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11. 09:57ㆍ미술/ 러시아 회화 &
러시아의 정통 고전주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는, Ivan Konstantinovich Aivazoffski(1817-1900)의 해지는 풍경 6점을 소개합니다. 아이바조브스키의 약력은 <ivazovsky in America>와 <주제로 보는 명화의 세계>의 글을 인용, 번역, 정리하여 아래에 소개하였습니다. 아래 그의 그림들은 "The Art Renewal Center"에서 옮긴 것이며, 이 그림들 외에도 30편 정도의 작품이 더 실려있습니다.
19세기 초, 아르메니아 상인이었던 콘스탄틴 아이바조브스키는 폴란드에서 테오도시아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테오도시아에서 작은 상점을 운영했으며, 어머니는 레이스와 자수공장에서 다섯 아이들의 부양에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테오도시아의 총독이 어린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고등학교 입학과 1833년에 예술원(St. Petersburg Academy of Art)에서 공부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 덕분에 바다 그림을 주로 그리던 프랑스 화가 타너(F. Tanner)와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 보로비오프 밑에서 졸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공부하였으며,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와 타너를 특히 존경하였습니다.
▲바닷가의 낚시꾼, Private collection
▲해안가 해넘이 풍경, Private collection
▲아유닥 크리미아 풍경, Private collection
▲오데사에 있는 검은 바다의 항구 185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어느 항구의 고기잡는 배들, 1854,, Private collection
▲풍차가 있는 노을 풍경, 1860, Private collection
제9의 파도를 보라!
나는 감동했다!
나는 인간의 무한한 용기에 가슴이 뛰었다!
그곳에는 자연의 장렬함과
인간의 강인한 살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이정도로 생명과 자연이 투쟁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 장면을 상징하는 그림을 본 적이 없다.
내 가슴은 생애 이 노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삶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제9의 파도’는 19세기 러시아의 대화가인
아이바조프스키의 작품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1850년, 32세라는 젊은 나이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린 대걸작이다.
해양화(海洋畵)의 거장인 그는
60년이라는 화가 생활동안 6천점 이상의 그림을 남겼다.
아이바조프스키는 작업이 빨랐다.
한 번 붓을 잡으면 온 생명을 응결시켜 창조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말했다.
“어떠한 분야에든 인내심 강한 노력만이 승리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엄하게 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끊임없이 향상을 거듭했다.
“자신의 그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말한다. “오늘 내가 그리기 시작한 미완성의 그림입니다.”라고.
아이바조프스키가 남긴 업적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러시아 최고의 명화가 바로 이 ‘제9의 파도’다.
이 그림에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용기’라는 인간의 충동이 있다.
무수한 기적을 바라보며 터져버릴 듯한
작가 자신의 장열한 마음의 투쟁을 영원히 남기고자 그린 것이리라.
어느 때는 벌떡 일어나 붓을 들고
어느 때는 일심불란하게 붓을 놀렸을 것이다.
신념 있는 아이바조프스키는
수난(受難)도 수고(受苦)도 인간은 반드시 극복해 갈 사명과 힘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바조프스키는 화려한 명성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높은 지위 따위 전혀 탐내지 않았다.
이 한 작품에 몰두했던 엄청난 정열을 아이바조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를 칠 테면 쳐라. 매도하려거든 해도 좋다.
설령 감옥에 갇히더라도 고난을 영예로 여기며
이겨내어 반드시 완성시켜 보일테다!”
인간의 마음은 어떠한 공포에도 지지 않는다!
인간의 용기는 어떠한 고난에도 지지 않는다!
극복해 내야 한다. 모든 것을! 자신의 앞길에 놓인 고난을!
그대여 그대들이여 단연코 극복해 내길 바란다!
이런 혼신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높이 2m, 폭 3m가넘는 화폭 가득히 세게 놀치는 풍우의 대해원이 펼쳐진다.
휘몰아치는 파도 사이에는
난파한 배의 부러진 돛에 매달린 6명의 사람이 출렁거리고 있다.
어두운 바다에 내동댕이쳐져 기나긴 하룻밤을 지낸 것일까.
기력이 다하여 이내 거친 파도 속으로 가라앉는 사람도 보인다.
그 사람의 흉중에는 그 순간 어떤 장면들이 교차하고 있었을까.
그러나 그 벗에게 자신 역시 큰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손은 내밀고 있는 숭고한 대장부의 모습이 보인다.
비틀려 부러진 돛대에 올라탄 사람은 빨간 천을 높이 치켜들고
노도(怒濤)속에서 무엇인가를 외치고 있다.
그 시선 끝 저편 해면에는 무엇인가 떠올라 있다.
사람이다! 동료다!
한 사람의 인간이 나무를 붙잡고 감연히 폭풍우의 노도에 도전하고 있다!
이 인간 용자야말로 ‘제9의 파도’에서
진정한 주역이 아닌가라고 통찰하는 미학자(美學者)도 있다.
귀를 기울이면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과 큰 파도소리가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있음에도
온 힘을 다해 벗을 향해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절규가 들려온다.
거기에 다시 20m는 될 법한 거대한 ‘제9의 파도’가
거센 파도의 하얀 물보라를 하늘 높이 뿜어 올리며 다가온다.
엄하고 가차 없이 큰 파도는 더욱 큰 파도가 되어!
격렬하고 인정사정없이 노도는 덮쳐 온다.
‘제9의 파도’란
가장 강대하고 가장 준엄하다는 파도를 말한다.
예로부터 뱃사람 사이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칠 때 파도에는 주기가 있어
9번째로 밀려오는 큰 파도가 가장 무섭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최대의 시련을 참아 내고
극복해 내었을 때 크나큰 활로가 결연히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야말로 분기하여 힘을 쥐어짜
노도를 타고 넘어야 하는 그 순간인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읊었던
같은 시대를 산 러시아 대시인 바라킨스키는 선언했다.
“자 드넓은 바다여 바로 지금, 나는 그대의 폭풍우가 필요하다.
거칠고 사나워도 좋다. 큰 바위에 내동댕이쳐도 좋다.
그대의 두렵고 격렬한 우렁찬 외침에 내 마음은 고동친다.
손꼽아 기다리던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처럼
그리고 거대한 적의 증오처럼 내 마음을 환희 차게 한다.”
이 얼마나 장대하고 무한한 용기가 넘쳐흐르는 말인가!
내 생명도 이 말에 깊고도 강하게 전율을 느꼈다.
“파도는 장애를 만날 때마다 그 완고함을 더한다.”
내가 청춘 시절부터 간지해 온 모토다.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겁내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투쟁을 기쁨으로 삼아
용감하게 끝까지 투쟁한 영웅뿐이다.
자신은 죽어도 좋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 끝까지 살아야 한다!
드디어 최후를 맞는 것인가.
아니 끝까지 살아야 한다! 끝까지 헤엄쳐야 한다!
큰 파도는 죽음을 각오하라고 미친 듯이 날뛰지만
이 박해에 나는 결코 항복하지 않으리!
여기서 끝까지 헤엄치지 않는다면
평생 굴욕적인 파도가 자신의 생명 속에서 소용돌이 칠 것이기 때문이다.
거친 파도는 높아진다. 끝없이 높아진다.
이 파도를 타고 넘어 극복해 내면 나는 어느 누가 인정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칭찬하는 인생의 대 영웅으로 빛날 것이다.
목격자는 한 사람도 없다. 증언해 줄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다.
비열한 인간들은 “저 자의 명예는 거짓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반드시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중상(中傷)의 폭풍우가 휘몰아칠 것이다.
그리고 승리와 정의를 왜곡하고
명예로운 인생에 질투심을 품고 저질적인 온갖 비난을 다 해 댈 것이다.
욕설은 아무것도 아니다! 결코 낙담하지 마라!
내 행복은 바로 이 내 생명 속에 확립해 보일 테다!
오직 홀로 결투에 승리하여 영관(榮冠)을 쟁취한
영원한 역사를 그대 자신이 남기는 것이다.
법화경에는 묘법의 역용을 비유하여
“대해에 표류하여 바다 괴물의 난을 만나…
파도도 잠기게 하지 못하리라.”라고 설해져 있다.
철저하게 정법정의를 증명하고자 하는 사명의 사람에게는
어떤 거대한 파도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힘이 엄연히 용출한다.
‘개목초’에서는 악세(惡世) 말법(末法)에 난이 덮쳐오는 양상을
“파도에 파도가 겹치고”라고 말씀하셨다.
그 파도를 하나하나씩 단호하게 당당하게 극복해야 내야 비로소 광선유포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제9의 파도’를 찬탄했다.
“이 폭풍우를 묘사한 그림에는 환희가 있다.
실로 덮치려 하는 폭풍우에 보는 사람의 마음을 격렬하게 흔드는
영원한 아름다움이 있다.”
보라!
무수한 고난과 싸워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의 저편에는
인생의 희망이 가득 찬 욱일(旭日)이 눈부시게 떠올라
한없이 드넓은 하늘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문턱까지 크나큰 격심한 수난의 파도 속에서
마지막 팔을 내저어 헤엄쳤다.
격동의 저편에 희망의 태양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또 다시 떠오른다.
기쁨으로 가득 찬 뜨거운 눈물이 복받쳐 오른다.
그리고 슬픔이 겹겹이 쌓인 노도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
풍요롭고도 영원히 변치 않을 푸른 숲의 육지가 보였다.
그를 모욕해 온 고난의 파도는
그의 실력으로 이룬 승리에 조금씩 잠잠해졌다.
그는 이겼다! 승리한 것이다!
영광의 태양이 떠올랐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매섭게 날뛰던 파도를 주저하지 않고 타고 넘은 것이다!
엄청난 파도에 그는 이겼다. 거대한 거친 파도에 그는 이겼다.
세찬 노도에 그는 이겼다. 인내와 노력으로
그림을 다 보고 나서 아내는 조용히 내 얼굴을 보았다.
“당신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아요.”
“미친 듯이 날뛰는 노도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함은
일본을 구제할 젊은이로다.”
내가 19세 때 읊은 시다.
어느 누구도 인간은! 인간은 반드시!
그 사람의 용기에는 희망과 평화의 아침이 기다리고 있다!
그대여 다시 한 번 결심하여 일어서라!
그곳에는 반드시 광명의 신호인
승리의 태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03년 11월 5일
계관시인 이케다 다이사쿠
이케다 다이사쿠(
종교법인 창가학회의 명예회장,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다. 야마모토 신이치(일본어:
일본 패전 이후 2년째 해당되던 해, 1947년 8월 14일 친구와 함께 가마타 부근의 창가학회 좌담회에 참석하였고 도다 조세이라는 스승을 만났다. 10일이 지난 후인 1947년 8월 24일, 창가학회에 입회하였다. 1948년 1월 1일부터는 다니던 협동조합의 일을 그만두고 도다 조세이가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하여 출판 업무에 종사하게 된다. 이후 도다(당시 창가학회 이사장) 이사장의 출판 사업은 극심한 불황으로 악화되었고, 이의 타개를 위해 설립한 대동상호신용금고(금융업)도 대장성의 감독에 따라 폐쇄하기에 이르렀으며 도다 조세이 이사장은 급기야 1950년 말 경에 창가학회 이사장 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시 이케다 다이사쿠는 약 6개월 간 급여가 밀리고 직원들이 모두 직장을 떠나는 와중에도 끝까지 남아서 도다 조세이와 함께 한다. 한편, 1948년 경 부터 도다 조세이는 이케다 다이사쿠에게 개인교수를 시작하여 경제, 정치, 문학, 역사, 철학, 과학, 수학 등 학문 전반에 걸쳐 개인교수를 하였으며 이 개인교수는 도다 조세이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약 10여년 간 지속되었다. 1951년 이케다 다이사쿠의 구명 운동 및 서명 운동에 힘입어 도다 조세이는 1951년 5월 3일 제2대 창가학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취임식에서 도다 조세이는 일본 내에서 75만 세대의 포교를 이루어내겠다고 공약한다. 당시 창가학회의 회원 수는 약 5천여명으로, 이 공약은 믿기 어려운 것이어서 당시 창간된 지 얼마 안 된 세이쿄신문(창가학회 기관지)에서도 이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 이케다 다이사쿠는 창가학회 참모실장으로 근무하면서 가마타지부에서 지부간사(보조역할)로 창가학회 첫 조직활동을 시작하면서 201세대 포교라는 실적을 이루었다. 이후 창가학회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도다 조세이가 공약했던 75만 세대 포교 달성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1956년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에서 창가학회는 오사카에 전직 야구선수를 후보로 공천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이케다 다이사쿠는 오사카에서 전무후무한 11,111세대 포교실적을 이루어낸다. 이후 야마구치, 삿포로 등지에서도 포교 확대의 핵심 역할을 하면서 마침내 1957년 12월 25일 75만 세대 포교를 달성한다. 75만 세대 포교를 달성한 도다 조세이 2대 회장은 1958년 3월 당시 다이세키사(사원) 총등산회를 실시했고, 이 행사 일체의 운영 및 총괄을 이케다 다이사쿠가 담당했다. 3월 16일에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후계를 의탁하는 의식을 개최하였다. 이후 1958년 4월 2일 스승 도다 조세이는 서거하였고, 스승 서거 3년째에 해당되는 1960년 거듭되는 회장 취임의 요청에 부응하여 1960년 5월 3일, 이케다 다이사쿠는 창가학회의 제3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같은 해 10월, 국제활동을 하는 회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처음으로 하와이 방문을 필두로 북·남미를 방문하고 국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세계적인 냉전 분위기가 극에 달했던 1972년 중국을 방문,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고 연달아 소련의 흐루시초프 서기장도 방문하여 냉전 종식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놀드 토인비 박사와 대담(대담집:21세기를 여는 대화, Dialogue)을 하였으며 이후 고르바초프(전 소련 서기장), 라이너스 폴링(미국의 물리화학자로 노벨상 2회 수상), 마거릿 대처(영국 전 총리), 후진타오(중국 전 국가주석), 저우언라이(중국 전 총리), 코피 아난(전 UN사무총장), 넬슨 만델라(남아공 전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체코 전 대통령) 등 수많은 국가 지도자와의 대담을 통해 대담집을 발간하였다. 1975년 1월 26일에는 세계 51개국 지역의 멤버가 괌에 모여 국제창가학회(SGI)가 창립되었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현재까지 전세계 각국의 교육 기관 및 법인, 단체에서 수여한 명예학위 및 휘호를 258개(2009년 8월 24일 현재) 가지고 있다. 창가학회는 2012년 현재 전 세계 192개 국가 및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한국에서는 한국케이에스지아이(KSGI)로 2000년 4월 15일에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한국케이에스지아이(KSGI) 산하에는 화광신문사(발행부수 50만부 이상), 행복유치원, 제주한일우호연수센터, 진천연수센터 이천 평화묘원 등의 기관이 있고 전국 각지에 100개 이상의 문화회관이 있다. |
마에하라 마사유키 지음
이케다 다이사쿠의 행동과 궤적을 그려낸 책. 가난한 김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세계 석학들과 인류의 미래를 담론하는 평화운동가가 되기까지, 이케다 다이사쿠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전해준다. 정의를 구현하는 '불법佛法'을 설파하고, 자기를 위해 남의 생명까지 이용하는 사람들과 싸우기 위해 한 평생 꾸준히 평화 사상을 실천해왔던 그의 행동과 궤적들을 만날 수 있다.
제1장 전시하의 청춘
바닷바람과 순수한 에도인
고집불통 이라 불린 아버지
책읽기를 좋아한 소년
출정을 단념하다
병고와 전쟁 상태에서의 청춘
도쿄 대공습과 종전
불탄 자리에서의 면학
맏형과 한 조각의 거울
제2장 사제불이
평생 스승과 만남
일본정학관에서 편집자 생활
도다 대학의 개인 수업
부채와 싸웠던 나날
첫 출진과 가마타로부터의 비약
호신용 칼 로서의 중책
창가학회의 역사와 확신
참모실장과 섭외부장에 취임
원자 폭탄 . 수소 폭탄 금지 선언의 유혹
제3장 3대 회장
큰 별이 지다
5월3일-제3대 회장
세계로, 그리고 SGI 발족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잇는 마음의 끈
니치렌의 격정, 이케다의 대감정
공명당과 국민의 공복
문화 활동과 일류를 아는 가치
제4장 도전과 응전
연속 투구하는 지도자
정계로부터의 역풍과 전기
종문의 권위를 이용한 선동
나 홀로 정의의 깃발 드노라
파문에 굴하지 않은 서민의 승리
국정의 일익으로
제5장 사상과 행동
거기에 인간이 있으니까
토인비로부터의 편지
평가의 차이가 의미하는 것
참된 엘리트는 약자 편
평화를 원하는 불변의 신념
이케다 다이사쿠 관련 연표
'미술 > 러시아 회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월룡 - 우리가 잃어버린 화가 (1) (0) | 2016.03.31 |
---|---|
러시아 화가, 겨울풍경 그림 (0) | 2013.05.13 |
트레티야코프 (0) | 2012.04.04 |
러시아 극사실 정물화 (0) | 2012.02.09 |
이삭 레비탄 (畵質良好함) (0) | 2011.07.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