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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도] 현대 유럽을 탄생시킨 로드무비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역사를 바꾼 길2]

 

 

 

375개 주요 간선도로를 지닌 8만km 길이의 제국 대동맥,

2천년 동안 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이 우화시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의 조국 프랑스야말로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로마화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곳곳에는 로마의 유적이 그대로 보존된 채 각국의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지 않은가?

라퐁텐이 로마를 간다면…

라퐁펜이 로마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 로마에 갔을까? 당시 파리라는 도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일단 그 근처에 살았다고 치면, 그는 맨 먼저 자기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아우구스토두눔(Augustodunum)으로 가야 한다. 갈리아로 불리던 프랑스를 정복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 카이사르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갈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그것을 기려 도시 이름을 아우구스토두눔으로 지은 것이다. 이 도시에서 라퐁텐은 남쪽으로 로마 가도를 타고 아렐라테(Arelate)까지 내려간다. 오늘날의 아를(Arles)인 아렐라테에서 라퐁텐은 ‘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의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앞에 ‘비아’(Via)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도로는 돌로 포장된 도로임에 틀림없다. 이 포장도로를 따라 알프스에 닿으면 이제부터는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서 다시 비아 아우렐리아를 따라가면 그대로 로마에 도착하는 것이다.

 

 

 

» 로마 전성시대의 로마 가도 네트워크.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이고, 아시아는 터키 지역을 일컫던 지명이다. 로마 시대의 지명이 오늘날 어떻게 반영됐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영문 지도를 그대로 실었다.

로마 가도는 로마인의 실용주의가 반영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지리지>를 쓴 스트라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3가지를 제공했다. 길, 수도, 하수도가 그것이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새로운 길이 개통되는 것을 해외전쟁에서의 승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뒤지지 않는 공적으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황제나 집정관들은 경쟁적으로 도로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도로와 도시에 이런 지도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처럼 제국을 휩쓸었다.

 

초기 귀족정 시대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에밀리우스’ ‘지우릴리우스’ 같은 이름이라든가, 강력한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 ‘도미트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등의 이름이 지금껏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다 이런 영향 때문이다.

 

초기 가도는 동맹도시와의 연결을 위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어 해안 염전지역과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도 건설됐다. 로마와 동부 아드리아해의 염전도시를 연결하는 가도에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급여를 ‘Salary’라고 하는 것은 로마군에게 급여로 소금(Salt)을 지급한 데서 유래했다)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도는 로마인에게 매우 친근한 존재였다. 가도를 따라 고대신을 모시는 갖가지 시설물이 들어선 것이라든지, 묘지가 늘어선 것은 그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도는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71년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군은 노예 6천명을 로마제국의 1번 도로라 할 수 있는 ‘비아 아피아’(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으로 선전하면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비아 아피아는 로마에서 남동 지역의 주요 항구인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를 잇는 길이 261km의 도로로 기원전 312년 당시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가 건설한 도로이다. 로마인들은 이 도로를 ‘모든 길의 황후’(레지나 비아룸)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했다.

지역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로운 땅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표현은 반대로 로마에서 모든 곳으로 진출했다는 말이 된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국력을 급격히 밖으로 분출해나갔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으로 제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로마 가도는 제국의 대동맥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맨 처음 뻗어나간 곳은 동쪽이다. 로마제국 초기 발달 단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문명은 그리스이기 때문에 동쪽이 가장 중요한 진출 방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아 아피아의 종착지인 타렌툼이 바로 그리스를 향한 거점 항구였다. 심지어 항구도 그리스인 식민자들이 건설했다. 비아 아피아는 다시 북쪽에 있는 아드리아해의 항구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확장돼 연결됐다.

 

브룬디시움에서 배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항구도시 아폴로니아에서 바로 ‘비아 아에그나티아’가 이어진다. 기원전 130년 무렵 건설된 이 가도는 디라키움을 거쳐 마케도니아를 종단해 그리스 북부 항구 살로니카에 도착한다.

 

지난번 아테네 올림픽 당시 중계방송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된 살로니카에서 다시 필리피를 거쳐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가면 마침내 비잔틴(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이르게 된다. 이 지역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땅이기도 하다.

 

 필리피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터스가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연합군과 싸워 패배해 자살한 곳이고, 트라키아는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고향이다.

 

동서 로마를 잇는 대동맥이 완성된 뒤 로마인들은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기원전 120년 무렵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쪽으로 진출한 로마인들은 맨 처음 피레네 산맥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알프스-피레네 라인은 당시 ‘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로 불렸다.

 

이 가도의 진출에 따라 오늘날의 아를, 님므, 안티브, 액생 프로방스, 상 레미 등이 생겨났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스페인인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로마인은 남쪽으로 전진해나갔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4년 죽기 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건설한 로마 가도는 2천km에 이른다. 나중에 그 길이는 7천km까지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이 건설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아 도미티아’에 연결된 ‘비아 아우구스타’의 건설로 등장한 오늘날의 도시는 바르셀로나(로마명 바르키노), 타라고나(타라코), 발렌시아(발렌티아), 사군토(사군툼), 카르타헤나(카르타고 노바) 등이다. 다시 로마 가도는 내륙쪽으로 진출해 코르도바, 라코루냐 등에까지 이어진다.

 

 

» 서기 106년 로마인이 스페인에 건설한 알칸타라 다리. 오늘날에도 그 정교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갈리아쪽으로 진출한 로마 가도는 아를에서 론강을 따라 올라가 리옹을 거쳐 도버해협까지 이른다. 도버해협을 건넌 로마 가도는 다시 런던(로마명 론디니움·Londinium)을 거쳐 웨일스, 스코틀랜드 접경까지 나아가고 있다. 갈리아 중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로마 가도는 라인강을 거쳐 다뉴브 지역까지 퍼져나가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을 거의 망라하는 규모로 확장돼 있다.

속도전과 개방, 그리고 시스템

로마 가도의 특징은 대략 이렇다.

(1) 현대유럽의 탄생자: 로마 가도의 확장은 사실상 유럽의 형성과 맥을 같이한다. 오늘날 유럽국가들이 로마제

     국 당시의 로마 속주의 이름을 국가명의 어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영국 지역을 가리키는

     브리타니아, 스페인 지역을 가리키는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지역을 가리키는 마케도니아 등이 모두 로마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상 로마제국의 팽창은 그대로 유럽의 팽창이라고 할 수 있다.

 

(2) 서구 문명의 대동맥 역할: 단순히 영토적 의미에서의 통합이라면 로마제국 붕괴 뒤 유럽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가도를 통해 문자와 종교, 로마법, 통화, 건축술, 과학, 예술, 의술,

     패션, 사상, 발명품 등 최고급의 문명이 거의 그대로 전지역에 동일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문명적 동질성이 유지된 것이다. 로마제국 이후로도 이 로마 가도를 따라 서구 문명의 갖가지 요소가 활발하

     게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경합하면서 서구 문명은 동질적 발전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었다.

 

(3) 속도전+개방+시스템: 제국의 팽창에 따라 로마인은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개방이냐 방어냐의 선택에서 그

     들은 개방을 선택했다. 통일된 특정 지역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보다 속도전 개념에 입각

     한 신속이동 배치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제국의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변환 배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을 네트워킹하

     고 이것을 시스템으로 완성해 가동했다. 그 결과 로마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정복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평등사회에의 지향성: 로마는 비록 노예제 사회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도로에 대한 관점에서는 대단한 평등

    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다른 고대제국들의 도로에 관한 통치철학이 보여주는 폐쇄성과 비효율을 아예 시

    작부터 극복하고 있다.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안에 있는 자들이 이 도로를 이용하도록 했다. 군인, 순례자, 병자, 사상가, 학

    자, 창녀, 사기꾼, 범죄자들이 이 도로를 통해 이동했다. 심지어 침략자들이 이 도로를 이용할지라도 그들은

    자신 있게 밀어붙였다.

기록 분야에서의 놀라운 것들

(5) 정보-기록의 중요성 재확인: 로마 가도는 건축물로서도 이야기하는 바가 많지만, 그와 부속된 기록 분야에서

     도 대단히 놀라운 것들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로마 가도는 로마의 도로원표(마일 제로·mile zero)에서

     43개 속주 여러 도시의 거리를 정확히 기록해놓았을 뿐 아니라, 1마일마다 이런 거리표를 기록한 기둥(이 기

     둥이 ‘칼럼’이다.

 

     이 기둥에 글을 써놓았다는 데서 오늘날의 신문 칼럼이 유래했다)을 세워놓았다. 이와 함께 도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을 비롯해 갖가지 주요한 내용을 기록해놓았다.

 

로마 가도는 주요 간선도로만 모두 375개, 총길이 8만km에 이르는 대걸작품이다. 일부 간선도로는 지금까지도 유용한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로마 가도는 오늘날 유럽을 만드는 기초가 됐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2천년 동안 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대동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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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도로, 로마에서 인도까지

 

 

 

» 로마인들이 도로를 건설하는 모습의 상상도.

 

로마뿐만 아니라 유명한 고대 제국들은 모두 대형 도로를 건설했다. 로마인들에 훨씬 앞서 이집트의 파라오들과 중동 지역의 절대군주들도 그런 역사를 이룩해놓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문명권마다 도로에 대한 지배자들의 생각이나 철학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파라오들은 도로를 절대자인 자신과 자신의 군대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파라오의 권위를 과시하는 제사나 행사, 군사행진 등을 위해 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와 달리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도로를 상업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의 도로는 진시황의 대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진나라는 흙을 다져서 강도와 내성을 강화하는 공법인 판축 공법을 사용했다. 이 판축 공법으로 도로뿐만 아니라 만리장성도 만들었던 것이다. 천하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다는 이런 관념은 후대로 내려가면서 전란이 빈번해지면서 크게 후퇴한다.

 

도로망 역시 침략자에게 악용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결국 도로망을 정비하지 않는다는 통치관으로 후퇴한다. 우리나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해 당시 위정자들이 침략에 악용될 수 있다고 징벌한 것이라든지 도로방치 정책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제국 가운데 도시 안의 도로망이 가장 발달했던 곳은 인도라고 할 수 있다. 서기 4세기 무렵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서 인도까지 들어갔을 때 알렉산더 군대는 그곳에 건설돼 있는 도로를 보고 깜짝 놀란다. 당시 마케도니아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석재 도로망이 완비돼 있었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오늘날 도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way’의 어원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way’는 중세 영어 ‘wey’에서 유래하는데, 라틴어 ‘veho’(‘I carry’의 뜻)의 파생어라고 한다. 이 ‘veho’는 또 그 어원이 인도 산스크리트어 ‘vah’(‘carry’ ‘go’ ‘move’의 뜻)라고 한다.

 

이 단어와 알렉산더 원정군이 목격한 인도 도로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현대의 차량용 도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road’는 고대 영어 단어 ‘rad’(‘to ride’라는 뜻)와 중세 영어 단어 ‘rode’(a mounted journey·탈 것을 이용하는 이동이나 여행)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출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4.11.25 제535호]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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