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26. 10:02ㆍ산행기 & 국내여행
부석사는 문화재에 관심 좀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씩들 다녀갔을 절입니다.
다녀만 가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씩 감상평도 남기죠.
부석사 무량수전을 보지 않고서는 대화에 껴들지도 못합니다. ㅎㅎㅎㅎ
그런데 감상평들이 거의가 똑같은데,
온갖 수사로 상찬을 하고서는 이렇게 망가트려져서 아쉽다, ‥ 대개 그런 식이입니다.
최순우 선생님이 『무량수전…』에서 부석사 감상평을 참 멋지게 적으셨지요.
아마도 그것이 전문가나 대중들에게 부석사 감상의 미학적 기준을 제공한 것일텐데,
안목은 빌려온다쳐도 굳이 거기에 구애받을 것까지는 없지요.
'미감(美感)'이라는 것은 어차피 상대적, 주관적입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 서서 - 최순우-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안양문,조사당,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중기의 건축이지만 우리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축중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높이와 굵기,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문창살하나 문지방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봐도 무량수전은 의젓하고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무량수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지체야말로 석굴암 건축이나 불국사 돌계단의 구조와 함께 우리 건축이 지니는 참 멋 즉 조상들의 안목과 그 미덕이 어떠하다는 실증을 보는 본보기라 할수밖에 없다. 무량수전앞 안양문에 올라앉아 먼 산을 바라보면 산뒤에 또 산 그 뒤에 또 산마루 눈길이 가는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속에 이렇게 아늑하고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 줄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리속에 빙빙 도는 그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이 무량수전 앞에서부터 당간지주가 서 있는 절 밖 그 넓은 터전을 여러층 단으로 닦으면서 그 마무리로 쌓아놓은 긴 석축들이 각기 다른각도에서 이뤄진 것은 아마도 먼 안산이 지니는 겹겹한 능선의 각도와 조화시키기 위해 풍수사상에서 계산된 계획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석축들의 짜임새를 바라보고 있으면 신라나 고려사람들이 지녔던 자연과 건조물의 조화에 대한 생각을 알수 있을 것 같고 그것은 순리의 아름다움이라고 이름짓고 싶다.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섞어서 높고 긴 석축을 쌓아 올리는 일은 자칫 잔재주에 기울기 마련이지만, 이 부석사 석축들을 돌아보고 있으면 이끼 낀 크고 작은 돌들의 모습이 모두 그 석축 속에서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희한한 구성을 이루고 있다.
'부석사' 유명세에 비해서는 상점이 없는 편입니다.
접근성이 안좋아서 그럴 겁니다. 대전에서 거의 4시간 걸렸습니다.
더덕 냄새가 좋더군요. 밭더덕이라는데......
좌우 건물까지 다 둘러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일자로만 보고 나왔는데도 1시간 반 걸렸습니다.
오르막길이고 계단이 여러 개이긴한데 별로 힘들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구요,
위로 쭉 올라가면서
일주문 - 천왕문 - 범종루 - 안양루(문) - 무량수전 - 조사당,,
일주문에 ‘태백산 부석사’라고 썼습디다?
친구 말로는 소백산이라는데???
태백산에서 소백산을 바라보는 건지, 소백산에서 태백산을 바라보는 건지....
좌우편에 맨 사과밭입니다. 가로수는 전부 은행나무고요.
여기는 가을에 와야 좋겠어요.
▶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이다.
이렇게 좌우 석축을 두고 계단으로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석축 위에 틀림없이 집들이 있었을 겁니다. 맨으로 석축만 쌓았을 리는 없을테니까요.
화엄종 원찰이라는데, 신라시대라면 寺勢가 어떠했겠습니까?
최순우 선생님이 예찬하신 예전의 부석사 모습은 지금의 것과는 다르답니다.
무량수전, 조사당, 안양루, 범종루, 그렇게만 있었대요. 휑했겠지요.
그래서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지금의 경치가 망쳤다고 한탄하는 거랍니다.
퇴락하고 고즈녁한 모습에다 눈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을테니 일망무제로 시원은 했겠지요.
그러나 의상대사나 화엄종의 네임밸류로 볼 때 무량수전 하나만 댕그라니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수 백 채의 건물이 꽉 들어차 있었을 것입니다.
50년대 70년대 말고, 더 멀리,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 신라인이 되어봅시다.
석축 위에 빼곡히 들어찼을 건물들... 아래녘은 사하촌...,
(한 두 채는 눈에 거슬리지만 집단이 되면 다르죠.)
수많은 굴뚝에서 올라오는 저녁밥 짓는 연기... 북적거리는 무채색 옷의 사람들....,
석축을 참 예쁘게 쌓았지요?
울진 불영계곡에 있는 불영사를 가보면 기막히게 쌓은 석축이 또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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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 널찍해서 참 좋습니다.
저렇게 화단으로 꾸미는 게 좋을지, 맨 마당으로 두는 게 좋을지, 아니면
빈 마당과 화단을 어떻게 조화롭게 꾸밀지......
관광 온 외부인의 입장만 생각할 건 아니죠.
여기서 먹구자구 생활하며 사는 사람도 사람입니다. 내 마당을 예쁘게 꾸미고 싶겠죠.
지금의 이 모습을 가지고 비탄하는 사람이 많던데, 이것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눈 지그시 감고 지울 건 지우고 볼 것만 남겨서 보는, 그런 능력이 있다면 좋겠는데요.
똑같은 탑이 양쪽으로 있습니다.
요 탑 주위로 만큼은 휑하니 빈 마당으로 비워두고 싶네요.
건축에 대해서 잘 몰라도 멋져보입니다.
최순우 선생님 말씀처럼 의젓하고 시원하고 균형미가 아주 일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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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떻게 단청 할 생각을 안했을까요?
당연히 이대로의 모습이 좋긴 합니다만... 칠을 하면 분위기가 확 바뀌겠지요?
그렇더라도 귀한 건물인데... 오래 보존하려면 단청을 해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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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무량수전이 훌륭한 건축물인지는 공부를 좀 해야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만
문외한인 제가 봐도 지붕 끝의 처마 들림이 멋져 보이는군요.
조사당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여기도 역시 같은 모양의 3층석탑이 있군요.
소박 간결한 것이 맘에 듭니다. 건축물과의 조화도 맞구요.
지금 이 탑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제일 좋다더군요.
날씨는 좋았는데, 황사인지 운무인지로 시계는 썩 좋지 않았습니다.
많이 아쉽죠. 저는 사실 그걸 보려고 온 거였는데....
물론 이곳에서 바라보는 원경(遠景)이 좋긴 합니다만 “독보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다른 곳에도 멋진 원경을 품은 절이 많습니다.
이 역시 간결 소박하지요?
얼핏 보면 이 비슷한 건물이 많은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까 그렇지가 않네요. 지붕이 많이 나온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잃지 않았는데,
이 조사당은 가까이에서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 계산한 듯합니다.
그런데 저 선비화, 닭장틀은 무어랍니까? ㅠㅠㅠ.
지팡이 꽂은 데서 잎이 났대나 어쨌대나......
▶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좀 올라와야하는데,
길을 부드럽게 S자로 만들어서 편하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자, 전망이 제일 좋다는 데서 바라봅니다만.... 부옇습니다.
부석사 경치는 황혼녁이 가장 좋다는군요. 오른편으로 해가 떨어집니다.
▶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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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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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돌이 부석(浮石)이랍니다. 여기 둥둥 떠 있었다는.....
이름이 부석사인 걸 보면 뭔가 사연이 있을 듯한데,
전해오는 전설이란 것은 허무맹랑합니다.
“친구야, 배흘림 기둥이 어떤 거냐?”
“엥? 지금 저게 배흘림 기둥이지.” (한심하단 눈빛으로)
“엥? 저게 어떻게 배흘림이냐? 배불룩, 배불뚝이지.
너 지금 ‘흘림체’ 하는 그 흘림을 말하는 것이냐?
다듬이 방맹이처럼 가지런한 저걸 보고서 흘림체를 떠올린단 게여?”
“ …… ”
“그러면 저렇게 배 나온 사람도 흘림체겠넹? …….”
여기서는 이렇게 서지 말리야.
이런 식으로……
양 옆에 있는 건물들은 전부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범종루를 이렇게 뒤에서 바라보면 좀 이상합니다.
일본식 지붕 같기도 하고 그럽니다.
이게 라일락이랍디다.
불교사적위치 |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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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
초기 |
중국 유학후 수도처로 삼아 안주하다가 뒷날 거대한 사찰을 이룬 곳이다. 그러나 부석사의 생김을 정리한 역사적 기록물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비석에 쓰인 몇 문자나 절을 재건한 기록, 보수한 기록 등만이 전한다. 부석사가 세워지기까지에 관해 '삼국사기'에는 고승 의상이 임금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전하며 '삼국유사'에는 "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처음 절이 생겨날 당시가 오늘날과 같은 대규모는 아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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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소백산이나 태백산 등지에 초가를 짓고 불경을 강의하거나 토굴에서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은 것으로 보아 7세기 후반의 부석사는 의상의 영정이 있는 조사당을 중심으로 초가집이 몇 채 있는 아주 청빈한 양상이었을 것이다 |
중창 |
의상의 제자인 신림 이후 부석사는 인적 물적 측면에서 차츰 변화했다. 신림은 훌륭한 제자를 많이 배출하였으며 부석사의 화엄종을 크게 중흥시켰다. 또한 규모면에서도 크게 변모하여 현재 부석사의 기본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대석단과 석등, 석룡, 장대석, 석탑 등이 경문왕 무렵에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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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사찰 건립이 가능했던 것은 신림이 배출한 수많은 화엄대덕들이 국가로부터 상당한 물질적인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의 상을 그려서 벽화로 걸어 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벽화에 그려진 신라 왕의 상을 보고 칼을 뽑아 내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가 위치한 태백산은 신라 오악 가운데 중사를 지내던 곳으로 흔히 북악(北岳)으로 불리워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법손들을 북악파라고도 하였다.화엄종의 본찰인 부석사는 신라 하대에는 대석단 위에 세워진 거대한 가람으로 많은 대중들이 생활하는 곳으로 변하였고 승려가 되기 위해 처음 출가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
고려이후 |
이곳의 주지로 있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였고 그 일부를 부석사와 안국사에 봉안하였다. 따라서 지금 부석사에 전해지는 화엄경판은 원융 대덕 때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한말 민속학자인 이능화선생의 화엄경판고란 책에 의하면 "고려 초에 태백산 부석사에서 2종의 화엄경을 목판에 각했다"고 하였다. 부석사에 현존하는 원융대덕의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은 김씨이고 자는 혜일이었다. 12세에 용흥사에서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수계하고, 28세에 대덕이 되었다. 정종 때 왕사, 문종때는 국사가 되었다. 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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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귀산사에 유행하였을 때, 꿈에 미륵보살이 나타나서 "네 품속에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해요, 다른 하나는 달이다"고 말하는 순간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는데 이 일이 있은 뒤 자를 혜일이라 하였다고 한다. |
조선시대 |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성종 24년(1493)에 조사당에 단청을 하였다. 광해군 3년(1611)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가 부러져 중수하였고 경종3년(172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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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22년 (1746)에 화재로 승당,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그 이듬해에 중수하였고 영조 44년(1765)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의 금색을 다시했다 |
근대이후 |
일제 시대인 1919년에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허리 부분이 잘린 석룡(石龍)이 노출되었다고 한다.
가을에 다시 와봐야겠습니다. 황혼무렵이 좋다니깐, 여기서 숙박을 하는 일정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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