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거미 / 박제영 外

2015. 4. 16. 09:47詩.

 

 

 

 

 

늙은 거미    

 

ㅣ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 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미    

 

                          박제영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거문개똥거미가 마른 항문으로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늙은 암컷 거문개똥거미가 제 마지막 거미줄 위에 맺힌 이슬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나 당신,

죽은 할머니가 그러셨지. 아가, 거미는 제 뱃속의 내장을 뽑아서 거미줄을 만드는 거란다.

그 거미줄로 새끼들 집도 짓고 새끼들 먹이도 잡는 거란다.

그렇게 새끼들 다 키우면 내장이란 내장은 다 빠져나가고 거죽만 남는 것이지.

새끼들 다 떠나보낸 늙은 거미가 마지막 남은 한올 내장을 꺼내 거미줄을 치고 있다면 아가,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수의를 짓고 있는 거란다.

그건 늙은 거미가 제 자신을 위해 만드는 처음이자 마지막 거미줄 이란다.

거미는 그렇게 살다 가는 거야.

할머니가 검은 똥을 쌌던 그해 여름 할머니는 늙은 거미처럼 제 거미줄을 치고 있었지.

늙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 당신

 

 

 

 

 

 

 

 

 

 

소나무에 대한 예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 황지우

 

 

 

시인은 학교 뒷산을 산책하다가 소나무를 보고 '문득' 용서의 깨달음을 얻었다.

묵혀뒀다 용서한 것이 아니고, 장고 끝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찰나의 용서를 해버렸다.

불교 용어로 내려놓는 것을 "放我着(방아착)"이라고 한다.

미움과 번뇌와 집착 덩어리를 내려놓음으로써 새로운 무언가를 얻을 가능성을 열어둔다는 것이 방아착이다.

무언가를 내려놓는 방법은 "확!" 내려놓는 것이다.

소나무를 보고 용서를 선택한 시인처럼, 우물쭈물하지 않고 미움을 내려놓는 찰나의 결단,

그것이 용서의 마음이다.

 

 

 

 

 

 

 

 

 

그대 나 죽거든

 

l 박노해


아영아영 나 죽거든 강물 위에 뿌리지마...
하늘바람에 보내지 말고 땅속에다 묻어주오
비 내리면 진 땅에다
눈 내리면 언 땅에다
까마귀 산짐승도 차마 무시라
뒷걸음쳐 피해가는 혁명가의 주검
그대 봄빛 손길보다 다독다독 묻어주오

나 언 땅 속에 길게 뿌리누워
못다 한 푸른 꿈과 노래로 흐를 테요
겨울 가고 해가 가고 나 흙으로 사라지고
호올로 야위어가는그대.. 어느 봄 새벽,
수련한 함박꽃으로 피어 날 부르시면은
나 목메인 푸르른 깃발 펄럭이면서
잠든 땅 흔들어 깨우며 살아날 테요

아영아영 나 죽거든 손톱 발톱 깎아주고 수염도 다듬어서
그대가 빨아 말린 흰옷 이쁘게 입혀주오
싸늘한 살과 뼈 험한 내 상처도
그대 다순 숨결로다 호야호야 어루만져
하아- 평온한 그대 품안에 꼬옥 보듬어 묻어주오
자지러진 통곡도 피 섞인 눈물도
모질게 거두시고 우리 맹세한 붉은 별 사랑으로,
눈부신 그 봄철로 슬픔 이겨야해. 아영 강인해야 해
어느 날인가 그대 날 찾아 땅속으로 오시는 날
나 보드란 흙가슴에 영원히 그댈 껴안으리니


 

 

 

 

 

 

 

묘비명

 

                                         김광규

 

단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엇을 남길 것이냐

 

 

 

 

 

 

 

                          김광규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고
나의 선생의 제자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나라의 납세자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고
적이고
환자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김광규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들을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들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

 

 

 

 

 

 

 

 

어느 돌의 태어남 

 

                                   김광규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깊은 산골짜기에도

돌이 있을까

아득한 옛날부터

홀로 있는 돌을 찾아

산으로 갔다

 

길도 없이 가파른 비탈

늙은 소나무 밑에

돌이 있었다

이끼가 두둑이 덮인

이 돌은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2 천 년일까  2만 년일까  2억 년일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이 돌은

지금부터

여기에

있다

 

내가 처음 본 순간

이 돌은 비로소

태어난 것이다

 

 

 

 

 

 

 

 

4월의 가로수

 

                                 김광규

 

머리는 이미 오래전에 잘렸다

전깃줄에 닿지 않도록

올해는 팔다리까지 잘려

봄바람 불어도 움직일 수 없고

토르소처럼 몸통만 남아

숨막히게 답답하다

라일락 향기 짙어지면 지금도

그날의 기억 되살아나는데

늘어진 가지들 모두 잘린 채

줄지어 늘어서 있는

길가의 수양버들

새잎조차 피어날 수 없어

안타깝게 몸부림치다가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어

몸통으로 잎이 돋는다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매고 나서는데

등위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 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 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 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젊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 일곱이라고

그 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말을 받는다

 

당골집 귀쩨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두어 달 없어질게요 - 백창우  (0) 2015.06.16
북한 여류시인의 詩  (0) 2015.04.16
황동규  (0) 2015.04.14
함순례, 나희덕,   (0) 2015.04.11
노래가 된 詩  (0) 2015.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