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슈미트] 사상가, 악마와 악수하다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나치즘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카를 슈미트,
21세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존재의 그림자
“정치의 기본적인 조건은 ‘전쟁’과 동일하다. …헌법은 정치적·의식적 결단이다.”
“그러한 파괴수단(초재래적인 무기)을 다른 인간에 대해 사용하는 인간은… 그의 목표가 되는 다른 인간들을 도덕적으로도 절멸시켜야 한다는 강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상대방 인간들을 전체로서 범죄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으로, 전체가 무가치하다고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그의 정신을 관통
독일 최고의 법학자로 히틀러 치하에서 대법관을 지내고, 나치즘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카를 슈미트(Carl Schmitt·1888~1985)의 이론이 21세기 들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무시하고 강행되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9·11테러 뒤 미국을 중심으로 이른바 서구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우적 움직임…. 냉전 이후 미국 중심의 단극 체제에서 벌어지는 강대국의 논리를 분석하다보면 곧바로 이 무서운 정치사상가의 어두운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0세기 민주주의 딜레마를 예리하고 냉혹하게 분석하며 ‘악마의 사상가’로 불렸던 카를 슈미트는 2차 세계대전 뒤에 ‘전범’으로 몰려 2년 가까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일체의 공식적인 활동에서 배제됐지만, 그는 끝까지 자신의 근본 견해를 수정하지 않았다.
한때 서구에선 그의 연구를 주석으로 다는 것조차 용인되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과 영향력은 20세기를 통털어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 한국의 유신헌법도 사실상 그의 법철학과 정치철학의 모범적인 사례라 불릴 만하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헌법>이 이 땅에서 번역된 것도 유신 발발 직전인 1972년이다.
법학자로서 카를 슈미트의 견해는 역설적으로 ‘법의 무효화’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법이 그 자체로서 어떤 효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법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법이 합의의 산물이라는 것 따위는 믿지 않았다.
“헌법은 그것이 규범화되기 이전에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선행된다. …힘에 바탕한 정치적 결단이 법을 만들고, 힘이 법의 효력 근거이다.”
따라서 최초로 헌법을 만든 사람들, 카를 슈미트가 ‘헌법제정권력’이라고 불렀던 사람들의 정치적 결단이 국가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초적인 힘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이게 지금 어디에 가 있는가? 헌법재판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국가 공동체는 이 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공동체의 ‘적’이다.
나치즘이 유태인들을 ‘비인도적’으로 박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국가철학의 기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나 나치주의자들에게 이 최초의 힘은 곧 ‘게르만 민족공동체’였다. 유태인은 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비쳐졌다. 따라서 나치의 인종주의는 히틀러 개인의 광기의 소산이거나 감정적인 대응이 아니다.
카를 슈미트는 이런 입장에서 유대인들을 박해하는 데 동조했다. 역설적으로 히틀러 등장 이전 그에게는 유대인 제자들이 여럿 있었다. 망명한 제자 가운데 좌파적 성향인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주도했고, 우파이던 레오 슈트라우스는 오늘날 미국 신보수주의의 이론적 근거를 만들었던 것이다
카를 슈미트가 한창 활동하던 1920~30년대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 패배하고 전후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 뒤에 구성된 바이마르공화국은 역사상 가장 완전한 형식적 민주주의 사례로 기록될 수 있는 반면에 내부 갈등이 가장 심한 사회이기도 했다. 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조국 독일의 1차 세계대전 패배다.
그러나 그의 전쟁관은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랐다. 그는 “(러시아혁명 이전의)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영주들 사이의 전통적인 전쟁”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러시아혁명 이후 전쟁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했다. 과거 유럽 열강의 전쟁이 국가 자체를 파괴하지는 않았던 데 반해, 러시아혁명은 전혀 달랐다. 외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내란을 일으키고 혁명을 관철시켜나갔다는 점에서 그때까지의 전쟁 규칙을 모두 파괴한 사건이라는 것이 카를 슈미트의 진단이다.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카를 슈미트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야말로 처음으로 ‘절대적인 적’을 상정한 집단이라고 진단한다. 볼셰비키들에게는 자기네 국가를 공격하고 있는 외국보다도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군주가 더 큰 적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전쟁은 ‘절대적 전쟁’이 돼버렸다.
상대방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서는 끝나지 않게 된 전쟁…. 19세기까지의 전쟁은 휴전을 하거나 설사 패배를 인정하고 항복하는 경우에도 항복협상을 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무조건’ 항복을 패배자에게 요구했다. 전쟁에서 ‘적’에 대한 규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관은 카를 슈미트의 법이론이나 정치이론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란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전쟁과 마찬가지다. 휴전상태에서 전시상황을 국내 통치에 적용하는 기술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는 믿을 수 없는 동반자다.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적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를 슈미트는 ‘의회민주주의’를 믿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의회주의는 적과 친구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능한 시스템이다. 국가는 외부의 적에 대응해 만들어진 정치공동체이다. 따라서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단일한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
그런데 의회주의는 누가 국가의 진정한 적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 낭만>이라는 저서에서 담론이나 토론의 힘을 조롱했다. ‘적’은 토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법 해석의 문제이며, 그 해석의 정당성은 ‘정치’에 의해서 주어지지 법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더 엄밀히 보면 카를 슈미트에게 자유주의란 ‘승자의 지배논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패자에게 저항을 거세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전쟁 승자의 최고 목표는 안정적으로 패배자를 지배하는 것이다. 그들의 저항과 봉기를 분쇄하는 것이 승자의 목적이기 때문에 패자들이 자신을 ‘적’으로 보지 않기를 원한다.
그런데 의회에서의 자유로운 토론으로는 어떠한 ‘결의’도 이끌어낼 수 없다. 나아가 그 결의가 ‘국민총화적’ 힘을 가질 수도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던 많은 국가들에서 ‘위기’ 때 기꺼이 ‘자유’와 ‘민주’를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카를 슈미트가 보기에 의회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런 ‘위기’ 때에도 의회가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특수한 시기에 국가를 최종적으로 책임질 주체는 서로 갈려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의회가 아니라 비상대권을 가진 ‘대통령’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헌법의 최종 수호자로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키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낼 의무와 권한이 있다. 카를 슈미트에 따르면, 이런 독재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일시적인 정지일 뿐이다.
‘신보수주의’ 맹위 떨치면서 다시 조명
그의 적과 친구의 구분은 국가간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국내 정치적 의사의 통일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런 신념 때문에 그는 양심과 사상의 자유보다 의지의 통일성을 우선했다. 심지어는 ‘공개투표’를 찬성하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그는 전쟁의 시기에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한 체제의 핵심원리로 되는 것을 부정했다. 그리고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는 국가를 뿌리에서부터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히틀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카를 슈미트는 그를 열렬히 지지했다. 히틀러야말로 독일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결단력 있는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는 나치 정권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치 정권을 정치적으로 법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최고의 이론가였다.
나중에 그가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서구에서 대처와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가 힘을 떨치면서부터다. 그에 앞서 한국에 미친 영향도 크다. 대통령에게 모든 비상대권을 부여한 유신헌법은 카를 슈미트의 초기 이론과 대단히 비슷하다.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통치’라는 용어부터가 카를 슈미트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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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카시즘으로의 부활
미국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스의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1949년 6월 위스콘신 출신의 초선 상원의원인 조지프 매카시가 정체불명의 서류 한장을 들고 나와 “국무부 안에 200여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다”고 주장하고 나서면서 깨진다. 매카시는 곧 의회의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통해 수십만명을 증언대에 세우고 공산주의자라는 ‘고백’을 강요했다.
매카시즘이 겨냥한 목표는 두 가지이다. 미국 체제는 공산주의를 허용할 수 없다는 것과, 국가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의 자유까지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논리는 당시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상황 논리로 정당화됐다. 당시 중국대륙을 공산주의의 손에 ‘넘긴’데다가 소련도 원자탄을 개발하는 등 미국이 풍전등화에 놓여 있다는 식의 주장이 먹혀 들어갔다.
사실상 매카시즘의 논리는 카를 슈미트가 꿈꾸었던 ‘전체국가’(total state)의 복제판이었다. 개인과 공동체를 일치시키는 논리에다가 국가가 위기에 처한 ‘예외적 상황’이라면 헌법의 수호를 위해 구성원들의 권리가 일정 부분 제약될 수 있다는 주장… 대단히 빼닮아 있다.
나치즘의 ‘게르만주의’와 매카시즘의 체제수호론은 현실이나 이론에 있어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문제를 확대해나간 과정도 비슷하다. 독일이 체코와 폴란드 침공을 통해 2차 세계대전의 문을 열었다면, 미국은 한국전을 통해 소리 없는 3차 세계대전-냉전의 문을 연 셈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20세기는 외면적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100년 내내 전쟁의 논리 아래 움직였던 셈이다. 민주주의는 전쟁의 공포 아래 허용된 일종의 ‘게임의 규칙’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법도 가능한 셈이다. 그 어느 순간에라도 민주주의는 중단되거나 포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카를 슈미트가 1920년대 <독재론>에서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대가 아니라 (예외적 순간의) 한 과정”이라고 썼을 때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규군은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
차 세계대전 뒤 거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금지당한 카를 슈미트는 1960대 초반 파르티잔(빨치산)에 관한 논문 하나를 발표했다. 프랑스와 싸운 알제리 파르티잔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그는 파르티잔의 정치적 성격에 주목했다. 파르티잔은 정복당한 민중들의 저항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일반 정규군과 달리 그들은 민중과 구분할 수 없다. 낮에는 농부였다가 밤에는 전투원으로 바뀐다. 여기서 정규군의 어려움은 ‘적’을 식별하기 곤란하다는 데 있다. 정규군의 전쟁은 그것이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일정한 전쟁의 규칙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파르티잔 전투는 그런 규범을 모두 뛰어넘는다. 파르티잔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정복자의 모든 부분은 ‘적’으로 규정된다. 정복국가의 민간인 공격도 정당화된다. 파르티잔에게는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이 무기다. 모든 수단이 가능하다.
오늘날 테러라고 비난되는 행위들도 파르티잔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자기방어일 뿐이다. 한쪽에서는 ‘적’을 식별할 수 없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두를 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이 치명적인 불일치가 바로 파르티잔 전투의 핵심이다.
슈미트가 내놓은 결론은 충격적이다. “정규군은 결코 파르티잔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규군은 적이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규군은 제도화된 ‘정치’를 통해 지배하려 하지만, 파르티잔은 ‘정치적인 것’을 통해 저항하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이런 주장은 베트남전이 본격화되기 훨씬 전에 제기됐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준다. 1980~90년대 소련이 아프간의 수렁에서 패퇴한 것이나, 2004년 현재 미국이 이라크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은 슈미트의 통찰력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은 후세인을 제거하는 것으로 ‘적’의 소탕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라크인들에게는 미국이 ‘해방자’가 아닌 정복자라는 것이다. 미국이 해방시켜주었다고 생각한 이라크 사람들이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을 미국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이라크인 전부를 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슈미트의 결론은 이라크에서도 반복될 것인가?
[출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4.04.22 제5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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