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

2013. 5. 15. 18:14책 · 펌글 · 자료/ 인물

 

 

 

독서는 타인의 사고를 반복함에 그칠 것이 아니라 생각거리를 얻는다는 데에 보다 참된 의의가 있다.

 

 

세상이란 관조(觀照)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다.

 

 

투쟁은 그것을 멀리서 맴돌면서 볼 때에는 무척 두려운 것이지만

막상 맞붙어 씨름할 때에는 그리 두려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어떤 창조의 쾌감 같은 희열을 안겨주는 것이다.

 

 

고립되어 있는 사람에게 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생활이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 정치적 · 역사적 연관이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어서의 생활이란 그저 시간의 경과에 지나지 않는다.

 

 

 

 

 

한 포기 키 작은 풀로 서서

 

대전교도소 1971년 2월~1986년 2월

 

 

 

 

아버님께

 

벌써 중추(中秋). 저희 공장 앞에는 밤새 낙엽이 적잖게 쌓입니다.

낙엽을 쓸면 흔히 그 조락(凋落)의 애상에 젖는다고 합니다만,

저는 낙엽이 지고 난 가지마다에 드높은 가지들이 뻗었음을 잊지 않습니다.

아우성처럼 뻗어나간 그 수많은 가지들의 합창 속에서 저는 낙엽이 결코 애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알겟습니다.

잎새보다는 가지를, 조락보다는 성장을 보는 눈, 그러한 눈의 명징이 귀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가을에 읽을 책은 형님께 몇 권 부탁하였습니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고 독서가 사색의 반려라면

가을과 독서와 사색은 하나로 통일되어 한 묶음의 볏단 같은 수확을 안겨줄 듯도 합니다.

오늘은 이만 각필하겠습니다.

 

1971. 10. 7

 

 

 

 

 

아버님께

 

아버님께서 그처럼 염려해주시던 겨울도 다하고 우수 경칩을 지나 이제는 '엽서 한 장에 넘칠 만큼' 춘색이 짙어졌습니다.

오늘은 이 글을 쓰기도 하려니와 그간 모아두었던 아버님의 편지를 한장 한장 되읽어보았습니다.

오늘은 아버님의 편지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아버님의 편지를 받아들 때, 대개의 경우 편지의 사연을 읽기 전에 잠시나마 생각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 짤막한 생각 속에 서서 저는 "자식은 五福에 들지 않는다"시던 어머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저의 이러한 감정은 부모님의 흰 빈발을 더하게 한 제가 제 자신의 불효를 자각함으로써 갖게 되는 하나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이상과 같은 기본적인 감정과는 별도로, 제가 편지의 내용에서 받는 느낌은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별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는 일종의 소외감 같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아버님으로부터 아버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사상과 개성을 가진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이해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둘째는, 아버님이 보내주신 편지의 대부분은 "집안 걱정 말고 몸조심하여라"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지금의 저에게 건강이 가장 중한 일이며 또 아버님께서도 가장 걱정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좀 다른 내용의 편지를 받고 싶습니다.

例하면 근간에 읽으신 書 ·文에 관한 소견이라든가 최근에 겪으신 생활 주변의 이야기라든가 하는

그런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염려의 편지'가 '대화의 편지'로 바뀌어진다면 저는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아버님의 편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71. 3. 16.

 

 

 

 

꽃과 나비는 부모가 돌보지 않아도 저렇게 아름답게 자라지 않느냐."

어린 아들에게 이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머님 아버님의 자애로 담뿍 적신 저는, 꽃보다 나비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1977.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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