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26. 08:29ㆍ詩.
며칠전 정동진 갈 때 가져갔던 책입니다.
2002년 11월에 나온 책이니까 꼭 10년 지난 책이구만요.
배낭에 넣을 얄팍한 책을 고르다보니....
맨 뒤에까지 줄 친 흔적을 보면 읽었음이 분명한데,
환장하겠습니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백날 책을 읽었어야 이모냥 요꼴이니. 참 깝깝하네요.
시를 네 계열로 나누어서 대표시를 선정했군요.
전통 서정시 계열
피지컬한 시의 계열
메시지가 강한 시의 계열
실험성이 강한 시의 계열
番外
서정시부터 보겠습니다.
귀찮아서 김춘수의 시해설과 제 생각을 막 섞어놓으렵니다.
엄마야 누나야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바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시 작품으로서의 <엄마야 누나야>는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메시지가 없고 정서만 있기 때문이다.
정서는 애매하고 걷잡을 수가 없다. 정서의 순도가 높으면 높을 수록 그렇다.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언어도단의 지경에 이른다.
오! 하는 감탄사만 있다.
감탄사에 내용을 부여한 그런 상태다. 모쯔르트의 음악에 가깝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순수한 음의 조립이다. 음이 빚는 분위기가 있을 뿐이다.
서정시의 본질은 안타까움의 정감을 일깨워주는 데에 있다.
우리는 지금 후 불면 날아가버릴 듯한 서정시의 정수를 보고 있다. 덧없기도 하다.
시를 공리의 눈으로 보지 말 것.
이런 따위의 시가 무슨 소용일까? 그것은 사상가들이 하는 소리고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다.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이 너무 살벌하고 역사는 너무 무디지 않은가 말이다.
이 시는 과부족이 없다.
여기다 무엇을 보태고 무엇을 뗀다면 균형이 망가진다.
절묘한 균형으로 시는 서 있다.
너무 섬세해서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까 두렵다.
이 시에서의 끝행은 떼어버려도 된다. 그러나 그건 의미상 그렇다는 것이지 시로서는 균형이 깨진다.
리듬이다. 이 시 전체의 해조(諧調)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언어도단의 지경에 이른다" 부분에서 막 소리 내서 웃었습니다.
저도 예전에 여행기 쓰다보면 더러 그런 적 있어요.^^*
往十里
김소월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 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往十里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랴거던
往十里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天安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山마루에 걸려서 운다.
이 시에서 왕십리는 온통 눈물에 흥건히 젖은 꼴이 되고 있다.
눈물은 슬픔의 흔적이지만 슬픔을 유발하는 것은 소월에게는 언제나 이별이다.
이때의 이별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그런 이별이다.
그것은 죽음일 수밖에는 없다.
친구한테 물었어요. “너 여드레 스무 날이 몇 일을 말하는 건지 알겠니?”
영어에도 없는 말이잖아요. 8월 20일이야 아니죠.
여드레 스무 날은 28일을 말하는 겁니다.
닷새 왔으면 좋다고 했는데, 뒤에 초하루 삭망까지니까...
28 / 29 / 30 / 31 / 1
리듬으로 트웬티 에잇이라고 안하고 에잇 트웬티라고 한 거예요.
김소월,, 정말로 언어, 음악, 정서,… 천재 중의 천잽니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김영랑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 살포시 젖는 불결같이
보르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한국어의 결을 그 섬세함을 한껏 보여준 시다. 시 전체의 분위기는 밝다.
이 시의 수사에 미스가 없지도 않다.
2연 2행이 그 예다. 신선하지도 않고 투명하지도 않다.
에이, 김소월과 비교하자면 째비도 안되죠. ^^*
제가 보기에는, 2연은 전부다가 이상합니다. 촌티나요.
재작년인가? 제가 영랑생가 다녀왔잖아요. 강진이었지 아마?
부잣집 장남입디다. 곱게 어려움 없이 산 사람이더군요.
생가에 가면 해설사가 있습니다. 부탁하면 나올 겁니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볼 걸 그랬습니다.
冬天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이 시의 수사는 완벽하다. 어느한 군데 보태고 깎을 곳이 없고 손 볼 곳도 없다.
수상의 완벽함의 예로 구두점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여섯 행의 짧은 시이기는 하나 쉼표가 끝에 가서 꼭 하나만 찍혀 있다.
이 시의 호흡과 의미와 이미지에 두루 걸린다.
그만큼 이 하나의 쉼표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려 있다.
물론 시인의 세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혹은 천부의 센스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는 이걸 간과하면 안된다. 이 시의 구조상의 핵심을 자칫하면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제 고등학교3학년 때 발표된 시일 겁니다.
<길마재 신화>라는 시집이 당시에 출판됐었습니다. 거기에 들어 있었을 거예요.
대학 본고사에 출제될지도 모른다해서 부랴부랴 공부했었는데,
첨 나온 시이니 국어선생도 잘 모르죠. 해답 보고 아는 체하는데... ㅋㅎ
그런데 그 시집에서 어떻게 이 시만을 쏙 빼서 출제할 거로 예상을 했었을까요?
그러니까 시 좀 볼 줄 아는 사람은 첫 눈에 딱 알아본 거죠.
이 시를 대표작으로 칠 겁니다.
歸蜀途
서정주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 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구비 구비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 운다"의 명사와 동사의 연결은 기상천외의 그야말로 컨시트다.
새의 울음이 이렇게도 절실해지고 있다.
‘흰 옷깃 염여 염여’… 이 표현이 뭘 뜻하는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염’.
원래는 '여며'라고 써야지요.
이 시는 대충 분위기만 느꼈었는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대로 와닿누만요.
전라도 사투리는 그 자체로 시라고 한 사람이있었는데....
전라도 시인들은 시어가 풍부해서 좋겠습니다.
나그네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한 폭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나그네는 떠돌이요, 보헤미안 방랑자다.
칠 팔십년 전만해도 시골마을에선 이런 과객들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석 자를 기본으로 한 이 시의 리듬이 과객의 걸음걸이를 아주 경쾌하게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
걸음걸이가 리듬을 타고 있다.
옛날에 저런 사람을 한번 우리집에 재워준 일이 있었습니다.
아침에 보내고 나서 어머니가 이불을 갤라고 보니까
정말 거짓말 안 보태고 이가 한 되는 나왔답디다.
나중에 들으니 길에서 얼어죽었다더군요.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그 러브스토리 기억하십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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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계열의 시라고 분류를 했군요.
피지컹 시라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이미지즘을 말하는 듯한데....
김광균, 정지용, 박목월, 박재삼 등등의 시를 소개했네요.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말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나무도 투명하다. 그저 훤하기만 하다.
이 시에 대하여 누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하면 그것은 한갓된 군소리가 될는지도 모른다.
이미지즘 계열의 시는 여백의 시라고도 할 수 있다.
되도록 말을 적게 하고 침묵(암시)의 공간을 많이 둘 것.
피지컬한 외부묘사가 시적 뉘앙스를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
풀어서 까발리지 말고 보자기에 싼 채로 선반에 얹어놓고 그만한 거리에서 가끔 쳐다보는.....
해설이 참 잘됐습니다.
이 시 시비가 대전 보문산에 있다고 했지요?
첫눈 오는 날 여기나 가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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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가 강한 시의 계열
플라톤적인 시의 메시지는 도덕성을 띤다. 즉 사회성을 띤다.
그러니까 뭔가를 가르치려는 교훈적인 것이 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시가 독자를 가르치는데 공헌해야 하느냐,
시가 독자에게 쾌락을 주는데 공헌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어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플라톤적인 시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는 이른바 자기의 도그마, 즉 톨스토이즘에 빠지게 되자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상식을 벗어난 글을 쓰게 됐다.
바그너의 음악보다 목동의 풀피리 소리가 더 음악적이고,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시보다 민요 한 구절이 더 시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병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해진 극소수의 독자가 상징주의 시를 이해하는 체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예술적 성과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톨스토이는 이처럼 형편없이 폄하했다.
그렇게 발설한 그것이 그의 성실성의 증거가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망발이다.
예술은 어딘가 사치스럽고, 어딘가 장식적이고, 어딘가 유희적인 데가 있다.
예술을 도덕적 공리주의의 눈으로만 볼 수는 없다.
예술은 하나의 위안이요 하나의 정신 진정제이기 때문이다.
청마 유치환은 "참의 시는 마침내 시가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시의 사치성과 장식성과 유희성을 질타한 말이다. 즉 시의 예술성을 혐오한 말이다.
그러나 시가 예술을 떠날 때, 시는 산문이 된다.
(김춘수)
아따, 톨스토이를 이렇게 깔 수 있나?
김춘수가 군부독재에 빌붙어먹어서 그렇지, 문학적 내공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 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 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 시는 플라톤적인시다.
그런데 시종 객관적인 사물을 통하여 관념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강한 의지를 속에 감추고 있다. 감정이 그만큼 절제되고 있다.
내용과 표현이 균형을 끝까지 잘 유지하고 있다.
플라톤적인 시도 그것이 시인 이상 관념에 우선해야 한다.
관념이 시를 압도하면 그것은 시가 아니고 산문이 된다.
추상적인 관념만을 사용한 문장이 된다면 굳이 시의 형식을 빌리지 말아야 한다.
자유시건 정형시건 시의 형식을 빌렸다고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김춘수는 이런 계통의 시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좀 있는 듯합니다.
김수영 시나 박노해 시도 혹평을 해요.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요.
좌파 알레르기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풀
김수영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랍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답청(踏靑)
정희성
풀을 밟아라
들녘엔 매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혜원의 그림 중에 <연소답청>이 있었지요?
제목 보니까 그 생각부터 납디다. ^^*
갈대
신경림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가난한 사랑의 노래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農舞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가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이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꺼나.
고개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노동의 새벽
박노해
박노해는 청마처럼, 아니 청마 이상으로 자기의 예술적 관심과 자질까지를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관념의 진술이 아니고 작품(poem)이라고 할 때 시는 그 나름의 개성을 가진다.
그것은 형태만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은밀한 부분이 있다.
그것이 시의 형태를 이루는 요소들이다.
리듬과 이미지, 산문과는 사뭇 다른 낱말과 낱말, 구절과 구절의 연결방식이 따로 있다.
시는 내용에 있지 않다. 내용을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그 전달방법에 있다.
▒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이 땅에 이렇게도 절실하게 슬픈 시가 나왔다.
이 시의 서정은 김소월의 그것과는 물론이고 윤동주의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이 시의 서정은 쉬르를 경과한 뒤에 나타난, 나타날 수 있었던 그런 것이다.
이 시에 나열된 장면들은 일종의 콜라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기발하면서 적절하다.
이런 현상은 시작 방법상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시인의 감수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형도의 감수성은 이미 19세기를 넘어서고 있다.
그의 시는 국제적인 수준에서도 현대시에 속한다.
게다가 매우 빼어난 현대시의 한 견본이 되고 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김춘수)
기형도 시를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높게 평가해주는 분이 많더군요.
저는 내가 직접 시를 써보겠단 건 꿈에도 생각 안해봤습니다.
맘을 한번 먹어볼래도 이렇게 기본 형식이라는 게 있다니 말이지요.
아휴, 그걸 언제 공부해서 쓴답니까?
요즘은 좀 써보고 싶기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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