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3. 09:50ㆍ책 · 펌글 · 자료/역사
[북경·런던·파리] 상처 없는 영광이 어디 있으랴
[오귀환의 사기열전 | 역사와 지명으로 본 수도-1]
북경과 런던, 파리는 어떻게 세계사의 운명과 영욕을 함께하며 도시로 성장했는가
구약성서에 따르면 여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 갈대아 우르는 이라크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있는 도시로 요즘은 텔 무카이야르라고 불리고, 하란은 터키 남부, 가나안은 이스라엘에 해당한다. 바로 이 우르가 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의 말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문자 그대로 ‘도시’라고 한다. 영어로 도시의 명사형인 ‘urb’, 형용사형인 ‘urban’이 이 우르(Ur)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길고 역동적인 역사를 지닌 북경
인류학이나 도시학에서 제시하는 전통적인 도시 발달 과정은 대략 이렇다.
‘사냥과 군집’-‘농업’-‘마을 형성’-‘도시 발생’-‘국가 출현’.
우르의 예에서 보듯이 중동지역에서 고대 도시가 가장 먼저 형성된 이유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필연적인 요인의 상호결합에 따른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1) 대규모 관개와 치수를 위한 통치적 필요성
(2) 장거리 상업 및 교역의 활성화에 따른 새로운 경제적 기회
(3) 농업발전에 따라 잉여농산물이 안정적으로 그것도 충분하게 생겨나게 된 상황
(4) 왕정과 그 통치기구의 제도적인 발전 계속
(5) 대규모 종교행위 및 제례행위의 증대에 따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 능력
(6) 자연과 외부 침략자에 대한 방어 필요성의 증대
(7) 격심한 인구 증가나 급격한 인구 감소 등 인구와 관련된 압력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의 증대….
그 결과 이른바 인류 4대 문명 지역에 고대도시들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도시들의 발달에 따라 인류의 문명도 화려하게 꽃피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여러 국가의 수도 가운데 일부는 멀리 이런 고대도시로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중국의 북경(北京·베이징)은 2300여년 전 전국시대 때 연나라의 수도에서 비롯됐고, 영국의 런던 역시 2천여년 전 로마군의 브리튼 진주 때 형성된 성곽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나라의 도시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도시를 가리키는 수도는 그 나라의 운명과 영욕을 함께하면서 가장 격심한 변동과정을 거친다. 특정 왕조나 정치세력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 오뚜기처럼 부활해 과거보다 훨씬 강대해지는가 하면,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수도는 거기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대들의 욕망과 탄식의 집합보다 훨씬 더 크고 격정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요 국가의 수도 가운데 가장 길고 역동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북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는 5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경원인’(Sinanthropus pekinensis)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학적인 연원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 뒤 전국시대 7웅의 하나였던 연나라가 수도를 삼음으로써 처음으로 수도의 자리에 오른 뒤 지금까지 8세기 정도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다. 연나라 수도로서의 북경은 기원전 3세기 진나라의 공격으로 크게 파괴됐다.
진나라 이후 한나라에 복속된 북경은 연으로 불렸으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 도시로 축소됐다. 오히려 남부의 한족과 북부의 선우족(흉노족)이 서로 맞서는 최전선의 군사도시라는 운명에 휘말렸다.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로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경계지역이었기 때문에 연(북경)은 경계선을 넘어 쳐들어오는 유목민족의 공격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 결과 4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 거의 4세기 동안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해 연 지역은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당나라가 이 지역을 유목민족으로부터 수복하고 유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 한족은 물론 유목민족도 그 전략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평가해 개발과 점령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0세기 초에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이 지역을 3개에 이르던 자신들의 복수 수도 가운데 하나로 삼고 남경(南京)이라고 불렀다. 당시 요나라는 북경에 높이 10m의 성벽을 약 23km 길이로 쌓았다. 모두 8개의 문을 설치하고 안에는 화려한 황궁을 세웠다.
로마군단, 런던을 버리다
12세기 중엽에는 다시 만주 북부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금나라가 요나라로부터 북경을 빼앗았다. 금은 이곳을 수도로 삼고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금은 더 화려한 황궁들을 많이 지었다.
13세기 초 징기즈칸의 몽고족이 세력을 확장해 이곳까지 진출한 뒤 지속적으로 공격해 결국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황궁이 방화돼 약 한달 동안 불타기도 했다. 몽고가 전 중국을 통일하자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몽고의 카라코룸에 있던 몽고의 고도 대신 이 북경을 새 수도로 삼는다고 결정했다.
1272년 북경은 ‘대도’(大都)라고 명명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전 중국의 수도로 군림한다. 성은 과거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증축되고, 대운하와 연결된 운하를 파서 강남의 물자가 직접 황궁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 시기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뒤 북경은 한족의 명나라 초기 남경으로부터 수도를 옮겨온 뒤 북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수도의 자리에 오른다.
그 결과 한족의 명나라와 그 뒤 여진족의 청나라의 통치시기에도 수도로서 계속 지위를 유지한다. 청나라 때 많은 궁들이 성곽 바깥에 추가로 조성됐다.
그러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에 의해 여름황궁인 원명원이 약탈되고 방화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제국주의의 침략피해를 직접 입은 것이다.
중국 북경의 원명원을 파괴한 영국의 수도 런던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런던은 로마군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역사에 그 이름을 등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서기 43년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군이 영국 지역인 브리튼섬의 남동부를 점령하고 템스강가의 낮은 구릉 2개가 있는 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많은 장사꾼들이 몰려드는 한 유명한 지역’으로서 론디니움을 역사서에 기록하기도 했다. 서기 60년 부디카라 불리는 이케니족 여왕의 공격으로 론디니움이 불에 타고 약탈되자 로마군은 그 뒤 150m 길이의 바실리카(고대 로마에서 재판정이나 예배장소로 쓰던 회당)까지 갖춘 도시로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다.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는 크리플게이트 요새를 건설했다. 이런 번영은 2세기 중반까지 계속된다. 서기 150년 로마군은 수공업 공방들과 주거지를 철거했으며, 200년에는 방어 목적을 위해 육지쪽을 향해 방벽까지 세운다. 도시 발전을 막아버린 셈이다.
중세시기 이 방벽은 재건축되고 확장된다. 로마군이 원래 유지한 6개의 통문 이외에도 더 많은 통문이 생겨난다. 3세기 내내 템스강을 따라 목재 방파제가 설치되고 공공건물이 재건된다. 이와 함께 강을 따라 방벽도 세워진다.
그러나 4세기가 되도록 인구는 서기 125년 당시보다 적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5세기 초 로마군 군단(로마명 레지온: 300~700명의 기병을 포함해 3천~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됨)들이 철수하면서 런던은 버려진다.
'파리시’에서 ‘파리’로
로마군 철수 뒤 2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다시 어떻게 해서 색슨족이 이 지역을 장악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서기 597년 무렵에 이르면 런던은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 결과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성 아구스틴을 로마로부터 잉글랜드로 파견한다. 성 바오로 성당이 세워지는 등 종교가 본격적으로 발흥하고, 7세기 후반에 이르면 런던은 다시 주요한 교역 중심지로 부활하게 된다.
런던은 노르만족의 침략(1066년)을 계기로 미래의 금융, 군사, 정치 중심지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정복자 윌리엄 1세는 런던 시민에게 종래 에드워드 국왕 때와 똑같은 법을 적용받을 것이며, 아무도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을 것이라는 협정을 맺는다.
노르만 출신 국왕들은 웨스트민스터를 자신들의 거주지이자 통치장소로 삼았다. 1085년에 이르면 런던은 1만~1만5천명의 인구로 알프스 이북의 유럽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한다. 1087년 대화재로 런던의 목재주택과 성 바오로 성당이 불타자 석재와 타일을 이용한 새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천방식이지만 하수천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1300년대까지 템스강 북안에 방파제가 계속 건설돼 항구시설이 크게 확장됐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총 65~100km에 이르는 수도망으로 총 8만명의 거주민이 혜택을 받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도시의 다이내미즘은 1348년 페스트의 창궐로 런던 주민 1만명이 죽는 사태로 크게 위축된다. 16세기에 들어서 런던은 다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해 수공업자 길드가 41개에 이르게 된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세계 각 지역에 대한 교역 독점권을 누리는 모스크바회사, 터키회사, 동인도회사 등이 등장한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550년 10만에 이르더니 17세기 초에는 22만명 수준에 이르고 있다.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경쟁을 벌였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런던보다 늦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늘날의 파리 센강 안의 시테섬에 골족의 한 분파인 ‘파리시’(Parisii)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부족 이름 ‘파리시’에서 도시 이름 ‘파리’(Paris)도 온 것이다.
처음 이 부족의 존재는 ‘루테리아’(Luteria)라는 이름으로 기록됐다. 이 이름은 라틴어로 ‘물 한 가운데 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의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전기>(기원전 52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항복하기보다 거주지를 태워버렸다.” 로마군이 왔을 때 그들은 잘 조직돼 있었으며, 독자적인 동전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리, 페스트와 백년전쟁을 뚫고…
로마 점령시기 파리는 거기 살던 부족의 라틴어 이름을 따서 ‘루테리아’라고 불린 채 로마인의 도시로 발전해 점차 센강의 왼쪽 강변을 따라 확대돼갔다. 그 결과 여러 직선도로를 비롯해 광장, 여러 개의 목욕탕, 원형투기장 등 공공건물은 모두 로마식으로 건설됐다.
2세기 후반부터 야만족의 침입이 이어져 3세기 중반에 이르면 센강 왼쪽 강변의 도시는 파괴되고 거주자들은 섬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 섬을 둘러싸고 두꺼운 석벽을 쌓는다. 4세기 초부터 이 지역이 ‘파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5세기 말, 클로비스의 인솔을 받는 프랑크족이 당시 골족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를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는다. 파리는 서기 584년까지 수도로 있다가 그 다음 왕조인 메로빙 왕조의 수도 이전에 따라 그 지위를 잃는다.
그 뒤 서기 987년 파리공이던 휴 카페가 왕좌에 오르고 파리는 다시 수도의 자리를 차지한다. 카페 왕조의 국왕들이 잇따라 칙령을 발표하고 점차 파리가 정치적 안정성을 되찾아가자 인구도 크게 늘어난다. 11세기 첫 길드가 생겨나는 것을 시작으로 길드가 크게 늘어난다.
서기 1190년 필리프 2세는 1년 동안 십자군 원정을 떠나며 파리의 통치권을 파격적으로 길드에 위임한다. 1220년 국왕은 자신이 누리던 엄청난 특권인 수입관세권을 도시민들에게 양도하기까지 한다. 이런 중상주의적 정책에 힘입어 상인들은 도량형 관리의 책임까지 양도받는다. 파리에는 소르본 등 많은 대학도 생겨난다.
14세기 파리는 페스트와 백년전쟁 때문에 발전이 크게 위축됐다. 반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파리는 1415년 백년전쟁의 재발로 영국군과 연합한 브루군드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1444년 영국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에야 파리는 다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계속>
[출처]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4.12.16 제5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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