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16. 19:06ㆍ산행기 & 국내여행
15일 08시 30분 출발 - 16일 17시 도착
구례(매천사 운조루 사성암) - 낙안읍성 - 순천 - 여수(여수 수산시장 숙박)
매천사梅泉祠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선생은 철종 6년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아버지 황시묵(黃時默)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가 있어 선생을 가르친 왕석보(王錫輔)는 일찍부터 매천이 장차 큰 학자가 되리라 예언하였다. 24세 되던 해(1878년)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유하면서 매천의 글이 장안에 알려지게 되었고, 26세 되던 해(1880년)에는 금강산을 유람하며 기행시를 썼으며, 그의 뛰어난 글솜씨로 인해 한말삼재(韓末三才)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졌다. 29세 때(1883년) 부모의 소망을 풀어들이기 위해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시골출신이라 하여 2등으로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것을 단념하고 전남 구례에 칩거하며 시작(詩作)과 저술에 힘쓰다 34세 때(1888년) 부모의 권유를 어기지 못해 다시 과거에 응시, 합격하였지만 부정부패로 찌들어 가는 정치 현실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영영 단념하고 구례 월곡마을에서「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등의 저술에 전념하였다. 45세 때(1899년)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언사소(言事疏)」를 지어 조정에 개혁방안을 제시하였으며, 51세 때(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를 규탄하는 시 「문변삼수(聞變三首)」와 애국지사를 애도하는 시 「오애시(五哀詩)」를 지었다. 56세 때(1910년) 일제에 의해 끝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지식인 으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절명시(絶命詩)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였다. 1911년 매천 사후에 친우 창강 김택영이 상해에서 매천의 시집「매천집」을 출판 배포하였다. 그 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매천야록」을 간행하였으며, 1962년 구례 월곡에 「매천사」를 준공하였고, 1985년 전남대학교 에서 「매천집」을 간행하여 시 1,015수와 문 361편을 수록하였다. 매천 황현은 직접 독립운동에 나섰던 분도 아니고 벼슬길에 나아가 국정에 관여한 분도 아니었으나 철저히 재야에서 지조를 지키면서 역사를 쓰고 시를 지어 뒷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남기는데 전념 하였다. 선생이 남긴 시는 1,015수에 이르렀으며 그가 평생동안 기록한 「매천야록」등 역사서는 우리나라 역사정신의 표본이 되어 오늘에 빛나고 있다. 매천사학은 박은식, 송상도, 이병헌, 신채호, 정인보 등으로 이어졌으며 매천문학은 한용운, 윤동주 등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화관광부는 매천 황현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정신문화연구원 과 협조, 학술세미나('99.8.10, 정신문화연구원 대강당)를 개최하고 전라남도, 광양시, 광양·구례문화원 등 관련기관·단체와 협조하여 매천 황현의 일대기 연극('99.8.7∼8, 광양 문예회관), 「매천 황현의 역사의식과 문학」이라는 주제의 세미나('99.8.7, 광양 문예회관), 유품전시('99.8.7∼8, 광양 문예회관), 추모백일장('99.8.7, 광양 유당공원), 매천 문예백일장('99.8.15, 매천사·구례 중앙초등학교) 등의 다양한 기념행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 절명시
난리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성성하구나
그동안 몇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더이상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푸른 하늘을 비치는도다.
요망한 기운에 가려 임금자리 옮겨지더니
구중궁궐 침침하여 해만 길구나
이제부터는 조칙(詔勅)이 다시 없을 것이니
옥같이 아름다웠던 조서(詔書)에 천가닥 눈물이 흐르는구나
새와 짐승이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낯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일찍이 나라를 위해 한 일 조금도 없는 내가
다만 살신성인할 뿐이니 이것을 충(忠)이라 할 수 있는가
겨우 송나라의 윤곡(尹穀)처럼 자결할 뿐이다.
송나라의 진동(陳東)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도다
문을 잠궈놔서 못 들어가봤는데, 집터가 아담하니 참 좋습디다.
매천선생님 生家가 아니고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매천 선생이 말년에 기거하시다가 자결하신 장소랍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문 걸어놓고 있다가 제사 지낼 때나 쓰는 모양이네요,
자손이 없으신가?
그런데 참, 이번에 다니다보니 꼭 이른 봄에 찾아온 듯한 기분이 듭디다.
남도 분위기는 역시 가을이 아닌 봄이 어울리나봅니다.
봄날에 아지랭이 피어오르고 따스한 햇볕, 그런거 있잖습니까.
구례 천은사
지리산 천은사(주지 성문)가 사찰을 관람하지 않는 등산객과 통행차량을 대상으로 징수해온 문화재 관람료가 부당하다는 내용의 고등법원 판결이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19일 강모씨 등 74명이 천은사와 전남도를 상대로 낸 통행방해금지 등 문화재관람료 부당 징수 관련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한 고등법원 판결을 그대로 확정한다고 밝혔다. 광주고등법원은 지난 2월 지리산 등산객과 차량을 대상으로 관람료를 징수해온 천은사에 입장료 1,600원과 함께 위자료 1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도로 부지 중 일부가 천은사 소유라고 하더라도 지방도로는 일반인의 교통을 위해 제공 된다”면서 “문화재를 관람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 관람료를 내야만 도로를 통행할 수 있게 한 것은 불법”이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천은사가 관람료 징수를 이유로 지방도의 통행을 방해할 경우 회당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천은사 측은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한다”며, “추후 대책위원회와 협의하여 향후 방향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종무소 측은 “지난 2011년에 법개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는 ‘공원문화유산지구’로 다지 지정하여 문화유산 입장료를 징수하겠다”고 밝히고, 지난 6월에 관련서류를 접수하여 심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천은사 측은 “그동안 사찰을 관통하는 지방도 861호 도로가 지난 1982년 군사정권에 의해 천은사 소유의 토지가 강제로 수용되어 도로를 개설한 후 지금까지 수행환경을 철저히 훼손해왔다. 그 후 토지소유자인 천은사측에 어떠한 사용 승락과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불법도로로 토지 소유자의 사용허가가 30년째 이뤄지지 않아 법적으로 등기되어있지 않은 임의도로임”을 강조 했으나, 대법원은 지난 2월 6일 광주지법의 천은사 관련 소송 판결이 이번 대법원 판결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대법원에서 해당 판결이 확정됨에 따라 소송에 참여한 74명은 입장료와 함께 위자료를 지급하게됐다. 한편 이번 소송단 변호를 담당한 서희원 변호사는 “이번 판결의 효력은 74명의 소송참가자들에게 있다”면서 “2차 소송단을 모집해 대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웬걸? 통행료 받는갑디다. 초소 같은 거 보이잖습니까?
그리고 절은 따로 입장료 받습니다. 2000원이던가.
공군 제대한 친구가 국가유공자라서 동반자 한 명까지 꽁짜입디다.
이번에 그 친구 덕 좀 봤습니다. ^__^)
멀쩡한 도로에서 통행세 받기가 뭐하니까 이렇게 일주문을 크게 만들어놨습니다.
그러니까 여긴 일주문이 두 개인 셈입니다.
절엘 오는 게 아니라, 그냥 이 길을 통과하는 차는 다 세워서 돈을 받습니다.
일반 버스까지도 받습니다.
아주 웃기는 상황이예요.
"돈 내기 싫으면 19번 도로로 가라." 고 써 있습니다.
이 고갯길이 '정령치'인데,
노고단 성삼재를 넘어오자면 여길 통과해야지, 아니면 많이 돌아가야 합니다.
19번 도로는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이야 있죠.
이 도로 앞 뒤를 포크레인으로 콱 찍어서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면 되죠. (^_^)
사연이야 있겠지만 절집에서 할 짓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개인 땅도 있을 수 있단 얘긴데. 한번 알박기 해봐?)
천은사는 이번이 두번째 방문입니다.
다시 봐도 참 좋습니다. 절이 아주 예쁘게 생겼습니다.
가람의 배치도 좋고, 풍광도 좋고, .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오만방자함이 안 보여서 좋습니다.
지금 보니까 지리산이 아니라 方大山이로군요. 노
고단 바로 밑에 있는 절인데.
여름에 오면 계곡이 아주 시원하고 좋습니다. 물도 많아요.
정말 강추입니다,
물바가지를 이렇게 많이 놓은 건 첨 봅니다. ㅋㅋㅋ
매직펜으로 기증자 식구 이름을 써놨네요.
물맛이 아주 깨끗 시원하고 좋습니다.
오른 편에 있는 친구가 길 안내를 맡은 친구인데, 전문 여행 가이드보다 낫습니다.
남도 만이 아니라 전국 어디든, 여행지·절·박물관에 대해서 환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초행길을 돌아다니려면 하루 몇 곳이나 들르겠습니까?
어디를 들러야 하는지, 어딜 가면 뭔 먹거리가 있는지, .... 모저 친구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제가 이곳 사진을 다 찍지 않아서 그런데
전후좌우로 작지 않은 건물이 여러 채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방이 수십 갭니다. 전문 여관 같기도 합니다.
외래 방문객이 많다는 뜻이겠죠.
입장료에다 통행료만 해도 수십 억원이 나오는 부자 절입니다.
이곳은 제일 안켠에 있는 자리인데 템플스테이 하는 곳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저 집이 아니고,
안으로 쑥 들어가면 계곡을 끼고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암자 가는 길이고,
절 밑에 저수지가 있습니다.
구례군 식수원인가봅니다. 낚시는 당연히 못하죠.
구례 사성암
해발 500m의 오산에 있는 암자로 고승들이 수도하던 곳이다. 오산 꼭대기에 있는데 원효·의상·도선·진각 등 네 명의 고승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하여 ‘사성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암자 근처 암벽에 고려시대 초기 작품인 음각마애여래입상이 있어 창건 내력을 짐작한다. 현재 이 암자는 작은 규모의 목조기와집으로 되어 있다.
친구 말인즉,
여기는 절 구경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지리산과 섬진강 전경을 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라서 안내를 했다고 하더군요.
날씨는 좋았는데, 알 수 없는 안개가 자욱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특히 구례에서 안개가 많았습니다. 원래 이 지역이 그런가?
아닌게 아니라 전망은 아주 좋게 생겼는데……
구례 읍내에서 보면 산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 게 있습니다.
아주 가파른 산입니다.
자동차는 못 올라가게 하고 셔틀버스를 운행합니다.
왕복 3400원 받고요.
도로 폭이 좁습니다.
도로를 새로 내는 공사를 하고 있더군요.
옛날 같으면 찾아오는 이도 없고 수행하기가 좋게 생긴 암자입니다.
원효, 도선, 진각, 의상대사가 공부하러 올만도 했겠습니다.
지금은 구례읍내와 섬진강 자락만 보이는데,
멀리 지리산이 병풍처럼 보이는 장소입니다.
여긴 소원 빌러 오는 이가 많은가 봅니다.
평일인데도 여자 방문객이 많더군요.
봉고차 두 대가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데도 사람이 꽉 찹니다.
날 두고 하는 말인가?
운조루 雲鳥樓
민속자료8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지준의 글에도 소개된 명당이다. 운조루에서 신기한 것은 집 입구의 연못과 도랑(앞도랑의 물길과 섬진강의 물길 방향이 정반대임), 대문 위의 호랑이 뼈, 사랑 누마루 아래에 커다란 나무 바퀴, 목독(나무로 된 쌀독- 쌀독의 마개에 <他人能解>라는 글귀를 써두었음 이는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돈을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이 눈길을 끈다. 또 굴뚝이 아주 낮게 설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 타인을 배려한 설계이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조루는 오미동 문화 유씨 종가 집안의 사랑채 누마루의 이름이지만 문화재 이름이 구례 운조루라 되어 있어 흔히 이 99 칸의 기와집을 운조루라 불러 온다. 이 집은 1776년(영조 52)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무관 삼수공(三水公) 류이주(柳爾胄)가 지리산의 좋은 재목으로 1782년 약7년간의 대공사로 완성시켰다. 구조는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耐자형 배치이며,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락지(金環洛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현재는 73칸으로 후손인 류홍수 씨가 기거하고 있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갖추어진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집 앞으로는 오봉산과 관모산이 있는데 이러한 형국은 한양의 축소판이다. 집 앞의 연당은 남쪽 관모산의 형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기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이다. '구만들(九萬坪)'이라 부르는 이곳의 마을들은 모두가 금환락지 명당터를 잡기 위해 일제시대 때 외지인들이 몰려와 개척한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의 노고단에서 섬진강에 엎드려 머리를 감으려다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이라고도 하고 그때 비녀도 떨어뜨렸는데 그곳은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표현하기도 하는 이곳의 풍수지리적 형국은 지리산의 주봉 노고단에서부터 그 신령스러움이 흘러 오는데, 월령봉을 타고 내려온 노고단의 용(龍)이 천황치에서 건너편 왕시루봉 줄기와 어우러져 섬진강을 끌어안은 모습이다.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이고 안산(案山)으로는 강 건너 오봉산이 머리를 조아리면 춤을 추고 있다. 금환락지는 또 다섯 가지가 아름답다 하여 오미동(五美洞)이라 불렀다. 마을의 안산이 되는 오봉산이 기묘하고, 사방의 산들이 다섯 별자리가 되어 길하고, 물과 샘이 풍족하며, 풍토가 윤택하여 다섯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또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眞穴)인 금구몰니(金龜沒泥)와 오보교취(五寶交聚)가 있는데, 유이주가 잡은 터는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혀 있다는 금구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의 머리 크기만한 돌거북이가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앉힐 때 부엌 자리에 불을 때기 때문에 거북이가 말라죽는다고 거북이가 나온 곳을 습기 많은 부엌 자리로 배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다가 지난 1989년 도난 당했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으로 통한다. 이 세명당은 오미동 구만리 들에서 상대 중대 하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 주인은 자기집 안채가 상대 금구몰니이고, 중대 금환락지는 행랑채 밖 연못자리이며 하대는 면 소재지에 있는 돌탑 자리라고 한다. 한편, 환동(環洞) 박 부자 집터 역시 그곳이 금환락지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아주 높은 돌담과 대나무숲으로 요새화되어 있는 이곳은 현재 이순백씨가 기거하고 있다. 원내리(垣內里) 사람들도 자기네 마을을 오보교취의 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운조루에 대한 명성이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구례방향 19번 국도변 우측편에 있는데 미리 방문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내판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기 쉽다. 명당 중의 명당에 터를 잡은 운조루에서는 아직 까지 일반인들이 기대하고 생각하는 고관 대작이나 입신 양명한 걸출한 인물이 배출된것은 아니지만 재산이 자손대에 이르면서 꾸준히 늘었고 자손들이 관직으로 많이 진출한 점을 들어 명당의 효험이 발하고 있다는 주장도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현재는 입장료(어른1,000원)를 받고 있다. 운조루 입구의 간이 매점을 하시는 노인(전진 교장선생님)분께 설명을 부탁드리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문화 류씨의 후손이란다.
집터가 아주 크고 배치도 좋습디다.
집도 집이지만 터가 명당터랍니다.
특히 집 앞에 있는 연못과 긴 행랑채가 인상 깊습더군요.
행랑채가 동·서로 나뉘어서 방이 열 개씩은 돼 보입디다.
50년전만해도 소작인이나 머슴들이 많았다더군요.
저 앞에 논밭들이 다 이 집 것이냐고 물으니 7,000평 남아 있답니다.
지금은 명당 기운이 다 빠진 모양입니다. (^^)
큰 아들이 살고 있다곤 하는데, 사람 사는 흔적은 별로 안 보입디다.
숙박도 한답니다.
하루 자는데 얼마냐니깐, 가운데 미닫이로 막은 방 두개(?)가 8만원이랍니다.
밥도 주냐니깐 밥은 안 준답디다.
노인네 할머니 혼자서 산수유를 따고 계시더군요.
대문을 들어서면서
작은 사랑채, 큰 사랑채, 뒤주 창고, 안채, 등등이 있는데,
건물이 여러 채입니다. 아주 넓어요.
희한하게 아궁이 입이 좁더군요.
이런 곳은 반드시 해설사를 동행해서 설명을 들어야만 합니다.
할머니가 1,000원 받은 값을 한답시고 뭐라 뭐라 하시는데
어깨 너머로 들은 풍월이라서......
진즉에 알아서 제 아버지를 모시고 왔었더라면 엄청 좋아하셨을텐데......
서울/경기도
여경구가옥 _ 꽃담에 남은 사상의 흔적
정용채가옥 _ 아름다운 행랑채의 정체를 밝히다
성공회강화성당/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_ 한옥식 성당의 미래를 상상하다
칠장사 _ 마당에서 깨달음을 얻다
운현궁 _ 한옥, 역사를 품다
충청도
김기응가옥 _ 은유의 공간을 들여다보다
최태하가옥 _ 하늘과 맞닿은 한옥
김기현가옥 _ 한옥의 여성성을 읽다
추사고택 _ 추사, 한옥과 통하다
결성동헌 _ 동헌, 스캔들이 터지다
전라도
몽심재 _ 한옥 정원, 신선을 꿈꾸다
김동수가옥 _ 공간의 향연에 빠지다
강골마을 이용욱가옥 _ 비대칭 한옥, 디자인의 진수를 보다
도래마을 홍기응가옥 _ 한옥, 리듬을 타다
운조루 _ 조선 선비의 로망을 만나다
경상도
옻골마을 백불고택 _ 한국의 미로 거듭나다
향단 _ 세상의 중심을 꿈꾸다
병산서원 _ 건축, 자연이 되다
남흥재사 - 막사발을 닮은 건축
정온선생가옥 _ 영광과 좌절, 숙명을 끌어안다
일두고택 _ 틈으로 완성하다
밀양향교 _ 은밀한 세상으로 들어가다
강원도/제주도
왕곡마을 _ 태고의 집을 만나다
성읍민속마을 _ 바람의 땅에서 한옥을 만나다
-『이야기 따라가는 한옥 여행』에서
낙안읍성
이건 동헌이고,
이건 동헌 옆에 고을 수령이 살던 관사이고,
이건 감옥인데, 동헌에서 뚝 떨어져서 마을 복판에 있습디다?
배추랑 갓이 엄청나게 크더군요.
저 배추 한 포기가 사람 웅크리고 앉은 만큼 커요.
보통 배추의 4배는 되겠습니다.
우물물이 아주 맑습니다. 그냥 식수로 사용하는 모양입니다.
저 아줌마들은 관상용이죠.
이 동네는 관광지와 실제 삶이 함께 어우러지고 있더군요.
낙안읍성엔 거의 200가호가 실제로 살고 있습니다.
나중에 많이 늘어났나봅니다.
첨엔 이렇지 않았답니다.
거의 모든 집이 민박을 하더군요,
친구 말이 음식도 잘한답니다.
순천만
순천만도 두번째 방문인데,
지금은 입장료를 받더군요. 물론 주차료도 받구요.
평일인데도 사람이 많습니다. 주말 같으면 난리도 아니겠어요.
입장료 수입이 엄청나겠습니다.
서해안 방조제 막은 지자체들은 배 아파 죽겠어요.
돈 몇 푼 안들이고 노다지 캐고 있잖습니까?
고기 잡아서 돈 벌어. 조개 캐서 돈 벌어. 체험학습장이라며 또 돈 받어……
여길 5시쯤에 도착했는데,
용산 일몰을 보자면 바쁘게 생겼습니다.
막 뛰다시피했습니다.
땀이 흠뻑 나게 가까스로 달려가서야 겨우 일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네요.
갈대숲 끝에서 용산 전망대까지 왕복 40분이라고 하는데,
넉넉히 1시간 잡아야 합니다.
지금 썰물이지요?
밀물일 때는 어떤가 모르겠네요. 지난번 보다는 물이 적은 듯한데.
순천에서 잘까 하다가 시간도 이르고 해서 여수까지 가기로 했는데,
밤중이라서 좀 헤맸습니다.
여객 터미널이 있는 수산시장 근처에다 모텔을 잡고나니까 8시쯤 됐습니다.
'뼈꼬시' 안주시켜서 잎새주 6병,
노래방 가서 맥주 10병인가 15병인가,
그리고 제방뚝 나가서 양주 한 병,
아침은 시장 골목에서 보리밥백반으로.
잘먹고 잘 놀았습니다. 지나치게. ㅋㅋㅋ
여수 항일암
이곳에서 잤으면 아침에 일출을 보는 건데 그랬습니다.
항일암에서의 날씨는 기막히게 좋았는데, 아!
올라가는 길이 460미터인가 밖에 안되는데
술에 곯아서 올라갈 수가 있어야지요.
친구 혼자만 올라가라고 하고는,
둘은 남아서 갓김치 놓고 막걸리 한잔하며 기다렸습니다.
의외로 갓김치가 맛이 좋더군요.
전에 추석선물로 들어온 건 질기고 맛이 없었는데,
이건 사근사근하니 맛있습디다.
바로 여기가 그 돌산입니다. 돌산 갓김치.
'오동도'라고도 부르는가 봅니다.
여수 엑스포
이 노릇을 어쩐답니까?
저렇게 돈을 처들여 놓고, 전부 고철이 되게 생겼습니다.
벌써부터 여기 저기 부서지고 녹물이 흐르더군요.
오로지 아쿠아리움 하나만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데,
글쎄요, 유지비가 이만저만 아니겠던데,
과연 이걸 보려고 사람들이 꾸준히 올까....?
입장료 2만원 받는데, 그 정도 받을만은 합니다만....
아주 잘해놨습니다. 한번 가보세요.
2시에 쇼하더군요.
여수에서 항일암까지 30분이면 갑니다.
그 둘만 봐도 본전치기 합니다.
순천만을 함께 둘러보면 더 좋구요.
순천만도 20~30분 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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