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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마천] 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

by 알래스카 Ⅱ 2015. 11. 3.

[사마천] 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열전]

 

 

진시황과 한무제에 당당하게 맞선 역사가 사마천,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다

 

한 황제가 있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뒤 적이었던 나라들의 무기를 몰수하고 화폐를 통일하고 문자를 통일했다. 그리고 북방 이민족과의 경계선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성을 쌓고 자신만의 제국을 선언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통치철학에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다른 6개 나라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도록 했다.

 

반대의견을 말하는 유학자 수백명도 산 채로 매장돼 죽어갔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천하는 이 엄청난 문화말살 앞에서 온몸을 떨었다. 천하는 수백년 만에 찾아온 통일의 평화를 제대로 누려보기도 전에 새로운 야만과 암흑 속으로 다시 빨려들어갔다.


궁형을 선택한 채 살아남아 붓을 들다

 

 

»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사마천. 그는 환관의 몸으로 자신의 불행을 승화해 위대한 작품 <사기>를 남겼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또 한 황제가 나타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잇따라 사방의 이민족을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나갔다. 황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들의 가족을 출세시키기 위해 변칙적인 인사를 거듭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흉노와의 전쟁은 계속되고…. 5천명을 이끄는 장군 하나가 지원도 끊긴 채 10만 흉노군에 포위된 채 분전하다가 화살마저 모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이 장군의 정황을 옹호하던 한 역사가에 대해 노발대발한 황제는 최고의 극악한 처벌을 명령한다…. 이 역사가는 죽음 대신 끔찍한 불명예를 안기는 궁형(남성의 성기를 제거하는 형벌)을 선택한 채 살아남는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든다.

 

진시황과 한무제.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성과를 거둔 황제로 꼽히는 두 사람. 이 막강한 권력자에 맞선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런데… 여기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사마천.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그는 그런 길을 갔다.

 

한무제가 자신에게 가한 가장 처참한 형벌을 참고 이겨낸 채 또 다른 절대황제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의 참극을 수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따라서 그가 남긴 역사서 <사기>는 ‘한 인간이 두 황제를 이긴’ 인간승리라고도 할 수 있다.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나라 전성기 때 용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으로 천문을 맡고 있었다. 사마천은 20살 때부터 경험을 쌓기 위해 중국 전역을 여행했다. 주요 유적지를 관찰하고 책자와 전설, 경험담 등 사료를 폭넓게 수집하는 소중한 기회를 가졌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 임금의 동굴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 설, 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왕실의 봉선례를 시행했다. 그런데 태사령이면서도 이 행사에 참가를 허가받지 못한 아버지 사마담은 분노와 실의로 중병을 얻어 죽게 된다. 사마담은 아들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3년 뒤 사마천은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다. 그는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한다. 사마천은 그 뒤 유명한 ‘이릉 사건’을 만난다. 흉노에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결국 궁형을 받고 환관이 된 것이다.

 

“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역사 사실들을 주워모아서 기록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위로는 황제 헌원에서 아래로는 바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를 연구할 것입니다…. 만약 이 글이 세상에 나와 나의 뜻을 아는 사람에게 전해지고 널리 퍼진다면, 지금까지 마음에 쌓여 있던 굴욕스러움이 조금은 보상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뒤 환관으로 중서령에 오른 사마천은 역사 집필에 혼신을 정열을 기울여 마침내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0열전 등 모두 130편, 52만6500자로 이뤄진 <사기>를 완성한다.

 

 

 

»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받았던 진시황(왼쪽)과 한무제. 사마천은 이 두사람을 그저그런 '본기'로 기록한다.

 

사마천의 업적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만하다.

(1) 그는 기본적으로 역사가이다.
(2) 그의 <사기>는 진시황의 분서갱유(기원전 313년) 이후 처음으로 기록된 본격적인 역사서라는 점에서 분서

     갱유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3)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분서갱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사마천은 이 피해를 어떻게 수습했는지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진시황의 분서는 고대의 문헌에 타격을 주었다. 그렇다고 문헌 전부가 한꺼번에 소멸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마천이 일부 남아 있는 고문헌을 확보해 당시 이미 나타나고 있던 위작(僞作)을 배척하고 고문헌의 보존을 꾀한 게 확실하기 때문이다.

 

분서의 피해를 가장 크게 입은 것은 <서경>을 비롯해 각 제후의 연대기였다고 한다. 진시황이 조·위·한·초·제·연 등 경쟁 6개국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영웅들을 부활시켜라”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지는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런 덕으로 고대의 진귀한 문장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진나라의 실책에 관한 연구)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중국 시문의 한 형식),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 한비자의 ‘세난’(說難·유세하는 것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글),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의학에 관한 글) 등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때가 불리하여 추(騶·항우의 오추마)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우(虞·항우의 총희 우희)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항우의 마지막 시)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와 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와 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은 그렇게 해서 부활한 것이다.

 

 

 

» 분서갱유를 묘사한 후세의 회화. 6개 나라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웠고, 반대 의견을 말하는 유학자 수백명도 산 채로 매장해 죽였다

 

기록자는… 기록은 무서운 것!

진시황과 한무제, 두 절대자는 결국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고통받았다. 법가였던 진시황이나 유학을 발흥시킨 한무제나 모두 말년에는 불로장생의 욕망 때문에 똑같이 불사사상과 술사·방사에 집착한다. 묘한 일이다. 두 황제의 이런 귀결은 우연일 수도 있지만 어떤 섬뜩함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권력자의 탈을 썼지만,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인간인 이런 황제들에게 사마천은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자신의 불행을 승화해 위대한 작품을 남긴다. 역사를 쥐고 우뚝 선 그 앞에서 진시황은 ‘본기’의 하나일 뿐이다. 한무제도 그저 그렇고 그런 ‘본기’의 하나로 자림매김한다. 역사가 앞에선 절대권력자도 그저 작은 먼지 같은, 지나가는 자연현상과 비슷할 따름이었던 것일까? 기록자는, 기록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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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 속에서 피어난 처절한 문학성

 

» 후세에 출간된 <사기>. 사마천은 왜 끝내 <사기>를 남겼을까.

 

사마천은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익주자사 출신의 임안에게 보낸 편지는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죽음은 단 한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주나라 서백(문왕)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는 진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인류의 적, 수많은 분서사건들

 

 

 

» 페르가몬의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화재 이후 장서를 크게 늘려 유명해졌으나 결국 안토니우스의 주도로 장서들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빼앗긴다.

 

 

‘분서’ 사건은 인류문명에 엄청난 피해를 끼쳤다. 수천년 또는 수백년에 걸쳐 집적된 인류의 지식과 문명의 결정체를 영원히 소멸시켜버린다는 점에서 이런 분서사건은 무섭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서양에서도 분서사건은 역사를 거치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벌어졌다.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무대로 벌어졌던 일련의 방화와 약탈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이집트 점령 뒤 이집트에 새 왕조를 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당시 동서양 여러 문명의 책자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일을 벌인 데서 비롯됐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마지막 파라오였던 클레오파트라 때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서반구 문명권의 주요 저서 70만권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규모는 그 뒤 1500년 뒤 타자기가 발명되기 전 유럽 전체가 보유하고 있던 도서의 10배에 이르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기원전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 7세 때 한차례, 로마의 이집트 점령 초기에 한차례, 4세기 말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때 또 한차례 방화의 피해를 입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화사건 때는 각각 4만권, 20만권씩 불에 탄 것으로 전해진다. 또 도서관의 책들은 서기 640년 아랍인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면서 바그다드로 옮겨졌다.

 

또 다른 대형 분서사건은 몽골제국 초기의 서방원정 때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13세기 초 칭기즈칸과 그 아들들의 서방원정 기간 동안 몽골군에게 점령당한 대도시의 도서들은 무수히 불태워졌다. 점령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되는 것과 함께 도서관과 책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슬람 정통신앙과 학문의 중심지였던 사마르칸트, 니샤푸르, 부하라, 메르브, 테르메스 등 대도시의 도서관과 책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칭기즈칸이 죽은 뒤인 1250년대에도 몽골 대칸 몽케의 동생인 훌라구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이란 지역 알라무트의 도서관도 파괴됐고, 이어서 바그다드도 무자비하게 약탈당했다.

이런 분서 행위로 얼마나 많은 인류의 유산들이 영원히 사라졌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출처] : 오귀환 <한겨레21> 전 편집장 · 콘텐츠 큐레이터 okh1234@empal.com [2004.05.13 제508호]

출처 : 솔바람소리
글쓴이 : 구름에 달가듯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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