 몽마르트르 언덕
-몽마르트르의 박물관 | 카바레
4. 압생트에 젖다
5. 바토라부아르
6. 노르망디를 화폭에
-인상주의라는 이름의 시초
7. 달과 6펜스
-오베르쉬루아즈 찾아가기
8. 세잔을 찾아가는 길
-퐁투아즈 가는 길
9. 몽파르나스가 떠오르다!
-몽파르나스 타워와 이 지역의 유명한 카페
10. 미술관이 된 기차역
11. 인상주의 미술관
-오르세 관람하기
12. 피카소, <모나리자>를 훔치다
13. 옴므파탈, 아름다운 이탈리아 청년
14.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4부 인간의 도시


1. 걷고 싶은 도시, 사람 중심의 도시
-파리에서 자전거 이용하기
2. 안과 밖을 뒤집은 퐁피두센터
-조르주퐁피두센터
3. 프랑스 인의 생활 양식
4. 파리의 맨해튼
5. 미래공원 라빌레트
6. 파리의 뉴타운
센 강변의 수영장

 

 

 

 

 

 

Stacey Kent - Ces petits riens (Those little things)
 

 

 

 

 

 

1

 

노트르담(Notre Dame)은 영어로 'Our Lady'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성당'을 뜻한다. 베드로에게 헌정되면 '생피에르(Sant-Pierre 성 베드로)', 요한에게 헌정되면 '생장(Saint-Jean 성 요한)', 이런 식으로 이름이 지어진다. 그래서 프랑스의 웬만한 도시들을 다니다보면 '노트르담 드파리' 식으로 노트르담 성당을 여러 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

 

성당 곳곳에 아래를 내려다 보며삐죽삐죽 나와 있는 가고일(gargoyle)들. 상상 속의 괴물들로 빗물받이이자 장식물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쉬메르라는 괴물들 형상이  성당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지붕 곳곳에 조각되어 있다.

 

 

 

 

 

 

 

 

 

 노트르담에 있는 괴수들의 석상 「가고일」

 

 

유럽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 악마나 괴수의 석상이 건축물 위에 세워져 도시를 내다 보고 있음을 발견한다노트레담의 괴수 석상은 미술사적으로 상당히 유명하다. 고딕양식은 높이를 지향하며 상향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고딕시대 교회의 건물들은 대체적으로 높이가 상당한데 이런 건물들을 지을 때 비가 오고 난 후 물이 고이는 것을 막기 위해 특별히 지붕의 낙수홈을 특별히 만들어야 했다. 고딕시대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은 지붕의 낙수홈을 만들 때 괴수의 주둥이를 사용했으며 그러기 위해 괴수의 석상을 만들게 된다 

낙수홈은 건축 구조학적으로 당연히 교회 밖에 위치하게 된다. 당시 건축예술가들은 신의 은총이 가득한 신성한 교회 내부와 악의 세력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외부세계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기 위해 낙수홈으로 악마의 석상을 사용했다. 즉 건축가들은 교회 밖에는 악마가 항상 노려보고 있으니 신앙으로 무장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던 것이다. 매 일요일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이런 괴수의 석상을 보고 공포에 휩싸이며 신앙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성서적으로 살기를 다짐한다. 고딕양식이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것은 이렇게 당시 유럽사람들의 생활까지 녹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성당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괴수의 석상들은 용을 비롯 6개의 몸을 가진 괴수 등 힘있고 강한 괴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독일말로는 이들을 총칭해 Beelzebub이라 하는데 귀신의 왕들을 말할 때 쓰는 단어다교회의 건물에 귀신의 왕을 둔 것은 다른 악귀가 접근치 못하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강하고 힘있는 악귀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다른 악신들은 어쩔 수 없이 귀신왕의 영지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 즉 교회밖에 귀신왕의 석상을 둠으로써 악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교회와 수도원을 보호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것이다. 어찌 보면 부적의 의미가 강하다. 

최초로 괴수의 석상이 사용된 곳은 1220년 라옹 교회를 지을 때였다. 그 후 파리 노트레담 성당이 이를 모방해 짓기 시작했는데 노트레담 성당에서 괴수의 석상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동물의 모양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바뀌었는데 나중에는 의미가 변질되어 반유대주의 운동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고딕교회에 붙어 있는 괴수의 석상을 가고일이라 부른다. 가고일은 영어의 gargle에서 왔다. 교회 지붕 처마 밑에서 물을 입 밖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괴수의 몸 안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 소리를 본 따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고딕시대 때 가고일은 새나 짐승의 모습을 뛴 괴수들로 주로 이루어졌으며 높은 건물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물을 멀리 내려 보내기 위해 상당히 밖으로 나와야 했다. 당시 건축가들은 이런 고딕양식의 건축학적 구조를 이용해 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예술성을 더했던 것이다.

  www.nanum.eu

 

 

 

난 이게 참 궁금했었는데, 그게 '가고일'이었구먼? '가글'에서 온 말이구먼?

이름을 몰라서 검색을 못해봤었네 그랴.

 

 

 

 

 

 

 

 3

앙부아즈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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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농소 성 건너편에 위치한 앙부아즈 성은 루아르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성의 정원에서 루아르 계곡으로 이어지는 파노라마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화 안의 숨겨진 밑그림에는 ‘앙부아즈 음모’로 불리는 피의 역사가 강을 붉게 물든 장면이 있다. 그 옆에는 천재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년에 머무르며 ‘모나리자’를 완성시키던 모습과 정원을 사색하던 모습도 간직하고 있다. 


 

앙부아즈 성의 역사

 

앙부아즈는 고대부터 요새화된 성곽도시 오피둠(Oppidum)이 형성되어 있었다. 성은 중세시대 때는 앙주 백작 가문을 비롯한 봉건 영주들의 요새로 쓰이다 1431년 앙부아즈의 영주 루이(Louis d'Amboise)가 샤를 7세의 측근이었던 라 트레무아유(La Trémoille) 가문에 대한 반란 사건에 연루되자 프랑스 왕실에서 몰수했고, 루이는 후에 사면되었으나 성은 반환받지 못했다. 

성이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되기 시작한 것은 앙부아즈 성에서 태어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할 만큼 사랑했던 샤를 8세에 의해서이다. 샤를 8세는 15세기 말에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 올 때 이탈리아 건축가와 조각가를 데려와 요새 같은 성을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중세 고딕양식이 조화를 이룬 성으로 개축했지만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샤를 8세의 뒤를 이은 루이 12세는 블루아 성에서 주로 머물면서 개축을 계속했고, 이어 샤를 8세처럼 이탈리아 양식을 좋아하던 프랑수아 1세가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앙부아즈 성에 정성을 기울이며 이탈리아 양식을 반영하며 뒤를 이어 증축했다.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올 때 초빙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앙부아즈 성과 클로뤼세 성에 머물며 궁정화가로 그림을 그리며, 운하설계나 궁정설계를 했고, 이 성의 일부 설계도 맡아 일하며 ‘모나리자’ 그림을 완성했다. 

성은 현재 서쪽 경계면과 중앙에 있던 건물은 사라지고 북쪽의 주 건물과, 예배당, 성벽, 탑만이 남아있고 

성 안은 가구를 비롯해 장식품들이 화려함으로 수놓아져 있다. 그 중에서도 국왕의 접견실이 가장 화려하다. 다빈치가 사용했던 방은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생 튀베르 예배당

 

성의 맞은편에 자리한 생 튀베르 예배당(Chapelle Saint-Hubert)은 중세의 화려한 플랑부아양 조각들이 뾰족탑과 지붕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천장과 창문은 고딕식 아치로 우아하고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고딕 양식의 멋이 물씬 풍기는 건축물이다.

레오나르드 다빈치가 성 아래에 있는 도시의 생 프로랑탕 성당에 안치되었다가 1874년 이곳으로 이장되어 잠들어 있고, 정원에는 레오나르드 다빈치를 기리는 흉상이 서있다. 

 

 

구교와 신교의 갈등, ‘앙부아즈의 음모’

 

‘앙부아즈의 음모’의 전조는 프랑수아 1세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랑수아 1세는 교회 개혁을 지지하면서도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 논쟁과는 거리를 유지했지만, 1534년 10월 17일 밤 파리와 오를레앙, 투르 등에 교황을 규탄하는 벽보가 붙었고, 벽보는 앙부아즈 성에 있는 왕의 침실 문 앞에도 붙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궁정 신하들은 분노하여, 300여명이 체포되고 그중 20명이 화형을 당하며 종교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 갈등은 1559년 앙리 2세가 죽은 뒤 어린 나이의 아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왕비 메리 스튜어트의 백부인 제2대 기즈 공 프랑수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증폭된다. 

구교도인 기즈 가문은 신교도 탄압정책을 실시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신교도들은 반란군을 조직했다. 전국의 신교도들은 1560년 1월 낭트에서 모여 출발해, 왕이 머물고 있는 블루아 성에 가기 위해 투르의 위그노 성문이 앞에 집결했다. 이 때부터 신교도를 지칭하는 위그노(Huguenot)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이 블루아 성으로 가려 할 때 파리의 변호사 아브넬이 배신하여 반란 기도가 알려졌고, 기즈 가문과 왕족은 블루아 성이 적을 방어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앙부아즈 성으로 피신했다. 앙부아즈 성은 요새화된 성으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결국 앙부아즈 성에서 기즈 가문이 이끄는 왕립군의 기습공격에 반란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기즈 공은 신교도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신교도들을 처형하는 장면을 지켜 볼 수 있는 관람석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이 때 1200여명의 신교도들은 앙부아즈 성에서 1주일 동안 고문과 사지를 찢는 고문을 받으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그들의 시체는 루아르 강에 내던져져 강은 핏물로 물드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 사건은 2년 뒤의 위그노 전쟁의 불씨가 된다.

그러나 앙부아즈 성에서 보이는 루아르 강은 평화만이 세상을 어루만지듯 강을 따라 흐르고 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치고 강의 슬픔 심연은 먼 나그네처럼 찾아온 어둠에 잠기고 이 어둠은  환희의 빛과 소리로 기지개를 켠다. 여름밤을 수놓는 ‘빛과 소리’의 공연쇼가 신데렐라가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고 참석한 무도회처럼 화려한 공연을 펼치기 때문이다.  ‘빛과 소리’ 영상쇼은 6월 마지막 주부터 9월 첫째 주까지 매우 수요일과 토요일에 펼쳐진다.



【한위클리 / 조미진 chomijin@hotmail.com


 

 

 

4

 

들라크루아는 어떤 학파나 제자를 키우진 않았지만 그 시대, 그리고 다음에 오는 젊은 화가들의 정신적 스승이 되었다. 거의 교주님 숭배하듯 흠모하였다. 그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은 일종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센 강 근처의 생제르망데프레에 외젠 들라크루아 박물관이 있다.

세상을 떠난 들라크루아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그에 충격을 받은 팡탱-라투르는 <들라크루아에의 경의>라는 역작을 남김으로써 그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전시는 이 작품의 제작과정과 다양한 변형작들을 통해 집단초상화의 개념,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화가의 아틀리에, 그리고 경의를 위해 헌정된 작품들의 의미에 대해 다룬다.


 

 

                           팡탱라투르, <들라크루아에 경의를 표하며> 1864 오르세

 

 

 

 

5

 

루브르 궁전

 

프랑스 왕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전을 꼽으러면 아마도 루브르가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베르사이유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루브르에 비하면 베르사이유는 '왕의 놀이터'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하다. 북쪽과 남쪽을 가로지르는 최대 거리가 1.3키로미터에 이르는 루브르는 성배드로 성당이나 버킹검 궁전보다도 내부 공간이 넓다.

 

 

「루브르 박물관」이 프랑스 오리지날 왕궁이었구나!

난「베르사이유 궁전」이 파리에 있는 왕궁인 줄로 착각했네 그랴. ㅋㅋㅋㅋ

 

 

 

 

 

6

 

바르비종파

 

1824년 파리 살롱전에 영국화가 존 컨스터블의 작품이 몇 점 전시되었는데, 그의 전원적 풍경은 젊은 화가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주었다. 신화적 그림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그 시대의 형식주의를 내던지고 자연에서 받은 자신의 영감을 표현하고자 퐁텐블로 숲의 외진 마을 바르비종에 모이기 시작하였고 자유롭게 컨스터블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코로, 밀레, 루소, 도비니 등이었고, 뒤프레, 디아즈 트라페냐, 트루아용 등도 합세하여 '바르비종의 일곱 별이라고 불린다.

 

 

 

 

 

7

 

압생트

 

1886년 반 고흐가 몽마르트에 오자 로트렉은 네덜란드에서 온 이 왕따를 금방 알아본다. 고흐가 10살도 더 위였지만 열등감과 외로움에 가득찬 이 위인들은 서로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며 금방 친해진다. 로트렉은 고흐를 데리고 다니며 압생트의 세게에 입문시킨 장본인이다. 설탕을 넣고 물을 부어가며 1대 1로 희석해서 마시는 압생트를 로트렉은 브랜디에 타서 폭탄주로 마시곤 했다고 한다. 아를에 내려가서 고갱과 함께 살던 시절 압생트를 스트레이트 원샷으로 들이켜던 고흐의 음주벽은 이때 생긴 것이 확실하다.

 

 

압생트(프랑스어: Absinthe)

 

 

 

압생트 기원은 유럽 19세기 때였습니다. 주 재료는 아니스(anise), 회양풀(fennel), 쓴쑥(wormword)으로 제작합니다. 도수는 40~70정도로 꽤나 높습니다. 값이 와인보다도 싸서 한 잔을 놓고 계속 물을 섞어 가며 여러 시간 마실 수 있어 가난한 예술가나 노동자들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압생트를 마시면 초록요정이 보인다는 환각증세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압생트의 별명은 '초록요정의 술'이라고 하네요.

마시는 법은 영상처럼 잔위에 구멍이 뚫린 스푼을 올려놓고 그위에 각설탕에 물을 조금씩 뿌립니다.

  

 

그러면 술은 우유처럼 뿌옇게 변합니다. 압생트에 적신 각설탕에 불을 붙인뒤녹아서 떨어지게 만드는 방식도 있지요.

  

 

보헤미안 방식은 설탕덩어리를 술에 담갔다가 불을 붙여서 살짝 녹은 뒤에 마찬가지로 물방울을 떨어뜨려서 먹는 방법입니다.

 

 

 

 

8

 

프로방스의 빛이 수직으로 지상에 부딫쳐 튀어 오르는 알갱이 같다면, 노르망디의 빛은 몽환적으로 둥둥 떠다니는 수증기 같다. 노르망디의 빛은 끝없이 드리워진 커튼 사이를 걷는 느낌이 든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빛 사이로 어느새 비가 내리는가 하면 다시 구름 사이로 천국의 빛이 쏟아진다. 비가 많고 날씨가 우중충해서인지 노르망디인들은 북구인들을 닮았다.

노르망디 초입에 지베르니가 있다. 지베르니의 경치에 반한 모네는 이곳에 정착했다. 모네가 지베르니에 정착하자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모네의 존재감 만으로 점점 늘어나 외국 화가들까지도 정착하기 시작했다.

 

 

 

 

 

9

 

반 고흐

 

어린 형의 죽음, 그로 인한 어머니의 우울증, 목사였던 근엄한 아버지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 내부에 억압된 욕구, 이로 인한 세상과의 단절,,

반 고흐는 세상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그의 내면을 더욱 불같이 타오르게 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해 줄 영혼의 쌍둥이를 찾아 헤매다 자살로 마감한 인생이었다. 이런 유형의 인간이 흔히 자신의 삶과 닮은 동성을 상대로 선택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고흐는 그마져도 어려웠다.

 

- 반 고흐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요약이 아주 잘되었군요.

 

 

 

 

 

10

 

로방스

 

프로방스는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마법을 지닌 곳이다. 곳곳에 묻어 있는 미술가들의 발자취나 호화로운 별장, 축제와 로제 와인, 사시사찰 파티로 흥청거릴 것만 같은 도시들, 그러면서도 포푸리 향 가득한 고급스러운 시골 냄새, ..... 세잔이야 프로방스 터박이지만, 피카소도, 마티스도, 고흐도, 고갱도, 모두 프로방스로 떠난 이유는 이 지방이 주는 특별한 영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빛의 움직임에 민감한 화가들은 작열하는 프로방스의 태양에 매료되었다. 마치 사물이 빛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지중해의 도시들은 가끔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파리에서 850km로 리옹, 마르세이유를 잇는 프랑스의 젖줄기를 종단하는 일이 쉽지 않다. 하지만 남프랑스로 내려오는 길가에는 유혹이 많다. 프랑스 최고의 와인 산지 부르고뉴와 론 강 유역을 쭉 따라 내려오기 때문이다.

엑상프로방스는 프로방스의 중심도시이다. 남프랑스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경관으로 연중 내내 관광객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파리의 자유가 관념적이라면 이곳의 자유는 물리적인 것에 가깝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1

 

에콜 드파리

 

외국에서 온 젊은 화가들은 불어가 서툴러 몽파르나스 거리의 카페에 모여 모국어로 소통하며 의지하고 정보를 얻곤 했다. 그래서 이곳 몽파르나스 거리는 이국적인 예술가촌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 프랑스이 아방가르드한 예술가들이 가세하면서, 파리의화단과는 좀 동떨어진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개성이 강해 서로간의 동질성은 없는, '그러나 하나인' 특이한 문화를 형성했다.

이렇듯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혼합된 이 시절의 몽파르나스 그룹을 '에콜 드파리'라고 총칭한다. 이탈리아에서 온 모딜리아니, 러시아인 샤갈, 폴라드인 키슬링, 리투아니아인 수린,을 비롯한 유대인 그룹과 독일,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외국인 그룹으로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태어나 청년기를 파리에서 프랑스 모더니즘 분위기에서 보낸 동시대의 화가등이었다. 화가로서의 스타일이나 재능은 서로 달랐지만 와국인이라는 멜랑콜리한 정서와 주류에 대한 반항적 기질, 자신들의 조국의 뿌리를 지킨다는 데에 일치감을 느꼈다.

에콜 드파리는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프랑스적 감수성과 톨레랑스 속에 각 작가들의 타향살이가 녹아든 하나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외로움과 미래의 불안, 인생에 대한 괴뇌,, 이것이 몽파르나스 예술촌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여기에 매료된 지식인들을 끌여들였다. 그래서 에콜 드파리는 이런 분위기에 젖은 아방가르드한 문학가, 시인, 작곡가, 가수, 망명객, 그리고......

이는 몽마르트의 개인주의적이면서 세기말적인 퇴폐적 몽환적 분위기와는 확연히 구별되었다.

 

 

 

 

 

 

 

 

 

 

내, 평소 궁금해 했던 것들을 쪽집게마냥 콕콕 찝어서 조목조목 잘 정리해주었네요.

사흘동안 푹 빠져 검색도 해가면서 아주 아주  잘 읽었습니다.

성의 있게 잘 만든 책입니다.  (평점 ★★★★☆)

사진을 조금 더 신경써서 적절한 것으로 배치했더라면 만점 주겠습니다.

 

 

 

 

 

 

 

 

 

▼ 아래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kmsnara/7616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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