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마흔의 서재』,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안 읽었던가? ㅠㅠ

2014. 10. 14. 17:26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나 이제, 장석주랑 강신주도 헷깔리네.

 

‘마흔은 늙어감, 즉 노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이다.

오십이 되어 느끼는 노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체념의 노화이고……,'

 

환장하겠네.

이 책을 더 읽어? 말어?

 

 

 

 

 

 

‘여행의 이익은 단지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을 처음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평소 낯익은 것,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던 것에 경이를 느끼고 새롭게 다시 보는 것에 있다.

여행하는 사람은 행하는 자가 아니라 보는 사람인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 자명한 것이라고 전제하던 것에 대해 새롭게 경이감 · 호기심을 느낀다.

여행이 경험이며 교육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미키 기요시 《어느 철학자가 보낸 편지》

 

해외여행은 아무래도 못 본 걸 보는 게 많지. 하지만 국내여행을 해보니 이 말이 딱 맞네.

 

 

 

 

 

 

꽃 피지 못하는 싹이 있고, 열매 맺지 못하는 꽃이 있다

 

딱 나네!

 

 

 

 

 

 

억측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고루하지 않고, 아집을 버렸다. (논어)

 

역시 공자가 나보다 한 수 윌세.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을 복이라 말하고, 남을 도울 힘이 있는 것을 복이라 한다.

학문하여 저술이 있는 것을 복이라 하고, 시비 소리가 귀에 들리는 일이 없는 것을 복이라 하며,

아는 것 많고 바르면서도 진실한 친구가 있는 것을 복이라 한다.’  - 《내가 사랑하는 삶》

 

허─  둬 가지 부족함세.

 

 

 

 

 

 

우둔한 행복보다는 고독이라는 부적응의 고통이 사람을 더 성장하게 만들며,

고독은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계기적 시간을 선물로 마련한다.

 

  그런 면이 있지.

 

 

 

 

 

 

산다는 것은 우리 일상의 모든 켜와 결, 굴곡의 주름들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훑어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음미되지 않은 삶은 가치가 없다.

 

◀  멋진 표현일세.

 

 

 

 

 

 

‘양적 조건이 충족된 다음에야 질적 전환이 일어난다.

창의적인 생각들은 충분히 학습된 후에 떠오른다. 물이 넘치듯이.’

 

◀  그렇췌. 유머 위트도 맨땅에선 안 나오줴.

 

 

 

 

 

 

책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책은 곧 나를 말해주는 것이다.

나만의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곧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나만의 고전이 없다면 진정한 독서가가 아니다.

2~3년 전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어보자.

여전히 재밌다고 생각되는 몇 권을 골라보자.

그렇게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어보자.

곁에는 나만의 고전이 자리잡고 있을것이다.’   - 와타나베 쇼이치

 

  장석주는 집에 3만 권의 책이 있다네. 30년 동안 읽은 책이라네.

 

 

 

 

 

‘내가 책에 탐닉하는 것은 심오한 통찰로 이루어진 책의 세계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다.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책은 우리를 무한한 사유와 창조의 능력으로 이끈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자주 샛길로 빠져 엉뚱한 곳에서 헤맸던가!

허나 그마저도 소중한다. 이는 추론과 생각에서 비롯된 예측불허의 간접적 에두름이다.

그 경험은 우리를 주어진 정보를 넘어서서 예측하지 못한 독자적 사유와 창조적 진화에 이르게 한다.

이게 책의 생성적 장점이다.

무엇보다 나는 즐겁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자의식을 버리고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책읽기란 자신을 넘어서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혁신적인 사유를 촉발시키고 존재의 가능성을 확장하며

우리를 새로운 어떤 세계로 데려가는 일이다.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나아간다.

책이 없었다면 나는 하품하는 개나 뒷발질하는 당나귀나

나뭇가지에 앉아 뜻없이 깍깍대는 까치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을 것이다.’

 

‘읽은 책들을 다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읽은 것들을 다 기억할 수도 없을 뿐더러 가억하는 것이 불가결한 것도 아니다.

기억은 상상력을 한정하지만, 망각은 무한상상력의 텃밭을 일구는 쟁기이다.’

 

◀  어쩜 나랑 생각이 똑같네.

 

 

 

 

 

 

 

새벽에 쓴 편지는 아름답다.

대개는 부쳐지지 못하고 아침에 폐기된다.

폐기되는 그것에는

환한 빛 아래에서는 차마 보기 힘든

진짜 진심이 널려 있기 마련이다.

 

◀  오─ 다른 사람도 그랬었구나!  (^__^))

 

 

 

 

 

 

 

비움은 단순한 덜어냄이 아니다. 내 것을 덜어내어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비움은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을 채울 수 있는 희망이다.

이것이 자정작용을 일으킨다.

우리가 생을 비워내야 하는 이유는 고요를 만나기 위해서다.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고요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삶을 명예롭게 한다.

 

한 개의 촛불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촛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

 

 

 

 

 

질문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많다. 질문에 돌아올 진실의 대답이 두려워서이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거짓과 같다.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위선이다.

 

 

 

 

 

 

겨울에 대한 질문

 

                          이장욱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내가 당신을 함부로
겨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어느 날 당신이 눈으로 내리거나
얼음이 되거나
영영 소식이 끊긴다 해도

함부로
겨울이야 오겠어?...
사육되는 개가 조금씩 주인을 길들이고
무수한 별들이 인간의 운명을 감상하고
가로등이 점점이 우리의 행로를 결정한다 해도

겨울에는 겨울만이 가득한가
밤에는 가득한 밤이?
우리는 영영 글자를 모르는 개가 되는 거야
다른 계절에 속한 별이 되는 거야
어느 새벽의 지하도에서는 소리를 지르다가

당신은 지금 어디서
혼자 겨울인가?
허공을 향해 함부로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어느덧 눈으로 내리다가 문득
소식이 끊기고

 

 

 

 

 

소통은 생명의 근본적인 요청이다.

‘나’란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은 타인과 접촉하면서 이루어지는 소통 속에서만 일어난다.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내 의식의 표층에 떠오르는 ‘나’는

결국 타인을 통해 경험되고 알게 된 나이다.

타인과 소통하지 않는 삶은 없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를 인식한다.

‘나’는 ‘우리’라는 무리 속의 ‘나’일 뿐 저 혼자 있는 ‘나가 아니다.

 

 

 

 

 

자화상을 그리면 사느라 바빠

오래 들여다보아 주지 못했던 얼굴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득 말을 건네올지도 모른다

잘 살고 있느냐고

괜찮은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