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람의 조선 여행》

2014. 9. 3. 12:49책 · 펌글 · 자료/예술.여행.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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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일반 대중과 역사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펴낸 「규장각 교양총서」 제7권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과《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 뒤를 이어 여행을 주제로 조선의 역사를 살펴본 세 번째 책이다. 이번 책에서는 별자리 여행에서부터 온천여행과 득음을 위한 여정까지 오백 년 조선 사람들의 여행기를 담고 있다. 본문은 크게 열세 가지 주제를 나누어 다양한 범주의 여행을 이야기한다. 발로 직접 뛰거나 걷지는 않았지만 그림과 글로 간접 여행하는 ‘와유’, 죄를 얻어 가족과 직업에서 벗어나 먼 곳에 처해졌던 ‘유배’, 지방 행정을 정찰하러 가는 ‘암행어사 길’,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길’ 등 다양한 목적으로 우리 땅을 돌아다닌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우리 강산을 누비며 길 위에서 진정한 삶을 펼쳤던 조선인들의 여행기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여행이 펼쳐진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교보문고 제공]

 

 

저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저서(총 10권)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 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리고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교보문고 제공]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은 비록 여행’을 앞세웠지만, 일상적 여행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도 여럿 있다. 방 안에 앉아서 그림과 글로 다른 곳을 여행하는 와유(臥遊)와 죄를 얻어 가족과 직업에서 벗어나 먼 곳에 처해졌던 유배, 그리고 암행어사의 길도 여행으로 보았다.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_ 즐거움의 지혜를 얻는, 조선으로의 시간여행

1장 누워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 옛사람들이 남긴 와유의 기록들 | 이종묵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2장 정치적 시험의 장이 된 왕세자의 온천여행
­ 조선 왕가의 치병기 |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3장 별자리를 좇아서 거닌 옛사람들의 시, 노래, 과학
­ 조선 사람의 밤하늘 여행 | 전용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4장 깊은 규방에서 나와 신천지를 마주하다
­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 이숙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5장 “목에서 피가 나고 배가 붓던” 여행길
­ 명인 명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송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6장 붓 한 자루 쥐고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다
­ 금강산 여행, 화폭에 담기다 |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7장 서른네 살, 12년의 고행 끝에 본 가문의 영광
­ 영남 양반 노상추가 떠난 과거길 | 정호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8장 착잡한 고통과 짜릿한 쾌락이 엇갈린 길
­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암행길 |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9장 감시 속에서 즐긴 유배인의 여행길
­ 이문건의 유배길과 해인사 유람 | 김경숙 조선대 사학과 교수

10장 돌고 돌았던 순회상인의 길 위에 펼쳐진 삶
­ 장돌림과 장삿길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조영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장 머리에 천지를 이고 몸에 천하를 두르다
­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를 따라가다 | 윤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흥분과 기대가 의분과 비통함이 된 까닭
­ 일제강점기에 떠난 수학여행 | 윤소영 독립기념과 연구원

13장 소설가 구보씨의 행복 찾기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1930년대 서울 | 서재길 국민대 국문과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교보문고 제공]

 

 

 

 

 

 

Richard Strauss / Romance for cello & orchestra in F major,Op.75 
  


 

 

 

 

 

왕이 죄인에게 유배형을 명하면 담당 관청에서 유배지를 배정해 왕에게 윤허를 받은 뒤 유배지로 압송하는 과정을 거친다.

유배지는 600리, 750리, 900리 밖으로 차등을 두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휘말려 경상도 성주에 유배된 묵재 이문건(1494~1567)은 9월17일 서울에서 출발해 11일간의 유배길 "여행" 끝에 28일 유배지에 다다랐다. 그가 남긴 묵재일기(默齋日記)의 기록을 따라 그 자취를 따라가본다.

 

 

"새벽에 의금부 서리 최세홍이 찾아왔다. 불러들여 만나보니 유배지가 성주로 정해졌다고 한다. 오늘 마패가 나오면 내일 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술을 대접해 보냈다. ● 갈모 1개, 목면 1동, 솜고도 1개, 가죽신 1개, 덧신 1개, 귀덮개 1개, 우비용 베옷 1개 등의 물품을 최세홍에게 보내주었다. 그의 요구가 극히 많아서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유배지에 호송하는 압송관은 정2품 이상의 대신은 금부도사가, 종2품~정3품 당상관은 의금부 서리가, 정3품 당하관 이하의 관료는 의금부 나장이 압송하고, 그 이하는 역졸을 통해 압송했다. 그런데 압송관 최세홍은 유배길에 필요한 여러 물품을 요구했는데 이를 부비채(浮費債)라고 한다. 유배인은 압송관의 여행경비까지 일부 짊어져야 했던 것이다. 

 

 

9월17일(陰) 새벽 그는 재촉해서 식사를 하고 큰누이 및 妻 안동 김씨와 작별했다. 해가 뜰 무렵 지인들이 찾아와 배웅하고 노비들이 통곡하는 가운데 그는 말을 타고 노비 몇 명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이종사촌 권길재는 한강에서 배를 함께 타고 이별주를 나누었다.

점심 무렵 천천현에 이르러 말을 먹이고 자신도 요기를 한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해 열원에 도착해 첫날밤을 맞았다. 즈날 밤에는 조카 염이가 찾아와 함께 지새웠다. 다음날 새벽 일찍 염의 누이가 떡 과일과 술을 보내와서 염과 함께 요기를 하고 비가 오는 중에 출발했다. 모정을 거쳐 좌찬역에 이르러 역관에 묵으면서 노비 야찰(夜札)을 서울로 보내 별탈 없이 잘 가고 있다는 기별을 집에 보냈다.

사흘째 되는 20일 충청도 괴산땅에 접어들어 저물녘 사청에 사는 숙모댁에 도착하니 처남들이 그를 붙들고 통곡했다. 괴산에 머무는 동안 많은 친지가 찾아와 위로했고, 괴산군수도 쌀 콩 술 과일을 보내왔다.

압송관인 최세홍은 이틀 뒤 22일에야 도착했다. 압송관은 유배인을 호송해 일정을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배인은 유배인 대로 압송관은 압송관 대로 길을 갔다. 정치적으로 유배길에 오른 사대부 죄인들은 도망갈 염려가 없었기에 어느 정도 자율적인 노정이 보장됐던 것이다. 흔히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오랏줄로 묶여 끌려가거나 함거에 실려가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대부 죄인은 말을 타고 노비를 거느리며 가는 모습이어서 죄인의 처지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반 여행객과 다름이 없었다. 어떤날은 압송관과 동행하고 어떤 날은 혼자서 길을 가기도 하는 등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이문건은 9월28일 드디어 유배지 땅인 성주에 도착했다. 괴산을 출발한 지 5일, 서울을 출발한 지 11일 만이었다. 성주 경계에 들어선 그는 한 개울가에서 점심을 먹고 노비를 먼저 관아에 보내어 기별했다. 뒤따라 읍내에 들어가니 향리 5, 6명이 길까지 마중나와 배소로 정해진 읍성 아래 김옥손의 집으로 그를 안내했다. 배소에 도착한 다음날 괴산에서 데리고 온 노비 4명과 말 3필을 돌려보내고 서울에서 따라온 노비는 편지를 들려서 서울로 보냈다.

유배지 성주는 서울에서 630리이며 「의정부노정기」에 의하면 7일 반 일정이었다. 하루 평균 84리를 달려야 기한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11일 만에 배소에 도착했으니 규정보다 3일이 더 지났으나 문제삼지는 않았다. 북청 유배길에 올랐던 백사 이항복은 일정보다 17일이나 더 걸려서 29일 만에 도착했었다.

유배형은 도형(徒刑)과 달리 노역이 부과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배지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자유롭게 살 수 있었다.

관에서는 유배인을 보수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하여 생계를 지원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겼다. 보수주인들은 사대부 출신들의 유배인들을 후하게 접대하기 마련이었으며, 유배인들도 지방관들과 각종 교유망을 바탕으로 보수주인 및 고을 백성들의 민원이나 개인 문제를 관에 전달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하곤 했다.

관에서는 매월 초하룻날 유배인들을 불러 모아 점고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이마져도 생략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아전이 필요에 따라 배소에 들러서 문안인사를 하면서 동태를 살피는 정도에 그쳤다.

유배형은 원칙적으로 유배지 경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역사 기록을 보면 고을 경계를 넘어 인근 고을 명승지를 찾아서 며칠씩 유람하는 이들을 찾을 수 있다. 성주에서 유배살이를 한 이문건 역시 합천 해인사를 자주 유람했다. 일기 기록에 의하면 지인은 물론 합천군수,  고령현감, 성주목사 등이 해인사에서 함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