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례, 나희덕,

2015. 4. 11. 11:26詩.

 

 

함순례 (66년생 보은댁) / 나희덕 (66년생 논산댁) / 황학주 (54년생 광주産)

 

 

 

 

 

 

 함순례

 

 

 

순례기

 

그러니까, 술래라 불린 적 있다   기일게 수울래 부르면 달빛 강변에서 강강수울래 춤추는 듯, 좀 짧게 부르면 술래야 술래야 머리카락 보일라 숨은 동무들 찾느라 해거름 길어졌다   해례야 달례야 부르는 벗들도 있다 벗들에게 빛 같은 존재가 되라는 의미겠는데 온몸 붉어지는 호명이다  수레라고도, 순네라고도, 첩첩 산골 가시내가 되었다 미소가 둥글어졌다   글 냄새 물씬 나는 필명도 잠깐 생각했지만 지금 나는 태아 적 이름으로 돌아와 있다   들판을 한없이 걸어야 하는 순례에 서 있다   보은 회인 용촌리 백삼십육 번지 일천구백육십육 년 일월 스무여드레 그 하늘에 다시 예를 갖춰야겠다   삼보일배, 슬픈 낙타 발굽 소리와 모래바람의 숨통을 열어봐야겠다

 

 

 

 

 

저쪽 사원

 

 

산길은 무덤을 향하고 있다

산책길 찾아

이 길 저 길 더듬어보니 그렇다

家格에 따라 무덤의 위용과 무덤으로 가는 길이 달랐다

사람은 죽어서도 평등하지 않았다

나의 후생은 사람 두엇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숲길 하나 얻는 것일까

혼자는 외로우니 두런두런 말 섞으며 걸어가면

어떤 슬픔도 측백나무 향처럼 부드러워지겠다

잘 죽기 위해 오늘을 사는 것

하지만 저쪽 세상을 나는 모른다

발을 딛지 못하는 허방일까 황홀한 꽃밭일까

나는 저쪽 세상의 색깔을 모른다

양지바를까 짙푸른 미명일까 암흑천지일까

저쪽을 들여다보기에 이쪽은 너무 캄캄하다

그러니 저쪽은 가보지 않은 사원이다

은은한 경배의 자리다, 다만 때가 되면

울지 않고 돌아가는 것

그 길은 만날 수도 있고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걸 어렴풋이 알 뿐이다

 

 

 

 

 

 

 

유언  

 

 

어머니의 장롱은 퀴퀴하다

솜 뒤틀린 목단 이불

누런 사진 뭉치들과 자잘한 옷가지에 기대어

어린 날 내 상장까지 가지런히 쌓여 있다

거기, 장롱 가운데쯤 커다란 하얀 보자기

굳은 매듭 풀어본다

 

목련공원묘지에 묻어다오, 믿는다

 

오래 전 마련하신 수의 위에

눈물로 적어놓은 쪽지 한 장

젊은 아버지 목숨줄 놓은

고향에 나란히 묻히고 싶지 않은 거다

당신 가신 뒤 아버지 이장 이루어지길 바라며

굵은 글씨 콱, 콱 박아 놓은 거다

 

요즘 들어 자주 세상 길 덮쳐오는 것 같아

집 나서기 무섭다는 어머니

새로운 길 찾아 나선 것일까

내 가슴에 얼룩얼룩 박혀오는 못,

 

믿. 는. 다

 

- 함순례 시집  < 뜨거운 발 > 2006 

 

 

 

 

 

이 양반 시는 <사랑방> 이거 하나만 맘에 드오이다.

 

 

사랑방



울 아부지 서른, 울 엄니 스물 셋 꽃아씨, 아부지 투덕한 살집만 믿고 신접살림 차렸다는디,

기둥 세우고, 짚과 흙 찰박찰박 벽 다져, 오로지 두 양반 손으로 집칸 올렸다는디,

부쳐먹을 땅뙈기가 없는 기라

내사 남아도는 게 힘이여 붉은 동빛 박지르며 집을 나서면,

이윽이윽 해가 지고, 어둠별 묻히고야 삽작을 밀고 들어섰다는디,

한 해 두 해 불어나는 전답, 울 엄니 아부지 얼굴만 봐도 배가 불렀다는디……

늘어나는 것이 어디 그뿐이랴 울 엄니 이태가 멀다 실제 배가 불렀다는디,

갈이질에, 새끼들 가동질에, 하루 해가 지는지 가는지 하 정신 없었다는디,

울 아부지 저녁밥 안치는 엄니 그대로 부엌바닥에 자빠뜨린 거라

그 징헌 꽃이 셋째 딸년 나였더란다 첫국밥 수저질이 느슨할 밖에……

임자 암 걱정 말어 울 아부지 구레나룻 쓰윽 훑었다는디,

스무 날을 넘기자 사랑방 올린다고 밤새 불을 써 놓고 퉁탕퉁탕 엄니 잠을 깨웠드란다

모름지기 사내 자슥 셋은 되야 혀 그때 되믄 계집애들이랑 분별하여 방을 줘야 않겄어!

그렇게 맨몸으로 생을 일궜던 울 아부지, 성 안 차는 아들 두 놈 부려놓고 이젠 여기 없네.

 


― 《시와 사람》2002

 



 

 

 

 

 

 

 

 

 

 

나희덕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 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

 

 

 

 

 

 

 

 

오분간

 

이 꽃그늘 아래서

내 일생이 다 지나갈 것 같다.

기다리면서 서성거리면서

아니, 이미 다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기다리는 오분간

아카시아꽃 하얗게 흩날리는

이 그늘 아래서

어느새 나는 머리 희끗한 노파가 되고,

버스가 저 모퉁이를 돌아서

내 앞에 멈추면

여섯살배기가 뛰어내려 안기는 게 아니라

훤칠한 청년 하나 내게로 걸어올 것만 같다.

내가 늙은 만큼 그는 자라서

서로의 삶을 맞바꾼 듯 마주보겠지.

기다림 하나로도 깜박 지나가 버릴 生,

내가 늘 기다렸던 이 자리에

그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쯤

너무 멀리 나가버린 그의 썰물을 향해

떨어지는 꽃잎,

또는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내 기다림을 완성하겠지.

중얼거리는 동안 꽃잎은 한 무더기 또 진다.

아, 저기 버스가 온다.

나는 훌쩍 날아올라 꽃그늘을 벗어난다.

 

 

 

 

 

 

그곳이 멀지 않다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시월

 

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흘려 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 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뿐이어서

당신 이름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마음, 그 풀밭에

 

누군가 손대지 않음으로써 일구어 놓았나

스스로 무성해진 풀밭

두려움도 없이 나는 풀을 벤다

낫이 움직이면서 내 속에 자란 풀을 먹어치운다

풀을 베어낸 자리마다 흙이 상처처럼

검붉다, 부질없이 부질없이

옮겨 심을 무엇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일까

드러난 흙이

뿌리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듯

나의 탐식은 풀밭 위를 달린다

풀은 왜 늙으면서 질겨지는가

가벼워지는가

두려움도 없이 나는 풀을 벤다

마음, 그 풀밭에 불을 놓는다

풀뿌리는 끝내 타지 않는다

 

 

 

 

 

 

 

길 속의 저 풀들은 홍해를 건너고 있는 것일까

 

갈라진 아스팔트 틈으로 풀들이 자라고 있다

길 속의 길,

길이 갈라져 풀이 난 게 아니라

풀씨가 팽창하면서

홍해처럼 길이 갈라진 게 아니었을까

키 작은 풀들 아래 개미들이 부지런히 부지런히

개미의 길을 가고 있다

길 속의 길 속의 길 속의 길 속의

 

어린 시절 뒷 창을 열면

푸성귀를 이고 지고 장터로 가던 아낙들,

장날이면 피어나던 그 푸른 길을

창턱에 올라앉아 바라보던 어린 내가 있었다

 

 

 

 

 

속리산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 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 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 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 주었다.

 

 

 

 

 

계산에 대하여

 

계산을 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모든 계산은

부정확하지는 않아도

불가능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계산을 하는 동안에도

자본은 운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구좌에선가 이자가 올라가고 있고

수수료와 세금과 연체료가 빠져나가고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재산은 불어 가거나 녹아 가고 있다

모든 존재는

언덕 아래로 굴러내리는 눈덩이와 같으니

모든 계산은

그 눈덩이의 지름을 재는 일과도 같다

계산을 한다는 것은

순간을 환산할 수 있다는 장담처럼

영원을 측량할 수 있다는 믿음처럼

어리석은 일, 계산을 마치는 순간

그 수치는 돌덩이가 되어 나를 누르고

구르는 동안 욕망의 옷을 입기 시작할 것이다

부디 계산을 마치지 말자

그래도 우리는 그 위에 꽃 피우며 잘도 산다

돌 위에 뿌리 내린 풍란처럼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제법 향기롭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철새들이 줄을 맞추어 날아가는 것

길을 잃지 않으려 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한몸이어서입니다

티끌 속에 섞여 한 계절 펄럭이다 보면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새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고 있는

저 두 사람

그 말없음의 거리가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새떼가 날아간 하늘 끝

또는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 그 온기에 젖어

나는 오늘도 두리번거리다 돌아갑니다

 

몸마다 새겨진 어떤 거리와 속도

새들은 지우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 혹시 길을 잃었다 해도

한 시절이 그들의 가슴 위로 날아갔다 해도

 

 

 

 

 

 

사라진 손바닥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

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창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

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

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

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초승달

 

 

오스트리아 마을에서

그곳 시인들과 저녁을 먹고

보리수 곁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준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산맥 위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 저편에 내가 두고 온 세계가 환히 보였다

 

그후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있다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

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손

다시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

 

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처럼

 

 

 

 

 

 

재로 지어진 옷

 

 

흰 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 흰 재로 지어진

 

 

 

 

 

 

천 개의 손

 

 

그의 손은 천 개나 되고요

머리에 얹은 화불도 헤아릴 수 없어

손으로 잡으려 하면 뿔뿔이 달아나버렸지요

 

대체 그 많은 손을 어디에 쓰나

갸웃거리며 계단을 더듬더듬 내려오는데

 

아, 천 개의 싸릿가지가 지나간 마당

 

고통의 소리를 본다는 그가

사람 마음에 따라

서른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그가

내게는 싸리비 든 손으로 와서

흙알갱이 어지러운 마음 바닥을 쓸고 갔네요

 

갑자기 눈앞이 환해져

나는 한 걸음도 내려서지 못하고

구름 난간 같은 계단에 앉아

빈 마당만 소슬하게 들여다보았지요

마음을 지나는 소나기떼처럼

싸리비 닳는 소리 아직 들리는 것 같아서요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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