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성공기: 이두호 만화사
김낙호(만화연구가)
이두호의 만화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십중팔구 ‘바지저고리’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의 만화를 많이 본 경우든 한 두 개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경우든, 한국의 혼을 담는다든지 하는 여러 찬사들을 이어간다. 그런데 약간 다른 시각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의 진정 흥미로운 지점은, 그런 식으로 어떤 공통된 이미지가 쉽게 떠오른다는 것이고 또한 떠오른 이미지가 정말로 이두호 만화의 대체적인 특성을 충실하게 반영한다는 사실 자체다. 다른 인지도 높은 대가급 만화가들을 한번 생각해보면,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이라든지 허영만의 ‘타짜’라든지 어떤 인상적인 작품 타이틀을 쉽게 떠올리기는 하지만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미지는 잡아내지는 못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만큼 수 십년간 독특한 인지도와 차별화되는 색을 유지해온 것이 바로 이두호의 작품세계이며, 단순하게 바지저고리 만화라는 흔한 수식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성공과정이다. 이번 기회에 간단하게나마 그 흐름을 살펴보고,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만능만화가로 시작한 70년대
이두호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 개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바로 만능만화가로 활약한 70년대,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 확고해진 80년대 이후가 그것이다. 현재 이두호의 이미지로 굳어진 우직한 한 우물 파기와는 달리, 69년 데뷔 후 70년대를 관통하는 그는 실로 만능만화가라는 호칭이 어울릴 정도로 다양한 방향의 작품들을 시도했다. 화가의 꿈을 접고 미대를 휴학한 후 68년부터 박기정의 문하생으로 만화의 기본을 다진 그는, 69년 ‘소년중앙’의 창간과 함께 데뷔를 했다. 소년중앙은 ‘새소년’이 개척한 소년소녀 교양잡지(를 표방한 사실상의 만화잡지) 시장에 후발주자로 뛰어들었던 상황인데, 이런 경우는 대체로 탄탄한 기본기로 가장 유행하는 장르들을 다방면으로 소화해낼 신진 작가군에 대한 수요가 생긴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두호는 ‘투명인간’이라는 SF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만화 활동을 시작하고, 이후 다양한 인기 장르를 자유롭게 거쳤다. ‘폭풍의 그라운드’, ‘유령타자’ 등 인기 스포츠를 소재로 하는 스포츠물은 당연한 귀결이었으며, ‘뛰어라 까목이’, ‘무지개 행진곡’ 등 생활 드라마도 당대 인기장르로서 같이 작업했다. 나아가 ‘이층집 소녀’, ‘언니야’ 같은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순정만화의 취향에 더 가까울 작품들도 만들어냈으며, 인기 있는 영화 혹은 드라마를 원작으로 만화로 각색한 작품들인 ‘6백만불의 사나이’, ‘벤허’, ‘쿵푸’, ‘뿌리’ 등도 탄생시켰다.
이 시기 이두호 만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실력을 키워나갔다. 하나는 당시 상당수 인기 장르 극화들이 그랬듯 일본작가 치바 데츠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간략하고 둥그런 그림체의 표현과 드라마틱한 내용 전개다. 일례로 당시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무지개 행진곡’은 당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치바 데츠야의 ‘1,2,3과 4,5,로쿠’라는 작품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다. 다만 사실상 그 작품을 그대로 표절한 것에 가까웠던 이원복의 ‘오똑이 행진곡’과 달리, 그림체 및 캐릭터 설정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을 뿐 내용은 독자적으로 전개한 식이다. 해외 유명 작품에서 설정과 캐릭터를 가져와서 독자적 이야기로 바꾸는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덕분에 일본의 프로레슬링 만화 ‘타이거마스크’의 주인공은 한국 버전에서는 무려 군대에 입영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림체는 특별한 개성보다는 당대 가장 인기 있었고 또한 그만큼 많은 작가들이 따라하고 있던 치바데츠야식 화풍에 가까웠고, 덕분에 당시 널리 퍼져있던 관행 가운데 하나였던 동료 작가 작품 도와주기 방식을 유용하게 활용하기도 했다. 일례로, 중앙일보 김필규 기자의 인터뷰 후일담에 따르면 70년대 말에 2년여동안 전국 그림기행을 다니는 동안 그의 연재물은 한희작 작가가 대신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두호는 한 쪽 방향만을 파고들지 않았다. 좀 더 거칠고 덜 카툰화된 선을 구사하는 작품들이 그의 다른 시도로, 영화와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극화가 그것이다. 이 장르는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나 드라마로 된 작품을 어린 독자층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만화로 표현하는 식인데, 원작이 실사인 만큼 캐릭터 표현에 있어서도 원작의 얼굴들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화풍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개조인간 스티브 오스틴, 서양에서 온 무술 승려 케인, 노예 쿤타 킨테까지 모두 강한 카툰화법으로 희화화시키기에는 부담스러운 주인공들이었다. 다만 캐릭터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끌고 갈 경우 등장하는 새 캐릭터는 마음껏 편하게 그리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6백만불의 사나이’의 경우처럼 거친 극화풍의 오스틴 대령이 강하게 카툰화된 꼬마 여자애를 안고 가는 장면도 쉽게 등장하곤 했다. 두 가지 방식의 작업 속에서, 그의 그림체는 점차 전반적으로 거친 선을 구사하는 극화풍으로 발전해가면서도 동시에 간략한 선화의 부드러운 느낌을 잃지 않는 쪽으로 수렴되어 갔다.
지속적인 인기 속에 작품을 연재하던 이 시기에 도식화된 다작을 통해서 재능을 쉽게 소진시키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지속적으로 다방면에서 실험한 것은 작가의 이후 작품 활동에 있어서 큰 행운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 익힌 연재 감각과 폭넓은 화풍, 원작의 독자적 각색을 통해서 얻은 이야기 솜씨, 그리고 여기에 애초에 서양화 화가를 지망했던 강한 동기부여는 그로 하여금 70년대 말에 심경을 정리하게 했다. 그리고 2년여의 전국기행 후 만화가로서 뿌리를 내리겠다는 결심을 하고는 자신만의 개성, 뚜렷한 화풍과 전문장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사극에 몰입하다
80년의 ‘암행어사 허풍대’는 새로운 이두호를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필두로 그는 다시 만능만화가의 역할을 바라는 편집자들의 바람을 거절하고, 조선조 사극이라는 하나의 장르에 집중하기를 고집했다. 다행히도 사극이라는 틀은 시대적 소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제외하자면 모험극화부터 학습성 명랑만화까지 충분히 여러 가지 요소로 표현될 수 있는 폭넓은 장르였고 이두호라는 작가의 작품 품질은 이미 검증되어 있기에, 편집자들은 그의 이런 선택을 결국 받아들였다. 이두호는 70년대의 만화 활동에서 확보한 입지를 단순히 인기 유지를 위해 소진한 것이 아니라, 편집자들에게 자신의 전문분야를 실험할 수 있도록 용인 받는 도구로 사용한 셈이다. 그 후 그는 일본의 시대극 전문 만화가 시라토 산페이의 거친 선과 꽉찬 구도로 이루어진 화풍을 본격적으로 습득하기 시작했고, 모방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던 초기의 학습 시기를 지나 점차 자신의 화풍으로 정리해내게 되었다.
그 결과 80년대 후반에는 이미 완성된 이두호식 화풍은 비유하자면 짚신을 닮았다. 선 굵고 살짝 둥글게 덩어리진 윤곽의 형상, 그것의 세부를 이루는 거친 잔선, 칸 속에 존재감을 가득 채우는 캐릭터 구도, 그 자체만으로는 수수해보이지만 간혹 전체 배경으로 시선을 옮기면 최대한 세밀한 디테일을 꽉찬 구도로 보여주는 구축샷 등은 마치 초가집에 갖 꼬아서 걸어놓은 짚신을 연상시킨다. 거친 선을 통해서 오히려 칼의 날카로움을 돋보이게 했던 시라토 산페이의 영향력은 더 이상 연결 짓기 힘들고, 캐릭터의 얼굴들 역시 매끄러운 둥근 선이 아닌 거친 잔선으로 강인한 표정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흔히 그의 그림에 대해서 한국적 감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유려하고 고운 선의 정서 혹은 현란한 구도의 민화 형상이라기보다 거칠고 우직한 짚신의 정서다. 이것은 많은 연습량을 필요로 하고 특정 장르와 감수성에 최적화된 필체이기 때문에, 폭넓게 보급되기 보다는 한 작가만의 개성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했다.
조선사극에 대한 작가의 몰입 선언은 81년 주간중앙에 연재를 시작한 ‘바람소리’를 통해서 더욱 확고해졌다. 80년대의 유명작가들은 자신의 대표 캐릭터를 만들어내서 여러 장르의 작품에 중복 출연시켰는데, 이현세의 “설까치” 오혜성, 허영만의 이강토, 강철수의 발바리, 고행석의 구영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마치 한 명의 인기배우가 여러 장르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자신의 스타성을 활용하듯 브랜드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이두호는 장독대라는 조선조 사극 캐릭터를 자신의 대표 캐릭터로 탄생시켰다. 이강토는 근현대사의 격동을 살 수도 있고, 기업총수가 될 수도 있고, 락커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장독대는 성격도 스타일도, 어떻게 해도 조선사극이라는 장르를 벗어나기 않는 캐릭터다. 결국 대표 캐릭터를 통해서도 이두호 만화는 조선사극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되었다.
물론 사극 분야 안에서는 나름의 다양성을 추구하여, 연재 지면의 속성에 따라서 다시금 아동/청소년 대상 모험활극과 성인용 극화로 작품 성향이 분화되었다. 나아가 명작만화류 역시 작업한 경력을 살려서, 학습지 등에 교양만화 스타일의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이 가운데 아동모험물의 가장 대표적인 – 즉 작품성향의 특징들을 가장 농밀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은 85년작 ‘머털도사님’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 작품은 우선 무엇보다 놀랍도록 완성도가 높은 오락물인데, 수련과정을 통한 성장물의 코드, 매력적인 라이벌 구도, 도술 승부, 약간의 로맨스 등의 필수요소들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속에 작가 특유의 개성으로 인간사에 대한 낙천성, 수난을 겪지만 여전히 약간 헐렁한 성격의 투박한 주인공, 민담을 연상시키는 해학을 구사한다. 그림체 역시 거친 표정보다 아직 둥근 선이 남아있는 얼굴을 구사하여 캐릭터성을 극대화하는 등, 히트작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충족시킨다. 덕분에 실제로 큰 히트를 쳐서 이후 ‘머털도사와 또매형’ 등 별도의 후속편도 탄생시켰고, 나아가 TV애니메이션으로도 여러 편 제작되어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 분류의 작품들은 모험물이나 교훈적 드라마 위에 사극의 배경을 씌우던 기존의 주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이두호만의 독보적인 경지에는 도달했다고 보기 힘들다.
이에 비해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는 주간 만화지 혹은 스포츠신문에 연재하는 작품의 경우, 한층 본격적인 개성으로 사극 탐구에 들어갔다. ‘머털도사님’과 동시에 작업했던 85년의 스포츠조선 연재작 ‘째마리’에서 그는 고증이라는 영역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켰다. 옛 사람들의 고어를 재현하여 독자들의 이해와 괴리되지 않기 위해 각주를 달아야 했으며, 당대의 생활풍습을 세밀하게 파고들었다. 성인층 대상의 사극에서 이두호는 캐릭터들에게 거친 잔선을 바탕으로 한 굳은 표정을 부여했고, 기구한 인생역정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두호의 성인 극화 사극은 88년 주간지에서 연재를 시작한 객주, 91년에 스포츠조선에서 시작한 임꺽정이라는 두 작품을 통해서 정점을 이루었다. 두 작품 모두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하는데, 원작들보다 한층 전체 사건의 드라마틱한 흐름보다 개별 캐릭터들의 인간적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이두호식 사극에서 다루는 것은 궁중 권력 암투도 민중들의 혁명도 아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무대로 하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개별적인 사람들의 인간사에 집중한다. 이것은 완연하게 궁중드라마 위주였던 90년대 초반까지의 TV 사극 드라마들과 큰 차별점이었으며, 80년대 민중주의적 시각을 한껏 흡수하여 민중혁명을 중시하는 시각의 사극을 그린 백성민 등과도 차별화된다. 혹은 마찬가지로 사극을 통해서 인간사를 이야기하지만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초월자적인 관점에서 훈수 두기를 즐기는 고우영과도 달랐다. 나아가 초월적인 영웅의 측면마저 이두호의 손길에서는 약해졌는데, 이런 점들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임꺽정’이다. 이두호가 그려내는 임꺽정은 민중적 영웅의 상징이 아니라 강하기는 하지만 그저 약점 많은, 또 다른 한 명의 시대를 살아간 사람일 뿐이다. 강력한 도적 영웅으로 묘사되곤 했던 여타 임꺽정 작품들과 달리, 이두호의 만화에서는 두령이 된 후에도 여전히 약간은 천박하고 인간적이며 은근히 소년같은 치기가 있는 인간 임꺽정이 끝까지 펼쳐진다.
이두호의 성인 사극은 이렇듯 뚜렷한 개성을 가진 작품세계를 구축하여, 사극 전문 작가로서의 이두호 이전에 이두호식 사극이라는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성인 사극에서 다진 고증이나 연출의 일부는 아동 사극에 다시 반영되기도 했지만,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국의 청소년 만화 지면 자체가 특정 취향에 과도하게 몰입했기에 이두호식 청소년 사극 모험물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상 뜸해졌다.
전문성의 의미와 힘
결국 80년대와 함께 시작한 사극 몰입은 성공적이었고, 90년대에 ‘임꺽정’을 시작할 무렵에는 그의 전문성이 하나의 브랜드를 확고하게 구축할 경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몰입은 어떤 면에서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 선택이었다. 당시 유명 작가들은 잡지연재와 함께 급격하게 성장한 대본소 시장을 동시에 공략하면서 작업량을 늘이는 것이 보통이었고, 그 결과 다양한 유행 장르를 동시 진행함은 물론 화실을 확장하여 거의 공장제에 가까운 작업방식을 구사하곤 했다. 작가가 작품의 창작자라기보다는 분업에 의하여 공산품에 가깝게 생산된 것에 부여하는 브랜드 상표 같은 경지에 도달하기 쉬웠다. 이런 방식은 물론 장르 오락물의 관점에서 효율적인 작품이 양산되기는 했지만, 품질 측면에서 큰 약점을 드러내기도 해서 결국 90년대 초반의 새로운 잡지 및 단행본 시장의 대두와 함께 급격하게 지위를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두호의 경우는 애초부터 그 시스템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부침의 과정에 사실상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극이라는 특정 장르에 대한 몰입과 그림 자체에 대한 집착은 분업화된 팀보다 개인 작가 중심의 작업을 선호하도록 만들었고, 인기를 구가하며 늘어난 작업량 속에서도 그 방향을 끝까지 고수했다.
스스로를 기업화하지 않은 행보는 다시금 사업적 성공보다 자신의 전문 장르를 깊게 파고드는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사극을 고수했기에 이두호는 기업극화와 스포츠물, 조폭물 등으로 지속적으로 부침을 겪고 방향을 선회한 장르 유행에 올라타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사극이라는 분야 안에서도 환타지 고대사나 무협의 맥락으로 가지치기하지 않고 조선시대 인간사라는 영역에 확실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덕분에 다른 많은 작가들이 그저 “재미있는 만화”로서 모호하게 포지셔닝을 하는 동안, 이두호 만화는 특정 장르 및 내용 성향과 연관된 뚜렷한 브랜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었다. 유행의 흐름에 편승하지 않되 항상 보편적인 수요가 있는 인간사 사극에 꾸준하게 매달린 결과, 80년대 성인만화계의 부침도 90년대의 급격한 세대 및 장르 교체의 물결도 그를 비켜 갔다. 작가 또한 단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더욱 깊게 파고들어서 고증을 더하고, 세계를 구축하고 재현하는 방식을 세련화했다. 특유의 다부진 몸매를 지닌 5등신 캐릭터들의 표정과 몸짓은 더욱 풍부해져서, 자신의 분야에 있어서는 어떤 후발주자도 따라잡기 힘들 리드를 다졌다.
이렇듯 이두호는 그저 단순히 조선사극 하나만 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분야로 개척했다. 특히 그 분야 내에서 자기 특유의 색을 가지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내는 것에 관한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이런 점이 더욱 뚜렷해진다. 95년 ‘우리교육’과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전봉준만 그리려고 해도 왜놈이 등장해 계급장도 그려야 하는데 그 작업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고, 내 선(線)이 거기에 적당치 않다. 고구려나 신라는 자료가 너무 없어 그리기 힘들고, 내 폭이 좁아서 그렇다. 그러나 동학은 거기에 관심 많은 백성민이 그리면 되고, 개화기는 오세영이 그리면 되지 않느냐. 하나 하나 자기에게 적합한 점 하나만 찍으면 되지, 지 혼자 역사의 선을 다 그을 수는 없는 거다.”
물론 자신의 전문성에 최대한 집중한다고 해서 작품 활동의 과정에 기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임꺽정’의 후속편에 가깝게 기획되었던 야심작 ‘파행’의 애매한 전개와 조기 종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2000년대 들어서 뚜렷한 인상을 남긴 장편이 아직 없다. 1인 작업의 작업량 한계, 한국 만화계의 중견으로서 학교 현장의 후학 교육이나 단체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창작의 흐름이 중단된 것 등의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다수의 80년대 인기 작가들이 불행히도 겪은, 90년대 이후 만화 장르의 시대적 호흡에 적응을 실패하고 완전히 뒤처지게 된 모습은 없다. 여전히 이두호 = 조선사극, 조선사극 = 이두호라는 등식이 일관되게 건재한 것은, 그만큼 확고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깊이로 다져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문성을 장착하는 만큼, 나머지 부분에서 여유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장르에 갈팡질팡할 것 없이 그 분야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을 더욱 파고들다 보면 비단 조선극화라는 장르틀이 아니라 만화 일반으로서 더욱 강력한 표현력이 다듬어진다. 큰 구도와 여백을 잃지 않으면서 점차 존재감이 강력해지는 그림, 인간 본성에 대한 해학적 여유가 가득한 2007년작 ‘가라사대’를 보면 이런 점이 명확해진다. 탄탄한 그림과 느슨한 여유가 있는 연출 감각 등은, 같은 잡지에 연재된 동시대 젊은 작가들의 여러 시도를 가볍게 압도하곤 했다. 덕분에 에피소드 방식의 소품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가장 우직한, 성공의 한 가지 방식
요약해자면, 이두호 만화의 성공과정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우직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수많은 장르를 섭렵하며 실력과 기본적인 명성을 다진 후,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확고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나의 전문분야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분야 안에서 최대한 장인적 완성도를 추구하고, 시대적 부침에 휘둘린 여타 작가들과 차별화된 확고한 포지셔닝에 성공한다.
물론, 이런 것은 분명히 특정 조건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모든 이들이 어떤 장르에서라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다. 분명히 장르나 작가의 개성에 따라서는 시사적인 감각이 더 필요한 경우도 있고, 끊임 없이 전위성이 필요한 경우도 있고, 원고 제작 페이스가 빨라야 해서 협업이 필수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가장 우직하고 기본적인 성공모델을 한번쯤 참조할 필요가 있다면, 이두호 만화의 흐름은 작가가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는 중요한 모델로서 후배 작가들에게 큰 귀감이 될 것이다.
조선을 그린 이두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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