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에 숨겨진 공격성 外

2014. 4. 3. 10:41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프로이드의 의자』에서 옯긴 글입니다.

 

 

 

 

1. 유머에 숨겨진 공격성

 

공격성을 표출하기 위한 여러가지 편법 중의 하나가 유머(농담, 위트)입니다. 유머나 위트는 상대로부터 공격 받을 가능성을 줄이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공격성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유머란 억눌려있던 공격 에너지가 해방되어 웃음이라는 형태로 발산되는 것입니다. 억압되어 사라질 뻔했던 공격성을 변장시킨 후에 의식으로 불러와서 즐기는 것이지요. 원초적인 형태의 공격 에너지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건너오는 다리의 검문소를 아무 일 없이 통과할 수 있도록

모습을 바꾼 것이 유머입니다.

 

우리가 유머나 개그에 열광하는 이유는 대리 만족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머를 하는 사람은 아슬아슬한 게임을 합니다. 마음 한구석에 유머의 원래 모습이 억압된 공격 에너지인 것을 알고 있으니 약간의 죄책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웃지도 않으면서 우스운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남들을 비꼬는 유머를 내가 하고 남들이 따라서 웃는다면 그때 죄책감이 줄어들면서 내 마음은 자유로워집니다. 남들의 웃음을 통해 일종의 사면을 받는 것이지요. 공격성이 들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모습을 바꾸어 발산된 것입니다.

 

반면에 실패한 유머는 위장 없이 공격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러면 유머를 시도한 사람은 당황해 하고, 창피하게 느끼고,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듣던 사람은 썰렁해 합니다. 유머나 개그, 농담에서 희생자는 별 볼일 없게 그려집니다. 그래야 듣거나 보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느끼면서 우쭐해집니다. 희생자가 마치 자신의 미숙했던 모습처럼 보이면서 자신이 훌쩍 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아집니다.

 

특히 농담은 세 사람 사이의 게임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는 사람, 듣는 사람, 그리고 농담의 희생자입니다. 농담은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아 실패와 성공 사이의 간격이 좁습니다. 숙련된 기술과 경험 없이 함부로 농담을 하다가는 낭패를 봅니다. 말하고 나서 속은 시원하지만 죄책감이 안 느껴져야 성공한 농담입니다. 중요한 자리나 어려운 자리에서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농담을 하다가는 사고 칠 확률이 높습니다. 유머, 위트, 농담, 개그는 원래의 모습을 완벽하게 바꿀수록 성공합니다.

 

좋은 유머는 두 가지 즐거움을 줍니다. 긴장이 해소되는 즐거움과 놀이의 즐거움입니다. 유머로 유도된 웃음은 마음의 자유를 줍니다. 자유로우면 크게 웃을 수 있습니다. 자유로워야 남을 이해할 여유가 생깁니다. 흥미롭게도 공격성을 억압해야 하는 사람일수록 유머 감각이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공격성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것을 무리하게 억압하면 틈새를 타고 만들어지는 것이 유머입니다.

 

Ω Σ ζ ω π

 

 

“아! 내가 공격성이 많은 사람이구나! ㅋㅎㅎ”

“이런 걸 보면 정신분석학이란 게 참 예리해요잉!”

 

 

제가 어제 이렇게만 써놓고 들어가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 생각하니 그 ‘공격성’이라는 말뜻은 ‘행동양식(行動樣態)’를 말하는 것이지, ‘의미성’에서 나쁘다는 뜻과는 별개인 것 같습니다. 공격적 어법을 구사하긴 하나 실상은 배려를 위한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꼭 희생자를 끼워넣어야만 유머· 위트가 되는 것도 아니구요.

1) 위트· 유머가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은 게임’이라거나, 2) ‘상대로부터 공격 받을 가능성을 줄이면서 공격성을 표현하는 방법’  3) ‘억압되어 사라질 뻔했던 공격성을 변장시킨 후에 의식으로 불러와서 즐기는 것’이라는 말은 참 예리한 지적이고 전적으로 동의를 합니다.  제 블로그 이름의 副題처럼, 제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 속에는 좌절· 분노· 회한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의식세계로 나와서 유머와 위트라는 공격적 언사로 표출될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제 유머 ·위트의 뿌리일 줄이야. ㅠㅠ.

 

 

 

 

 

 

 

2. 동일화와 이상화

 

누구에게나 역할 모델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同一化(identification)’입니다. 동일화와 잘 구별이 안되고 비슷한 것이 ‘理想化(idialization)’입니다. 이상화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남이 가지고 있어 남이 나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누구나 성장하면서 이상화의 단계를 거칩니다. 첫번째 이상화는 바로 부모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상화의 반작용이 나타납니다. 좋아하고 따르던 인물에게 실망하고 회의감이 드는 때가 옵니다. 그래서 그를 평가절하하고 격하시킵니다. 이것은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내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상화했던 인물을 아주 버리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약점까지도 껴안으면서 가는 것입니다.

 

이상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다면? 눈에 콩깍지가 씌운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도 내 눈에는 멋있게만 보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상대의 그런 행동이 보기 싫어지고, 상대의 약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것 또한 정상적인 과정입니다.

 

이런 그에게 실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성숙한 수준에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게 되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이때부터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사랑은 오히려 무르익습니다. 그런데 自己愛가 너무 강한 사람은 상대의 식어버린 사랑을 참지 못합니다. 새롭게 열정을 공급해줄 사람을 찾아 떠납니다. 그리고는 ‘상처받은 사랑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Ω Σ ζ ω π

 

 

“무섭네요! 어떻게 千變萬化할 사람의 심리를 학문적으로 분석해 낼 수가 있다지요?”

 

 

제 고등학교 은사님 중에 제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존경을 받은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제게는 두 번이나 담임을 하셨던 분이고 제 친구에게는 주례를 서 주신 각별한 인연까지 있는 분이신데, 그런 분을 우리가 언젠가부터 씹기 시작했어요. 아, 우리의 심리상태가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3. 자학과 피학증

 

미국 작가 도로시아 브랜드는 "모두에게 자기를 망치려는 마음씨가 있다. 그것이 크도록 내버려두면 불행이라는 열매를 맺을 뿐이다"라고 햇습니다. 그 말처럼 자기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면? 내가 나를 망가뜨림으로써 만족감을 느낀다면 말이 되는 일인가요? 이성적으로는 전혀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말이 됩니다. 이는 프로이드가 주장하는 죽음 본능과 연결됩니다.

 

자기 파괴의 극단적인 예가 자살입니다. 그런데 은근하게 숨겨진 자살행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흡연, 폭음, 폭식, 약물남용이 그러합니다. 자신에게 나쁜 줄 알면서도 그러는 것은 불안을 해소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처벌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를 ‘피학증’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선택을 해야 나중에 실패의 핑계를 거기서 찾을 수 있기에 무의식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이 낮거나 자아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에서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쉽게 합니다. 자존심이 낮다는 것은 나와 남의 관계에서 내가 편안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남이 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라도 나를 아껴주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자기 파괴적 행동을 더 합니다. 그렇게 거꾸로 불행의 입구로 걸어들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Ω Σ ζ ω π

 

 

“이는 바로 제 작은누나 얘깁니다. 어쩜 이리 쪽집게일까.”

 

 

 

 

 

 

 

4. 외로움과 고독

 

孤獨은 '혼자 있어 외로움'입니다. 같이 있을 사람이 없어 혼자 있기도 하고, 스스로 혼자 있기를 원해서 그렇기도 합니다. 외로움은 참기 힘든 느낌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간섭을 받습니다. 외롭지 않으면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거기에 갈등이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고독과 외로움을 구분해 말합니다.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이고,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은 털어내야 할 감정이지만 고독은 추구해야 할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외로움은 외로움을 낳습니다. 외로워하는 사람은 남을 불편하게 합니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끌어당기는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면 그는 남들이 자기를 거부한다고 받아들여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 제 작은누나가 꼭 이렇습니다. 죽기살기로 만나다가 2년 지나면 꼭 원망을 하면서 갈라섭니다.)

 

외로움은 타인과 나와의 관계라고 생각하지만 정신분석의 입장에서 보면 외로움은 '내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의 소통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누구와 어울리고, 또는 바쁜 척해도 내 마음을 끝까지 속일 수는 없습니다. 끊어진 끈을 다시 이으려면 고독을 통해 접근해야 합니다. 고독은 격리된 삶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 능력, 재미를 말합니다.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서도 진정으로 고독한 사람들이 만나야 오래 지속되는 진실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Ω Σ ζ ω π

 

 

四柱라고도 하고 四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는 사주기둥에 天孤가 두 개나 들어 있습니다. 그래 그런지 저는 고독을 그냥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혼자인 것을 외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즐긴다고까진 못하겠지만 고독한 시간을 갖고자 했던 경험은 많습니다. 여행을 혼자 가는 것도 그 연장선상이랄 수 있습니다. 더러 이런 얘기도 듣습니다. ‘어떻게 영화를 혼자 보러 가냐’, ‘어떻게 여행을 혼자 왔냐’, ‘어떻게 혼자 식당 가서 밥을 먹냐.’… etc.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말이죠. 오히려 그걸 어색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덜떨어진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여럿이 있어도 혼자일 뿐이고,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니란 걸,, 당장 블로그를 해보면 그렇지 않던가 말이지요?

 

 

 

 

 

그만 합시다.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게 생겼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