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8. 19:47ㆍ책 · 펌글 · 자료/인문 · 철학 · 과학
민비시해사건의 주범 우장춘의 父, 우범선
우장춘 신화는 1990년 일본의 한 논픽션 작가 스노다 후사코 여사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해 1988년 『민비 암살-조선왕조 말기의 국모』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고, 한일 양국에서 화제가 됐다. 스노다 후사코는 이 책 발간 후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인이 과거사에 대해서 알고 속죄해야
한다"는 주장을 누차 했는데, 이후 '과거사에 대한 고발'에서 더 나아가 '한일사의 해법'을 역사적 인물의 삶을 통해 찾아보려
했다. 아래는 그녀의 두번 째 책인 우범선 우장춘 부자에 대한 이야기,『나의 조국』프롤로그 중 일부이다.
우장춘이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3년 전 내가 출간했던 『민비 암살』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무르고 있
던 1985년 봄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민비 암살의 행동대원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명단으 작성하고 있었다. 조언을 해준 서울
대 학생이 나의 수첩을 들여다보더니, "아, 우범선…… 일본인과 함께 경복궁에 잡임한 조선군 대대장이죠? 그 사람은 우장춘
의 아버지 입니다. 물론 우 박사의 이름은 알고 계시겠습니다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나의 말을 들은 학생은 놀란 얼굴로 나를 보았다.
"모르셨습니까? 우장춘은 '한국 농업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으로서 세게적으로도 유명한 식물학자입니다. 한국에서는 교과
서에까지 나옵니다. 우박사의 연구로 '씨 없는 수박'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그렇지만 민비 암살사건에 가담한 우범선
과 부자관계였다는 사실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아버지는 한국 근대사의 최악의 죄인 중 하나요, 아들은 한국 현대사의 최고의 위인 중 하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스노다 후사
코는 이것이 한일사의 매듭을 푸는 한 해법을 보여주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버지의 죄를 보속하기 위해 조국에
헌신한 아들' 이라는 주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이 드라마틱한 부자 이야기를 취재하기 시작햇다. 그리고 1990년,
『나의 조국』을 세상에 내놓았다. 우 박사의 일대기에 대한 책은 이후에도 많이 나왔으나 그 대부분은 이 책의 취재내용을 기
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스노다 후사코는 취재를 하던 와중 끊임없이 혼란에 휩싸였다. '역사에 대한 속죄', '아버지의 죄과에
대한 아들의 보속'이 라는 주제가 실제 우장춘의 삶과 끊임없이 충돌한 탓이다. 우장춘의 지인 중 한 명은 '우장춘이 그의 아버
지를 자랑스러워했다"고 증언했으며, 우장춘의 개인 행적 어디에도 '역사와 부친의 죄에 대한 죄의식'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탓
에 스노다 후미코는 혼란에 빠졌다.
-『우장춘의 마코토』 P 25~28
-『우장춘의 마코토』 P 25~28
아버지 우범선과 관련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무렵의 근대사가 상세히 나오네요. 우범선이 중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배포가 대단했던 인물인가 봅니다. '우범선은 말하기를, 조선은 국토가 너무도 협착하니 장래 국가 백년대계를 생각한다면 누구나 만주까지 병란할 생각을 두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고, 일본에 망명하여 변성명을 할 때에도 그는 북야일평(北野一平)이라 하였으니, 즉 만주벌을 한번 토평하겠다는 의미다. 어느 누구도 꿈도 꾸지 못하던 그 당시에 그가 벌써 만주 문제를 생각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식견과 포부가 웅대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 비중비화 백인백화집 별건곤 제 69호.
※ 윤효정,「풍운한말비사」에서 인용한 글이 많던데, 저는 처음 들어보는 책이군요.
당시 서울에는 무려 3000명의 淸兵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주둔군은 150여명 남짓이었으므로 감히 도발해볼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침 베트남에서 청불전쟁이 터졌다. 1874년 프랑스는 제2차 사이공조약을 체결하고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았다. 이에
청나라는 종주국으로서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1884년 베트남 북부에 군대를 파견하여 전쟁을 벌였으나 개전과 동시에 연
전연패를 거듭했다. 이 소식은 당시 조선에도 전해졌다.이로 인해 청의 위신은 추락했고, 청의 양무운동은 근대화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개화파에 퍼졌다. 그리고 이 전쟁 때문에 서울에 주둔하던 청병의 절반이 철수했다. 개화파는 이 기회를 노려
쿠테타를 도모했다. 그것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p75~`)
신축년(1901) 이후로 누차 역적 괴수 우범선을 만나 거짓으로 친한 척하면서 을미년에 있었던 사변에 대해 자세히 탐문하였습
니다. 그 결가 곤녕합에서 모후를 죽인 일은 그가 꾸민 음모의 결과로서 무슨 일이나 다 자기가 주관하였노라고 큰소리 쳤는데,
신하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어서 가슴이 서늘하고 간담이 떨렸습니다. 이 역적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드디어 고영근과
기회를 보아 죽이기로 서로 약속하였습니다. - 윤효정이 조선으로 돌아와 사면을 받을 때의 재판기록이다. / 아무튼 우범선은
1903년 12월 그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쳤다. 우장춘의 나이 여섯 살, 그리고 어머니 나카는 둘째 홍춘을 임신하고 있던 상태
였다.
x x
‘誠’은 일본어로 ‘마코토’라고 읽는데, 에도시대의 유학자 야마가 소코는 이 '마코토'를 축으로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는데, 그는
주자학과 상이한 해석을 취했습니다. 즉 주자는「중용」의 誠을 ‘理’와 하나가 된 상태라고 해석했는데, 소코는 '理'의 개념을
배제한 채 천지와 인간의 내연 필연에 따라 순수하게 사는 것 자체가 '마코토'라고 주장했습니다. 진토 이사이라는 유학자 또
한 '마코토'를 '인간관계에서 타자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주관적 심정의 순수함'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마코토'란 자신
을 관계에 몰입시키는 '無私無心'의 표현이라는 겁니다. 마코토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거지요. 일본의 '마코토'는 원리적
인 규범성이나 객관적인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악이나 옳고 그름과는 무관한 순수성을 가리키는 일본적
관념입니다.
그의 애국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애국과 다르다. 일본을 적대시하는 것만이 애국이 아니다. 그의 필생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종의 합성' 이론 자체가 하나가 다른 하나를 克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릏 補한다는 가르침이다. 우장춘은 서로가 있어
야만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상생의 세계관을 자신의 학문을 통해,생애를 통해 온몸으로 피력했으며, 피를 피로
씻어내는 역사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를 웅변한 것과 다름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당위를 떠나, 우리는 과거를 직시하고 서로에게 정직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를 되찾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직, 순수, 즉 '마코토'인 것이다.
(p293`~296)
이 책, 별 다섯개 줍니다.
'책 · 펌글 · 자료 > 인문 · 철학 · 과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치심과 죄의식은 어떻게 다를까? 外 (0) | 2013.08.19 |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까? 外 (0) | 2013.08.17 |
한국 철학 콘서트 (0) | 2013.05.31 |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0) | 2013.04.11 |
김상근『마키아벨리』 (0) | 2013.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